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가족의 붕괴 와중의 가족 서사
김채현_춤비평가

가족(家族)은 어떠해야 하는가. 〈잊혀져가는 것들〉(대학로극장쿼드, 6월 22~23일)에서 김남진은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이 공연은 2부작이다. 제1부는 ‘남자의 기억’으로서 아버지가 소재이며, 제2부는 ‘여자의 기억’으로서 어머니가 소재이다. 〈잊혀져가는 것들〉은 김남진이 종종 제시해왔던 말하자면 혈육(血肉) 서사의 연장선상에 있고, 혈육 서사가 흔치 않은 춤계에서 자못 독자적인 행보에 들 것이다.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김채현



1부 시작 전부터 무대 앞에는 굴건(屈巾) 하나가 노출된 채로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어 시선부터 끌었다. 공연 시작과 더불어 암전 속에서 〈아베 마리아〉가 소프라노들의 센티멘털한 허밍코러스로 강렬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굴건이 밝게 비춰지며 굴건 뒤에서 검정 캐주얼 차림의 한 남자가 움직임을 개시한다. 바지와 소매가 걷어 올려져 그의 사지는 살색으로 노출된 상태다. 부동의 눈부신 굴건 이미지, 허밍코러스와 더불어 칠흑 속 억세게 유동하는 사지는 강건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이 부분은 그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를 한동안 명료하게 구현하는데, 시청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매우 흡인력이 컸고 뇌리에 오래 각인되고 공감할 만한 아주 명장면이 아닌가 한다.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김채현



1부는 김남진의 독무로 짜였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배역을 번갈아 가며 부자지간의 정을 재현해 보인다. 화자(話者)의 역을 겸하는 김남진의 독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독백은 주로 조그만 탁자에서 진행된다. 독백에서는 짜장면을 특별식으로나 먹어보던 그 시절(대체로 1980년대 이전)이 서민 가정의 추억으로 소개된다. 어느 날 짜장면을 주문하는 아들과는 달리 앞에 앉은 어머니는 짜장면을 짐짓 마다하고 볶음밥을 주문하였다. 어머니의 태도에서 아들은 가정 형편을 짐작하는 데서 나아가 불평등한 사회에 의분(義憤)을 토하는 순간을 잠시 연출한다. 짜장면을 먹다 말고 불쑥 일어나 불의한 사회를 고쳐보겠다는 다짐을 외쳐보건만 주변의 냉소가 뒤따를 뿐이다. 자기가 살며 겪어보니 그만큼 위선적이며 어려운 사회를 감내해야 했던 아버지를 아들은 이제 중년의 나이에 어느 중식집에서 짜장면을 앞에 두고 회상한다.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김채현



여기서 테이블은 독백을 진행하는 탁자가 되는 동시에 움직임을 위한 소도구, 그리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안치되는 관(棺) 역할을 겸한다. 아버지의 심경은 주로 대사와 앉은 몸짓으로 처리되고, 아들은 대사, 몸짓, 춤 움직임으로써 배역을 펼쳐내었다. 김남진이 탁자 아래위에서 탁자와 함께 수행하는 독무 움직임은 정교함과 격함을 왕래하였다. 이 독무는 1부 도입부에서는 아버지를 위한 만가로 진행되었고, 1부 종지부에서는 사회의 불의를 향한 외침 또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야 했던 세상사람들의 고충으로 다가온다. 그런 후 김남진이 탁자 아래로 기어들어 가서 몸을 우겨넣으면 그것은 아버지의 관이 되고 그 배역은 아버지로 전환된다. 끝으로 관 속에서 아버지가 마무리하는 독백에는 회한(‘관 속에서 나는 누구를 생각하고 기억할고?’)이 그득하다.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김채현



2부 ‘여자의 기억’에서 어머니는 치매 노인이다. 시작 장면으로서 쪽진머리에 흰옷을 입고 단아하게 앉은 여성 노인을 플래쉬로 사진 찍는 순간은 아마도 영정 사진 준비 행사일 것이고, 그 상징성이 분명하다. 입을 다문 노인 뒤로 죽 늘어선 사람들은 자식들로서 어머니와 교감이 전혀 없어 그 순간 어둡고 싸늘한 분위기가 완연하다. 노인이 떠난 빈자리에서 자식들이 전개하는 집단무는 빠르면서 날이 선 편이다. 노인을 아마도 요양원에 보내드리는 것에 대해 맘이 편치 않은, 아니면 그 반대일 자식들의 심경은 그렇게 묘사되었다. 이 집단무에서도 출연자들(자식들) 간의 어울림이나 교감의 기색이라곤 감지되지 않으며 춤 모양과 리듬에서의 일치성이 두드러지는 그 만큼 암묵적으로 상당히 매정스런 정경으로 다가온다.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김채현



이어지는 광경으로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의 신혼 시절 사진을 보며 딸이 호들갑스레 대화를 유도한다. 요양원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치매 노인은 딸을 분간하지도 못한 채 안녕하세요 누구신가요 투의 묻기를 반복할 따름인데, 제 편리할 대로 어머니를 찾아간 딸은 분별력이 희미한 어머니의 의지는 아랑곳않고 재산권 관련 서류에다 어머니의 지장을 받아가기를 누차 반복하며 다른 자식들도 묵시적인 동조를 보인다. 노인이 홀대받는 처지를 가감없이 그려내는 것을 주축으로 2부에서는 자식들이 노인의 치매를 치료하긴커녕 악용하여 재산을 강탈할 기회만 노리는 행태, 자식들 간의 재산 싸움박질 같은 행태가 삽입된다. 이즈음 세간에서도 이미 낯설지 않은 일들 아닌가.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김채현



그렇게 안타까움이 고조되는 중에서도 어머니는 자식 걱정을 놓지 않으며 때로는 자신의 과거사를 회상해내면서도 서운함을 내색하기는커녕 의연한 모습이 뚜렷하다. 자식들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각자 수그린 동작으로 심경을 표하는 순간이 있고 더욱이 격렬한 집단무로 복잡한 심사가 표출된다. 끝내 자식들은 노인과 어울리지 못하며 노인 홀로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자식을 만나는 환각에 빠진다. 〈잊혀져가는 것들〉 1, 2부에서 명대중가요 ‘황성옛터’가 맡은 비중은 높다. ‘황성옛터’는 출연자의 노래, 구음, 옛 유성기 음반 원음으로 간간이 반복된다. 공연 전체의 정동은 인생사에 깊이 얽힌 서러움을 삭여내는 이 가요에 뒷받침받은 바 작지 않았다.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김채현



누구나 피부로 느끼듯, 가족은 오늘날 잊혀져가는 것들 중의 하나다. 심지어 가족은 2세기 전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은 이젠 낯설지도 않다. 이런 거대담론에 비추어 노인 소외 세태가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족들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지, 노인은 어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지 알 사람은 다 안다. 원론적으로는, 잊혀져가는 것들을 인륜의 빛, 본능적 양심 아래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집단 의지가 관건일 것이다.



김남진 〈잊혀져가는 것들〉 ⓒ김채현



공연 전반에서 보완할 점들이 눈에 띄었다. 〈잊혀져가는 것들〉 1부에서 짜장면에 얽힌 개인적 일화를 안무자는 단편적으로 그리고 담담하게 발화하였다. 여기서 어떤 복선이나 돌발성이 없었던 탓으로 해당 일화는 안무자의 진술에 맴돌 뿐 어떤 기대감을 전제로 관객의 관심을 이어가는 매력(!)은 결여되었다. 2부에서는 그런 자식들에게서 연상됨 직한 비뚤어진 심성들이 보다 강력하게 형상화되어 덧붙여질 필요가 있었고 극적 대사도 단조로움을 벗어나 보완되어야 할 듯하였다. 즉 드라마투르기 측면에서 면밀함과 메소드가 약하였다.

앞서 〈잊혀져가는 것들〉을 혈육 서사의 작품이라 지칭하였다. 김남진에게서는 〈브라더〉 〈씻김〉 〈기다리는 사람들〉이 혈육 서사 범주에 들 것이다. 그의 혈육 서사는 혈육 서사 그 자체만으로도 춤계 내에서 남다른 면을 구축해왔다. 여기에 더하여 그의 서사들은 때로 둔탁한 면이 없지 않았어도 넓게 보아 사회적 견해를 강하게 발하는 면모들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특성을 확인할 만한 작품이 춤계에서는 드물어지는 경향은 이즈음 새삼 주시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한 경향에 장단점이 있는 가운데, 더 크게 부각되는 단점으로는 관객과의 소구력이 약하다는 점부터 들어진다. 반성할 일 아닌가. 가족이 붕괴하니 가족 서사도 붕괴해야 하는가. 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이 아니다. 안무자가 겪음 직한 사회 현상에 대해 무심하거나 자신의 (주체적) 의견을 유보 또는 회피할 경우, 공연작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크게 고려해볼 문제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3. 9.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