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인천시립무용단 〈비가〉
약화된 파국 속에서 그려진 영웅의 운명
김채현_춤비평가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 중에서 기묘한 비극으로 치자면 〈오이디푸스왕〉만 한 작품은 없다. 신화 속 인물이긴 하지만,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심리를 제창하면서 그 이름이 보통명사로 더 알려지게 된 왕. 인천시립무용단의 〈비가〉(悲歌)는 그를 소재로 하였다(11월 11-12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인천시립무용단 〈비가〉 ⓒ김채현




〈비가〉에서는 무대 안쪽에 여러 층의 스탠드 구조물을 배경처럼 가로로 설치하고 어둡게 처리하여 음산한 분위기부터 자아낸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루에 담겨 끌려나가면서 테베에 역병이 들이닥친 것을 목도하게 된다. 그때 테베의 군주는 오이디푸스였다.(테베는 아테네에서 서북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실재하는 지역이고 고대에는 도시국가였으며 신화 속 여러 비극의 무대였다. 신화에 등장하는 테베 군주들의 계보도 전승되어 오고, 오이디푸스는 카드모스왕조의 7대 왕이다.) 사람들이 죽어가자 오이디푸스는 군주로서 전염병을 퇴치할 방도를 고심하던 와중에 뜻밖에도 자신의 출생 비밀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생모와의 관계도 알아차리게 된다. 아마도 역병이 돌지 않았다면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고, 그는 평소처럼 모범적이며 훌륭한 군주로서 종신했을 것 같다.

〈비가〉의 스토리라인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버려진 아기를 양치기가 구조하는 짧은 순간, 역병에 휩싸인 도시 테베, 크레온과 오이디푸스의 쟁투,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진실에 가까워지며 전전긍긍하는 모습,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테이레시아스가 진상을 토로하는 모습들, 진실을 깨달은 이오카스테의 자결과 오이디푸스의 세상 작별. 〈비가〉는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왕〉의 틀거리를 따른다.






인천시립무용단 〈비가〉 ⓒ김채현




남성 주역 및 조연의 역할이 〈비가〉에서 뚜렷하였다. 오이디푸스왕 역의 유승현, 크레온 역의 정명훈이 그들로서, 두 사람의 춤은 단적으로 움직임의 역동성 면에다 방점을 크게 찍었다. 유승현은 훤칠한 키에다 강골이고 중량감 있는 도약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바가 있다.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가 작품에서 인품과 행동에서 모자람이 없는 인물로 묘사하는 영웅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크레온 역을 맡은 정명훈은 오이디푸스 이후의 권좌를 넘보며 오이디푸스와 대립각을 세우고 그에 밀리지 않을 기세를 펼쳐 보인다. 오이디푸스가 크레온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대결이 일단 마무리되지만, 더 큰 시련이 오이디푸스를 기다릴 것이다.

생모이자 왕비인 이오카스테 역은 박소연과 유나외가 더블 캐스팅되어 각기 하루씩 출연하였다. 이오카스테는 넘치는 관능미와 내재된 모성애를 오가면서 점차 솟아나는 불안한 감정을 특히 몸을 통해 표현해야 한다. 여기서 애끓는 심경과 이성애의 감정이 교차할수록 나락의 순간들은 가까워진다. 가녀린 몸매에 복합적이며 꽤나 까다로운 감정선을 소화해내면서 공감을 모아가는 이오카스테의 연기였다.




인천시립무용단 〈비가〉 ⓒ김채현




조금 특이하게, 〈비가〉에는 고대 그리스 연극의 코러스가 등장한다. 주목할 점이다. 코러스는 그리스극에서 주역이 아닌 집단(당시에 남성들이 맡았음)으로서 합창, 춤, 대사를 수단으로 극의 전개를 알리고 예측하며 심지어는 주역의 심경을 대변하고 다른 등장인물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비가〉에서 코러스는 약 3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스탠드 구조물 위에서는 집단의 몸짓으로써, 무대 바닥에서는 집단무로써 작품의 흐름을 돕는 기능을 맡는다. 이에 따라 코러스는 오이디푸스에 동조하기보다는 그에 대해 거리를 두며 막바지에는 그를 책(責)하는 입장에 선다. 코러스를 하나의 집단 역할자로 본다면, 〈비가〉는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 크레온, 테이레시아스, 신탁을 내린 신에 더하여 코러스 등 모두 여섯 역할자로 구성된 셈이다. 그리고 공연 전반에 걸쳐 스탠드 위에서 직립한 코러스 집단은 장중한 느낌을 조성한다. 사족으로서, 그리스극의 코러스가 국내 춤 무대에 등장한 사례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며, 어떻든​ 〈비가〉의 코러스가 작지 않은 규모로서 지속적으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기억해둠 직하다.




인천시립무용단 〈비가〉 ⓒ김채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연상시키는 오이디푸스와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는 서로 성격이 전혀 다르며 실제로는 무관하다. 신화 속에서 오이디푸스왕은 통치자로서 책임은 물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자 영웅으로 그려진다. 왕은 부친 살해의 진상 조사에 착수하고부터 신이 점지한 운명에 갇히고 만다. 신은 왕의 운명을 갖고 놀며 파국의 크레셴도를 높여간다. 이런 운명을 눈치채지 못한 왕은 자신이 파국에 처하게 될 상황을 개의치 않고 진상을 끈질기게 밝혀내는데, 기묘한 비극의 진상이 결론이긴 하지만 그는 운명에 맞서는 어느 인간의 용기를 몸소 보여주었다(그래서 그는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도 영웅으로 각인된다). 파국의 크레셴도,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상 규명에 몰두하는 오이디푸스의 영웅적 우직함... 이처럼 〈오이디푸스왕〉에서 뚜렷한 파국의 크레셴도는 도리어 〈비가〉에서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립무용단 〈비가〉 ⓒ김채현




일례로 〈비가〉의 초반부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크레온과 오이디푸스 간의 쟁투에서 그 같은 파국을 감지하기는 어렵다. 역병에 휩싸인 도시가 묘사된 후 바로 이어지는 크레온과 오이디푸스의 쟁투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오이디푸스 이후의 권좌를 넘보는 크레온의 야심에서 비롯한 것으로 부각되었다. 물론 그 쟁투를 신탁과 오이디푸스 간의 쟁투를 은유한 것으로 확대해볼 수 있겠으나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다. 오이디푸스-크레온의 쟁투는 권좌 쟁탈 말고는 신이 점지한 오이디푸스의 운명과는 연관이 깊지 않아 필연성이 떨어지고, 이 때문에 〈비가〉에서 그 위치 설정과 비중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에
연이어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를 상대로 테이레시아스가 진상을 토로하는 모습들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파국의 크레셴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테이레시아스는 진상을 밝힐 듯 말 듯 미묘한 동작들로써 두 사람의 내면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전개하였다. 테이레시아스의 일거수일투족으로 오이디푸스와 특히 이오카스테의 심경이 절망감 또는 수치감으로 굳어지는 순간들은 〈비가〉가 제공하는 명장면이다.




인천시립무용단 〈비가〉 ⓒ김채현




〈비가〉에서 접하는 인간의 운명은 소포클레스가 묘사한 고대 그리스식의 의 운명이다. 그에 맞서는 인물의 의지에서 결국 직시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진실이고, 그것을 유승현, 박소연, 유나외는 코러스와 함께 그려나갔다. 더 소개할 장면들이 있어 정리해본다. 스탠드 구조물 꼭대기에서 (신탁을 내리는) 신이 인간과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주재한다. 코러스들은 스탠드 아래위를 이동하며 전개되는 상황들에다 액센트를 부여한다. 또 코러스들은 역병의 희생자이면서 신의 대리인인 듯이 오이디푸스를 판결한다. 이를 전후하여 파국의 크레셴도가 깊어가는 와중에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를 쓰다듬거나 어루만지며 포옹하는 동작들은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가 처한 딜레마를 실감나게 드러낸다. 코러스들이 오이디푸스를 뒤덮은 그물망의 굴레를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뒤집어쓰고 자결한다.






인천시립무용단 〈비가〉 ⓒ김채현




〈비가〉의 세계는 소포클레스에게서 비롯되었고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될 웬만한 것이 아니다. 이참에 다시 짚어볼 점으로서, 인천시립무용단뿐 아니라 지역의 공립무용단이 대개 지역 관련 소재나 한국의 전래 설화 등에서 소재를 찾는 경향이 아직도 강한 편이다. <비가>는 이런 경향을 완전히 벗어난 경우로서 소재에 접근하는 관점이 한꺼풀 벗겨진 것을 명확하게 보게 된다. 소재 확장이 춤의 긍정적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자면 더 눈여겨볼 일이다. 몇 해 전부터 소재의 폭을 넓혀온 인천시립무용단의 작업은 앞으로 더 박차를 가할 만하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2. 12.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