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소리와 움직이는 이미지
정다슬 본지 해외통신원

 국제 예술 축제 루르트리엔날레(International Festival of the Arts Ruhr/triennale)가 10월 6일 무지카 에테르나가 연주하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작곡의 <봄의 제전> 연주를 마지막으로 45일간의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2002년 처음 시작 된 루르트리엔날레는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페스티벌 중 하나임에도 아직까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다. 대개의 페스티벌이 한 여름에 열리는 반면 루르트리엔날레는 8월 말 경 시작하여 가을이 시작 될 즈음 막을 내리는 기간의 특성 탓으로 보인다.
 페스티벌은 독일 서부를 흐르는 루르 강 유역의 에센, 도르트문트, 보훔 등 유럽 최대의 공업 도시에서 진행된다. 과거 탄광지역과 산업 공장을 변화시킨 10개의 공연장은 세월의 향기를 그대로 뿜어내고 있어 건축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자아낸다. 그리고 이곳에서 현재 현대 예술을 이끌어가고 있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무용, 음악, 연극, 설치미술까지 다양한 장르를 통해 관객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

 

 

 루르트리엔날레는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 및 스태프를 3년을 주기로 교체하는 식으로 지속적인 자극을 꾀하고 있다. 2012년 부터 2014년까지는 빌리 데커, 유어르겐 프림에 이어 작곡가이자 극작가인 하이너 괴벨이 총 감독을 맡아 페스티벌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괴벨은 루르 지역으로 800명 이상의 아티스트들과 43개의 작품을 가져왔는데, 그 중 20 작품은 페스티벌에서 세계 초연 혹은 유럽, 독일 초연을 가졌다.
 올해의 축제에서는 보리스 샤마츠, 안느 테레사 드 키어스메이커, 윌리엄 포사이드, 로미오 카스텔루치, 로버트 윌슨 등 유럽 현대 예술의 선두 주자들이 대거 참여했고, 동양인 아티스트로는 토모코 헤미, 유코 카쿠타 등 일본인 예술가들이 주로 초청되었다. 방대한 페스티벌의 규모만큼 페스티벌을 찾는 관객의 수도 상당했는데, 올해는 티켓의 90%인 49,400장이 판매되었다고 하니 현대예술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다.

 




□ 능동적 관객의 역할

 

 루르트리엔날레의 특징 중 하나는 관객을 단순히 객석에 앉아있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페스티벌을 함께 만들어나는 능동적 위치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관객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공연예술의 특성을 자각하고 그 역할을 예술가 못지 않게 극대화시키는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다.



텀블토크(Tumble Talk)
 

 

 루르트리엔날레에서 공연만큼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대화와 토론이다. 그리고 이것을 공연화한 것이 바로 텀블토크이다. 선택된 안무가 혹은 연출자는 자신의 공연이 막을 내린 며칠 후 관객 앞에 던져진다. 정해진 주제나 목표, 준비된 질문과 답, 레코딩 없이 예술가와 관객들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형식적인 질문이나 답은 찾아 볼 수 없고, 도발적이고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오간다. 관객 앞에 먹이가 된 예술가를 위한 안전망이나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이러한 소통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했던 ‘낯선 경험’ 혹은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며, 아티스트와 그들의 작업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준다. 윌리엄 포사이드와 보리스 샤마츠가 함께 했던 텀블토크에서는 두 안무가가 서로의 작품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주고 받기도 하였으며, 관객들이 던진 안무의 철학에 관한 추상적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하기 위해서는 며칠이 필요하다며 함께 입을 모으는 등 조금은 딱딱한 분위기를 유쾌하게 벗어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선택(The Children's Choice Award)


 어린 아이들이 레드카펫을 밞고 공연장으로 들어가 객석의 첫째 줄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들은 바로 루르트리엔날레의 공식 심사위원이다. 루르 지역에 사는 100명의 아이들은 여느 성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작품들을 관람하고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 다양한 상을 예술가들에게 시상한다. 카테고리 역시 어린이 심사위원 들이 직접 정하게 되는데 “최고 중의 최고(Best of the Best)”, “와우!(Only Wow!)”, “최악의 의상(Worst Costume)”, “최고의 몸(Best Body)”, “너무 흥미진진해서 참여하고 싶었던 작품 (The Show that was so trilling that I wanted to be a part of it)”, “내가 가장 많이 웃었던 작품(The Show, I laughed most)”, “내가 가장 빨리 잠든 작품(The Show where I fell asleep fastest)” 등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것들이다. 제 아무리 유명하고 주목 받는 이 시대의 예술가라 하더라도 아이들의 날카롭고 영민한 눈으로 재어진 심판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간혹 아이들의 예술에 대한 직관력과 능력을 과소평가 할지도 모르겠다. 루르트리엔날레의 '아이들의 선택'은 이러한 어린이들을 성인들의 ‘분석적 사고’와 같은 수준으로 배치하고 있는 의미 깊은 시도로 볼 수 있다.
 올해는 맥 스튜어트, 필립 게마허, 블라디미어 밀러가 공동제작 한 무용작품 <잘못된 선(The fault line)> 이 “음악과 춤이 어울리지 않은 작품 상(The Show where the music and dancing didn’t went together)”을 수상했고, 안느 테레사 드 키어스메이커의 <시간의 소용돌이(Vortex Tempus)>가 “가장 미친 몸짓 상(The Craziest Gesture)” 을, 보리스 샤마츠와 키어스메이커가 함께 만든 <파르티타 2(Partita2)>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 작품 상(The Shoe where I had no emotion)” 을 수상했다. 반면 윌리엄 포사이드는 설치미술 작품인 <노웨어 에브리웨어(Nowhere and Everywhere)> 로 “최고의 감독상(Best Director)”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받았다.
 어린 심사위원들은 2012년 페스티벌에서 디렉터인 하이너 괴벨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에게 “귀가 아픈 작품 상(Pain in the Ear)”을 주기도 했다. 올해도 ‘아이들의 선택’은 성인들의 시선으로는 바라보기 힘든 곳을 발견해냈다. 대부분의 비평가나 관객의 작품평과는 확연히 달랐던 "아이들의 선택"을 통해 우리들은 아이들의 눈길이 어떤 예술세계에 머물고 있는지를 슬며시 따라가 볼 수 있다.

 




춤은 들려지고 음악은 보여진다.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 의 안무가 지리 킬리안는 한 인터뷰에서 “음악이 보이는 것 같기를, 춤이 들리는 것 같기를, 무대 위의 감정들이 안개처럼 스며들기를, 동작 하는 표현들이 냄새처럼 맡아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올해 루르트리엔날레에서는 이 말이 가슴에 그대로 와 닿았다.
 특히, 벨기에 현대무용을 대표하는 컴퍼니 중 하나인 로사스는 이 아름다운 구절이 실현되는 듯한 작품 <시간의 소용돌이(Vortex Temporum)>을 선보였다. 루르트리엔날레에서 세계 초연 된 이 작품은 벨기에의 현대 음악 앙상블 ‘익투스’와의 협업 작품이다. 최근 몸과 호흡, 소리와 움직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는 안느 테레사는 이번 작품에서 1996년에 프랑스 작곡가 제라드 그리세이가 작곡한 음악을 시작으로 작품의 제목까지 그대로 빌려왔다.
 무대에 오른 7명의 무용수와 6명의 음악가 그리고 한 명의 지휘자는 짝을 이루었고, 음악가들의 비중은 무용수들 만큼이나 중요했다. 무용수의 몸은 각 피아노,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되어 연주되었다. 시간의(혹은 음악의) 수축과 팽창에 반응하며 악기가 ‘보여’주는 무게와 질감을 시각적으로 전달했다. 동시에 무용수들은 무대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원과 그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원들의 연결고리를 따라 원의 순환을 반복했다. 원 안에서 오고 가며, 증폭과 하강,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을 통해 극도의 미니멀리즘이 보여졌다.
 작품의 중반부 쯤 서서히 관객들이 음악을 보기 시작할 때에는 음악가들 역시 악기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두 명의 무용수에 의해 원 안에서 빙글 빙글 돌려졌다. 음악가와 무용수가 함께 움직일 때는 관객석 곳곳에서 작은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움직임과 음악의 리듬이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안느 테레사의 작업은 음악의 마디와 음표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나누고 시각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음악이 무용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용은 음악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을 심도 있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관객에게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감각이 전환되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미국 출신의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는 미술관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그는 무용공연이 아닌 안무를 위한 오브제를 전시하였고, 관객들은 직접 참여하는 형식을 꾀했다. <노웨어 에브리웨어(Nowhere Everywhere)>는 사실 뉴욕의 한 유기된 빌딩에서 한 명의 무용수와 40개의 추로 시작된다. 하지만 루르트리엔날레에서 필자가 만난 작품은 공중에 떠 있는 400개가 넘는 추였다. 관람객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되 예상치 못한 속도로 흔들리는 추를 피하는 과제를 받게 된다.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관객의 움직임들을 채택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윌리엄 포사이드가 만들어내는 작품이고 오브제가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안무 오브제인 <관념의 도시(City of Abstract)>에서는 관객들을 소용돌이로 집어넣어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반응과 더불어 그 안에서 움직임을 끌어내는 방법을 선보였다. 이 외에도 60개 이상의 비디오 작업들은 그의 움직임 언어의 원칙과 그가 얼만큼 ‘즉흥’작업에 관심을 갖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춤의 아카이브

 공연장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가판대에서는 페스티벌 기념 용품은 물론 참여 예술가들의 음악 CD부터 비디오, 관련 도서 등 다양한 물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관객들의 관심을 끈 것은 안무가들이 출판한 책들이다. 최근 많은 안무가들과 무용단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남길 수 있는 일종의 악보(대개 ‘안무 악보 Choreographic Score’라고 불려진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까지의 창작 과정에 대한 인터뷰와 다양한 드로잉, 사진은 물론 안무와 연출의 소재, 계획에 관련된 문서들까지 실려있다. 그야말로 작품의 씨앗인 아이디어를 출판하는 셈이다. 동시에 이런 책들은 몇 페이지로 구성된 공연 팜플렛과는 달리 심도 있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하여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소리와 움직이는 이미지” 라는 키워드를 통해 구성된 2013년 루르트리엔날레는 격변하는 현대 예술을 정리하고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예술의 진화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특히, 단지 결과물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 창작 그 자체에 대한 다각도적인 접근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관객에 의한,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마주하며 공연 예술의 주인공은 어쩌면 예술가가 아닌 관객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루르트리엔날레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현대예술의 내일을 기대하고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축제였다.

정다슬
본지 독일 통신원, 독일 부퍼탈 거주, 부퍼탈탄츠테아터 소속

2013.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