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춤 전공 청소년을 위한…

〈춤웹진〉은 내일의 춤 현장에서 창의적 무용인으로 활동하기를 꿈꾸는 청소년들을 위해 청소년기부터 춤을 전공한 젊은 무용인들의 목소리를 소개한다. 청소년기가 예술의 세계를 자기 나름대로 시작하고 준비하는 시기이다시피, 청소년기에 접할 자극과 조언, 학습은 장래 활동에 바탕을 이룬다. 지금의 청소년들의 바로 윗세대로서 젊은 무용인들이 자신의 청소년기 체험과 갈등과 추억을 토대로 소망하는 바가 오늘 청소년들에게 소중한 참고가 되기를 기대한다. - 편집자




내가 갖추고 싶었던 것들

 

 

청소년기에 춤을 익히고
대학원에서 책 읽는 20대

 

나의 꿈과 적성에 맞는 직업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으며 춤에 입문한 것은 아니었다. 춤추는 사람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이끌림이 시작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현대무용을 취미로 즐기다가 고교 입학과 동시에 대입을 목표로 춤을 배우면서 환상이 무너졌다. 대학 입시 시험에 특화된 교육을 통해 넘어야 할 큰 문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 입학시험은 대부분 실기 평가로 진행되며, 오로지 움직임 기량을 인정받아야 희망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입시와 직결되는 교육은 무용수 양성을 위한 시스템으로 획일화되어 있다. 특히 시각적 평가가 크게 작용하다 보니 유연성, 키, 체중, 발등 등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체조건이 요구될 수밖에 없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혹독한 노력과 관리가 필요했다. 움직임 역시 기술과 기능적 확장이 우선시 되었고, 청소년 시기의 나는 입시에서 요구하는 춤 양식을 체화시켜야만 했다.
 서울에 소재한 대학 요강을 보면 대부분 학교는 필수적으로 2분~3분 이내의 개인 작품을, 때에 따라 진공기초 따라하기와 부전공 작품을 보게 된다. 다년간 쌓은 피나는 노력이 단 몇 분 안에 판가름 나는 것이다. 또한 수시를 통해 학생을 선발하는 추세여서 수능 시험을 치르지 않으며 마치 기계처럼 작품의 동작만을 무한 반복하는 데 큰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강한 이끌림으로 시작한 춤은 그저 대입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었고, 이러한 시스템에 염증을 느끼면서 나는 큰 슬럼프에 빠졌다. 무용수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님을 깨달고 춤과 관련한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지만,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모색함에 있어서도 혼자 힘으로는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그럼에도 주변 지인과 선생님,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지 못한 것에 후회가 남는다. 무엇보다도 청소년 시기에 춤 전공 학생들이 타인에게 조언을 구하기 전에 스스로 학습하려는 의욕을 충족시킬 마땅한 책이나 정보 경로가 없었던 것은 나로서는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청소년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 스스로 실천하고 싶은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째, 자신만의 움직임 어법을 개발하기 위해 즉흥 경험을 쌓는 것을 추천한다. 즉흥은 외부 자극에 감각적,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표현력을 개발하고 움직임의 다양성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입시제도에 갇힌 획일적 움직임 속에서는 자신만의 색깔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는 선생님 또는 타인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며 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몸을 탐구하고 움직임을 연구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기존에 사용하는 움직임 패턴을 변형시키거나 입시 작품 때 사용하는 음악, 클래식, 한정적인 음악 장르에서 벗어나 즐겨듣는 대중가요, 랩, 팝 등에 맞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보는 것을 추천한다. 주어진 틀이 없기에 처음에는 낯설 수 있지만, 두려움을 깨고 지속적으로 훈련한다면 움직임의 어휘를 확장, 스타일을 구축하는데 큰 도움일 될 것이다.
 둘째, 글쓰기와 말하기를 가까이하라. 춤 활동을 하다 보면 타인에게 논리적으로 생각을 설명, 전달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특히 안무가에게는 작품을 소개하는 글 또는 지원서를 작성할 때 글쓰기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자신의 사고를 문장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능력은 청소년기부터 쌓을수록 바람직스럽다고 본다.
 2019년 서울무용센터에서 주최한 서울국제안무워크숍 시리즈 ‘글로 완성하는 안무’ 프로그램 중 ‘감각을 언어화 하는 방법’ 워크숍에서 작가는 감정, 감각, 생각, 느낌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기에 자신의 감각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이를 타인에게 말할 수 있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예술에서 영감을 받을 때 이 감각의 언어화를 위하는 순간 단순화되기 때문에 감각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표현할 방법을 모색할 것을 강조하려고 한다.1) 이를 위해 다독(多讀)하며 단어를 체득해야만 한다.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을 확장한다면 더욱 선명하게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첫 시도가 어렵다면 단순하게 주위를 바라보며 사색하는 시간을 갖고, 관찰을 통해 느껴지는 심상을 문장으로 작성해보는 습관을 추천한다.
 셋째, 청소년 시기에도 춤과 인접 예술 분야의 사조와 흐름을 습득하고 감각을 키워라. 이제 컨템퍼러리 댄스는 하나의 양식으로 규정짓기 어려워졌다. 미술, 연극, 음악, 춤 장르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테크닉 위주의 춤뿐 아니라 개념 위주의 작업, 퍼포먼스, 커뮤니티댄스, 장소특정적 춤 등 다양한 양식의 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술 경향과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어떻게 예술이 전개되었는지 그 맥락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책 공부를 통해 역사를 단순히 익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춤에 접목시킬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작품 관람은 춤계의 흐름과 동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무대춤에 한정 짓지 않고 미술관, 공공장소, 도시 곳곳 등 다양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공연 관람을 할 것을 추천한다. 관람을 통해 다양한 스타일을 접하고, 생각을 구축하면서 자기가 추구하는 춤을 탐색해봐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이론이 밑받침된 상태에서 춤에 접근한다면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세 가지 조언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절실하게 느꼈던 것들이다. 어떤 이는 공감으로 할 수도 있고 또는 자극받아 소소하게 실천할지도 모르겠다. 미래는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들여다볼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 수 있지만, 결코 모든 순간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힘들지라도 청소년기에 쌓은 노력이 언젠간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올 거란 희망을 간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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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choomin.sfac.or.kr/zoom/zoom_view.asp?type=IN&zom_idx=506&div=01 




ⓒ영화 〈빌리 엘리어트〉





정답 없는 취향을 찾아서

여전히 춤추고 배우는 게 신기한 20대


제가 만약 과거로 돌아가 입시를 하던 청소년기의 저를 만날 수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바로 “취향이라는 것은 있지만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를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던 이유는 이 말이 춤에도, 더 나아가 모든 예술과 어쩌면 여정이라 말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있습니다.
 우선,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은 눈에 보이는 신체로 작품이든 각 대학의 따라하기를 수행하기 급급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래서 저에게는 다이어트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고 작품과 따라하기를 완벽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연습을 하는데 음악이 너무 지겨운 거에요. 똑같은 음악을 매일 몇 주 몇 달을 들으니 질려서 다른 음악에다 작품 연습을 해보았어요. 그 당시에 제 작품음악은 빠르고 기계음이 들어갔는데 질린다는 이유로 다른 음악을 틀었는데 첼로 선율에 서정적이고 느린 음악이었어요. 그런데 바뀐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본래 음악 박자에 맞춘 움직임으로 똑같이 춤을 추는 거에요. 그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는데 너무 이질적이고 이상했던 거 있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실수 없이 움직였지만 너무 이상한데, 음악이랑 내 움직임이 너무 이질적이라서 이상한가? 도대체 춤을 잘 추는 게 뭘까?” 난 분명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움직였는데 그것을 다 지켜서 춤을 추면 잘 추는 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아닌 것이었어요. 그 후로 첼로 음악에 맞춰서 계속 연습해보았어요. 신기하게도 음악에 맞춰서 몸의 리듬감과 박자가 달라지는 거에요. 그렇게 달라지는 제 모습이 맘에 들어, 그 후로부터 작품을 매일 다른 음악에 맞춰서 연습했어요. 점점 작품의 움직임조차 지겨워서 조금씩 제 입맛대로 바꿔보고, 나중에는 연습실에서 작품의 순서조차 하지 않고 매일 다른 음악에 제 마음대로 움직였어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게 즉흥이었어요. 이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고, 전 선생님이 짜주신 빠르고 날카로운 움직임을 제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분절이나 박자를 쪼개는 움직임도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구요. 이제는 그런 움직임을 잘한다고 말하게 되었어요.
 서론이 길었죠. 입시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이 곧 율법이고 인생의 나침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러지 마세요. 선생님이 추는 춤이 아니라 나 본인이 추는 춤이잖아요. 어떻게 움직임의 질감이 변할지 모르는데 정답을 찾지 마세요. 애초에 정답조차 없던 거였어요. 각자의 취향이 존재할 뿐이에요. 대신 너무 편협한 시선으로 자기 취향이 아닌 움직임을 배척하진 마세요.
 청소년기 이후 저는 흔히 ‘무용계’라 하는 곳을 벗어난 경험이 있어요. 그때 당시에는 무용사나 무용 이론, 예술사 등을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저에게 생겼어요. 예술사를 배우고 공부하다 보니 미술과 음악, 무용이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어요. 유명한 드가의 발레 그림을 보면 그때 고전주의 발레가 활발하게 성장하던 시기였던 것처럼, 머스 커닝햄이 4분 33초 동안 무대에서 연주를 하지 않은 존 케이지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고 협업한 것처럼, 미술과 음악, 무용은 밀접하다는 것을 자각한 거죠.
 이를 깨달았던 그 당시에 저는 리플렛(전단)을 읽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난해한 무용공연보다 전시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 전시회에서 무용수들이 춤을 추더라구요. 흔히 우리가 접하는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닌 전시회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전시회에서 움직이는 무용수들이 하나의 전시 작품이 될 수 있으며, 혹은 전시회 전체가 하나의 큰 캔버스라면 개개인의 무용수들은 다양한 재료가 될 수 있구나”였습니다. 그 후로 특정 공간 무용공연을 관람하게 되었고 특정 공간 전체의 디자인 등을 관심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질문을 하진 않았으나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가 예상했던 답과 다른 지점을 발견했고 작가의 충분히 타당한 답변을 들으며 이렇게 각자의 생각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관객들이 다면적으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관객들에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직설적이게 보여주는 것이 달리 보면 좋은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고 오히려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하되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이유로 다면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를 시도할 때 생각의 범위가 너무 좁다는 것을 느꼈고, 생각하는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를 많이 하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넓어질 것 같아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실천했던 방법 중 하나는 모든 것을 여러 번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사람들은 왜 MBTI를 좋아할까?’ 이런 사소한 것입니다. 이건 그저 제 피셜이지만, 사람은 사실 타인에 의해 성격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남자가 좀 더 세심한 것처럼요. 사실 그 남자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체화된 거죠. 이렇듯,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내가 ‘가끔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겠는 나’를 직면하죠. 이를 직면하게 되면 사람들은 되려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이 상황이 두렵고 마치 돌연변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MBTI가 나온 순간, 친절히 16개의 유형으로 분류해주며 그 내용마저 공감이 되기 때문에 MBTI를 맹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람은 자유를 원하지만 어느 정도의 안정감 또한 원하기 때문에 현재처럼 살 수 있는 자유에 더해 ‘MBTI’라는 틀이 주는 안정감이 있어서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MBTI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부터 ‘왜?’로 출발하여 생각하고 혼자서 대답하며 저 혼자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길렀어요. 그러다 보니, 가끔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때가 있어 텍스트로 적어서 생각했어요. 이를 반복하다 보니, 제 생각을 글로 쓰는 행위 자체가 저에게는 습관이 되었어요. 그저 사소한 습관이라고 여겼던 것이 작품을 감상하고 쓰는 감상문을 편하게 적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러한 저의 특징을 아는 지인은 나중에 평론가로 활동해보는 제안을 했는데, 당시에 저는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가끔 진지하게 고민도 해요. 제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을 춤을 추는 데 느끼는 재미처럼 느끼는데, 이 역시 천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이렇게 장황하게 말한 까닭은 사실 저는 춤을 추는 댄서만이 저에게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저의 소소한 취미가 연결되어 이렇게 지금 저의 사소한 이야기들로 글을 쓰는 것처럼 시간을 갖고 보내는 어떠한 것들은 절대 바닥에 버려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청소년기에도 이것저것 고루 시도해보세요. 다 지양분이 되기 마련이니 스스로에게 정해진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장 눈앞에 닥친 입시가 인생을 좌지우지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좋은 대학에 입학해 공연에 출연하는 게 행복한 삶인지 아닌지, 사실 그것은 아무도 재단할 수 없어요.
 지금 입시를 준비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은 하루하루를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어떠한 형태로 만들어질 거에요. 대신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이것은 당부 드리고 싶네요. 정답이 없으므로 청소년기 때부터 자신의 답을 찾으려 하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영화 〈댄싱 드림즈〉





내가 해야 했을 두 가지

 

춤을 추고 싶어서 일어났다가
10분 뒤에 퍼져 있는 20대

 

먼저 글 제목의 동사는 ‘해야 했을’이다. 이미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청소년 시기에 내가 미리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두 가지를 소개하는 글이다. 바꿔 말하면 이 두 가지를 하지 않았더라도 인생에 큰 비극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일찍이 했었더라면 나는 더욱 중요한 변곡점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청소년 시기에 이 두 가지를 시작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 나의 ‘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 글을 읽은 뒤 한번 시작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의 청소년은 다른 나라의 청소년들과는 확연히 다른 시기를 보낸다. 다른 나라보다 훨씬 치열하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계통을 전공하는 청소년들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비전공생들보다 더 치열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입시생이라는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이 시절의 노력은 아주 선명한 결과로써 끝이 난다. 그러기에 한편으로 잔인하다는 생각도 든다. 모두를 태울 수 없는 배라는 것을 알지만 맹목적인 목표만을 보고 달린들 그 결과는 누가 보장할까. 그렇기에 더욱 더 치열하고 절박하게 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어쭙잖은 위로나 기분 좋을 말들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독한 충고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지나간 이 시기를 반추해 보았을 때, 목표를 넘어선 나의 모습만을 상상하면서 정작 어느 레일 위에 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런 나에게 전달하는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내가 물어봤어야 할 질문

입시와 관련된 이야기는 고사하고 이 시기에 청소년이던 내가 무엇을 찾아야 했는지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예술이라는 거대한 자신만의 단원의 시작점에서 나는 무엇을 찾았어야 할까. ‘무용’이란 장르를 선택하였다면 무엇을 위해 혹은 무엇을 하려고 내가 움직이고 있는지 계속해서 찾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는 춤을 관둘 때까지 짊어져야 할 물음들일 것이다. 어찌 보면 하나의 진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진리라는 단어가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냥 단순히 이유를 찾는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춤을 추고 하나의 공연에 참여한들, 혹은 창작의 과정을 지나온들 우리는 실질적인 물건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사용할 수 있는 볼펜 한 자루도 못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볼펜 한 자루를 만드는 노동의 가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다들 땀 흘리며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실용적인 물건 하나도 못 만들면서 무엇 때문에 지금 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진다는 행위이다. 답을 찾기 위한 문제이기보다 좋은 질문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시기와 주변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답이 바뀔 수 있으며 오히려 성급하게 설정한 답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할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질문을 찾고 던지는 행위에 몰두해야 한다.

내가 찾았어야 할 취향

취향을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청소년기에는 아무래도 입시에만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어떤 것을 하기 위해 대학을 가려는지 하는 물음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눈앞의 목표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목표에만 집중하는 것도 어마어마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고 그것만으로도 성장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찾는 과정도 아주 중요하다. 이를 등한시하게 되면 원하던 곳이든 원치 않던 곳이든 기간이 지나고 난 뒤 쉽게 길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막다른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헤매던 순간들이 있다. 이러한 경험 탓에 결국 누구에게 더욱 기대게 되고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쉽게 다른 변화를 찾는 것은 임시방편밖에 되지 못한다. 결국은 또다시 헤매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단단하게 자신을 만들어가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을 때 가장 쉽고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취향을 찾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누군가가 잘 쓰기 위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예술 활동은 자신에게 맞는, 자신이 표현하려는 욕구를 가감 없이 보이는 데에 있다. 이 취향을 찾는 것은 결국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표현할 것인지를 찾아주는 시초가 되기도 한다. 그럼 이 취향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먼저 제안하는 것은 청소년기부터 많은 작품을 보는 것이다. 누군가의 추천이어도 좋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안무가의 작품이어도 좋다. 또는 현재 가장 주목 받는 안무가의 작품들도 있다. 당연히 공연장에서 직접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상황상 대안적인 방법들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인터넷과 SNS, 유튜브, 비메오 등 다양한 영상 플랫폼, 소셜 네트워크가 있어서 조금만 노력을 한다면 원하는 작품의 영상을 무료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는 입시와 관련된 작품이나 단순히 지인이 등장 혹은 안무한 작품은 배제하는 것을 권하겠다. 오로지 내가 선택하고 궁금했던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또한 작품 일부분만 편집된 클립 영상보다는 전체를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면 쉽게 개인적인 좋음과 싫음이 판가름 날것이다. 순전히 단편적인 취향은 내가 굳이 내 감상을 파고들려고 하지 않아도 바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어느 작품을 향한 나의 좋고 싫음에 대한 자세한 이유를 분석해 보는 것이다. 이 작품이 나는 좋은데 무엇이 나의 좋음을 드러내게 하였는가. 이 작품이 나는 싫은데 무엇이 나를 불쾌하게 하고 혹은 좋지 않다고 판정하게 하는가.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을 찾을 때는 그 작가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 어떤 비평가보다 독하게 작품을 관찰하여도 된다. 왜냐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나는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단순한 관객으로 작품을 감상하였다면 어떤 좋고 싫음 혹은 다른 표면적인 감정만을 느낌으로써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해나갈 장르에 관련된 일이라면 이다음 단계가 분명히 필요하다. 이 작품은 왜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을까. 이 과정에서 개인의 취향을 분명히 할 수 있다. 내가 선호하는 방향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의 감상을 쉽게 풀어내지 못할 때가 있고 익숙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작품에 대한 조사를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작품에 대해 여러 정보와 글, 인터뷰를 한번 보고 혹은 누군가의 비평문이나 감상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서 자기 생각을 짜 맞추는 과정을 지속해서 하다 보면 점점 파악하기가 수월해질 수 있다.
 좋고 싫으므로 감상을 끝내는 것의 아쉬움은 이 두 단어는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김영하 작가는 수업 전에 학생들에게 하나의 제안을 한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짜증나’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짜증나’ 안에는 무수한 단어들이 뭉개져 있다. 화난다, 불쾌하다, 아프다, 슬프다. 등등 분명한 감정의 정의가 있음에도 짜증이라는 단어로 뭉개어 표현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정확한 단어가 있을 것이고 이를 기록해야만 자신의 취향을 명확하게 만들 수 있다.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감정, 감상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취향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데 있어서 두려움을 가져서도 안 된다. 이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그러니 편한 마음으로 모든 작품을 자신의 느낌대로 정리해보아야 한다.
 두 가지의 행동은 청소년 시기나 춤을 시작할 때 꼭 해야 할 필수적인 노력은 아니다. 언젠가 스스로 하게 될 수도 있고 지금은 너무 바쁘거나 몰입할 수 없어서 미뤄두어도 괜찮다. 그러나 일찍 할수록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었다면 그 시기가 언제라도 당장 시도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시도한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을 줄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영화 〈분홍신〉





18살에 만난 나, 그리고 춤

 

비상한 재주로 사람을 홀리는 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30대

 

나는 춤을 만들고 추고 있다. 현대무용을 시작하게 된 것은 춤을 만들면서 춤이 무언가가 될 수 있고, 춤을 추면서 춤 안에 온전히 있을 수 있겠다는 발견에서였다. 그때, 우연히, 때마침 이 흥미로운 지점을 알게 해준 한 현대무용가의 무용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현대무용을 끝내 몰랐거나 혹은 더 늦게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TV에서 만난 그 현대무용가는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지만, 무용수의 반복되는 춤을 조금씩 변형해나가고 꾸준히 새롭게 바라보며 춤이 내포한 이야기를 더욱 확장시키는 듯했다.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나는 무작정 동네 무용학원을 찾아갔다.
 현대무용을 시작하게 된 것은 18살, 그해 늦은 여름이었다.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나의 삶은 18살을 기준으로 전과 후의 삶이 동전의 양면처럼 나뉜다. 무용을 시작하기 전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몸이 많이 아팠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많은 선생님들께 우울해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학교에 있는 시간 동안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지,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알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음에 좌절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기력해 보였을지 몰라도, 마음은 늘 화가 끓어 넘쳤다. 아침 자율학습 시간에 책을 읽는다며 자로 손등을 때리고, 급식비를 내지 못해 행정일이 진행이 안된다며 온갖 짜증을 내는 어른들이 미워 부모님께 자퇴를 하겠다고 떼를 쓰곤 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편안한 일은 도서관의 구석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무엇이 내 마음에 남는지 되돌아보지 않고 그저 읽는 행위에만 집중했다. 책을 읽는 것이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은 나를 바라보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반복적으로 읽는 행위를 거듭하며 어느 날 생긴 습관은 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나 자신과의 대화에서 사랑과 용기를 주고받는 데 좋은 거름이 되어주었다.
 밤 9시가 넘는 시간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위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고, 하고 싶은 것은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대학교는 일단 가야 한다고 수능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주변 어른들의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내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가에 가만히 집중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들여다보자 내 삶의 방향이 조금씩 틀어가고, 잡혀가고 있음을 느꼈다.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운이 좋았던 것인지 이야기를 글로 쓰고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던 내게 춤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현대무용가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보여졌고,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서 현대무용을 만나게 되었다. 18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간다는 느낌이 행복했다. 몸이 아프지 않았고, 전보다는 자주 웃게 되었다.
 대구가 고향이던 나는, 무용학원의 선생님들께 늦게 시작한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가려면 무조건 욕심을 가져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한 가지를 오랫동안 해도 질리지 않는 것을 나의 유한한 인생에서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오늘 춤출 수 있는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고자 했던 대학교를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사실 그리 슬프지 않았다. 춤을 시작하고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안도하는 내게 춤은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동료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늘 고난은 있지만 춤으로 만난 좋은 사람들 덕분에 대게는 즐겁게, 기쁘게 춤을 만들고 추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무엇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 모를 때가 가끔 찾아온다. 그러면 18살 춤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나를 만나려고 한다. 아무것도 찾지 않아도 그리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늘 내가 괜찮은지 스스로에게 묻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믿었던 18살을 기억하려 한다. 내가 나를 만난 청소년 시절 그때가 나에게는 전환점이었다.

2021. 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