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툇마루무용단 〈Identity〉
나와 내 안팎의 다른 나를 대면하는 상황적 경험들
최찬열_춤비평가

세계가 생성하는 한 우리의 모습은 계속 변화해 나갈 수밖에 없다. 시간의 지평 위에서 우리는 자기 정체성의 상실과 회복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정체성의 탈-구축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왠지 두렵다. 이는 나를 직시하면서 내 안의 다른 나를 마주하거나 내 밖의 다른 나, 곧 타자를 만나는 일이며, 타자는 때론 변종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툇마루무용단의 정기공연작 〈Identity〉(3월 19~2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나와 내 안팎의 다른 나를 대면할 때 생기는 두려움, 망설임, 주저함 등을 주제화한 공연이다. 그러면서 유민경의 〈New World〉가 시간의 지도리 위에서 변치 않는 정체성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양승관의 〈The Variant〉는 비록 우리와 다른 변종 인간일지라도, 그 또한 고귀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유민경 〈New World〉 ⓒSang Hoon Ok




유민경의 〈New World〉는 메시지가 뚜렷하다. 조명이 밝아지면, 무대 하수 앞쪽에 뭔가를 담고 축 처져 걸려 있는 긴 망사 자루가 눈에 들어온다. 생명을 품은 자궁인 듯하다. 메인-막에는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손짓으로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영상이 투사되어 보이고, 동시에 심장 박동 소리 같은 강렬한 음향이 극장 전체로 울려 퍼진다. 반투명 천에 감싸인 채 꿈틀꿈틀하며 발버둥질하다가 이윽고 툭 떨어져 나온 생명체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힘겹게 일어나 비틀비틀 쓰러질 듯, 미숙하고 서툰 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낯선 세상에 태어나 어리둥절해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실존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원치 않는 세상 속으로 내던져지듯 태어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하는 실존의 근거 없음 혹은 삶의 부조리를 알맞게 장면화하는 도입부이다. 또한 불안정한 실존의 모습을 통해 인류의 불확실한 미래를 넌지시 암시하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유민경 〈New World〉 ⓒSang Hoon Ok




메인-막이 올라가면, 무대 전체는 메타버스 안이다. 12개의 정사각형 받침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층이 나지 않으면서 고르고 나란하게 놓여 있고, 각각의 받침대 위에는 아바타로 변신한 춤꾼들이 은색 반짝이 스팽글 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 또 춤꾼들은 받침대를 세우거나 돌려가며 일사불란한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몇 개의 받침대를 붙여놓고 그 위에서 군무를 추기도 한다. 춤은 사이버 세계 속 캐릭터의 성격을 강조해 나타내 보이는 절도 있고, 단절적인 움직임이 주를 이루며, 이는 시종일관 속도감 있게 진행이 된다. ‘넌 어디서 왔어?’ ‘넌 몇 살이야?’ 인종과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고,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일어 등 각기 다른 나라 말로 거리낌 없이 소통하며 자유롭고 발랄한 춤을 춘다. 새 세대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아바타들의 춤과 퍼포먼스는 쾌활하고 생기가 넘친다. 현실 세계에서의 소통의 답답함이 메타버스 안에서는 해소된다는 뜻이리라. 현실에서보다 사이버 공간에서 소통하는 것을 더 편안하게 여기는 요즘 세대의 심정을 반영한 장면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아바타는 몇 가지 예사롭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처음엔 어떤 모습이었어?’ ‘사람이 죽는다는 걸 믿어?’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살짝 표출되는 대목이다. ‘잔인한 가상 세계’, 숨은 뜻이 있어 되새겨 볼 만한 대사도 들린다.








유민경 〈New World〉 ⓒSang Hoon Ok




하늘-막이 열리고 극장 뒤 벽면의 난간이 훤하게 드러나면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무대 상수 앞쪽에서 등장해 대각선 방향으로 움직이는 춤꾼의 머리에는 긴 끈이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다. 탯줄인 듯하다. 그 순간 상수 쪽 무대 천장에서 끈적끈적한 액체 물질이 쉼 없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바로 밑 무대 바닥에는 여인이 아기 인형을 꼭 껴안은 채 누워서 액체 물질을 오롯이 다 맞고 있다. 액체 물질은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생명수 혹은 정액으로 보인다. 꽤 과감한 이 퍼포먼스는 탄생의 숭고함을 형상화한 장면이리라.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춤꾼들이 사각 받침대를 하나둘 들고 와 차곡차곡 쌓아 올려 무대 뒤 난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든 후, 한 명 한 명 천천히 현세의 옷을 벗고 차례차례로 비장하게 난간으로 올라간다. 죽음의 행렬이다. 장엄하게 천상으로 오르는 긴 행렬은 무대를 에워싼다. 무대는 이제 생(生)과 사(死)가 공존하는 세계이다. 무대와 무대 뒤 벽면 난간이, 깊이감을 확보한 채 상하로 연결되어 삶과 죽음은 순환의 고리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사이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에 말하던 춤 만든 이가 왜 돌연 삶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마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초상화 그림처럼 얼굴과 팔다리, 온몸의 살이 녹아내리며 정체성이 지워진 거대한 인형이 무대 중앙 천장에 매달려있고, 그 밑에 아기 인형을 품은 여인이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우리는 춤 만든 이가, 아마 정체성이 변화하는 매 계기를 출생의 순간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짐작할 수 있다. 거대 인형은 성별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체성이 지워져 있고, 온몸에서 떨어져나온 살이 흘러내리고 추락하는 심연에는 언제나 이미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유민경 〈New World〉 ⓒSang Hoon Ok




유민경의 〈New World〉는 무대의 전면과 중앙, 그리고 후면과 벽면 난간을 시차를 두고 활용하면서 삶과 죽음의 순환을 입체감 있게 형상화했고, 정사각형 받침대와 망사 주머니, 액체 물질과 크고 작은 인형 등 각종 오브제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인류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매 계기는 퇴행의 순간이 아니라, 생명의 태어남에 버금가는 창조적 생성의 국면임을 묘사해 보여주었다. 또한 동시에 인류의 미래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며 진화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함께 상상해보자고 제안하는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다소 들뜨고 어수선한 측면도 있었고, 자칫 휘황찬란한 볼거리를 만드는 데 치중한 공연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좀 더 차분하고 정교하게 미장센을 구축하는 데 집중한다면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춤 세계를 펼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양승관 〈The Variant〉 ⓒSang Hoon Ok




유민경 〈New World〉가 의식에 명료하게 포착되는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이라면, 양승관의 〈The Variant〉는 독특한 질감으로 감성을 파고드는 작품이다. 막이 열리면, 폐허가 된 마을이 나타난다. 여기저기 생활용품과 가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의자와 크고 둥근 거울, 마네킹 등이 보이고 무엇보다도 거대한 목제 프레임 두 개가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가구들을 제자리에 놓고 프레임을 바로 세운다. 마치 새로운 마을을 세우고, 그 마을의 경계 지점, 곧 출입구를 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무대 바닥에는 흰 테이프로 구획이 정해져 있는데, 이는 마을 구성원 각자의 공간, 곧 집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 구획 표시가 없는 무대 중앙은 광장 혹은 공공 공간일 것이다. 군무는 주로 이 공간에서 수행된다. 가지런하고 질서 있게 들어선 집들로 형성된 평온한 공동체에 이방인이 나타나면서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양승관 〈The Variant〉 ⓒSang Hoon Ok




이방인은 손이 긴 변종 인간이다. 큰 프레임으로 설정된 마을 입구에서 변종 인간은 서성거리고 있고, 갑작스러운 변종의 등장에 경계심을 거두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 등이 퍼포먼스와 군무로 표출된다. 그러나 군무이지만 똑같은 동작으로 시종일관 함께 추는 춤은 아니다. 손을 허공으로 올린 채 중간 손가락 셋을 펴 보이는 시그니처 동작과 함께 간헐적으로 수행되는 체계가 잘 잡힌 군무를 제외하곤, 그 밖의 움직임과 동작은 춤꾼마다 조금씩 다 다르다. 각기 다른 몸짓과 움직임으로 변종과 관계 맺는다는 말이다.

모든 등장인물에게 다른 역할이 부여되어 각자가 움직여야 할 이유가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는 불안해 보이고, 어떤 이는 어린애처럼 보이고, 또 어떤 이는 소심하게 보인다. 이들은 성격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고, 또 그런 만큼 변종 인간을 다르게 대한다. 그러나 대체로 세 부류의 인간 군상으로 나뉜다. 망설이며 다가가거나, 멀리서 관망하거나, 친근하거나. 이를테면 춤 만든 이는 춤꾼들의 캐릭터를 살리고 콘셉트에 부합하는 장면을 구축하기 위해 엄청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 관객에게 새로운 차원의 감동을 선사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공연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지고 설득력은 미흡했다. 그렇지만 정성껏 미장센을 가꾸고 디테일을 다듬은 춤 만든 이의 세심한 손길이 색다른 질감과 다른 몸짓 감각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The Variant〉가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온 이유일 것이다. 양승관은 지금보다 앞으로가 훨씬 기대되는 젊은 안무가이다.










양승관 〈The Variant〉 ⓒSang Hoon Ok




양승관의 작품 〈The Variant〉의 하이라이트는 큰 프레임을 이용한 퍼포먼스로 여겨진다. 공연에서 프레임은 마을의 출입구 혹은 문턱이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변종 인간을 나누는 경계선 혹은 분할선이다. 변종 인간을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 그리고 받아들인다면 어느 선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하고 갈등하는 마을 사람들의 군중심리는 주로 프레임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펼쳐지는 퍼포먼스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점을 정하기 위해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 퍼포먼스가 의미심장하게 보인 까닭이다. 말하자면 양승관은 이런 류의 퍼포먼스를 통해 변종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절대 기준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The Variant〉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되짚어 보기를 제안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변종 인간일지언정 다른 인간들과 다름없이 고귀하고 영롱한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제법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최찬열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

2022. 4.
사진제공_Sang Hoon Ok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