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박진미 〈또 다른 시작〉
춤의 가능성에 춤(삶)을 내던지다
권옥희_춤비평가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드라.
     ...(중략)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 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하면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
-단가 〈사철가〉 중-


봄이다, 시작하기 좋은.
박진미의 〈또 다른 시작〉(3월 19일, 봉산문화회관 가온홀)을 본다. ‘또 다른 시작’이라. 팸플릿의 이력을 보니 안무자(박진미)는 창원시립무용단(1988~2008,부수석)을 거쳐 독립무용가(120여회의 공연)로, 그리고 2015년부터 〈량Ⅳ〉 〈무애앵〉 〈달구벌 打, 짓...박진미 2019〉등 10여 편의 안무작에 이르기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은 열정과 그 이력이 숨차다. 그런데 왜 ‘또 다른’ 시작일까.

시놉시스는 팬데믹, 우울, 불안에 맞서 “치열하고 격렬하게 저항하고 삶에 몸부림치는 도시 대구”에서 무용가(안무가)로 살아남는(?) 이야기다. 시력을 잃어가는 무용수의 설정은 끝이(앞이) 보이지 않는 팬데믹 상황의 은유로 읽히나(내홍을 입은 것일 수도), 동료들과 함께 하는 추억(춤)여행으로 시력과 몸(춤)의 기억이 회복되고, 춤으로 다시 ‘반전의 서막’을 연다는 순진하고 단순한 설정은 슬프다.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도, 끝내 정리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하여 여전히 우리는 불행한데.




박진미 〈또 다른 시작〉




어쩌면 안무자(박진미)는 자신이 꾸었거나 꾸고 있는 춤의 미래에 관해서가 아니라 꾸어야 할 춤의 미래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자신처럼(?) 춤추는 이들이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신의를 통과한 동료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춤을 춘다는 설정을 미리 만들어놓고 그 희망에 따라 춤의 미래를 설계한 것일지도. 그렇다면 또 다른 춤의 시작으로 여는 ‘반전의 서막’보다 ‘의리’와 신의로 꾸는 춤 이야기가 먼저 만들어지는 이 초긍정(순진한)의 결말을 가진 춤을 춤의 시나리오라 부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 〈또 다른 시작〉으로 ‘반전의 서막’을 열겠다는 안무자가 열망한 춤의 미래는 때때로 (춤)현실과 불화한 그에게 위안이자 피난지였을지도. 아마도 ‘반전’의 시간을 바라며 춤을 추는 매 순간 정신을 가다듬으며 춤을 추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시간을 견뎌내고 다시 무대에 선 것처럼 이제 안무자에게 춤 선택에 대한 더 이상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박진미 〈또 다른 시작〉




춤은 총 4장으로, 1장 ‘어두운 공간’은 ‘삶의 속도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려낸다. 검정색 바지에 오버사이즈 재킷을 입은 무용수들이 등을 구부린 구부정한 자세로 서로의 길을 막아서는가 하면, 눈과 입을 가리고 무대 바닥을 살피는 움직임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어두운 상황’을 그려내고자 한 의도로 읽혔으나, ‘삶의 속도’를 채 그려내지 못해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2장, 가야금(오혜영)과 기타(김마스타)가 무대 양쪽에 배치되고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박진미(안무자)가 가운데 서며 시작되는 춤. 박진미는 한국 춤(몸)이 몸(춤)의 기반이다. 마치 고통을 삼키고 있는 듯, 추는 듯 추지 않는 듯한 움직임은 더 이상 지켜야 할 춤도 추어낼 춤도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고요하게 이어지던 춤은 이내 손으로 눈을 가리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누워 발로 바닥을 문지르고 밀어낸다. 절망을 안은 듯한 춤과 상반된, 그가 입은 붉은색 드레스는 어떤 새로운 삶(춤)의 징후와 혹은 꿈과 예감의 가능성을 향해 열어놓은 열망으로 읽힌다. 군무진이 합류, 같이 추는 회상의 춤은 추억(춤)으로 용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쟁과 아코디언 연주로 삶을 몰아대던 온갖 압박과 재촉이 느슨해지는 그 자리에 생명력으로 채워지는 춤의 회복을 꿈꿨으나, 의상의 낡은 시간(60~70년대)과 온갖 춤의(함부로 배치한 듯한)범람이 이를 방해한다.




박진미 〈또 다른 시작〉




3장, ‘몸의 기억’, 권준철의 솔로에 이어 권준철이 박진미를 안아들고 시작된 듀오. 안아들었던 박진미를 무대에 내려놓자 스르륵 내려앉는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업기를 반복한다. 열정과 회한과 실망과 나머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 먼지처럼 삭아져 내리는 듯한 춤(꿈)을 끝없이 일으켜 세우는 권준철은 박진미의 또 다른 자아이거나 동료애(?)로 읽히기도 하나, 춤(몸)은 불분명하고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추는 몸과 화해하기 위해 춤에 더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권준철과 박진미의 솔로는 마치 제 마음속에 스러져 있던 춤의 기억, 희망들을 곧추세우려 애쓰는 춤이었다. 아쉬웠던 듀오. 듀오는 서로의 춤 감정을 오래 꿰뚫어 자극하고 정신을 살릴 시간을 확보해야만 서로가 꾸는 다른 시간의 꿈을 춤으로 재현할 수 있다.

4장, ‘반전의 서막’. 검정색 의상, 겉옷으로 얇고 가벼운 흰색 장삼을 날리며 추는 군무는 한국적 정서가 깔린 춤으로, 안무자의 특유의 흥과 열기가 잠깐 피어올랐다. 바닥에 누워 구르는 군무진의 몸(춤)을 건너오는 박진미의 머뭇거림도 망설임도 없는 단호하게 내딛는 춤은 춤의 가능성에 안무자의 미래를 건 것으로, 발아래 현실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 구르는 무용수들의 시간과 자신의 춤 자리를 수차례 바꾸며 천천히 무대 중앙에 단단하게 선다. 뜻하지 않았던 자리에서 얻어낸 은유들로, 온몸으로 춤의 감정을 세워 올린 힘 있는 장이었다.






박진미 〈또 다른 시작〉




박진미의 〈또 다른 시작〉은 자신(안무자)이 만든 ‘삶의 속도’에 ‘시력을 잃어’가는 이의 자기 성찰로, 눈 감고 싶은 현실(춤)에 대한 분노와 자각으로 읽히는 작품이었다. 중요한 것은 ‘시작’은 성찰과 자각, 거기에서만 시작된다는 것. 그것도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또 다른 시작〉이 작품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제 안무가로 ‘반전’을 도모하였으니, 도약하는 일만 남았다.

슬픈 것은, 미래를 바라고 도모하였다고 해서 당장 다른 춤(삶)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 고생 또한 이어질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껏(49세) 춤만 춰온 이에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서두른다고 반드시 멀리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도시 대구’에서 무용가로서 강요된 제도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것. 춤 시간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무용가로서의 조건을 자각하고 춤추는 존재 그 자체로만 남는 것. 잊지 말았으면.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 ​ ​ ​​​​​​​​

2022. 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