시평

영산 놀이마당에서 2: 마을굿춤의 내일
독보적 영산 축제 속 춤의 씨앗
김채현_춤비평가

서로 마주 보고 편을 나누어 줄을 당겨서 힘으로 승부를 결판짓는 놀이가 줄다리기(줄당기기)이다. 볏짚으로 만든 줄을 당기는 줄다리기 풍속은 쌀 농경문화와 밀접하고 2015년 유네스코는 한국·베트남·캄보디아·필리핀의 줄다리기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동 지정한 바 있다. 한국의 줄다리기로는 경남 영산(창녕)·의령·밀양·남해·충남 기지시(당진)·강원 삼척의 것이 함께 선정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전통줄다리기연합회가 결성된 줄로 안다.

지난호 〈춤웹진〉 글에서 1970년대의 탈춤 마당굿에 이어 영산의 줄다리기가 대학 축전에 등장해서 대학가에 새로운 기풍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 서로 힘을 모았던 사실이 소개되었었다. 대학가에 영산줄다리기가 처음 등장한 때는 1982년으로 알려져 있고, 그때부터 대학 축전이 대동놀이판으로 변모하도록 하는 기폭제가 영산줄다리기였다.(하지만 오늘날 대학 축전에서 영산줄다리기를 하는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환경을 일구는 데 큰 역할을 한 영산의 줄다리기가 탈춤 마당굿의 역사에 기여한 바는 재평가되어야 하겠다. 1980년대나 90년대에 이런 점이 의식되기에는 물론 시기상조였을 테고, 그로부터 3, 40년이 지난 이제 다시 조망해보면 그런 의의가 새삼 부각된다.



영산줄다리기에서 줄을 당기고 있다 ⓒ카페사사모



조선시대에 전국 곳곳의 마을들에서 행해졌을 줄다리기는 일제강점기에는 1936년 무렵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일제히 금지되었다. 그렇게 금지한 그 속셈과 흉계를 누가 모르랴. 영산줄다리기도 그즈음부터 행하려야 행할 수도 없었고 해방 이후에는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영산줄다리기는 1961년 3·1문화제에서 비로소 재현되고부터 다시 전승되기 시작하여 1969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영산줄다리기가 이렇게 부활하여 한참 후 대학 축전들에서 소개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영산의 향토교육자이자 농꾼이셨던 조성국(曹星國) 선생이다. 그는 전국의 대학 축전 현장들에 영산줄을 몸소 지고 가서 줄다리기 노는 법을 지도하였다. 그 훨씬 전에 선생은 영산에서 10여년 교사로 있다가 5·16 쿠데타 후 교원노조 활동으로 해직되었다. 그 후 농사꾼으로서 그 지역 최초로 양파 재배에 눈을 돌려 창녕이 양파의 주산지로 떠오르는 데 주춧돌을 놓기도 한 분이다(한 번 검색해보시라). 마침내 지난 3월 3일 아침 그분의 흉상 제막식이 놀이마당 현장에서 열렸다.



조성국 선생 흉상 제막식 ⓒ김채현



줄다리기가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단합을 상징하다시피 이 놀이에서 규모는 중대한 요소로 작용한다. 먼저 한 가닥의 밧줄이나 새끼줄이 아니라 1미터 굵기에 육박하는 줄(몸줄이라 한다)이 과거에는 무려 300미터 길이에 이르고 그 몸줄에서 가느다란 곁줄(젖줄이라 한다)이 1미터 정도 간격으로 가지처럼 뻗은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1961년도의 경우 그러한 줄을 당긴 인원이 무려 16000명이었고 구경꾼까지 47300명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줄에 그만한 인원수이니 더더욱 장관이었으리라. 그러나 1970년대에 가면 줄을 당기는 인원은 5000명, 구경꾼은 11000명으로 줄어든다(당시 영산면 인구: 12000명). 줄다리기를 예전에는 들판에서 하였지만 지금은 운동장 같은 놀이마당에서 하며 놀이마당 규모에 맞춰 줄 길이도 80미터 정도로 줄어들었다. 올해 3월의 줄다리기에서는 1000명 남짓 줄을 당긴 것으로 관측된다. 이 같은 변모를 재촉한 요인으로는 단적으로 농경사회의 소멸 추세가 손꼽힐 것이고, 또 개인주의 확산 등 여러 현상이 거론될 수 있다.

줄다리기에서 줄을 당겨 승부를 내는 시간은 길어야 15분 정도이다. 겉으로 보기에 짧은 시합 시간과는 다르게 설 직후 정초부터 마을마다 분담해서 볏짚을 모으고 다수의 주민들이 직접 줄을 만들고 공을 들이는 시간은 사실 엄청나다. 볏짚으로 새끼를 손으로 꼬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새끼줄 가닥들을 모아 여러 굵기의 줄들을 만들어가면서 길이도 늘여가는 시일은 열흘 남짓 걸리는 것 같다. 줄을 볏짚으로 만들 때에는 아이들도 작업을 거들고 풍물로 흥을 돋우는 등 마을마다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그 사이에 줄들에다 물을 먹이고 소금을 뿌리고 밟아주어 줄이 튼튼해지도록 한다. 줄이 완성되면 풍농, 제액초복, 그리고 줄당기기 승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행사 당일 그 긴 줄을 마치 용을 모시듯이 수레에 태워서 호위하며 행사장까지 수백명이 행진해서 간다.

영산줄다리기에서는 동군(東軍)과 서군(西軍)이 맞대결한다. 우리나라를 동서로 나눠 대결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한다. 각 군 진영마다 선도해서 지휘하는 대중소 장군이 3명이며 장군들은 정초에 선임되는데, 과거에는 대장에 선임되면 수십 말의 막걸리(1말: 20리터)를 참가자들에게 희사하는 관례가 있었다 한다. 장군복은 1976년 임진왜란 시기 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친 의병장 곽재우장군의 홍의 도포를 기반으로 청색 또는 황금색의 쾌자를 걸치고선 전립을 쓰고 옛 장군의 장화를 신는 것으로 통일해서 위엄을 갖추도록 하였다. 선임된 장군들은 기간 동안 거둥에 신중해야 한다. 출진하는 날 영산면 사람들이 소장을, 소장이 중장을, 중장과 소장이 대장을 각자의 집에 가서 모셔 나오면 장군들은 각자 칼춤으로 답하고 군중들은 환호하며 춤춘다. 그런 후에 맨앞에 서낭을 모시고 풍물과 각종 깃발이 뒤따르며 그다음에 줄 위에 간격을 두고 늠름하게 선 세 장군이 장검을 들고 지휘하며 맨뒤를 관중들이 따르며 이동하는 장면 역시 장관이다. 말하자면, 줄 만들기부터 승부 결판까지 줄다리기는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마다 직면하는 일대 사건이자 의례인 것이다. 이 대형 행사 하루 이틀 전에는 영산 골목줄다리기가 진행되기도 한다.



영산줄다리기에서 암줄에 수줄을 맞추기 직전 ⓒ카페사사모



영산줄다리기에서 암줄에 수줄을 맞춰들었다 ⓒ카페사사모



영산줄다리기에서 겨루기 직전에 정돈된 줄에서 젖줄이 보인다 ⓒ국립무형유산원



영산줄다리기에서 줄을 당기며 겨루고 있다ⓒ경남창녕교육지원청



올해 영산 3·1민속문화제는 2. 29. ~ 3. 3. 사이 4일간 열렸다. 3월 1일 전후로 며칠간 여는 것을 관행으로 한다. 이러한 관행은 1963년 삼일민속문화제에서 줄다리기가 재현된 이후 삼일민속문화제의 일환으로 열리게 되면서 지난 60년간 정착되었다. 한반도에서 정월 대보름에 풍농을 기원하는 민속 행사가 아주 많았으며 전국의 줄다리기들도 이 시기에 열리기 마련이었고 영산줄다리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가운데서도 영산줄다리기가 비슷한 시기의 삼일절 기념 행사와 함께 열리게 된 데에는 특기할 내력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1919년 삼일독립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영산면 사람들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영남 지방(경상남북도 전체)에서는 가장 먼저 3월 13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줄다리기의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뜻과 삼일독립만세운동의 큰 뜻은 멀지 않고 상통하는 바가 크다.



영산삼일민속문화제 개막식 현장 ⓒ김채현



삼일절을 전후해서 삼일절 속에서 지역 공동체의 안녕과 단합을 기원하는 축제는 축제를 튼튼하게 만들어왔음이 분명하다. 지역의 의로운 역사와 축제의 결합은 영산줄다리기와 영산쇠머리대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며 축제의 정체성과 생명력을 강화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국내에서 이런 축제는 아주 드물어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이번에도 3월 1일 날 삼일절 기념의 마음을 담아 삼일민속문화제 개막식이 매우 성대하게 열렸다. 그날 개막식에 바로 이어 영산쇠머리대기(국가중요무형문화재) 행사가 열릴 참이어서 삼일민속문화제 개막식 전부터 놀이마당은 인파로 붐비었다.

3월 3일 오후에 열린 영산줄다리기는 삼일민속문화제의 피날레에 해당하며 그 이틀 전인 3월 1일 낮에 있은 영산쇠머리대기는 그 오프닝에 해당한다. 영산쇠머리대기는 소의 머리 형상을 본떠 만든 나무 구조물을 격하게 부딪치면서 동부 마을과 서부 마을이 승부를 가르는 놀이이다. 그 유래는 조선시대에 시작했다는 것 외에 명확히 알려진 것은 없는 편이다. 쇠머리의 주재료 나무는 소나무이며 기다란 소나무를 새끼줄로 엮고 감싸서 만드는데, 요즘은 그 크기가 예전의 절반 정도(머리 높이 3미터 남짓)라 한다. 삼각형의 쇠머리 모양 뒤로 몸통(너비 4미터, 길이 5미터)이 달리며 전체 무게는 1.5톤 정도이다. 이 쇠머리를 메고 출진하는 장정(壯丁)은 각 진영마다 50명 남짓이고 예전에는 100명이었다 한다. 각 군 진영을 지휘하는 장군 또한 영산줄다리기와 마찬가지로 3인이며, 출진할 적에 구성되는 행렬도 영산줄다리기의 것과 유사하다.



영산쇠머리대기 겨루는 장면 ⓒ김채현



영산줄다리기와 영산쇠머리대기, 둘 다 모두 애향심과 풍농, 안녕을 기원하는 놀이이되 현장에서의 실질적 경쟁(agon)을 바탕으로 한 놀이이다. 줄과 쇠머리를 만들 때부터 경쟁을 염두에 두되 치성을 드리고 고사를 지낸다. 어느 경우든 대중소 장군들에 임명된 기간 동안 거둥에 조신해야 한다. 출전하는 현장 장군들 뒤에서 그 부인들이 모두 화사한 한복 차림으로 치장하고 내내 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아주 드문 일이겠으나 줄과 엮임이 부실하여 놀이 진행이 어려우면 우선 패배가 선언된다. 그런 것 말고도 보편적으로 놀이가 놀이 분위기를 내려면 나름의 법식(法式; rule)이 필요하며, 특히 놀이의 현장 법식 즉 규칙을 어기는 자는 놀이에서 추방된다. 영산 면민들의 두 가지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그 명맥을 오늘까지 열띠게 이어온 저변에서는 이처럼 두 가지 놀이를 놀이답게 하는 경쟁의 규칙이 깔려 있다. 과거에는 이 두 행사에서 패할 경우 참여자들의 실망이 엄청났다고 하는 기록들로 미루어 경쟁심은 곧 애향심의 발로일 것이다. 사람들이 생활 및 신앙과 직결해서 놀이를 수행한 생생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그 사람들에게 마을의 큰 놀이는 잔치이자 축제였고 천지굿이었던 것이다. 비록 농경사회는 소멸해갈지언정 경쟁의 놀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줄이 상대방 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당겨지거나 줄이 끊어지거나, 쇠머리가 밀려나거나 넘어지거나 먼저 땅바닥에 닿게 되는 쪽이 진다. 줄다리기에서 암수 줄의 서군과 동군, 쇠머리대기에서 동군과 서군은 서로 맞겨루기 전에 각 진영마다 수백 개가 넘을 깃발들을 치켜세우고 휘두르며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대나무 가지를 흔들어대고 풍물소리에 맞춰 떼지어 놀이마당 운동장을 휘몰아 돌아다니며 함성을 내지르기 일쑤이다. 줄다리기에서 암줄 속으로 수줄을 맞춰 들이고 비녀목을 장치할 때, 쇠머리를 아래위로 들어올리며 어를 적에 양측의 신경전은 날카롭게 이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을 기(氣)싸움이라 한다. 이기려는 열기가 고조되는 현장에서 각 진영의 하나되기가 이뤄진다. 그 하나되기는 이미 정초에 줄과 쇠머리를 만들 때부터 시작되었고 기싸움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다. 기싸움을 위해 사람들은 풍물을 치고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깃발들과 마른 대나무 가지들을 좌우로 아래위로 흔들어대며 저마다 춤추는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함성을 지른다. 이 순간에 이르러 막춤이나 어깨춤이 난무하게 된다. 기가 넘쳐난다. 시합하는 시간보다 시합 전에 기를 돋우는 그 시간이 백미라 하겠다. 그러기 몇 시간 전, 놀이마당을 향해 출진하는 행렬이 시내를 누비고 다닐 때부터 막춤과 어깨춤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영산삼일민속문화제 현장 ⓒ김채현



앞서 언급했듯 지역의 의로운 역사와 축제의 결합은 영산의 두 중요무형문화재 축제를 더욱 돋보이도록 한다. 근래 일부 지역에서 줄다리기를 관광상품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줄로 안다. 대규모의 집단 놀이는 축제로서 아주 매력적이다. 지역 활성화 또는 경기 활성화 측면에서도 집단 놀이 축제는 강렬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지역 소멸, 수도권 과밀집중으로 인한 지역불균형 등의 추세에 비추어 해당 지역들이 축제에 기대하는 바는 십분 이해됨직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산의 사례처럼 굳이 의로운 역사와의 결합은 아닐지라도 지역민과 밀착된 축제로서 관광상품화하는 방향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정초부터 삼일절 시기까지 창원 영산면에서는 축제의 시기가 지속된다. 이처럼 예를 들어 지역의 밝은 정체성이나 상징물과 줄다리기 행사를 결합함으로써 지역민과 관광객이 명분 있게 어우러질 만한 계기가 관광형 축제로 조성된다면 일석이조가 될 것이다.


마음껏 놀면서 모두가 저절로 하나 되는 영산 축제 현장에서도 춤은 이심전심 펼쳐지며 참으로 자연발생적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 몸놀림이자 춤이다. 여기서 주시할 것은 몸 움직임의 역할이다. 천지자연의 순환에 따라 해마다 시기를 정해 마을 전체의 놀이와 의례를 융합하는 것을 과거에는 마을굿이라 했고 오늘의 축제에 해당한다. 축제라는 것은 원래 놀이와 의례에서 기원하였다. 모시면서(侍) 노는(遊) 것이 축제의 근본이다. 사람의 움직임이 없다면 이런 유형의 축제는 성립하지 않을 터이고 아예 성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막춤이나 어깨춤 등의 가치에 비하여, 전래해온 마을 단위의 놀이와 의례를 다들 무심코 지나쳤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농경사회로부터 디지털시대로 이행한 후에도 막춤이나 어깨춤 등의 가치는 좀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가치를 외면하는 풍토가 문제이다. 지금은 극장 옥내 무대와는 또 다른 세계에서 사람들과 생활 환경 속에서 춤을 실행하는 커뮤니티댄스, 장소춤이 빠르게 부각되는 시대이다. 마을굿의 속뜻을 되짚어 보고 거기서 춤 활동의 씨앗을 찾아내는 것 역시 진취적이며 창의적인 활동이 아닐 수 없다. 무대와 천지자연 사이 춤의 경계가 와해되고 있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4. 4.
사진제공_김채현, 카페사사모, 국립무형유산원, 경남창녕교육지원청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