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남정호의 춤 산책 5
나의 춤을 기억한다(3)
가르치며 배우다
남정호_안무가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 출 입국서류를 작성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퇴직하고 나니 직업을 기입할 때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명함에 박힌 대로 명예교수를 적기는 좀 따분하고, 내가 하는 일의 정체성을 영어로 댄서-dancer라고 기입했다가 공항 보안대에서 진이 빠지게 된 옛 제자들의 경험담도 떠오르고. 출입국 창구에서 빨리 수속을 끝내기 위하여 아니면 골탕 먹이기 위하여는 좀 근엄한 공식적인 단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choreographer-안무가라고 멋지게 적어놓고 꺼림직한 것은 무슨 때문일까.

직업이란 그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 일이 나의 실제 생계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융통성 없는 사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공직에 있지 않았던 화가, 음악가, 작가 친구들이 당연히 써내듯이 무용가라는 이 멋진 단어만을 나의 이름 옆에 써 놓고 나니 가볍다, 후련하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현대무용가는 발레단이라는 인형의 집을 나와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작품을 만드는 가난한 예술가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가난한 무용가가 낯설게 들리는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용가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물려받은 재산이 있거나 부자 배우자나 파트론을 만나야 한다는 암묵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무용가가 춤을 추어서, 안무를 하여서 그리고 공연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우가 된 것은 아직도 얼마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며 여전히 아주 드문 경우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가르치는 일을 하여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무용가는 무용선생이기도 하다. 가르친다는 것은 초기의 현대무용가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작품을 위한 재료를 다듬는 것처럼 필수적이었지만 현재의 무용가들은 대부분 생계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르치는 일을 택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생이 되는 것이다. 프랑스 의사며 작가인 니콜라스 앙드리는 1740년에 벌써 ‘선생의 책임-responsability of teachers’에 대하여 ‘orthopedic-정형법-똑바로 세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나무가 넘어지지 않게 설치된 버팀목같은 그림도 함께 그려 놓았다. 나무에 직접 손을 대어 교정하기보다는 버팀목이라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나무가 서서히 자발적으로 곧은 형태를 찾아가게 된다는 인간에 대한 오래된 믿음이 있는 교육관이다.






프랑스 유학시절 첫해에 렌에서 불어를 익히며 일반인들에게 재즈 수업을 한 것은 경제적 이유에서이다. 일단 한국서 재즈 수업을 배운 적도 없는 내가 그 수업을 감행한 것은 사기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닌 절실한 시절이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 음악에 맞추어 대학서 배운 현대무용의 기본을 적당하게 쉬운 수준으로 정리하고 언젠가 본 듯한 골반 동작을 첨가하여 프레이징한 후에 앞에서 열심히 시범을 하니 그런대로 넘어갔다.

당시는 강사가 음향기구를 직접 챙겨야 해서 하루에 몇 대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 꽤 무게가 있는 CD 재생기를 지참하고 출퇴근을 하였었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장면. 수업 마치고 나오니 비가 부슬거리고 어둑해지는 시간이었어.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데 대로변의 멋진 가구점을 지나치게 되었거든. 따뜻한 조명 아래 있는 멋지고 안락한 실내 가구들. 나는 거기로 들어가서 내 추운 몸을 녹이고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성냥팔이 소녀가 된 기분이었어. 이를 악물고 비를 맞으며 한참을 걸어서 집에 도착했는데 서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튼튼해진 느낌이 들었지 뭐야, 이제부터는 어떤 고난도 잘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 ^^








처음에는 경제적 이유로 가르친다고 해도 곧 그 대상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게 된다. 그러다가 정이 들면 자연스레 사적인 자리도 갖게 되어 밥도 같이 먹고, 입던 연습복도 챙겨주고 좋아하는 것도 추천하고 생활의 지혜도 함께 나누려 한다. 제자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소위 개인적인 영역에까지 어쩔 수 없이 깊숙이 들어가 인간적인 허점마저 노출하게도 되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한 거니까.

좀 한다고 하는 동급생들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등록금은 학부보다 더 비싼 것 같았고 수업은 그다지 많지 않아 전공교수의 조수 노릇을 하고 있는 듯한 선배들을 교내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진학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에게는 더 이상 등록금 부담을 끼치고 싶지 않고. 이제부터 내가 벌어서 공부하리라. 대학에서 교직과목을 이수하였던 터라 모교에서 무용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드디어 공식적으로 보수를 받았다. 돈을 벌었다!






그래도 한때는 섬마을 선생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과 손을 잡고 모래밭을 뛰놀며 춤을 추면서 소박한 학부모가 건네주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먹으며 사는 삶! 그러니까 페스탈로치나 마더 데레사 콤플렉스(웃음). 그런데 이 환상이 실현된 적이 있었다. 학부 3년때 학생회 간부를 맡게 되었는데 가톨릭 신자인 내가 맡은 일이 Y부장! 나중에 알고 보니 기독교 학교인지라 그 어느 부보다 YWCA부장은 활동량이 즉 봉사심이 많은 선배들이 맡았다고. 이기적인 이미지로 평판이 난 나에게 그 일을 맡긴 돌아가신 홍정희 교수님의 심중은 무엇이었을까.

오류동 공민학교 여학생들에게 무용을 가르쳐 가을 학예회에 발표될 무용작품을 준비하는 프로젝트였다. 공민학교는 의무교육인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하여 아마 민간(YWCA?)에서 설계된 대안교육이었을 것이다. 10~15세 정도의 여자아이들 열두 명을 선발하였다. 학교 무용실 분실함에 쌓여있던 타이츠들을 빼내어 기숙사로 가지고 와서 손빨래를 하여 새것이 된 것을 하나씩 나누어 입히니 꾀죄죄했던 아이들이 천사들이 되었다.

학기 중에는 2주에 한번 가다가 여름방학에는 더 자주 가게 되었는데 오류동 버스 역에 내리면 몇 명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 아이들과 손을 잡고 지난 시절 군사시설로 이용된 것 같은 허술한 시멘트 벙커 무용실로 이동하였다. 마중 나오지 않은 아이들은 바닥을 물로 깔끔히 청소를 해놓았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곳에서 맨발의 이사도라가 되어 꿈꾸듯이 춤을 추었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 장소는 사우나처럼 데워져서 모두 땀범벅이 되었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면 한 아이가 문 옆에 있는 찌그러진 바케스 속의 얼음덩이에 꽂혀 있던 콜라 한 병을 따서 나에게 가져왔다. 자신들은 맹물을 마시면서.

나는 그 아이들의 절대적 신뢰와 애정이 담긴 시선에 순종하며 기꺼이 염치없이 그 시원한 음료를 마셨고 아직까지도 그 강렬한 맛을 잊을 수 없으니 보수는 충분히 받은 셈이다. 예술제는 당시 미술을 전공한 김민기씨가 지도한 학생들의 그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벽을 지나 허름한 강당에서 시행되었다. 나보다 더 몰입한 것 같은 음악선생은 자기 집의 피아노를 옮겨 왔고 나는 학교 의상실에 보관된 옷 중에서 기세 좋게 고른 것들을 입히고 화장해 주면서 나의 제자들을 꾸며주었다. 그렇다. 어떤 엄마가 옥수수를 쪄 왔었지. ^^

이 오류동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삭막한 서울 객지 생활 중에서 받은 상처와 무력함을 치유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가르친다고 하면서 배운 것, 얻은 것이 더 많은 시간이었다.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

2024. 4.
사진제공_남정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