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메테 에드바센 / 서영란
춤이 언어적 발화를 수용한 대조적인 두 방식
김명현_춤비평가

침묵하는 예술이었던 무용예술에 언어가 개입되기 시작한 것도 이미 오래된 일이다. 사실 개념무용이라는 용어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언어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만들어지는 작업을 지칭하는 것이다. 물론 개념무용을 정의하는데 무용작품의 비판적 성격에 중심을 둘지, 언어적 형식에 중심을 둘지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개념무용이란 용어의 등장과 무용에서의 언어의 수용은 높은 상관성을 가진다. 국내 무대에서도 무용 작품이 언어를 수용하는 경향은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무용 작품이 두 편 눈에 띄었다.

옵/신 페스티벌에서 초대된 메테 에드바센(Mette Edvardsen)의 〈블랙〉과 〈무제〉(11월 19일, 수림문화재단), 그리고 국립현대무용단의 프로그램 ‘스텝업’에서 공개된 서영란의 〈버자이나의 죽음- 신화짓기〉(11월 27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모두 작품 전체를 언어가 이끌어가는 작업이었다. 한 작품은 언어의 문자성을 활용하고, 한 작품은 언어의 구술성을 활용하는 작업이라는 차이도 있었고, 한 작품은 매클루언의 말을 빌리자면 차가운 매체적 성격을 드러내고, 한 작품은 뜨거운 매체적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둘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메테 에드바센 〈블랙〉 ⓒGaetano Cammarota


  

메테 에드바센 〈블랙〉 ⓒ옵/신 페스티벌




먼저 에드바르센의 〈블랙〉은 사물의 단어를 8번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테이블, 테이블 테이블, 테이블, 테이블, 테이블, 테이블, 테이블
체어, 체어, 체어, 체어, 체어, 체어, 체어, 체어
램프, 램프, 램프, 램프, 램프, 램프, 램프, 램프
빛, 바닥, 여기, 하나, 둘, 세 걸음, 화분, 물, 테이블, 병, 절반 가득, 바닥, 젖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에드바르센은 한 단어를 8번씩 반복하며 공간을 옮겨 다닌다. 그녀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는 또렷하게 각인되며 각각의 사물이 놓여있는 위치가 관객의 머릿속에 구조화된다. 사물의 이름과 연관된 행동이 반복되고, 사물의 이름 위로 행동들이 겹쳐지면서 사건이 발생하고, 관객은 텅 빈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사건은 그저 몇 개의 사물이 놓여있는 그녀의 소박한 방에서 일어나는- 화분에 물을 주고, 물이 넘쳐 바닥이 젓고, 강아지가 짓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부딪치고, 커피를 마시고, 테이블에 얼룩을 남기는 등의-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사건들은 단순히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홀로’ ‘망할’ ‘꽤’ ‘뚜렷한’ ‘그러나’ ‘흐릿하다’ 등 상태와 심리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더해지면서 의미의 층위를 더해간다. 병, 뼈, 공, 코너, 신발, 종이, 가방, 틈, 노란, 부드러운, 어두운, 깊은, 잠, 어떤, 사물, 박스, 안에, 빛, 빛나다와 같이 일련의 시퀀스를 가지고 연결되어 말해지면서 사물과 사건은 명암과 농담을 더하며 점점 더 또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종국에는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칼에 손이 베이고, 피를 흘리고 기절했다가 깨어나고, 따르릉 울리는 전화소리에 수화기를 들지만 수화기 너머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가 다시 방에 있는 사물들의 이름을 읊으면서 마지막에 ‘라이트’ ‘블랙’이라 말하면 끝이 난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극, 언어와 지각 사이의 간극,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이 또렷하게 각인되며 그 사이의 틈, 즉 인식의 틈을 지각시키는 것이 〈블랙〉의 목적인 듯하다.




  

메테 에드바센 〈무제〉 ⓒ옵/신 페스티벌




옵/신 페스티벌은 에드바센의 대표 3부작 중 두 편 〈블랙〉과 〈무제〉를 선보였다. 3부작은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를 실험하며 실재 공간과 허구 공간의 중첩을 시도하는 작업들이다. 그녀는 사물과 작업하는 것을 즐기는 데, 실재의 공간에서 사물을 지우고 단지 그것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만으로 현시하게 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녀에게 안무는 곧 글쓰기이며 이를 실험하기에 언제나 언어를 개입시키지만, 언어가 없을 때의 글쓰기로서 안무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를 위한 재료들은 단어들, 보이지 않는 사물들, 목소리, 행동, 반복, 리듬으로 여기에 몸과 행위를 결합하여 ‘도래할 글쓰기’의 형식을 찾아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업이 형식적으로는 구술적이었지만, 실제로는 문자적인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어를 하나씩 말했고,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선명하게 의미를 드러냈는데 이렇게 단어가 하나씩 순차적으로 전달되는 방식은 의미없는 문자의 조합을 선형적 배치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글의 특징이다. 문자적으로 전달된 정보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사물과 사건을 현존시켰다. 이는 공연예술의 무대가 그동안 중시해온 지금-여기, 내 눈앞에 존재하는 물리적, 시각적 현존을 거부하고, 의식 안에서만 현시되는 지각적 현존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을 보는 자(spectator)가 아니라 듣는 자(audience)로 부르기를 선호한다는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확실히 전통적 공연예술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서영란 〈버자이너의 죽음- 신화짓기〉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서영란의 〈버자이너의 죽음- 신화짓기〉는 2015년 선보였던 〈버자이너의 죽음〉을 버전업한 작품이다. 고대 농경사회의 신화에 등장하는 수메르의 이난나, 이집트의 이시스, 가나안의 아세라, 시리아의 아스타르테, 그리스의 데메테르, 키프로스의 아프로디테 등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고 곡물과 가축의 양육자로서 신격의 최고위에 올라있던 여신들이 남성신에게 권좌를 물려준 것이 남성이성중심 사회의 폭거로 바라보며, 여성의 생명 창조의 힘을 복권시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여신의 죽음으로 인해 자연은 인간과 멀어졌고, 몸은 치유의 주술적 힘을 잃어버렸다. 이를 다시 복원하는 것은 몸의 주술적 감각을 깨우고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서영란의 〈버자이너의 죽음- 신화짓기〉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여신들의 죽음은 문자의 발명과 관련이 있다. 아직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 대부분의 농경문명에서는 어머니 여신이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 여신들은 아이들의 양육자이자 보호자였으며, 곡물과 가축들의 원천으로 생명의 탄생은 물론 죽음도 관장하는 신이었다. 문자가 발명되면서 구술사회의 특징인 공동체성, 동시성, 종합성 등의 특징은 무너졌다. 말(청각)은 이미지를 재현한다. 이미지는 정보를 총체적, 종합적, 동시적,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문자는 정보를 선형적, 순차적, 환원적, 추상적으로 전달한다. 이미지를 재현하지 않는 의미없는 기호들의 조합은 뇌가 연속적, 추상적, 분석적 방식으로 작동케 한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도 문자의 출현과 계급사회의 출현 사이에 상관성이 있다고 보는데, 추상적 사고는 세계를 나누고, 분류한다. 말은 한 쌍의 성대 근육을 사용하지만, 문자는 뾰족한 도구를 사용하고 글을 쓰는 한쪽 손을 더 지배적이고 강하게 진화시켰다. 이런 이원화되고 편향된 신체는 가부장적 세계관을 인류의 잠재의식에 심어 여성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여성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는 필연적 짝패다. 물론 이것은 인과성 논리가 아니라 상관성 논리다. (레너드 쉴레인, 『알파벳과 여신』, 콘체르토, 2018)




서영란 〈버자이너의 죽음- 신화짓기〉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자유소극장의 작은 무대에는 5명의 퍼포머(곽유하, 염정연, 윤상은, 정언진, 정이수)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몸 경험을 서로의 몸에 기대거나 끌어안거나 접하여 구술하면서 작품을 진행한다. 잠자리에서 공간 가득히 팽창했던 몸의 경험, 초여름의 열기를 몸 깊숙이 담지했던 경험, 사진 속의 몸이 마치 식물 정령에 둘러싸인 것 같은 발견, 산호처럼 뭉툭하게 잘려나간 인어의 기형적인 다리를 본 꿈, 잘려나가고, 녹아내리고, 들려지고, 옮겨지는 내 몸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몸의 느낌들을 말한다. 그리고 신화의 이야기를 빌어와 아담의 옆구리에서 떼어낸 갈비뼈로 창조되었으면서도 생명을 주는 어머니로 추앙되었다가, 뱀의 형상으로 그려진 여성들을 말한다.

이들이 소환하는 몸들은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적인 몸이기보단 사회 혹은 타자에 의해 감염되고, 변형되며, 훼손되는 비주체적, 식물적 몸이다. 이 몸들의 이미지는 사회적 규범과 이상을 체화한 신체 이미지가 아니라 문화적 관습에 의해 상상된 신체 이미지다. 상상된 신체는 한 문화권의 통상적 관념에 의지하여 형성된다. 예를 들어 월경을 시작하면서 소녀는 월경에 대한 통상적 관념에 영향받아 생식 능력을 환영하거나, 더러움과 동일시하는 신체 이미지를 가진다. 이 작품에서 퍼포머들이 드러낸 식물적 신체 이미지는 여성성을 수동성으로 이해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외려 수동성을 넘어 무기력함마저 드러낸다. 배란이 가져오는 몸이 분리되는 고통에 대한 묘사나 코로나19 백신에 의해 생식을 상실했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백신 공격에 의해 생식을 상실한 자리에서 이들의 새로운 신화짓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앞서 꿈에서 보았던 인어떼를 다시 쫒아간다. 인어의 다리는 메두사의 피로 만들어진 산호초처럼 뭉뚝하게 잘려져 있으며, 마을은 바다에 침수되었고, 유리창은 깨져있다. 그녀들이 유리창에 베어 흘린 피로 바다가 빨갛게 물든다. 여기에 상어는 자기의 살점을 떼어 새끼를 낳고 녹아버린다. 생식은 곧 죽음인 것이다. 피흘림과 죽음과 폐허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러나 생식의 현장은 마지막 문장처럼 “후끈후끈하다.” 뜨거운 열기만이 생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서영란 〈버자이너의 죽음- 신화짓기〉 ⓒ국립현대무용단/Swan Studio




무대에서 주술적인 몸을 불러내고 신화를 말하는 이들은 혼자서 단독으로 있기보단 서로에게 기대거나 의지하거나 걸쳐 있었고, 앉거나 누워 있었으며, 가부좌를 하고 앉아 기도하듯이 손을 모으고 몸을 계속 돌리는 등 주술적인 행동을 보인다. 전통적인 여성들의 노동은 앉아서 하는 동작을 많이 포함한다. 아이를 돌보거나, 식재료를 다듬거나, 의류와 침구를 다루는 행위들은 주로 앉은 자세에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이런 움직임은 여성적이라 할 수 있다. 움직임은 느슨했고 느렸다. 특히 종반부에 무대 앞쪽에서의 아주아주 느린 움직임은 보고 있자니 멈춘 것 같고, 시야를 돌리면 마치 눈에 이물질이 낀 것처럼 아른거리는 특이한 것이었다. 남성적 시각에서 여성의 움직임은 불순물 같이 보인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까.

이들이 움직여 다닌 무대의 중앙은 대체로 비어있었고, 이들의 활동 공간은 주변이었다. 한 순간 벽에 기대어 선 네 명 퍼포머의 몸이 녹아내리듯 천천히 내려앉았고 조명이 어두워졌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를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권좌에서 밀려난 여신들이 사라진 것처럼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여신들이 벽에 스며들 듯 사라진 것 같았다. 이처럼 작품은 여성들의 행동, 여성들의 장소, 여성들의 시간이 잘 조합된 것이었다. 덧붙여, 이들의 구술은 소리도 작고, 반복되고, 중첩되어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는데, 이러한 모호한 발화방식이 여성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했다.(물론 현대사회의 많은 여성들은 분명하게 발화하지만 아직도 큰소리 내는 것을 꺼리고, 순응적으로 따라하기를 규범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안무자에게 이것이 의도된 것이었는지 물었는데 아니라고 했다. 부분적으론 의도한 것이고, (벽에서 녹아내리는 장면을 포함하여) 부분적으론 우연적 결과다. 그래서 이 작품의 꽤나 흥미로운 소재와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규범화하고 있는 혹은 관념적으로 ‘여성’을 나타내는 행동이나, 장소, 시간, 발화방식에 대한 리서치가 소홀했다는 생각에 다소 실망감을 가진다. 몸에 관한 진술도 개념적 접근은 보이지 않고 경험적 접근만 보인다. 둘을 분명하게 나눌 순 없어도 경험적 접근만으로는 보편적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이야기를 나열만 했을 뿐 연결성이 부족했던 것도 단점이다.

프로그램북에서 “파괴된 어머니 대지의 몸, 남성-간성-여성-양성-무성 사이의 존재들, 사이보그-복제-반려종-기후위기 시대의 탈교배와 탈생식 등이 제작되고 있는 지도, 이 보이지 않는 지도를 떠올리며 직관적으로 감각하고 말의 가지를 뻗어나간다”고 했는데, 하나의 주제를 무한히 확장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작품의 주제를 흐린다. 상상력은 필요한 것이지만, 과도하게 세계를 확장시키면 길을 잃는다. 하나의 음식을 조리할 때 들어가야 할 재료의 종류가 제한되듯이, 한 그릇에 담길 음식의 양에 한정이 있듯이 하나의 작품이 다룰 재료에도 제한이 있어야 한다. 아직 성장 중에 있는 안무가들을 위한 무대인 ‘스텝업’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다양한 식재료를 가져오는 것보다 한 가지 재료라도 정확한 계량과, 정확한 온도에 맞춘 정확한 조리시간으로 의도했던 맛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명현 

학부에서는 한국무용을, 석사과정에서는 예술경영을, 박사과정에서는 문화콘텐츠를 전공했다. 무용 작품의 기획에서부터 제작, 생산, 유통, 비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의 언어의 작동에 관심이 있다. 팟캐스트 플랫폼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심플리 댄스〉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

2023. 1.
사진제공_Gaetano Cammarota, 옵/신 페스티벌, 국립현대무용단, Swan Studiio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