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얀 마루시치 공동창작 〈돌과 판지〉
관계의 생물성에 대한 돌과 판지의 성찰
김명현_춤비평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 초청된 스위스 안무가 얀 마루시치의 세 작품 중 한국-스위스 공동창작 프로젝트 〈돌과 판지〉(10월 15일, JTN홀 1관)는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포장재인 판지를 통해 인간과 환경이 맺는 관계, 사물과 인간이 맺는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를 성찰하는 작업이다. 마루시치는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아티스트로 재활용이 가능한,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판지로 작품을 만들고자 했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매우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전했다. 자본주의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돌과 판지마저도 대가를 지불해야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의 코로나 대책은 지난 수년 간 극장을 떠나 작업했던 마루시치가 공연의 장소로 극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했는데 이 또한 예술이 극장이라는 제도 안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사회정치적 환경을 실감시켰다. 이런 외부적 환경으로 인해 돌과 판지를 통한 인간과 환경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작품과 공연장소의 관계, 작품과 관객의 관계, 관객의 몸과 배우의 몸의 관계, 사물과 몸의 관계 등을 성찰하는 작업으로 확장되었다.




얀 마루시치 공동창작 〈돌과 판지〉 ⓒ2021 SPAF/옥상훈




경사가 급격한 공연장에 들어서면 골판지 박스를 뜯어서 테이프로 연결한 막이 무대를 가로막고 있다. 그 앞에 골판지 더미가 보인다. 공연이 시작되면 정적을 뚫고 “여기요” “.....” “여기 사람 있어요” “.....” “도와주세요” “.....” “여기요, 숨을 못 쉬겠어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몸은 보이지 않고 도와달라는 목소리만 들리는데 관객들은 이것이 무대 안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판지더미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정말로 도와달라는 소리인지, 연기인지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한참을 고민한다. 15분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신음과 비명까지 더해져 점차로 더 간곡해지고 빈번해지는 요청에 객석이 마침내 반응한다.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판지를 들춰내자 은갈치 상의에 빨간 스커트를 입은 국지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화가 난 듯 잠시 앉아서 관객들을 쏘아보고 객석 사이로 난 계단을 걸어올라 퇴장한다. 국지인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돌과 판지의 물질성이니, 사물적 현존이니 하는 추상적 개념보다 관객의 개입을 충동질하는 이들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졌다.




얀 마루시치 공동창작 〈돌과 판지〉 ⓒ2021 SPAF/옥상훈




무대를 가리고 있던 판지막이 아래로 떨어지면 판지를 접어서 만든 작은 집 같은 구조물이 등장하고 그 안에 정채민이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그녀는 영어로 인사를 한다. “Hello” “How old are you?” “Where do you live?” “Do you live here?” “I want to talk to you” 등 그녀는 이웃에게 인사하듯, 자신을 소개하듯, 누구를 향한 말인지 모르게 질문을 하거나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관객들과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끝내 객석으로부터 단 한마디의 대꾸도 이끌어내지 못한 그녀는 “Do you think I am a liar?”라고 물음하곤 퇴장한다. 살려달라는 도움 요청에 반응했던 관객들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대화 요청엔 싸늘했다. 영어로 진행된 때문일 수도 있지만 외국인 관객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만큼 언어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일까? 아니면 돌아앉은 그녀의 등이 우리를 외면했던 것일까? 이런 관객에게 말 걸기는 이후 보다 능동적인 퍼포먼스로 다양한 관계 맺기의 양상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얀 마루시치 공동창작 〈돌과 판지〉 ⓒ2021 SPAF/옥상훈




정지혜가 두 손에 벽돌을 들고 나온다. 그 위에 회색의 돌이 놓여 있다. 그녀는 입에 작은 돌을 물고 두 손에 벽돌을 들고 뒷벽에 기대어 10여분 정도 미동도 없이 서있다 퇴장한다. 돌은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언어의 재생산을 불능화하고 고요를 생산한다. 이 고요함에 일방적으로 내몰린 관객은 10분이란 지루함과 관계 맺기를 하며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느껴야 한다. 벽돌은 자연을 위장한 인공물이다. 손에 들린 10분이란 시간 동안 그것은 점점 무게감을  더하고, 몸에 어떤 힘이나 위력, 부담으로 작용한다. 입에 재갈을 물리고 부담을 더해가는 이 돌들은 자연을 위장한 채  우리를 옥죄고 있는 오염된 환경을 지시하는 듯하다.




얀 마루시치 공동창작 〈돌과 판지〉 ⓒ2021 SPAF/옥상훈




정채민은 내복 차림새로 나와 판지를 테이핑해 카펫처럼 깔아놓은 바닥에 빨간 라커로 하트를 그린다. 라커의 화학성분이 매캐하게 객석으로 퍼진다. 그 독성 가득한 물질을 숨 쉬고 있는 관객을 향해 그녀는 “중추신경에서 말단신경으로 신호를 전달하는...”으로 시작하는 ‘교감신경’에 대한 텍스트를 읽는다. 흥분한 중추신경의 영향인 듯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다 퇴장한다. 정지혜가 무대 양옆에 높이 쌓여있는 음료, 과자, 라면 등의 포장박스를 하나씩 내려 무대를 횡단하는 긴 줄을 만든다. 테트리스 게임처럼 박스를 쌓아 올려 벽을 만들어 간다. 박스를 쌓아 올릴수록 정지혜의 몸이 사라진다.




얀 마루시치 공동창작 〈돌과 판지〉 ⓒ2021 SPAF/옥상훈




중추신경을 흥분시키는 화학물질을 관객에게 흡입시키고, 신체 반응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 자본이 지배하는 생명 정치의 시대에 우리는 한낱 과학실험실의 생쥐 신세다. 쌓아 올리는 행위는 자본의 생존방식이다. 자본은 축적될수록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위로 쌓든, 아래로 꾹꾹 누르든 축적을 본질적 생존 양식으로 삼는다. 그 쌓아 올림 뒤로 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몸이다. 자본이 커질수록 우리는 사라진다. 판지는 가볍지만 쌓아 올린 판지의 의미는 매우 무겁다. 첫 장면에서 국지인의 몸을 누르던 판지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새삼 상기되었다.






얀 마루시치 공동창작 〈돌과 판지〉 ⓒ2021 SPAF/옥상훈




국지인이 베이지색 점프 수트를 입고 조각난 판지를 몇 장 들고 등장한다. 그것을 얼굴 높이로 올려 펼쳐 보인다. 시위를 하는 것 같다. 다음엔 가슴 높이에서 펼쳐 보인다.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채권자라도 되는 듯 삐딱하게 서서 팔을 쭉 뻗어 판지를 보여준다. 구걸이라도 하는 듯 판지를 바닥에 놓고 그 뒤에 앉는다. 입에서 빨간 펜을 뱉어 판지 옆에 세워 둔 채 퇴장한다.

빈 종이일 뿐인 판지가 놓이는 위치와 공연자의 제스처에 따라 언어적 의미를 전달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아도 판지가 말을 한다. 빨간 펜은 차마 하지 못한 말, 위험한 말 혹은 경고다. 하찮아 보이는 판지가 가진 자본주의의 위력을 경고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를 위로하는 빨간 하트를 전달하는 것일까. 텅 빈 판지에 무슨 말을 써넣을지는 관객의 몫일 것이다.

돌과 판지는 한낱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의 현존은 다양한 관계 맺기를 통해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때로 그것은 사라짐으로써 의미를 획득하기도 한다. 〈돌과 판지〉에서 돌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지만, 판지는 그것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채웠다. 오히려 돌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부재하는 현존이라는 기호적 성격은 더 강하게 뇌리에 남았다. 돌과 판지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전경화하는 관계 맺기 속에서 자본주의의 특성을 가시화하고, 관객의 몸에 그 흔적을 깊이 각인시켰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말했지만, 〈돌과 판지〉가 보여준 가벼움은 곧 존재의 무거움이다.

김명현

학부에서는 한국무용을, 석사과정에서는 예술경영을, 박사과정에서는 문화콘텐츠를 전공했다. 무용 작품의 기획에서부터 제작, 생산, 유통, 비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의 언어의 작동에 관심이 있다. 팟캐스트 플랫폼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심플리 댄스〉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

2021. 11.
사진제공_2021 SPAF/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