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나브로가슴에 〈Earthing〉
빛과 몸, 소리와 공간의 연금술
정옥희_춤비평가

맨발걷기가 열풍이다.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도 되고 스트레스도 줄여주며 심지어 암도 나았다는 간증에 맨발걷기시민운동까지 생겨났다. ‘어씽’(earthing)이라는 낯선 개념이 도입된 지 얼마지 않아 맨발걷기 인파가 공원과 숲, 왕릉을 빠르게 잠식하는 걸 보면 현대인의 종교는 건강인 듯하다. 하지만 땅과 연결된다는 게 그저 건강의 수단일까? 접지(接地)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성찰을 피할 수 없다.

시나브로가슴에의 〈어씽〉(Earthing; 안무 권혁)(대학로예술극장, 10. 6~8.)은 “사람과 땅, 자연을 이야기하는 무용 공연”(브로셔)이다. KO-FICE 한-아세안 문화혁신 공동협력 프로젝트로 라오스의 팡라오 댄스컴퍼니와 함께 만들어 2022년 12월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처음 선보였다. 당시로선 낯선 개념인 어씽이 그세 이렇게나 현지화되었으니 안무가가 제일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시나브로가슴에 〈Earthing〉 ⓒAiden Hwang



좁은 탑조명에 등장한 두 발이 땅을 지근지근 밟는다. 천천히, 반복적으로 제자리걸음 하다가 암전. 어씽의 개념을 설명한 프롤로그이지만 이미 보편화된 데다가 베자르의 〈볼레로〉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니 사족이 돼버렸다.

조금 넓어진 탑조명 주위로 일곱 명의 남녀 무용수가 양반다리로 둘러앉았다. 밀교(密敎)의 주술의식처럼 비밀스럽고 엄숙하다. 불교음악 같은 음향이 무대를 압도하는 가운데 무용수들은 바위처럼 우뚝하다가 서서히 풀린다. 상체에서 시작된 흔들림이 퍼져나가면서 머리로, 꼬리뼈로, 손끝과 발끝으로 파생되고 증폭된다. 끝없이 반복되고 중첩되면서 한번 시작된 움직임은 멈출 줄 모르고 몰아친다.

반복적인 움직임들이 있다. 두 번 짧게 내리 끊었다가 한 번 길게 연결하는 동작은 심박동과 호흡을 시각화하고, 머리끝에서 꼬리뼈로 이어지는 웨이브 동작은 바르테니에프 기초 원리 중 머리-꼬리 연계성을 연상시킨다. 바르테니에프는 신생아가 반드시 거쳐야 할 움직임 발달 단계로 호흡, 중심-말단, 그리고 머리-꼬리의 연계성 등을 들었다. 모든 생명이 거쳐야 할 발달 단계이자 움직임의 본질이 아닌가. 팽창과 수축, 상승과 하강의 원리에 따라 움직임이 몰아치니 무용수들은 안무가가 짠 동작을 수행한다기보다 에너지를 받아내는 듯하다.



시나브로가슴에 〈Earthing〉 ⓒAiden Hwang



30분 만에야 바닥에서 엉덩이를 뗀 무용수들은 기러기 떼처럼 무대를 부유한다. 그들은 얼굴도, 자아도, 정체성도 없는 존재들이다. 일단 달아오른 이들은 휘몰아치는 피아노 연주곡에 떠밀리듯 무대와 극장, 관객과 공연을 잊고 하나됨으로 존재한다. 인류가 근대적 개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생각하면 이토록 철저히 자아를 지우고 집단과 생명에 다시 연결되고자 하는 노력이 숭고하다.





시나브로가슴에 〈Earthing〉 ⓒAiden Hwang



안무가 권혁의 시그니처, 즉 단순한 움직임을 집요하게 반복하고 중첩하고 축적하고 변용하며 인간의 조건을 다루는 스타일은 〈어씽〉에서도 빛난다. 무용계에는 트레일러로 요약할 수 없는 계열의 작품이 있는데 그의 작품이 그러하다. 시간의 흐름을 오롯이 체험해야 한다. 권혁은 뒷모습을 안무하는 데 특히 재주가 있다. 좀처럼 정면을 향하지 않고 고개를 들지 않는 무용수들의 어깨와 등판을 바라보자면 공연을 관람하기보다는 현장을 목격하는 기분이 든다. 불규칙한 박자 속에서 쌓이고 쌓이는 동작들이 일순간 홱 전환될 때의 쾌감도 크다. 눈치 보지 않고 단호하게 멈추거나 동작을 바꿀 때면 서커스만큼이나 아슬아슬하다.



시나브로가슴에 〈Earthing〉 ⓒAiden Hwang



〈어씽〉은 권혁의 시그니춰 스타일을 유지면서도 조명과 스모그를 활용하여 스케일을 확장시켰다. 원기둥처럼 단단한 탑조명과 허리춤까지 차오른 스모그, 성운처럼 공중을 가로지른 조명층은 대학로 예술극장의 아담한 무대를 우주적 공간을 변신시켰다. 스모그는 스푸마토 기법처럼 발과 땅의 경계를 지우는 장치이자 보이지 않는 생명 에너지를 가시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무용수들이 둥그렇게 모여 손을 위아래로 반복하여 흔들자 바닥에 깔린 스모그가 원자폭탄 버섯구름처럼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장면이나 무대 하수 구석에 모여 선 무용수들이 스모그에 휩싸여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장면, 붉은 흙바람처럼 무대를 집어삼켰던 조명의 일렁임에 칼날 같은 탑조명이 일순간 꽂히는 장면 등은 잊기 힘든 이미지다. 막이 내리면 무대엔 아무것도 없나니, 그저 빛과 몸, 소리와 공간이 빚어낸 연금술이다.

정옥희

춤 연구자 및 비평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Dance Chronicle 자문위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진화하는 발레클래스』(2022),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2020)가 있다.​

2023. 11.
사진제공_시나브로가슴에, Aiden Hwang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