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춤웹진 관객평가단 평가소견
2022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김지우 장은정 최유나 (가나다 순)

〈춤웹진〉은 다액의 공공지원금으로 열리는 주요 춤제전 행사에 대해 일반 관객의 객관적이며 다양한 시선과 의견을 수렴하여 여론화함으로써 춤제전들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공공지원금이 효율성을 진작하도록 자극을 가하는 취지로 관객평가단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 2월 평가단 공모 공고를 시작하여 4월 평가단 선정 작업을 거쳐 구성된 2022 관객평가단은 올해 연말까지 운영된다. 〈춤웹진〉은 해당 행사에 관한 관객평가단의 소견을 원고로 모아 원고 작성인의 개별 이름은 밝히지 않으며 해당 행사 평가단의 공동 작성 명의로 게재 공개한다. 춤제전들의 진지한 기획과 춤창작자들의 열성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 편집자



소견


1. 히로아키 우메다 〈더블빌: Intensional Particle, indivisible substance〉 (10월 8일 관람)

히로아키 우메다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총 2부로 구성된 작품 더블빌을 선보였다. 1, 2부 모두 약 20분 내외였고 중간에 인터미션이 있어 공연을 집중해서 관람하는데 적격이었다. 무용수 움직임의 파장이 디지털 분자들로 무대를 가득 메워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했고 반복적인 기계 음악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작품에 더욱 몰입하게 했다. 전체적인 작품 흐름은 비가시적인 작품의 본질을 새로운 양식을 통해 가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움직임을 기반으로 공간의 확장을 도모하는 듯했다.

하얀 무대에는 중앙을 중심으로 양쪽에 영상 기계장치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곧 하얀 옷을 입은 두 명의 무용수가 등장했고 무대 뒤 영상에는 수천 개의 미립자를 상징하는 듯한 무수한 별이 모여 은하수를 이루는 장면이 흘러갔다. 우주 같은 배경과 기계 음악의 조화 속에서 무용수의 응축된 에너지가 절제된 움직임으로 표현되며 빅뱅과 사이보그를 연상케했다. 후반부에는 미립자의 분열 및 증폭, 확장이 하나의 수평선으로 수렴되어 간결하게 1부를 마무리했다.

내재적인 미립자의 운동을 점으로 표현했던 1부에 이어 불가분의 물질을 선으로 표현한 2부에서는 비교적 확장된 느낌을 주었다. 검은 옷을 입고 등장한 한 무용수는 흘러가는 기계 음악과 무수한 직선을 배경으로 날렵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속도가 증가했고 마지막에는 1부와 동일하게 수평선으로 수렴되어 마무리됐다. 처음에는 신선하게 다가왔던 전개가 후반부로 갈수록 반복적인 표현방식으로 점차 몰입도가 떨어졌다.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였다는 점과 관객이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의미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무용 작품의 본질과 양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안무자의 의도가 작품에 단편적으로 반영된 것은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용수의 움직임이 단순히 무대 뒤 배경에 영상으로 반영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2. 고물X고블린파티 〈꼭두각시〉 (10월 15일 관람)

고물X고블린파티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전통음악과 컨템포러리댄스를 접목한 작품 
〈꼭두각시​〉를 선보였다. 기존 공연예술에서는 개인의 역할이 고정화된 측면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이 공연에서는 연주자가 춤을 추고 노래를 하거나 무용수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공연자가 고도로 숙련되고 전문화된 기교에서 벗어나 춤, 음악, 놀이의 경계를 유머로 넘나들며 위계를 전복시킨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동시대적 소통에 무게를 둔 듯한 이 작품은 특별한 서사 구조가 없었음에도 이해하기 쉽고 난해하지 않아 관객이 작품을 수용하는데 무리가 없었다고 본다.


연주자와 무용수 모두 검은 무대에서 검은 옷을 입고 공연을 진행했다. 의상을 통일한 점이 무대 위에서 수평적인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연주자 다섯 명은 각각 장구, 해금, 대금, 피리, 가야금을 연주했다. 모든 연주자가 움직임을 통해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연주하면서 악기 자체를 돋보이게 하는 연출이 돋보였다.
‘꼭두각시’​ 가사에 독특한 화음을 넣어 기이한 무대 분위기를 조성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후 연주가 무르익은 시점에 무용수 세 명이 등장했다. 어두운 무대 배경 및 의상과 대비되는 무용수의 손과 발은 신체의 움직임이 확장되는 착시효과와 더불어 표현성이 극대화되는 특징이 나타났다.


본래 ‘꼭두각시’는 한국 인형극인 ‘박첨지 놀이’에서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기괴한 탈을 씌워 노는 젊은 색시 인형’을 가리켰다. 그런데 현재는 ‘꼭두각시놀음’으로 사람이 움직여 노는 물체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 무대에서 무용수들과 함께 움직였던 〈꼭두각시〉를 상징하는 해골 소품은 지배와 억압의 관계를 외줄 타듯 오갔다. 뒤에서 해골을 조종하는 무용수와 조종을 당하는 해골은 주체와 객체가 분명히 나뉜 듯 보이지만, 관객의 시선에서는 표면적으로 해골을 주체로 보며 그 경계를 무의식적으로 허물고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공연 후반부는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음악은 여성의 삶의 애환이 담긴 해학적인 가사와 반복적인 리듬이 부각됐고, 마찬가지로 춤도 해골과 그것을 움직이는 무용수 모두 재기발랄한 움직임을 통해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한편 작품 주제가 직관적으로 전달되니 관객 입장에선 이해하기 수월했으나, 사회적인 메시지가 표면적인 작품 전개로 인해 협소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기존에 고답적인 전통 창작의 형식과 내용에서 탈피한 작품으로서 실험적인 무대를 선보여 다원 예술적 특징을 담지한 의미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소견

1. 컴퍼니 XY 〈뫼비우스〉 (10월 15일 관람)

쌓는다. 솟구친다, 날아오른다, 추락한다. 해체된다. 쌓는다.

인간은 날개가 없다. 그런데 무대에서 날아오르는 숲속의 새들을 보았다.

보통의 곡예를 보는 동안 우리들은 대체로 ‘우와~ 신기하다’라는 경이로움을 체험한다. 축적된 기술을 본다.

본다. 탄성을 지른다. 그러나 컴퍼니XY는 보는 동안 내내 관객을 사유로 이끈다.

인간 탑을 쌓아올리고 아무런 장치 없이 날아오르고 추락하는 동안 함께 시도했던 무수한 열망과 도전하는 인간의 역사를 떠올린다. 다만 안전한 추락이다. 서로 던져지지만 누군가 기필코 받아낸다. 중력의 힘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날개가 없는 인간들의 숙명이지만 비극적인 추락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다시 일으켜 세워지고, 떨어진 이는 다시금 누군가의 도약대가 되는 인류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그것은 조용한 제의를 보는 것과 같았다. 단 한 번의 외면, 단 한 번의 배신은 큰 사고와 절멸을 야기할 터인데 이 치열한 사투는 서로의 단단한 신뢰로 평화롭고 안전하게 이루어진다. 내 생명은 타인의 헌신으로 지속된다. 몸과 몸으로 부딪히는 이 기막힌 신뢰를 보는 동안 향후 세계가 나아갈 이상향의 세계를 목도한다.

곡예를 하기 위해서라면 분명히 피지컬이 우수한 젊은이들이 무대일거라는 추측과 달리 청소년과 수염 썽썽한 중년의 퍼포머들이 함께 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은 18년 역사의 이 단체는 오랜 멤버를 내쫓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웃었다. 경쟁하지 않고 나이를 넘어서는 조화를 보여준 작품 뫼비우스의 정신과 같다. ‘타자는 나의 세포다’라는 말의 구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뫼비우스 공연은 내가 손해보고 다치지 않기 위해 타자의 손을 놓기를 미움으로 다짐하고 훈련해온 나 자신에게 ‘내가 있잖아’라고 또박또박 쓴 손 편지를 받은 기분이다.

(추신) 언제든지 몸을 날려. 내가 받아줄게.


2. 프리즈마 〈칭창총 소나타 1번〉 
(10월 15일 관람)


거의 모든 장르가 나온다. 무용, 연극, 그림자극, 영상, 음악, 가면….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게 생긴 큰 인형탈은 관극 전부터 호기심을 이끌기 충분했다. 지하철의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는 두 인물은 갑자기 서로의 몸이 바뀐다. 이 공연의 주제가 ‘코로나19로 아시아계 혐오가 불거진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겪는 삶의 애환과 인종차별 극복의 목소리를 전하는(출처: 여성신문)’ 것이라고 했는데, 우선 자국에서 살고 있는 절대 인종차별을 겪지 않는 나에게 아시아계 혐오로 인한 차별과 애환이 실감나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 갈등을 극복하고 다양성을 수용하자는 메시지로 다양한 장르가 동원되었는데, 그림자극과 연주, 성악, 영상, 조각은 수용하기에는 미학적이지 않았고, 조화를 이루기보다 나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통불가’가 메시지였다면 나는 작품과 소통 불가했다. 인상 적었던 인형탈은 소비되었고, 공 3개가 들어있는 조각은 조악했고, 성악은 기괴한 음을 내었다. 차표를 받으려는 차장은 뜬금없이 신경질적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낯설게 한 것도 맞다. 낯설기 위해서 낯설었다.

실험이면 예술일까? 나는 무엇을 놓쳐서 칭창총이 만들어놓은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내가 본 것들은 모두 무엇의 상징일까? 실제와 허구 시공간의 한께를 확장하는 경험, 낯선 감각 더 나은 세상에 관한 무대를 담기에, 내 자신이 예술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한 것일까? 그렇다면, 맞다. 나는 칭,창,총에 졌다.


소견

R.A.M.a 〈제너레이션: 자화상의 결투〉 (10월 23일 관람)

2022 서울국제공연예술제는 대학로 일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제너레이션: 자화상의 결투〉는 올해 7월 개관한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진행되었다. 극장 쿼드는 단차도 준수하며 좌석 앞뒤 간격도 넓어 편리하였다. 매우 친절한 쿼드 안내원분들도 기억에 남는다. 공연장이 가진 특성도 이번 공연과 어우러졌다. 극장은 가변형으로,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표현하는 춤이라는 장르와 잘 어울렸다. 특히 관람했던 작품은 춤과 더불어 영상이 활용되는 공연이었기에 블랙박스형 극장이 몰입을 도왔다.

〈제너레이션: 자화상의 결투〉 중심 내용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용수 한 명이 극장을 예열했다. 들어오는 관객과 눈을 맞추기도 하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 공간에서 일어날 움직임을 기대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 무용수는 중점적인 부분에서 많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관객의 몰입을 불러왔다. 정해진 시공간에서 시작될 작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관객이 작품으로 들어가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중심 내용이 시작되기 전, 무용수의 춤이 단순한 도입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역할로 표현하자면 무용수, 극장, 무대, 관객이 연결되도록 하는 매개자 역할이었던 것이다. 이 무용수가 존재함으로써 작품의 흐름이 구성되는 듯하여 좋았다.

또한, 본 공연에서 주된 흐름을 담당하는 두 무용수가 관객석에서 작품을 시작하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타 장르 공연에서도 유사한 연출이 사용되곤 하지만, 무용 공연에서 이와 같은 연출을 만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춤과 더불어 영상이 사용되어 짜임새를 더해주기도 했다. 조명 역시 움직임을 중심으로 무용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적절히 사용되었다.

동시에 주제 자체가 흥미로웠다. 세대의 교차, 그 교차 속에서의 조율이 느껴졌다. 작품은 어떤 지점을 향해 다른 두 사람이 걸어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초반부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표정으로 표현하거나 그건 너무 빠르다고 말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느끼는 이질감이 움직임으로도, 다른 요소로도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서로를 점차 이해하기 시작하는 듯하였다. 다른 특성을 이해하는 순간은 선물로 추정되는 것을 뜯어 보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시선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어떤 소품을 사용한 것이 좋았다. 유사한 물건을 선물 받았으나 다르게 다루는 것에서 두 사람의 특징, 넘어서 다른 두 세대의 특징이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세대가 대립하는 모습도 춤으로 표현되었다. 이 부분이 격하지 않게 표현된 것도 좋은 점이었다. 여러 과정을 거치며 둘은 맞닿게 되고, 작품이 끝난다. 두 사람 혹은 세대가 작품 속에서 갈등을 완벽히 해소했거나 완벽히 문제를 해결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극명히 대비되는 듯하나 공감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전환을 겪고 이해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2022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말하는 전환이라는 키워드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5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이야기 전개가 기억에 남는다.

대립과 갈등, 세대와 질문의 중요성 등 우리 시대와 밀접한 것들을 무용이라는 방식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이번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는 관람한 공연 외에도 시의성을 고려한 주제, 사회 속 전환 등 일관된 주제의 다양한 공연이 진행된 점 역시 좋았다. 춤 언어로 시대의 흐름을 더듬어 주는 경험을 할 수 있어 흥미로운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22.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