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무용단 〈호동〉
미래의 무용극을 향한 시선과 경계할 점
김채현_춤비평가

국립무용단은 올해로 창단 60주년을 맞이하였다. 1973년 서울 장충동에서 지금의 국립극장이 재개관하던 시기에(그 이전에 국립극장은 서울 명동에 있었다) 국립발레단과 분리된 때로부터는 50주년(1년 모자라는)이다. 그래도 올해는 창단 60주년이며, 이를 기념하여 이번에 〈호동〉을 올렸다(국립극장 해오름극장, 10월 27-29일).

호동(好童)은 고구려의 호동 왕자이다. 그의 전설적인 행적은 여러 장르에서 소재화 작업을 더러 자극한 바 있다. 국립무용단도 1974년 〈왕자 호동〉을 공연하였고, 1991년에는 제목을 손질해서 〈그 하늘, 그 북소리〉로 재공연하였다. 이 모두 송범의 안무작이었다. 송범은 국내에서 무용극을 개척한 초기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국립무용단의 단장을 1962년부터 공동으로 맡고 1973년부터는 단독으로 맡아 1992년까지 장기간 재임하는 동안 한국 무용극 개발에 전념하였다. 〈왕자 호동〉을 포함하여 그의 3대작이라 통칭되는 〈도미부인〉 〈은하수〉는 국립무용단을 기반으로 해서 만든 무용극이었다. 그런 결과 송범은 그 누구보다도 국내 무용극의 대명사로 인식되어왔었다.

송범뿐만 아니라 국립무용단에 있어서도 무용극은 역사성이 작지 않다. 송범의 무용극이 시대의 변동에 뒤처졌다고 해서 무용극 자체를 백안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무용극은 알고 보면 국립무용단의 큰 자산 가운데 하나로서 언제나 발전적인 변화를 기해야 한다는 것이 평자의 시각이고, 송범 이후 여러 단장들도 나름의 변화들을 모색하였다. 무용극은 국립무용단과 대중(국민)을 잇는 중요한 접점이자 장르로 재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국립무용단이 60주년 기념작으로 국립무용단 식의 무용극의 대표작 중 하나를 리바이벌 개작한 것은 그러므로 의미가 있다.




  

국립무용단 〈호동〉 ⓒ국립극장




〈호동〉은 고구려가 낙랑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낙랑 공주와 사랑을 더는 이루지 못하고 자결하는 것으로 끝나는 스토리라인에서 〈왕자 호동〉과 유사하다. 그러나 〈호동〉은 〈왕자 호동〉과는 달리 역사적 스토리의 충실한 재현과는 거리를 두었다. 호동 왕자의 일화를 과거 역사 속의 비련(悲戀)으로만 수용하는 일반적인 인식을 〈호동〉은 과감히 탈피하였다. 〈호동〉에서는 부왕(父王)인 대무신왕이 부각되면서 호동 왕자는 그에 순순히 응하지 않되 여러 면 고뇌하며 방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처럼 〈호동〉은 〈왕자 호동〉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실존적인 차원을 적용하는 데서부터 무용극의 변화를 꾀하는 패기를 내보였다. 긍정적인 일이다.

〈호동〉의 안무는 국립무용단의 삼사십대 단원 3인이 맡았다. 60주년 기념작이라는 의미 있는 공연을 그들의 공동안무로 맡기면서 국립무용단은 〈호동〉을 ‘미래의 무용극’으로 지칭하였다. 지난 10월에 국립무용단은 60주년 기념 도서 〈국립무용단 60년사〉를 펴냈고, 여기서 평자는 송범이 한반도 전래의 서사, 전통춤에서의 극적 표현 개발, 스펙터클한 형상화, 기승전결의 사실적 묘사, 낭만적 감성의 환기와 같은 요소들을 갖고 한국 무용극의 초석을 놓았다고 소개하였다. 〈왕자 호동〉에도 물론 해당되는 이런 요소들은 그후 역대 단장들에게서 부분적으로 허물어졌다. 다만 이번의 〈호동〉은 스스로 ‘미래의 무용극’을 표방한 데서 보다시피 더 적극성을 갖고 작업에 임한 차이가 있다.




  

국립무용단 〈호동〉 ⓒ국립극장




〈호동〉에는 국립무용단의 기존 무용극들에서는 접할 수 없거나 드물었던 시청각적 요소와 장치들이 등장한다. 구멍 뚫린 철강판의 벽체로 마감하여 세워 올린 대형 철골조 장치들, 수평 또는 수직으로 매달린 상태에서 글자와 디지털 이미지를 수시로 내비치는 엘이디타워들, 차가운 느낌으로 번뜩이는 수직 동관(銅管)들, 무대 좌우 양쪽에서 무대를 향해 사선으로 강렬하게 투사되어 난무(亂舞)하는 등의 무수한 조명들뿐만 아니라 색조를 절제하여 실루엣과 라인을 강조한 의상, 메탈성 음향의 박진감 있는 음악은 객석의 시청각에 강한 임팩트를 던졌다. 또한 엘이디타워에는 대무신왕의 전쟁 계획을 비롯하여 호동의 독백 같은 대사 등이 흐르는 문자로 수시로 비치면서 사태의 전개를 안내하는 역할을 겸하였다. 변조되어 간간이 들리는 증폭된 음성은 일례로 대무신왕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소리 이미지 구실을 하였다.

이들 요소나 장치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2010년대 이후 국립무용단의 여러 공연들에서 선을 보인 것들이어서 그것이 낯설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호동〉에서는 지금과 매우 근접한 시기에 국립무용단의 주요 공연작에 사용된 부분들을 단원들이 인용해서 재활용하는 전략을 읽을 수 있는 한편으로, 이는 공동 안무자들이 출연했던 경험을 반영한 대목으로도 해석된다.






  

국립무용단 〈호동〉 ⓒ국립극장




〈호동〉은 전체 8장으로 전개된다. 여덟 개의 장마다 ‘나’(1장), ‘나’ 위에 ‘나’(2장), ‘그들’(3장), ‘너’(4장), ‘너’가 ‘나’라면(5장), 낙화(6장), 숲은 움직인다(7장), 선택(8장)처럼 다소 감성적인 소제목들이 붙여졌고 무대 전개는 그에 충실하였다. ‘나’는 호동이며 ‘너’는 낙랑 공주(무대에서는 서희로 설정되었다)로서, 〈호동〉에서 호동 왕자 개인과 그 주변 정황 사이의 관계가 앵글로 부각된다. ‘나’는 부왕 대무신왕으로부터 낙랑 정벌의 명령을 강압적으로 받고선 실행하지 않을 수 없고 낙랑 공주를 사랑하지만 낙랑 공주는 스스로 죽으며 ‘나’ 또한 부왕과 그들 집단에게서 버림받고 자결한다. 이와 결부해서 〈호동〉의 초입에 잠시 등장하는 현대 전쟁의 영상 클립 스냅들은 단편적이어서 아쉬운 감이 있었으나 〈호동〉 속의 사건과 사연들이 과거사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일이기도 한 것임을 잠깐 스쳐가듯이 환기한다.

호동 왕자를 과거에서 구해내어 오늘의 존재로 살도록 한 것은 〈호동〉에서 빠뜨리지 않고 주목할 점이다. 그의 녹록하지 않은 상황을 절대 상황으로 만든 존재가 대무신왕인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호동〉은 대무신왕을 호동의 대척점으로서 전면에 내세워 긴박한 상황을 끌어내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대무신왕은 야욕스런 정복자이자 냉혈한(冷血漢)으로 다가온다. 시대를 초월한 호동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독재자에도 비견될 대무신왕에 의해 두 사람의 사랑이 비련으로 끝맺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거느리는 집단은 그에게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나’의 상황은 집단의 행태들을 배경으로 다시 도드라지며,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실제 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독해되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국립무용단 〈호동〉 ⓒ국립극장




이와 같이 무용극 〈호동〉에서 발상의 대전환을 여러 면에서 만나게 되고, 이번 기회에 그 문은 열렸다. 이에 비하여, 〈호동〉은 전반적으로 춤이 미진하여 ‘무용’극으로서의 완성도와 공감대는 떨어졌다. 대무신왕의 역할에서는 아예 춤이 부재하였으며 그에게서 두드러진 제스처와 의상을 객석에서는 주로 과시적인 것들로 감지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호동과 낙랑 공주 사이에서 이인무라 할 것이 눈에 띄지 않은 상태에서 수차례의 재회와 포옹이 연출되었다. 두 사람이 춤으로 빚어냄 직한 환희와 애틋함이 결여된 탓으로 그들이 구현할수록 무용‘극’에 깊이를 더할 인간미가 살려졌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장졸(將卒) 역할의 집단이 해내는 춤은 예각의 움직임에 에너지가 드셌던 반면에 집단무가 기본으로 갖춰야 할 다양한 구도의 구성미를 결하였다. 전쟁 씬과 같은 직접적인 묘사를 꼭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집단무에서 허한 느낌은 피하기 어려웠다. 특히 변전이 낮은 집단무의 전개는 예측불허의 기대감을 키우기보다는 〈호동〉이라는 대형 무용극의 흐름 전반에서 단조로운 감을 유발하기가 십상이었다.


〈왕자 호동〉과 〈호동〉, 둘 간의 거리는 일단 멀어 보인다. 반면에 송범이 초석을 놓았다는 한반도 전래의 서사, 전통춤에서의 극적 표현 개발, 스펙터클한 형상화, 기승전결의 사실적 묘사, 낭만적 감성의 환기와 같은 요소들을 토대로 〈호동〉을 상기해보면 상통하는 점들이 적지 않아서 〈왕자 호동〉과 멀지 않다는 인상이 들 만하다. 그렇더라도 이들 측면을 구현해내는 방법과 서사 해석의 차원에서 그리고 직접적인 재현 묘사를 에둘러가면서 〈호동〉은 다소 진취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근 50년이 지난 그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오늘의 감성과 시선으로 〈왕자 호동〉을 사실상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이와 같은 유형의 작업들은 많을수록 바람직하고 ‘미래의 무용극’을 앞당길 듯하다. 무엇을 빼고 무엇을 더할 것인가? 단적으로 무용극의 새로운 문법과 그에 적절한 춤을 지속적으로 탐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덧붙여, 이번에 한껏 참조한 것으로 짐작되는 뮤지컬 양식 또한 적지 않은 보탬이 될 테지만 국립무용단은 뮤지컬 아류, 뮤지컬 무용극을 경계하며 ‘미래의 무용극’을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2. 11.
사진제공_국립극장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