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대담_ 춤축제에서 전문 무용수로 특별 초청된 이윤경
무용수의 존재성에 큰 자긍심을 느낀다





김태원
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서 무용수의 가치와 중요성을 조명하는 프로젝트 ‘댄서의 순정’을 처음으로 기획했다 들었다. 이 프로젝트의 ‘첫 주자’로 이윤경 씨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공연은 언제이고,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이윤경 10월 15일에 공연한다. 무용수를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에 처음으로 선정되어 영광스럽고 또 감사한 마음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무용수에 대한 존재성을 강조하려 한다. 여성 무용가 김매자, 안애순, 차진엽 씨의 작품을 선택했다. 시대별로도 3세대 간에 걸친 춤을 다양하게 선보일 수 있도록 염두에 두었다. 지금까지도 춤 활동을 펼치고 계신 김매자 선생님은 평소 매우 존경하고 있는 분이다. 전부터 선생님의 작품을 꼭 한번 받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좋은 기회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 안애순 선배가 안무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던 90년대 초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국내 현대춤의 움직임을 정립하는 과정에 그녀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녀와 이번 작업을 통해 여태와 다른 춤의 다른 질감, 다른 깊이를 되짚어보면서 지금의 내 춤 움직임을 다시 한 번 업그레이드시켰으면 한다. 안무가 차진엽 씨는 국제현대무용제(Modafe) 폐막식에서 함께 작업한 적이 있다. 감성이나 춤에 대한 생각이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춤을 굉장히 잘 추는 여성무용수로서 무용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여성스러운 움직임으로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 그녀의 작품으로 작업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세 무용인의 작품을 이번 내 개인공연을 통해 선보이게 된다. 내 솔로는 그 안에 조금씩 들어간다. 이번 공연을 통해 무용수 자체가 안무가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창조적 매개체’임을 강조하고 싶다. 작품의 질은 안무가에 의해 좌우되지만, 최종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무용수다. 무용수가 안무자에 비해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하는데, 이런 부분을 신경 써서 무용수의 중요성이 이 기회에 부각되었으면 한다.

그간 평론가들이 창작활동에 중점을 두다보니 무용수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듯하다. 발레와 한국무용 가운데에서도 전통무용의 경우에는 무용수가 중심이다. 그러나 현대무용은 창조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것이 평론이 지향하는 가치와 맞아떨어지면서 무용수의 존재성이나 그 이미지가 떨어진 것 같다. 이윤경 씨는 현대무용가로서, 장르가 다른 김매자 선생님 춤을 받을 때 어려움은 없었나? 이전에 창작무용가 국수호 씨 <사도>(2007), <월인(달의사람들)>(2008)도 작업한 것으로 아는데….
<월인>과 <사도>는 국수8호 선생님께서 저의 현대무용 감각과 한국무용의 동작을 혼합하여 내게 맞는 움직임으로 짜주었던 작품이라 작품해석에 주안을 두었다. 이번에는 ‘호흡’에 유념하고 있다. 내가 쓰고 있는 호흡은 몸의 중심을 잡고 있는 선이 바닥으로 누르는 것보다는 위로 열리는 스타일인데, 김매자 선생님의 경우에는 철저히 바닥에 누르는 호흡을 요구한다. 그래서 선생님과 한 달 정도 따로 연습을 했다. 춤의 순서나 움직임 형태는 잘 나오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선생님의 호흡처럼 깊게 배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바닥을 누르는 호흡을 하려니 상체가 자유롭지 못하고, 상체를 자유로이 하려니 자꾸 몸이 뜬다. 오늘 아침의 연습에서도 전체적인 느낌이나 에너지는 잘 나오지 않았는데, 단전(丹田)에서 나오는 누르는 힘은 아직 멀었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다. 공연 전까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선생님의 그 깊이를 따라가려 노력하고 있다.



이윤경 씨는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테크닉을 배웠잖은가. 김매자 선생님처럼 누르는 테크닉을 익힌 셈인데, ‘떠오르는 호흡’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레이엄 테크닉을 배웠지만 여러 작업을 통해 내 몸에 편안한, 익숙한 움직임을 스스로 만들어오다 보니 호흡도 바뀌었다. 현대무용가 중에서 누르는 호흡을 하는 편이지만, 한국무용처럼 깊게 누른 것은 아니고 외향적으로 뿜어내는 움직임이 많다보니 호흡선이 열리게 되었다. 가능하면 안에서의 호흡을 하려하는데 아무래도 외향적으로 강한 움직임이 많고 그런 작업을 오래 해왔다. 따라서 속 깊이 누르는 에너지는 한국무용을 지속적으로 해야만 가능하다고 보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도 있다. 한국의 춤꾼은 한국무용을 해야 진정한 무용수로서 오랫동안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요즘 젊은 무용수들이 외적으로 보여지는 테크닉만 하고 있는데, 결국 그것이 진정한 자기 테크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싶다.

지난 1990년대 안애순 안무의 주역 무용수로서 그녀와 많은 춤작업을 하면서 당시 관심이 되었던 릴렉스 움직임이나, 즉흥 작업을 많이 한 탓이 아닌가 싶다. 그 과정에서 누르는 것보다 이완되게 열린 호흡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
맞다. 마사 그라함 테크닉이 기본이었던 육완순 선생님의 현대무용은 줄곧 누르는 호흡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안애순 선배의 작업은 현대무용적 움직임 중에서도 에너지를 누르면서 나아가는 움직임이긴 하지만, 보다 릴렉스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강조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쓰는 호흡법이 바뀐 것 같다. 연습과정에서 업에서 밸런스로 넘어가는 동작이 있는데, 김매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움직이다보니 제대로 중심이 잡아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발바닥에서부터 내리찍는 에너지를 매번 강조하시는데, 그렇게 누르면서 잇지 못하고 내 움직임대로 자연스럽게 올라가버리곤 한다. (웃음)

안애순 안무의 <해,숨,달>(1995)에서 이윤경 씨가 무대를 종횡무진 뛰어다녔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이윤경 씨가 무대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마치 신밧드의 모험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담요를 타고 움직이는 듯하다”고 평했다. 그렇게 뜨는 동작들, 뛰어오르는 움직임들을 해 오다보니 누르는 에너지가 익숙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
그렇다. 김매자 선생님께 작품을 받으면서 누르는 무게감이나 깊이감, 전반적인 움직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신체적으로는 힘들지만, 그러나 무용수로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요즈음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류석훈 씨와 둘이 작업했을 때에는 늘 스스로 모색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많았다. 둘이지만 내가 좀 더 나이가 많다 보니, 춤의 기술적 측면은 내가 풀어야 할 때가 많다. 그에 비해 이번 작업은 다른 안무가들에게서 작품을 받는 이상한 설레임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 없으니 심적으로는 편안하다.


 

올해로 50을 막 넘겼는데, 평소 무용수로서 몸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본’ 움직임이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워밍업으로 바 연습, 동작연습으로 몸을 전부 푼다. 그 이후에 안무가를 만나러 간다. 관절에 무리가 많은 춤작업의 특성상 병원에서 치료도 병행하고 있고, 또 틈틈이 한약도 챙겨먹는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안무가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춤꾼 이윤경이 걸어온 길

 

데뷔작과 개인공연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내 개인 공연은 의외로 많지 않다. 1986년 ‘바탕골 현대무용의 밤’에서 <오는 것, 가는 것>으로 데뷔했다. 이어 1989년에 김태원 선생님이 기획한 ‘공간 제5세대 춤꾼전’에서 <멍>이라는 작품을 공간사랑 무대에 올렸다. 이후 오랫동안 개인작품을 하지 않다가 1997년에 정동극장에서 <거북이의 꿈> <기우는 달>을 묶어 공연했다. 그리고 2008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솔로춤 <춤 고백>을 했다. 이번에 SIDance에서 공연하면 개인발표로서는 다섯 번째가 된다.

정동극장에서 한 <거북이의 꿈>은 어떤 작품인가?
쉽게 말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생각하시면 된다. 제목 그대로 거북이가 가지고 있는 느린, 그러나 변치 않는 꿈을 그린 작품이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거북이가 바로 나의 삶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서 만든 작품이다. 당시 네 명의 무용수가 출연해서 그 꿈을 유머러스하고 아름답게 표현해 주었다.

여러 차례 시리즈로 공연한 <홀로 아리랑>은?
처음에 공연기획 MCT에서 주관한 기획프로그램이었다. 1997년부터 작년까지 8편 시리즈로 제작한 기획공연이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만큼 큰 애착을 느낀다.
 

 

2008년에 발표한 <춤 고백>은 수작(秀作)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스스로 그때 평론가로서 리뷰를 남기지 못해 아쉽다. 공연 일시가 추운 12월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대신 당시 내가 회장을 맡고 있었던 한국춤평론가회 회지의 표지에 그 공연의 사진을 실었던 기억이 있다. 2004년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한 〈MEMORY-Space〉도 밝고 따뜻한 느낌을 가진 유머러스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이윤경 씨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라면 무엇이 있겠나? 주요 수상경력은?
오래한 탓인지 <홀로아리랑>을 대표작으로 꼽고 싶다. 2004년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공간궤도>(Space-Orbit)도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또 같은 해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올린 〈Waiting Room〉으로 한국춤평론가회 ‘춤 비평상’을 수상했었다.
그간 프랑스 생드니 국제안무가경연 '베스트댄서상'(1994), 국제 바뇰레 안무가 경연대회 '대상'(1996), 공연과 리뷰 'PAF 안무상'(2000), 제18회 무용예술상 '무용연기상'(2002), 일본 국제 발레&현대무용 경연 '금상, 안무상'(2002), 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2), 한국춤평론가회의 '2005 춤비평가상'과 ' 2007 춤 연기상', 한국현대무용진흥회 '2013 이사도라 무용 예술상', 그리고 한국현대무용협회 '코파나스상'(2013) 등을 수상했다.

류석훈 씨와 2002년에 결혼했는데 어떤 인연이었나?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 <해,숨,달> 등의 공연을 하면서 무용수 류석훈을 알게 되었다. 보통의 남자무용수들에 비해 순박하면서도 매우 성실했다. 춤에 대한 생각도 나와 비슷했다. 이후 여러 작품을 하면서 많이 친해졌다. 이젠 춤의 동지이면서 동반자이다.

결혼 이후 류석훈 씨가 만든 댄스컴퍼니 ‘더 바디’에 많은 힘을 보태다 보니, 그 무용단은 떠올랐지만 오히려 이윤경 씨는 그믐달처럼 그 존재감이나 활동이 잘 보이지 않게 된 것 같은데...
류석훈 씨가 처음으로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더 바디’에 집중하게 되었고 지금도 공동작업을 해오고 있다. 무용단의 활동에 매달리게 되는 것은 무용계의 지원제도에도 원인이 있다. 현재의 제도는 한 무용인이 자신의 영역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춤 현장에서 활동을 했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신진무용가나 중견무용가 모두 똑같은 정도의 지원금 수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춤 그룹을 개인이 이끌어가면서 활동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래서 무용단의 운영은 류석훈씨와 저의 듀엣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필요할 때에만 프로젝트 형식으로 여타 무용수들을 끌어들여 작업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그간 주로 두 사람의 작업이 많았다.



현대무용단체로서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인 것 같다.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힘든가?
그렇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나쁘지 않았었는데, 2005년 넘어서부터는 무용단을 꾸려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통상 받는 지원금 천만 원으로는 현실적으로 작품을 제대로 된 극장에서 올릴 수 없다. 단원들의 식비, 연습실 대여료, 의상비, 무대제작비 등을 고려하면 독립적인 무용단의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면 대학 무용단들이 춤현장을 많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솔리스트나 듀엣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힘든 상황을 지속해오다가 올해 공연집중육성단체에 선정되었다. 1년에 1억씩 총 3년을 지원받아서 3년간 2개의 신작, 4개의 레퍼토리를 발표하게 된다. 오랫동안 꾸준히 작업하다보니, 많은 이들이 그런 부분을 인정해준 것 같아 고맙다.

무용수로서 오랜 시간 활동해 왔는데,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는가?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지만 무용가이자 무용수로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미래에 대해 확실히 그것을 그릴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몇 살까지 춤을 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신체적으로 가능할 때까지 무대에서 춤을 추고 싶다. 단지 이루고 싶은 꿈, 목표라 할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에도 후배 무용수들에게 기억되고 새롭게 인식되어지는 무용가였으면 한다. 무엇보다 전문무용수로서 ‘이윤경’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다. 꼭 그렇게 하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다.




내 춤은 고행이다

 

우리나라의 무용역사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무용가를 가치 있게 평가하고 보호하는 것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어느 오래된 미국 현대춤의 기사를 보니까, 도리스 험프리와 이혼 후 별 다른 수입이 없는 채 뉴욕에서 25평 남짓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미국의 현대무용가 찰스 와이드먼(Charles Weidman, 1901~1975)에 대해 당시 미국 예술계는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해 뉴욕시와 미국정부에서 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인물의 순수한 예술적 행로와 열정을 높게 산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지원제도는 아직 명확한 기준이 없는 것 같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첫 설립 시는 문예진흥원) 1973년 설립 이후 예술지원제도가 40년 이어져 왔다고 보겠는데, 이젠 그 초기 단계를 뛰어넘어 우리 춤의 전체적인 역사를 고려한, 현 실정에 맞는 지원정책이 서야 한다. 곧 무용계에 공헌한 정도에 따라 등급을 정하고 지원해야 한다. 변함없이 예전 방식대로 비전문적인 지원이 이어진다면, 예술가들 전체의 삶 자체가 불안해 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 같은 안정적인 지원제도도 없이 순수무용가로서의 길을 지속한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측면 내 춤은 ‘고행(苦行)’이다. 춤은 하면할수록 힘이 든다. 신체적으로나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다. 그 한계를 이겨내고자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식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 같다. 〈THE ROAD〉(2013)의 첫 장면에 오체투지의 동작이 나온다.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내려놓는 것을 끊임없이 거듭하며 나아가는 과정, 그것이 곧 춤인 듯하다.
매우 힘든 과정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후배 무용가들에게 내가 이 땅의 무용수의 한 표본이 될 수 있다는 점만은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무용수를 조명하는 ‘댄서의 순정’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것에 후배 무용수들도 어떤 목표와 자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주변에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이라고 본다. 묵묵히 길을 걷다보면 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후배 무용수들에게 “빠른 결과를 바라지 말고 꾸준히 나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젊은 무용가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춤을 진정성 있게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이번 공연을 통해 내 자신의 춤을 되돌아보고, 전문무용수로서의 길을 함께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최근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개인적 차원의 장학제도를 마련하고 싶어서 돈을 모으고 있다. 아니면 평론가 모임에서 주관하는 연기상의 상금을 기부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현재는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의 ‘베스트 댄서상’의 상금을 류석훈&이윤경 이름으로 주고 있다. 작게나마 그렇게라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후배들을 장려하는 일을 조금씩 해나가야 하는 것이 내 한 의무라고 본다.



무용가 이윤경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 사표(師表)나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무용가는?
내 춤의 기본적인 정신력은 절대적으로 육완순 선생님께 비롯되었다. 그리고 내 춤을 정립해서 현재의 스타일을 갖게 된 데에는 안애순 선배와의 작업을 통해서다. 그 당시 평론가들의 지적도 적지 않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런 중에 전문무용인으로서 존경하는 분은 김매자 선생님과 국수호 선생님이다. 두 분께서 보여주시는 춤의 깊이감, 춤에 대한 진지한 태도, 그리고 그 열정과 노력은 단순한 존경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다.

2014. 10.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