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춤웹진 관객평가단 평가소견
2022 서울세계무용축제
김지우 맹영지 윤경근 최유나 (가나다 순)

〈춤웹진〉은 다액의 공공지원금으로 열리는 주요 춤제전 행사에 대해 일반 관객의 객관적이며 다양한 시선과 의견을 수렴하여 여론화함으로써 춤제전들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공공지원금이 효율성을 진작하도록 자극을 가하는 취지로 관객평가단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난 2월 평가단 공모 공고를 시작하여 4월 평가단 선정 작업을 거쳐 구성된 2022 관객평가단은 올해 연말까지 운영된다. 〈춤웹진〉은 해당 행사에 관한 관객평가단의 소견을 원고로 모아 원고 작성인의 개별 이름은 밝히지 않으며 해당 행사 평가단의 공동 작성 명의로 게재 공개한다. 춤제전들의 진지한 기획과 춤창작자들의 열성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 편집자



소견 |

1. 9/30(금)
서울세계무용축제(시댄스) 기간 첫 번째 관람한 공연이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진행되었으며, 필자는 2층에서 공연을 관람하였다. 그러나 2층의 일부 좌석은 집중하기엔 적합한 좌석이 아니었다고 본다. 2층보다는 1.5층 정도로 된 곳에 측면석이었기에 좋은 시야가 아니었으며 의자도 꽤 많이 불편하다. 이로 인해 무용 공연에 충실히 집중할 수는 없었다. 아직 많지 않지만, 관람 경험이 점차 쌓이며 무용 공연을 볼 때 집중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왔다. 움직임뿐만 아니라 작은 소리, 내뱉는 표현 하나하나가 공연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은 부분을 보려면 집중해야 하며, 집중은 장면 진행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이듬해 열릴 시댄스에서는 관람 환경이 더 개선되었으면 한다. 물론 시댄스도 최대의 환경을 제공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좋은 관람 환경이 된다면 춤과 관람객이 더 즐겁게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질 크로비지에 〈The Hidden Garden〉
작품은 녹색 사각형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공연되었다. 무용수는 공간을 정해두고 시작하여 관객을 집중시켰다. 정원이라고 칭할 수 있는 그 공간 안에서 벌어질 움직임을 예측하게 되는 것도 좋은 부분이었다. 동시에 그 녹색 사각형 천으로 된 것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 역시 좋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그 정원 밑으로 들어가 정원에 잠식되는 듯 표현한 장면도 인상 깊다. 또 무용수는 정원이라는 주제에 맞게 꽃다발과 꽃을 사용했다. 모여 있는 꽃다발은 마치 무용수의 여러 가지 모습과 같이 느껴졌다. 한 육체에 모여 있던 자신의 모습들을 날려보기도, 모아보기도 하는 듯하였다. 무용수는 그를 통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중간중간 웃을 수 있는 코드, 장면의 전환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크게 공감할 수는 없었다. 작품에 내포된 메시지를 소화하기 어려웠다.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선 좋은 평가를 하고 싶다. 하지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장치가 있으면서 무용수의 의도를 추측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비에 데메트리우 〈Genes and Tonic〉(진토닉)
공연은 무용수의 소통으로 시작한다. 작품을 무용수 혼자 춤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으로 함께 끌어가는 것이 인상 깊었다. 대사를 통해서도 관객과 소통하려는 시도가 느껴졌다. 이와 같은 시도는 관람객이 작품에 몰두해서 볼 수 있도록 도왔다고 생각한다. DJ라는 캐릭터를 대입한 점도 흥미로웠다. 실제로 디제잉을 하는 것을 작품의 한 장면으로 넣은 것도 좋은 부분이었다. 의상도 좋은 쇼맨십의 한 부분으로 다가왔다.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가 경쾌하여 무용수는 에너지를 보여주는 움직임을 많이 했다. 그런 춤을 출 때 의상이 빛나며 작품에 경쾌한 색을 계속 덧칠하였다.
메시지 측면에서도 좋은 작품이었다.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에 진입하고 결국 행복에 도달하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행복을 디제이가 된 자신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행복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그 행복이 확장되는 부분도 좋았다. 관객의 행복도 동시에 분출되며 디제잉 음악과 함께 행복이 어우러졌다. 무용 공연 작품이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띠는 것보다 움직임이 곧 행복인 것으로 보였다. 완전한 행복이 아니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라고도 느껴졌다. 관객인 나에게도 그야말로 행복이 체감되었다. 온전히 작품에 공감하면서, 또 즐기면서 볼 수 있는 무용 공연이었다. 평가소견을 작성하며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은 배제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나 매우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이 해당 회차 마지막 순서로 배정된 것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언어적 소통이다. 무용수가 공연을 영어로 이끌어 가는데, 과연 관람객 모두가 이해했을까 생각이 든다. 영어로 소통이 어려운 관람객이 있었다면 공연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아주 다행히도 영어를 알아듣는 건 할 수 있었기에 공연을 문제없이 관람했지만 모든 사람이 영어를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물론, 경계 없는 언어의 최고봉인 춤이 중심이 되는 무용 공연은 언어적 소통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언어적 소통을 중심적인 이슈로 두지 않고 작품의 한 부분으로 여겨 있는 그대로 작품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그러나 무용수가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보았을 때 더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만약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이 공연이 재연된다면, 다른 방법으로 언어적 소통을 해결했으면 한다. 해당 작품이 만족스러웠다고 평가할 수 있는 만큼 소통 측면에서 나는 꽤 아쉬움을 느꼈다.

2. 10/02(일)
솔 댄스 컴퍼니 〈TOML(Time of My Life)〉
〈TOML〉은 시댄스 초청작의 마지막 공연으로, 진정한 폐막작이었다.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진행되었으며, 단차가 있고 무대와 좌석의 거리가 가까워 어느 자리에서도 무용 공연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공연장이었다. 따라서 해당 작품을 편안하게 관람하였다. 덧붙이면 역시나 무용 관련 인사가 다수로 보였다. 그러나 일반 관객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와 같이 무용 공연 초심자이거나 처음 무용을 관람한다면, 〈TOML〉은 적합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존재에 관한 이해가 계속된다고 느껴졌다. 그에 맞는 작품의 정체성이 짜임새 있게 이어지는 것이 좋은 부분이었다. 무용수들은 공연하며 계속 브이 사인을 한다. 브이는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하는 포즈 중 하나이다. 무용수들이 보인 브이 사인은 거울 혹은 사진 속에 있는 자신을 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램프를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램프는 자신과 서로를 이해하는 행동의 지속으로도 해석되었다.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그러나 주제를 관통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작품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요소는 무용수들의 움직이는 소리, 숨소리에 더하여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목소리를 내어 표현하다 그 목소리들이 화합을 이루기도 한다. 하모니를 이루던 목소리들은 불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홀로, 함께, 다르게 존재하는 것들의 인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메시지가 계속 이어지는 점이 좋았다. 공연 후반부에 도달하면 모든 무용수가 민무늬 흰색 자켓을 뒤집어 입는다. 뒤집어 입으며 민무늬와는 대비되는 화려한 무늬가 나온다. 그 무늬는 마치 다양성으로 환산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듯 다른 6명의 무용수가 가진 무늬 역시 다양한 자아의 공존으로 다가온다.


소견 ||

Club Guy & Roni – Freedom (09.17.토 20:00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단순히 무용수들의 움직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드로잉, 또 사운드 아트, 영상까지 볼 수 있는, 컨템퍼러리 예술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보며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신선함이었다. 9·11 테러로 인해 전 세계는 큰 아픔을 나눴다. 그러나 그후의 상황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면의 어두운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생각할 거리와 참상을 예술로서 전달하였다.
연출가의 고민과 다양한 도전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무용 공연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그에 어울리는 조명, 음악이 전부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달랐다.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 무대 감독은 무대 조형물뿐만이 아니라 무대 배경을 꽉 채울 정도로 큰 그림을 실시간으로 그렸다. 또 사운드 아티스트의 경우 무대의 상자 모양의 오브제를 이용해서 음악으로 사용했는데, 상자를 두드리거나 분필로 긁어 소리를 내었다. 단순히 소리를 낸 것이고 그림을 그렸을 뿐이지만 안무와 어우러지며 심리적으로 조여 오는 느낌을 낼 수 있었다. 또 상자 오브제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것이 그대로 노출 된 것 또한도 관객의 입장에서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그리고 사운드 아티스트가 하는 행동, 그린 그림, 무용수들의 행동, 무대 감독의 그림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의미 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연출가의 고민이 수많은 디테일로 담겨 있어 이것을 깨닫는 재미도 있었다. 또한 신선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영상자료와 내래이션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인데, 차마 움직임으로 표현하지 못한 정보들을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제공해주어 작품의 소재에 대해서 이해하기 쉬웠다. 그리고 이 점이 다른 무용의 작품들과는 매우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었다.
주제 또한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라 9·11 테러, 그리고 이후에 일어났던 한 가족의 비극에 대해서 누군가는 전달해야 했는데, 이를 뉴스, 다큐멘터리 등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무용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되어 오히려 더 관심이 가고 기억에 강하게 남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의 영향을 받아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작품의 내용을 온전히 다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
관객들과의 대화에서도 이 작품의 모든 구성원들이 작품의 소재인 모하메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친구로 지내고 있다는 말에 이 작품에 얼마나 진심으로 임하고 모하메두의 심정을 대변하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자리에서 마음 편히 질문하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진행자가 관객들이 궁금해할 것을 먼저 나서서 질문을 해주어 마음 편하게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소견 |||
9월 14일 자유소극장에서는 Sidance에서 초청된 세 작품이 진행되었다. 국내 초청작 육미영 안무가의 〈...hv lost...〉, 이스라엘 포커스로 샤하르 비냐미니의 〈진화〉, 휴먼필즈의 〈있어야 할 곳〉이 진행되었다. 시댄스의 취지에 맞게 다양한 색을 가진 안무가들의 세 작품을 한 무대에 볼 수 있어 관객으로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육미영 〈...hv lost...〉
작품의 첫 번째로 국내 초청된 육미영 안무가의 〈...hv lost...〉가 진행되었다. 작품 감상하고 난 후 국내 초청작품의 선정기준에 대한 과정에 의문이 생겼다. 해외의 손꼽히는 작품을 엄선하고 한 달여의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나열하는, 한국에서 무용 장르의 큰 축제 중 하나인 시댄스에서 국내 초청작품은 어떠한 기준으로 선별하였을까.
작품은 미디어를 사용하고 앉은뱅이 의자 그리고 튜튜의상을 입은 두 무용수의 듀엣이 연신 진행되나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못했다. 앉은뱅이 의자의 사용 이유를 작품에서 찾기 힘들었고 배경으로 비치는 미디어의 영상 또한 단조롭고 일차원적인 사용으로써 단순히 소비되었다고 느껴졌다. 이러한 맥락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연결되었다. 직접적인 대사를 사용한 안무가의 말도 맥락이 잡히지 않았고 두 무용수의 움직임 또한 계속해서 어긋나 보였다. 어긋나듯 맞추어지는 구성을 의도한 것인가 보다 하고 착각할 정도로 두 무용수의 움직임은 맞지 않았다. 보편적인 공연의 특성에 20분이라는 시간은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고 그 안에 여러 가지 요소들이 들어와 작품을 구성하였지만, 작품의 요지는 전달되지 않는 아쉬움 가득한 작품이었다.

샤하르 비냐미니 〈진화〉
샤하르 비냐미니의 작품 〈진화〉는 두 무용수의 집요한 움직임으로 진행된다. 샤하르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자주 접하면서 ‘집요함’과 ‘진득함’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온전히 표현한다면 저러한 움직임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나의 움직임 메소드를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무용수의 손끝, 발끝까지 뽑아내며 진행한다. 두 무용수의 움직임과 더불어 느껴지는 진한 호흡은 관객에게까지 전염되어 함께 호흡하게 되었다.
작품의 움직임 메소드가 어떠한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준비된 프로그램 북을 자세히 찾아보게 되었다. ‘서로를 이해하려 할 때 이들의 근육은 어떤 힘쓰는 상태를 겪게 된다. 각각의 힘과 개성을 통해 이들은 혼돈 속에서도 합일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이는 조화를 향한 이들의 노력과 분투이다.’ 단순히 두 무용수의 만남뿐 아니라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서 성장하고 이러한 만남의 상황에서 근육의 상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완성된 작품 〈진화〉는 춤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하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휴먼 필즈 〈있어야 할 곳〉
마지막 작품 휴먼 필즈의 〈있어야 할 곳〉은 세 무용수의 기분 좋은 트리오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조명이 켜지고 무용수들은 아주 편안하게 자신의 공간에 서서 한번의 호흡과 함께 시원시원한 움직임으로 관객들을 한순간에 작품으로 몰입시킨다. 작품에 대한 메시지와 의도, 구성 등 공연의 여러 요소를 차치하고서 단순히 무용수의 움직임만으로 관객으로서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공연은 정말 오랜만임과 동시에 무용에 대한 원초적인 향유에 대해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세 무용수 중 유일한 동양인인 ‘원진영’ 무용수의 매력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는데 신체 비율을 포함한 움직임 테크닉이 굉장히 휼룡하였고 무대에서 내뿜는 아우라가 상당히 이상적이었다. 세 무용수의 황홀한 움직임의 향연은 무대라는 공간을 차지하는 무용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다만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작품의 개념이다. 무용수의 움직임만으로 충분히 작품을 기분 좋게 감상한 후 작품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싶었으나 무대의 표면적 이미지가 강렬하게 다가온 본인에게 작품 내용에 대한 글들이 이해되지는 않았다. ‘변화 자체만이 영원한 것’ ‘존재하기란 영원한 생성이다’ 등 여러 수사학적 글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실제 작품에서 보이고 느껴지는 것과의 괴리가 글에 대한 반감을 품게 하기도 하였다.

슈테파니 티어쉬 〈무부아르〉
〈무부아르〉 작품을 9월 24일 저녁 8시 직접 극장에서 보기 전 사진과 홍보영상으로 극적인 무대연출에 대한 흥미를 자극했다. 신화적인 의상과 무대미술은 어떤 식으로 작품을 흘러가게 할지 상당히 기대되었다. 연극과 무용은 전달방식의 차이가 있으나 접점이 더 많은 장르이기에 이 두 장르의 융합은 안무가와 연출가분들의 시도가 그전에도 계속해서 발전되어왔다. 춤 작품에서 대사가 나온다는 것은 이제 크게 새로운 시도는 아니었지만 본 작품이 외국 안무가와 배우들이 나오기 때문에 언어전달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떠한 감정을 받을지가 이 작품을 보기 전 기대 자 걱정이었다. 극장의 구조상 자막의 위치는 영화처럼 장면과 자막을 동시에 볼 수 없고 그랬을 때 놓치는 관객들은 자막과 장면 중 시선을 선택해 한 요소를 놓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배우들이 내뱉는 대사들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보다 감정전달의 역할이 더욱 컸기 때문에 염려가 된 부분들이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작품이 시작되고 나서 나온 지역 노인 합창단분들이 한국어로 부르는 노랫말들은 작품이 시작되기 전 작품에 들어가는 초입을 유연하게 열어주었다. 또한, 동양의 노인분들과 상대적으로 젊은 서양 배우들이 한 무대에 있는 것이 신선한 장면들로 다가왔다.
상실과 죽음, 하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슈테파니의 이번 작품은 한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단순히 사람이라는 대상보다 만물의 생명 더 크게는 지구 전체의 한 부분들로 나아가 상실된 대상을 혹은 현상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 속에서 보이는 비통함과 슬픔, 고통 때로는 담담함 등의 감정들을 춤과 노래, 대사들로 전달한다. 특히 배우분들의 움직임과 대사, 노래에서 절절하게 나오는 감정들은 그 뜻을 명확하게 해석하지는 못하나 느껴지는 것은 명확했다. 5명의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배우들의 연기와 춤 그리고 소리의 표현은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였다.
작품을 본 후 읽은 프로그램 북에서 이 작품을 표현하는 한 문장이 나온다. “만일 ‘너’를 잃는다면.... 나는 그 상실을 애도할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나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너 없이, 나는 누구로서 ‘있다’는 말인가?” - 주디스 버틀러
어쩌면 이 문장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이 75분의 러닝타임동안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항상 한 대상과 연결되어있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환경, 생명, 또는 사회나 집단이 자신과 영원히 연결되는 경우는 대부분 없다. 또한 연결된 대상에 대한 애정이 존재의 길이를 연장해주지도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겪게 되는 상실에 대해 인지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 관계가 조금 더 성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소견 ||||

메테 잉바르첸 〈to come(extended)〉
9월 21일, 덴마크 안무가인 메테 잉바르첸(Mette Ingvartsen)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작품 〈to come(exteded)〉을 올렸다. 이 공연은 14명의 출연진이 작품 초·중반부에 인간의 성행위를 묘사하고 후반부에 스윙 댄스를 추어 약 한 시간 동안 전개됐다. 모두 3장으로 구성된 작품은 성(sex)과 춤의 조화를 원초적인 신체 움직임을 통해 유쾌한 감정으로 표현하며 활력이 넘쳤다. 작품 제목처럼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시공간적 흐름은 개인의 욕망이 타인과 소통을 통해 사회적 금기를 허물며 삶의 본질을 상기시킨 듯했다.
하얀 무대 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푸른 타이츠로 몸을 감싼 공연자들이 등장했다. 성별이나 인종, 나이 등을 알 수 없는 통일된 모습은 문화적 산물인 인간의 의식 혹은 무의식에 내재한 선입견과 편견을 해제하려는 의도인 듯했다. 기괴한 인상에서 시작된 1장은 공연자들이 서로의 성감대를 포착하기 위해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이거나 정지하며 집단 난교를 형상화했다. 약 30분 동안 무음으로 전개된 움직임에서 종종 나타난 코믹한 동작들은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전개에 감초 역할을 했다. 가시적인 움직임은 이질적인 첫 이미지에서 점차 관객의 이해를 도우며 몰입도를 높였고 기묘한 장면들은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며 향후 전개에 궁금증을 자아냈다.
빠른 리듬이 흐르는 어스름해진 무대 위로 공연자들이 흰 양말과 흰 운동화만을 착용한 채 나체로 등장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객석 정면을 향해 선 공연자들은 희미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점차 격정적인 호흡과 표정이 결부되어 그들 자신의 고유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소리는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로 수렴되었고 2장 초반부에 다소 당혹스러운 분위기를 편안한 분위기로 전환시켰다. 사적 공간에서의 모습과 행위를 공적 공간에서 다루며 인식의 분리를 해제하고, 관객이 느끼는 이질감과 익숙함을 외줄 타듯이 오가면서 인간의 은폐된 욕망을 드러내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1장과 대비되는 공연자들의 모습은 개별 특성을 드러내고 차이에서 촉발된 다양성을 무기로 초반에는 긴장감을, 후반에는 기묘한 쾌감을 부여했다.
마지막 장은 공연자들의 스윙 댄스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시각과 청각, 촉각의 절묘한 자극이 춤추는 이들뿐만 아니라 보는 이들도 동화되어 함께 춤추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웃으며 움직이는 모습은 내부 관계 속 권력의 위계를 와해하고 외부의 시선 권력에서도 해방된 기분을 선사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공연자들 즉, 개체별 단독성이 기존의 성과 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 인간적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이었다. 반면 복잡하고 난해하며 심오한 타 무용 작품이 왜곡된 권위를 통해 수용자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표현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놀이적 성격이 두드러졌던 만큼 관객도 예술작품을 수용하고 향유하는데도 무리가 없었다고 본다. 춤의 본질을 상기시켰던 이 작품은 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가 기획한 ‘춤에게 바치는 춤들’이라는 기획 의도에 부합했다고 판단된다. 일정한 구조 속에서 잠식되어가던 춤의 본질을 독특한 표현으로 재구성하여 예술적 표현 및 소통 방식에 낯선 화두를 던진 선두적인 작품이라 사료된다.

조나스 & 란더 〈바트 파두〉(BATE FADO)
조나스 & 란더는 9월 26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바트 파두’를 선보였다. 파두는 포르투갈에서 비롯된 음악 장르로, 본래는 노래와 춤이 함께였으나 점차 노래 위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무용수와 연주자 8명이 출연한 본 공연에서는 춤과 음악이 함께 공연되었고 목소리와 기타 연주에 탭댄스를 접목시켜 박진감 넘치는 무대를 선보였다. 인터미션 없이 110분 동안 진행되었음에도 관객의 시선을 끌었던 자유로운 무대 구성과 전개 방식, 애환과 유머로 점철된 작품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막이 열리고 무대 위 중앙에 육각형의 구조물이, 무대 하수에는 십자가 모양의 큰 소품이 세워져 있었다. 이후 네 명의 기타 연주자가 무대 중앙에 들어서서 원을 그리며 파두를 연주하였고 발을 구르며 구호를 외쳤다. 공연 후반에는 누워서 연주하거나 머리 위에서 연주하는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되 흔들림 없는 연주로 관객의 흥을 돋우었다. 한편 무용수들은 기타리스트들의 연주 이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연 초반에는 가볍게 발을 구르며 움직였고 점차 복잡한 리듬의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상체 움직임이 거의 없었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추기도 하였다. 아울러 남성 보컬은 이야기가 전환될 때마다 서두에 등장하여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각 장에 상징적인 메시지를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잔잔한 흐름 속에서 관객에게 주요 장면들을 각인시키며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막이 내린 이후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자 출연진모두가 재등장해서 파두 한 곡을 앵콜 곡으로 불러주었다. 순수한 열정과 진중한 자세에 깊이 감명받았던 순간이었다. 반면 아쉬운 점은 공연이 통일된 형태로 전개되어 각 장의 구분이 불분명해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음악과 춤의 세세한 표현과 부분적으로 돋보이는 유머러스한 장면들은 시청각적 즐거움은 더했으나, 내용을 유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2022.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