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영화, 드라마와 시너지 노리는 뮤지컬
송준호_문화칼럼니스트

지난 연말부터 대작 뮤지컬들의 맞대결이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소셜커머스에서는 할인 판매가 자취를 감췄고 VIP석 티켓 가격은 최고가를 경신하지만 공연장에는 빈 좌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런 성황에도 눈에 띄는 것은 영화를 원작으로 하거나 영화화를 바탕으로 인기 쌍끌이 전략을 보여주는 뮤지컬들이다. 또 올해는 드라마 원작의 뮤지컬들이나 드라마화가 계획된 뮤지컬들도 대거 발표되면서 영상 매체와 시너지를 노리는 작품들의 행보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각색 과정의 안전한 보험, 뮤지컬

영화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들은 매년 기대작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이미 검증된 원작의 매력이 무대에서는 어떻게 변할지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흔히 원 소스 멀티 유즈(OSMU)라 불리는 시도에서 영상 장르의 무대화는 이미 익숙한 형태다.

하지만 유명한 영화 원작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것이 성공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영상 문법을 무대 문법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매력을 새롭게 탈바꿈하는 각색 작업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준을 좁히면 성공 사례는 대폭 줄어든다. 〈라이온킹〉이나 〈브로드웨이 42번가〉나 〈시카고〉, 〈빌리 엘리어트〉 같은 작품들이 해를 걸러 스테디셀러의 면모를 뽐내고 있다. 창작뮤지컬에서도 이런 시도는 꾸준히 등장했다. 〈서편제〉, 〈번지점프를 하다〉, 〈라디오스타〉 등의 작품이 원작의 에너지와 감동을 성공적으로 무대로 옮겨 재연마다 꾸준히 반향을 얻고 있다.

많은 무비컬들이 초연 이후 사그라지는 것은 영화의 명성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다. 원작의 감동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기대만큼 실망의 위험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은 ‘뮤지컬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작업이다. 노래와 춤의 존재감이 큰 장르의 개성이 스크린 앞 관객에게 통했다면, 뮤지컬 객석에서도 그 공통의 매력을 무난하게 수용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뮤지컬이라는 장벽을 무리없이 극복했고, 이를 무대 문법으로 다시 풀어낸 뮤지컬 〈프로즌(Frozen)〉 역시 동화적 환상성과 사랑이라는 테마를 음악과 무대미술로 잘 표현한 끝에 호평을 이끌어냈다. 비록 원작과 달리 다소 진중한 분위기로 바뀐 〈프로즌〉의 연출에 다소 반응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뮤지컬만의 판타지를 넘버와 무대미술로 보강한 시도가 주효했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뮤지컬 영화들은 원작 팬들과 뮤지컬 마니아, 나아가 뮤지컬 프로덕션 모두에게 훌륭한 보물창고 역할을 한다. 종종 등장하는 뮤지컬 영화의 흥행은 많은 뮤지컬 팬들에게 막연한 기대감을 선사한다. 이를테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라라랜드〉가 뮤지컬로 옮겨진다는 상상 같은 것이다. 원 테이크로 촬영된 고속도로 오프닝 장면이나 주인공들의 공원 탭댄스 장면은 무대에서 재현되는 것만으로도 영화와 뮤지컬 관객 모두에게 황홀한 경험이 될 것이다. 연말연시 흥행을 이끌었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물랑루즈!〉 역시 이런 원작의 원동력을 무대에서 더 극적으로 재현해 관객의 시선을 모았다.


무대와 스크린 오가며 증폭되는 장르의 매력

김준수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사실 영화보다 브로드웨이 데뷔가 먼저였던 뮤지컬 원작이지만, 지금의 관객들에는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1957년 초연 이후로 아직까지도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클래식 뮤지컬이다. 1961년 개봉한 영화는 뮤지컬의 연출과 안무를 맡았던 제롬 로빈스가 로버트 와이즈 감독과 함께 연출해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을 휩쓰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지난해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이를 다시 뮤지컬 영화로 만들어 또 한번 이슈가 됐다. 이래저래 영화와 인연이 깊은 작품이다.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쇼노트



잘 알려졌듯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반으로 하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서사는 매우 전형적이다. 원작에서 두 가문의 갈등은 1950년대 뉴욕으로 무대를 옮겨 이민자 갱단 간의 세력 다툼으로 살짝 비틀어진 정도다. 이를 보완하는 것은 역시 춤과 음악이다. 발레와 재즈, 스윙, 맘보, 플라멩코 등 다양한 춤이 클래식과 팝 음악과 맞물려 극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이번 공연에서는 제롬 로빈스의 오리지널 안무 계승자인 훌리오 몽헤가 참여해 ‘모든 캐릭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춤추고 노래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드러내려는 도구로 춤과 음악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뮤지컬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스크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춤과 음악의 입체감과 현장감이 무대에서 제대로 살아난다. 요즘 뮤지컬과도 다른 이 스타일은 태어난 지 60여 년이 된 작품임에도 여전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생명력을 발휘하는 이유다.





뮤지컬 〈물랑루즈!〉 ⓒCJ E&M



또 하나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물랑루즈!〉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결이 다른 뮤지컬이다. 2001년에 개봉한 영화 〈물랑루즈〉는 MTV 시대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영상미와 비틀즈와 스팅, 너바나 같은 20세기의 대표 뮤지션들의 히트곡으로 뮤지컬 영화의 존재감을 새삼 각인시킨 바 있다. 〈댄싱 히어로〉, 〈위대한 개츠비〉 등 격정적인 음악을 화려한 영상미에 결합하는 데 강점이 있는 바즈 루어만 감독은 여기서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테마는 화려한 네온사인 뒤의 예술가들의 잿빛 삶과 맞물려 더 낭만적이고 퇴폐적으로 비친다.

영화 원작의 미장센이 그랬던 것처럼 뮤지컬 역시 화려한 무대미술로 가득차 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관객의 시선을 먼저 압도하는 것은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인근에 있는 카바레 물랭 루즈를 구현한 무대 세트다. 물랭 루즈를 상징하는 빨간 풍차와 코끼리의 조형물이 객석을 마주하는 형태는 관객을 파리의 카바레로 순식간에 초대한다. 특히 오프닝 전부터 배우들이 펼치는 퍼포먼스는 영화 원작을 연상시키면서도 쇼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재치 있는 뮤지컬적 장치다.

영화와 뮤지컬 공히 ‘사랑의 위대함’을 설파하며 사랑으로 돈이나 죽음까지도 극복하려 하는 극단적 낭만주의를 표방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세계관이 엄청난 자본으로 치장한 호화로운 공연장에서 치러진다는 사실이다. 비극적 운명으로 수렴하는 결말에서도 결코 감상적인 상황으로 관객을 끌고 가지 않고 거대한 커튼콜로 이어지는 엔딩은 영화가 보여줬던 재미와 감동을 극대화하는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스크린에서 새로운 도전 나선 뮤지컬

뮤지컬 영화는 아직까지 뮤지컬 관람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좋은 진입 통로가 된다. 제목은 들어봤지만 좀처럼 직접 볼 기회가 없었던 유명 작품들은 스크린에서 더 풍성해진 스토리와 편집 기술로 대중과 만난다. 대표적인 것이 〈오페라의 유령〉과 〈레 미제라블〉, 〈캣츠〉,그리고 〈맘마미아〉 같은 작품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인기 뮤지컬이 스크린으로 옮겨지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공연 실황을 영상화해서 극장 개봉하는 그동안의 형태와는 다르다. 지난해 말 개봉해 박스오피스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영웅〉은 창작뮤지컬로 만든 첫 뮤지컬 영화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치열했던 삶을 본격적인 뮤지컬 형식으로 담아냈다. 물론 앞서 장유정 연출의 뮤지컬 〈김종욱 찾기〉와 〈형제는 용감했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2010년과 2017년에 먼저 선을 보였지만, 뮤지컬 형식이 아닌 극영화였다.





뮤지컬 〈영웅〉 ⓒ에이콤



영화와 뮤지컬의 가장 큰 차이는 매체의 성격에 맞게 캐릭터와 서사가 스크린의 문법으로 보완됐다는 점이다. 영화는 아무래도 인간 안중근의 면모를 더 살리기 위해, 뮤지컬에서는 없는 전투나 갈등 신을 추가해 인품을 표현하는 에피소드로 활용하고 있다. 또 뮤지컬은 총 31곡의 넘버로 이뤄져 있지만, 영화에서는 절반 가량을 덜어내고 새로운 곡을 추가해 개별 장르로서의 차별성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가장 큰 차이는 뮤지컬의 성스루(sung-through) 스타일을 부담스러워하는 관객을 위해 대사의 비중도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는 점이다.

또 장르 간 명장면의 비교는 각색 버전의 감상에서 빠질 수 없는 재미다. 무대에서는 철골 세트 사이를 추격하거나 영상 디자인을 활용해 기차 영상이 실물로 바뀌는 연출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 영화에서는 실제 장소에서 촬영한 장면으로 현장 연출의 강점을 십분 활용했다. 다만 이런 경우 뮤지컬에서 느꼈던 연출의 재치 있는 아이디어는 다소 평범한 역사극으로 비치는 한계도 발견됐다.

그럼에도 이러한 창작뮤지컬의 영화화 시도는 문화 콘텐츠 사업의 다각화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거대 자본이 들어가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과 대비해 창작뮤지컬은 늘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주로 중, 소극장 뮤지컬에 국한되고 있는 창작뮤지컬 제작과 유통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활로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번 〈영웅〉이 영화와 뮤지컬로 같은 시기 개봉과 개막을 하며 쌍끌이 흥행을 이어가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각색된 버전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같은 시도는 차후 창작뮤지컬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컬에서도 계속되는 실험

영화 못지않게 인기 드라마의 무대화 역시 뮤지컬에 익숙지 않은 안방 시청자들을 공연장으로 데려오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그동안 〈환상의 커플〉, 〈풀하우스〉, 〈파리의 연인〉, 〈커피프린스 1호점〉 등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드라마들이 잇따라 뮤지컬로 옮겨졌다. 지난해만 해도 비교적 근래에 방영됐던 〈또! 오해영〉과 〈사랑의 불시착〉이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사랑의 불시착〉 ⓒ㈜에이투지엔터테인먼트, ㈜T2N미디어



하지만 이 역시 관객과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은 무비컬처럼 손에 꼽힌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장대한 인과 관계가 쌓이는 드라마의 속성을 2시간에 불과한 뮤지컬 안에 욱여넣는 시도가 대부분 실패하기 때문이다. 또 특정한 에피소드만을 선별해 새로 서사를 만들어내는 시도 또한 원작의 재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불만을 야기한다. 이런 과정에서 드라마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개연성 없는 스토리 진행 끝에 힘없이 좌절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원적인 한계에도 기존 드라마는 창작의 원천 콘텐츠로서 여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시장의 판단이다. 그 판단의 결과로 올해도 유명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여러 편의 뮤지컬들이 제작 또는 개막을 계획하고 있다. 아트원컴퍼니는 상반기에 예술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드림하이〉(2011)를 쇼 뮤지컬로 선보일 예정이다. 쇼플레이는 인기 드라마 〈호텔 델루나〉(2019)를 대극장 뮤지컬로 각색하는 작업을 지난해부터 이어오고 있다. 라이선스 뮤지컬에 이어 대형 창작뮤지컬 제작에서도 공격적인 행보를 보여온 EMK뮤지컬컴퍼니는 지난해 최고의 히트작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무대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 중이다. 제작사는 드라마의 세 에피소드를 다른 스태프와 배우로 구분해 세 편의 뮤지컬로 만든다는 야심찬 포부를 내비쳤다. 이들 원작 콘텐츠의 양날의 검이 어떤 방식으로 극복돼 무대에 구현될지에 뮤지컬계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2023. 4.
사진제공_쇼노트, CJ E&M, 에이콤, ㈜에이투지엔터테인먼트, ㈜T2N미디어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