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프랑스에서 보내는 엽서 9
일관성 있다는 그 말
남영호_재불무용가

“당신이 하는 말에는 일관성이 있네요. 그리고 프로그램들도 아주 다양하네요. 우리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겠는지 검토해서 연락해드리지요.” 몽펠리에 시청 문화부 공무원이 한 말이다. 몽펠리에 시청의 그 사람은 나를 알고 있었다. “한국 출신의 무용가 영호 남.” 내가 한-불 수교 120주년 때 몽펠리에무용페스티벌에 초청되었고, 몽펠리에 시즌 공연을 제법 많이 해서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한국 무용가가 한-불 130주년 기념으로 한-불 페스티벌을 하겠다고 한다. 그 사람의 첫 마디 C’est cohérent(일관성 있다)이라는 말은 나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아주 중요한 말이다.

먼저, 전시 장소를 물색하는 미팅을 위해 갤러리 대표인 마리 카롤린 씨가 본인이 알고 있는 한국 예술가 4명을 함께 묶어서 서류를 만들었다. 거기에 난 한 예술가를 더 추가했다. “달항아리”를 만드는 신철 작가였다. 2012년 달항아리 공연을 위해 만나게 되어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달항아리 전시를 하였다. 몽펠리에에서 처음 하는 한국페스티벌에 한국을 대표하는 도자기 달항아리 전시도 꼭 추가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5명의 한국 미술가들이 결정되었다. 표현주의 그림 작가, 한국 젊은이들을 특별하게 찍은 사진, 설치미술, 미니멀작품, 달항아리까지….

전시 장소는 몽펠리에 근교 카스트리(Castries)시의 궁전(Chateau de Castries)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시의 시장을 비롯, 시의원과의 미팅이 필요했다. 프랑스에서는 미팅을 받아내기가 제일 어렵다. 미팅이 잡혔다는 말은 그 기관과 사람들이 프로젝트 기획에 관한 제의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계획이 괜찮다 하면 실현을 해보자는 말과 같다. 반대로 미팅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은 곧 그곳에서 프로젝트 기획에 관심 이 없다는 뜻이다. 미팅을 잡기 위해 친구가 소개해 준 기획을 맡은 친구에게 메일 을 준비하도록 했다. 나는 공적인 메일을 불어로 잘 쓰지를 못한다, 하지만 내용을 읽으면서 보충할 수는 있다. 뭐니 해도 이 페스티벌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이니까 . 메일을 보낸 며칠 후 전화로 한번 더 확인하면서 미팅이 정해졌고, 드디어 미팅 장에 갤러리 대표와 서류를 갖고 나갔다.

마침내, 카스트리시 문화부와 연결되었고, 미팅에서 한국 전시가 채택되었다. 장소가 궁전이다 보니 제약도 따랐다. 하지만 역시 전문가인 갤러리 대표가 있었으니 여러 대안을 얘기하면서 잘 풀리고 있었다. 거기에 나는 전시 오프닝 날의 달항아리 라이브 드로잉 퍼프먼스까지 추가로 제의했고 성사되었다. 카스트리시에서는 장소 무료 대관과 장소 보험금과 오프닝 리셉션을 책임지기로 하였고, 우리 측은 그외 모든것을 맡기로 했다. 궁전 전시관의 일일 대관료는 상상을 초월했고 하루 보험금만 1000유로라 했다. 궁전에서 하는 전시가 성사되면서 나는 감동받고 흥분하였다.

다음은 공연 쪽, 몽펠리에시립극장과 미팅을 요청하였고, 사물놀이 공연을 제의하였다. 극장 무료대관에다 홍보를 극장 측에서 맡기로 했고, 우리는 입장권을 반씩 나누기로 했다. 이제는 협업 프로젝트를 알아봐야 했다. 한국에서 오는 사물놀이팀과 국악팀이 현지 예술가들과 만나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프로젝트. 제목은 ‘몽 아리랑’으로 하기로 했다. 몽펠리에의 몽, 한국을 뜻하는 아리랑, 거기에 몽이라는 말은 한자로 꿈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가! 그래서 음악 협업 제목들은 이제부터 ‘몽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하기로 했다.

먼저 현지 음악인들을 선정해야 했다, 내가 잘 아는 친구 음악가에게 연락했다. 내 공연 때 몇 번 음악을 맡은 친구이면서 한국에도 몇 번 가보았던 음악가, 그 친구가 몽펠리에 쪽에서는 잘 알려진 음악가들을 선정 소개해주었다. 이 협업 프로젝트를 이 페스티벌의 큰 특징이라고 모든 페스티벌 파트너들과 시 관계자들에게 설득했고, 그 들은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나 역시 한국의 무용가로서 이곳에서 작업하면서 프랑스 예술가들과 협업을 많이 했었다, 몽펠리에 재즈극장의 어느 레지던트 와 함께 제의했다. 현지 음악가들이 잘 알려져 있던 음악가들이다 보니 그 재즈 극장에서도 오케이되었다.

코레디시 첫 페스티벌 준비로 만나본 몽펠리에 문화 예술기관들의 사람들에 대한 소감은 한마디로 ‘열린 정신’ 그 자체였다. 내가 생각하는 작품들을 설명하는 나를 아주 잘 들어주었다. 물론, 준비도 아주 많이 했었다. 왜 이 예술가들의 전시가 흥미로울 수 있는지, 이 공연들이 몽펠리에 시민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소개시켜 줄 수 있는 아주 다이내믹한 콘서트가 될 것이다 등등.,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스스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자신감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프로그램 선정에서는 나름 진지해진다.

첫 코레디시 페스티벌이 한-불 수교 130주년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한국에서 오는 예술가들 항공비 지원, 약간의 홍보비, 프로그램 만들기 등의 예산이 한국에서 나왔고, 몽펠리에시에서는 페스티벌 장소 무료 대관뿐 아니라 예산 지원으로 10,000유로를 주었다. 그 예산으로 한국에서 오는 예술가들 호텔비와 레스토랑비로 나갔고, 기획비로 들어갔다. 코레디시 페스티벌에 사람들이 오게 하려면 페스티벌을 알려야 했다. 홍보 보도자료를 준비해 현지 언론인들에게 보냈고, 페스티벌 시작 3주 전에 기자 간담회 를 했다. 놀랍게도 첫번째 기자 간담회에 20명 정도의 기자들이 왔었다. 모두들 자신 들의 직업에 투철하다고나 할까? 프랑스 남부 지중해 도시 몽펠리에에서의 처음 있는 한국 페스티벌은 한-불 수교 130주년과 함께 아주 명분 있는 기사거리였다.

사이트도 미리 친구가 아주 멋지게 만들어 주었다. www.festivalcoreedici.com 이 사이트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며 해마다 페스티벌이 끝나면 결과보고서까지 사이트 아카이브란에 다 넣어 두었다. 난 이 페스티벌의 기록들을 다 간직하리라는 목적으로 사이트를 만들었고, 두번째 해부터는 사이트 만든 친구에게 소정의 예산을 주면서 이 사이트를 유지 하고 있다,

첫회 페스티벌은 현지 언론의 큰 호응을 받았다. 현지 언론 신문에는 몇 면씩 코레디시 페스티벌에 대해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현지 방송국 등 40군데 이상에 노출되었다. 처음으로 현지 언론이 코레디시 페스티벌 기사로 도배 되었다는 것, 첫회 코레디시 페스티벌 개막일에는 부시장을 비롯, 문화부, 시의원 및 여러 시 관계자들이 와서 축하와 성원을 해주었고, 한국 측에서는 파리의 한국문화원 원장도 와서 축사를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첫 코레디시 페스티벌 기간 내내 몽펠리에의 날씨가 지중해의 역할을 할 만큼 아주 좋았다는 것이다. 그 11월에 기온이 2도!!! 한국에서 참가한 모든 예술가들은 지중해 도시 몽펠리에에 매료 되었다. 난 아주 흥분되었고, 보람 있었고, 행복했다.

코레디시 페스티벌은 올해로 8회째, 해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그 사이 어려웠던 일들이 왜 없었을까? 실망한 사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더 넓혀지는 느낌은 확실하다. 이제는 작품 활동도 하면서 페스티벌을 하는 밀도 있는 시간 계획이 필요하다.

남영호

현대무용가. 1991년 프랑스에 간 이래 남쪽의 몽펠리에 지역을 중심으로 현대춤 활동을 해왔다. 2015년부터는 한국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축제인 '꼬레디시'를 매년 가을 주최하는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2022. 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