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상재 〈살아있는가〉
매혹과 불안의 춤추기로 존재 각성하기
권옥희_춤비평가

서상재는 아테나 라즈의 〈나는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에서 일부 문장을 작품내용에 옮겨온다. 춤의 제목까지. 내용은 이렇다. “사회적 또는 문화적 압박이나 트라우마, 자신이 자초한 선택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직감과 감정과 점점 분리된다. 당신은 자신의 욕구를 모두 뒷전으로 미뤘다. 기본적인 욕구뿐 아닐, 충만함을 느끼게 해주는 더 깊은 차원의 더 중요한 직감적 욕구까지도...(중략) 직감은 당신이 스스로에게 묻기를 기다린다. 나는 먹고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아있는가?’”

지역의 중견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무대에 오른 서상재(art factory)의 〈살아있는가〉(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 7월15일). 자신의 춤과 안무로 혼자 오롯이 50여분을 책임진 무대였다. 안무자가 춤에 걸고 있는 기획과 노력과 투쟁과 그 성패의 과정 등 지금 그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와 고민을 볼 수 있는 무대였다.




서상재 〈살아있는가〉 ⓒ옥상훈




무대 넓이 크기의 검정색에 T자 흰색종이가 오른쪽으로 가로 누운 듯, 흑백이 배색된 종이가 깔린 무대. 무음. 검정색바지와 셔츠를 입고 무대에 등장, 바닥에 깔린 종이를 손바닥으로 마치 자신의 작업자리를 준비하듯, 쓸고 편다. 그리고 읊조린다. “살았는가. 살아있나. 행복, 꿈을 위해 어제 그리고 오늘 반복되는 일상들, 아무 의미 없고, 나는 외동아들, 어려서부터 혼자인 시간이 많았지…. 나만의 시간, 행복…(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몇 마디) 매일 나의 미래를 꿈꿨어. 살아있었지. 지금은 살아있나? 죽었나?”




  

서상재 〈살아있는가〉 ⓒ옥상훈




흰색과 검은색의 경계선에 정확히 등을 대고 눕자 음악이 흐른다.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성가 미제레레(Miserere). 아름답다. 바닥을 튕기듯 몸을 꿀렁거린다. 목을 들고 두 팔을 공중을 향해 뻗어들었다가 내린 뒤, 일어나 객석을 본다. 위를 쳐다보다가 검정과 흰색이 이어진 중간에서 종이를 들치고 아래로 들어간다. 흰색 부분 아래에서 몸을 꿈틀대니 검정색 부분이 따라서 꿀렁거린다. 몸을 뒤집으며 종이를 잡아당긴다. 흑과 백이 엉킨 덩어리. 자신을 형성한 모든 것. 구겨 안은 종이를 높이 치켜들고 뒷걸음을 치고, 휘두르는가 싶더니 어깨에 얹는다. 아래로 살짝 내려앉는다. 온몸으로 무게를 견디듯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자락을 자신의 허리춤에 치마처럼 맨다. 피아노 소리. 꼬리가 길어진 종이치마를 끌고 무대를 가로질러 상수로 이동하더니 이번에는 구겨진 거대한 종이를 머리 위에 올린다. 조심스럽게 걷지만 이내 바닥으로 떨어진 구겨진 종이 자락 끄트머리를 잡아끄는가 하면, 엉켜 무대 바닥을 긴다. 사선으로 이동, 무대 하수에서 종이 덩어리에서 빠져나온 뒤, 온몸으로 춤을 춘다. 지금껏 자신이 추어왔던 모든 춤의 언어로, 그렇게 한참을.




서상재 〈살아있는가〉 ⓒ옥상훈




안무자는 큰 이야기에 이르는, 또는 그것을 춤으로 불러오는 방법에 관해 말하고 있다. 큰 것은 작은 것 속에 있다. 흑과 백으로 정확히 나뉜 종이 무대바닥과 아름다운 성가에서 길어 올리는 고독한 작업은 말하자면 어릴 적에 혼자 하고 놀았던 놀이처럼 종이 바닥(담요나 이불 홑청이기도 했을) 아래에 숨고, 기어 다니고, 치마처럼 허리에 묶어 춤추듯 걸었는가 하면 큰 크기와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끌고 다니며 놀았던 행위들에서 (외동)어린아이가 가졌을, 외롭지만 행복했던 양가적 감정에서 확장된다.






서상재 〈살아있는가〉 ⓒ옥상훈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영혼의 어둠을 뜻하면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와 ‘성금요일’에 드리는 미사에 사용되는 검은색과 정화된 영혼과 기쁨, 순수함을 뜻하는 흰색과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참회곡을 통해, 다시 말해서 어릴 적 기억과 감정을 자세하게 바라보기를 그치지 않는 태도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큰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흑과 백, 그 경계에서 모두를 품어 안으려는 듯 감정을 그 아래로 끌어내리며 종이바닥 밑으로 숨어드는 것. 흰색이기만도 그렇다고 검정이기만도 아니었을 삶, 말하자면 미래의 꿈(?)이었을 춤이 수단으로 바뀐 현실 속에서 삶은 삶에 대한 가장 극심한 저항이자, 죽음이기도 하다. 안무자가 스스로에게 ‘살아있는가?’ 자문하는 이유인지도.




서상재 〈살아있는가〉 ⓒ옥상훈




종이 덩이를 한 쪽으로 밀쳐놓은 뒤 추는 춤은 고양된 감정만도, 그렇다고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만도 아닌, 설렁설렁 추는가 하면 어느 순간 특유의 재기를 반짝 드러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춤을 춘다. 말하자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 언뜻언뜻 자신이 마치 죽어있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진지한 춤(꿈) 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듯한 춤. 벽에 기대서며 춤을 마무리하면서 연습복처럼 보이던 검정색 의상을 벗으니 드러나는 흰색 드레스셔츠와 검정색 바지. 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단정하게 채운다. 성실의 뜻으로 흰색은 성사(聖事)에서 사용되는 의복색이기도 하다.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살아있는가’에 대한 답인지도. 밀쳐두었던 종이를 펴서 접기 시작한다. 크게 반으로, 다시 반, 다시 또 반으로 접은 뒤 자신의 키만한 크기의 흰색이 드러나자 종이 위에 눕는다. 다시 일어나 또 접는다. 반으로 또 반으로... 사각형이 되자, 이번에는 종이 옆에 웅크리고 눕는다. 그리고 다시 접고 눕는다. 마치 접은 종이 크기에 자신의 몸을 맞추고 말 것 마냥 접고 눕기를 반복한다. 위태로워 보인다. 이윽고 큰 딱지 만한 크기가 되었을 때 무대 가운데 놓은 뒤, 접은 종이위에 올라서자, 흔들. 내려와서 다리를 두 팔로 감싸고 좁은 종이위에 올라앉는다. 〈이태리의 정원〉(1936, 최승희가 불렀던) 이 흐른다. ‘맑은 하늘에 새가 울면 사랑의 노래 부르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주세요...‘ 2절까지.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앉아있던 종이를 들어 뒷몀의 검은색을 보여주곤 뒤돌아 걸어 들어간다.




서상재 〈살아있는가〉 ⓒ옥상훈




단지 흑백의 경계가 뚜렷한 종이바닥과 성가만으로 작품에 종교적 의미가 어떠니 하는 말로 해석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딱지만 하게 접힌 종이위에 올라앉은 서상재와 조그만 크기로 접힌 종이는 제자리와 제 면목을 회복한 듯,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것은 의미가 확장된 흑백의 거대한 종이가 딱지 접히듯 접혀 행복한 시간으로 면목을 되찾고 거기 있는 것인지도. 어쩌면 딱지만 하게 접힌 종이라는 사물과 서상재는 이미 제 구원을 제 안에 내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막한 이 고요의 상황을 정리해주는 (시대적) 세상의 슬픔들을 감추고 와야 할 세상을 가로막는 듯 근심 하나 없이 평화롭게(?) 노래를 부르는 최승희의 목소리. 모순의 성찰들 위에 또 하나의 모순된 그림이 겹치는, 흑과 백의 거대한(?) 종이와 딱지 만하게 접힌 종이, 그리고 음악. 탁월한 연출이었다.

한 안무가청년이 흰색 드레스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단정하게 채우면서 이제 나는 다른(그게 무엇이든) 무엇이 된(될 거)다고 할 때, 그는 제 존재 속에서 또 하나의 존재에 각성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존재로 살기 위해 마땅히 겪어야 할 시련들이 곧 그 삶의 매혹임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상재가 중견안무가로 성장, 도약한 작품이었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 ​ ​ ​​​​​​​​​​

2022. 8.
사진제공_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