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상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절대적 소질(춤)로 만드는 길
권옥희_춤비평가

“여기서 나가는 길 좀 가르쳐 줄래?”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대다수 사람들은 이 세상의 법칙인 부족을 법칙으로 따르며 산다. 다시, 이 세상의 부족함이 곧 우리의 존재방식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결코 얻어낼 수 없는 성질로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안다.
서상재(서상재아트팩토리)의 〈신화적 상상력 Ⅱ-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7월21일)를 본다. 가보지 못한 어떤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춤으로 푼 〈신화적 상상력Ⅰ〉에 이은 작업이다. 진실로 바라고 그리워하는 그 어떤 절대적 결핍이 서상재의 존재방식인 듯.

지난해 겨울, 〈공존, 춤〉에서 본 춤의 폭발, 그 잔영이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다시 여름이다.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서상재아트팩토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옥상훈



프롤로그. 투명플라스틱 컵(1,080개)이 하나씩 사각형태로 놓인 무대. 컵 무더기 위로 노랑색 조명이 스윽 지나가자 컵에 반사된 빛이 마치 제단에 켜진 촛불의 그것처럼 일렁인다. 그것은 수많은 인간적 욕구와 컵과 컵사이가 만들어내는 지형적 곡절에 따라 난 길처럼 보였다.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인 장치였다.

가벼운 일상복을 입은 남자(서상재)가 날 듯 컵 위를 지나다니는 조명이 만들어내는 그림을 보고 서 있다. 색을 입은 조명의 움직임이 ‘이곳이 궁금하지 않아? 들어와 보지 않을래?’라고 말하는 듯하다. 남자(서상재)가 컵의 무더기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호기심이 가득한 몸짓으로. 컵 사이를 춤추듯 건너다닌다.

회색토끼(머리모양만)가 등장. 남자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상관없는 몸짓으로 컵을 쓰러트리며 거침없이 다닌다.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군무진이 들어와 거든다. 발로 차고, 집어서 던지고 뭉개는가 하면 컵 위로 몸을 던지고 구르고, 미끄러진다.

앨리스(동화)가 토끼를 따라 우물 안으로 들어가듯, 홀린 드 밖으로부터 중심으로 남자(서상재)는 들어왔는데. 그의 결핍을 껴안는 컵들은(빛) 남자의 존재를 증명할 뿐만 아니라 남자가 (조심스러운 태도)성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는데. 중심으로 믿었던 곳(것) 이제는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낯선 곳이 되어 있다. 빛의 일렁임에 깊은 사유를 담아낸 프롤로그로 아름다웠다.



서상재아트팩토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옥상훈



1장, 다이아몬드의 왕. 쓰러진 컵을 무대 뒤로 밀어놓고, 모여 앉아있다. 자신들이 다이아몬드 인양 거만한 자세로. 컵을 집어 들고 춤을 춘다. 이리저리 모였다가 흩어진다. 그들의 움직임을 가르며 나오는 서상재. 자신도 다이아몬드인양 컵을 든 손을 올려 쳐다보고 미소 짓는다. 무엇이 그를 미소 짓게 하는가. 사람이 재물을 길들였을 때, 혹은 재물이 사람이 길들였을 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세계로부터 영원히 내몰리게 된다는 것을. 재물로부터 얻으려 했던 것은 바로 그 재물 안에 결코 얻어낼 수 없는 성질로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듯(안다고 하자) 남자는 이 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는 이 세계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흔들,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추는 춤. 무대 뒤쪽에서 컵으로 탑을 쌓고 있는 토끼. 그 위에 들고 있던 컵을 얹는다.



서상재아트팩토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옥상훈



2장, ‘클로버의 왕’. 모두 멈춘 채 객석을 등지고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그들의 앞을 남자(서상재)가 지나가자 무용수들이 컵을 기울여 남자의 입에, 얼굴에, 머리위에 쏟는다. 컵(빈 컵) 세례를 모두 받으며 서상재가 구르고 긴다. 컵안에 든 것이 재물 혹은 지혜 가고자 한 세계 무엇이었건 그가 가보고자 한 세계임은 분명해 보인다.

3장, ‘하트의 여왕’. 카드 모양의 캔버스 판이 내려오고, 영상그림이 입혀진다. (민속)꼭두각시 음악이 흐르고 민소매에 통바지를 입은 남자 듀오(천기랑, 오동훈)의 춤. 춤은, 당신이 나이며, 내가 아니고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찾는 듯하다. 마주보고, 손바닥을 대보고, 서로에게 스미듯 추는 춤. 나와 당신은 일인칭이고 이인칭이며 동시에 삼인칭이다. ‘똑딱~ 똑딱’ 반복되는 박자를 타고 인칭이 사라진 상대의 춤에 몰입, 동작이 확산된다.





서상재아트팩토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옥상훈



사랑이라는 일상의 열망과 닮고자 하는 작은 근심 같은 춤과 상관없이 뒤에서 컵 탑을 쌓고 있는 토끼. 어느 사이 세운 세 개의 탑. 춤을 추던 듀오가 컵 탑으로 다가서 컵을 하나씩 집어드는가 싶더니 쓰러트린다. 탑을 쌓고 있던 토끼. 어라?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며 이내 같이 어울려 한바탕 춤을 춘다. 쌓고 있던 탑을 무엇이라 부르든, 그곳에 갇히지 않겠다는 안무자의 의지로 보인다.

4장, ‘스페이드의 왕’. 가슴을 앞으로 한껏 내밀고 모델 걸음으로 무대를 누비는 군무진. 추켜올리듯, 새되고 압축된 “어업”하는 소리와 강한 비트박자에 맞춰 종횡무진 무대를 누빈다. 간간이 “소리 없이, 그놈 자알 논다”는 새된 목소리의 사설이 끼어든다. 한껏 힘이 들어간 몸통을 흔들거리며, 앞으로 뒤로 걷는 춤으로 이어진 스페이드, 권력의 장. 동화 속 카드여왕이
습관적으로 “저 놈의 목을 쳐라” 외친 그 공허한 권력??





서상재아트팩토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옥상훈



마지막 에필로그. 그사이 토끼가 탑을 하나 더 쌓았다. 다시 여섯 장의 카드모양 장치가 내려오고, 영상이 입혀진다. 앞 카드 그림을 뚫고 뒤 무대 막에 그림이 반사된다. 열 두장의 그림이 무대에 가득하다. 서상재가 걸어 나와 컵을 들고 쪼그려 앉는다. 컵으로 음악을 받아들 듯, 춤을 시작한다. 구겨진 컵을 편다. 펴든 컵을 들고 춤을 춘다. 상처투성이인 컵, 그 상징은 무엇일까. 멀쩡한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구겨지기 전 최초의 불안한 순간으로 길을 되돌려, 끝내 컵을 들고 추고자 한 어떤 바람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순간 증명해줄 수 있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그 사이 탑을 하나 더 쌓은 토끼, 서상재가 탑으로 걸어가 자신이 들고 있던 상처투성이 컵을 탑 위에 얹는다.

서상재가 진실로 바라고 그리워하는 곳(것), 세상의 법칙에 묶여 가보지 못한 곳(것). 그곳은 슬프게도 서상재에게 있어 세상의 법칙인 부족의 법칙을 따른다. 하지만 이 부족함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그 결핍, 그것에게서 연유하는 성실성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 동화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카드(다이아몬드, 클로버, 하트, 스페이드)를 알아볼 것이다. 서상재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좋은 작품인 이유는 개인의 욕망을 투사하고, 자기 확장을 꾀하고자 하는 길을 포함, 카드의 상징체계를 통해 변화와 생성을 암시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제시한 그 길을 포함, 다른 모든 길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도 아닐뿐더러 단지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 그곳을 자신이 존재할 절대적인 장소로 삼고, 안무자의 모든 능력이 발현될 소질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그는)​ 그 절대적 소질로 그곳(것)에 가보는 것이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공부했다.​​

2023. 8.
사진제공_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