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4 무용 창작산실 공연 총평
명철한 주제의식, 레퍼토리화가 과제
방희망_춤비평가

 2014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예진흥기금으로 운영하게 된 무용창작산실 지원사업은 5월에 시범공연으로 19개 팀을 지정하여 각 1,500만원을 지원하였고, 7월의 쇼케이스를 거쳐 우수작품 제작지원에 최종 선정된 10개 팀 중 9개 팀이 공연을 올리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공연은 12월 12일부터 3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ㆍ소극장에서 진행되었다.
 올해의 특징은 대극장 부문과 소극장 부문을 구분하여 참가신청을 받은 뒤 심사해 선정했다는 것인데,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면 대극장 부문에는 각 5천만 원, 소극장 부문에는 각 2천만 원의 제작 예산이 지원되었다.
 이경옥무용단, 트러스트무용단, 서울발레시어터, 김선미무용단, 이렇게 네 단체가 대극장 부문에 선정되어 이틀 셋업에 하루 공연하는 방식으로 80여분 길이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소극장 부문에 선정된 정현진의 Company J는 김남진의 댄스씨어터 창과 함께, 안무가 김경영의 작품은 박나훈무용단과 함께 이틀씩 공연하였다. 역시 소극장부문에 해당하는 김설진과 남현우의 공동 안무작은 50분짜리 작품으로 이틀 동안 무대에 올랐다.




 이경옥무용단의 <심청>(안무 이경옥, 12월 12일)은 너무나 익숙해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고전에서 심청과 심봉사의 어두운 심리를 끄집어내어 변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심청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마련해 놓은 순정한 효녀여서가 아니라 이제 그만 암담한 운명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에 심연으로 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안무가의 그런 관점은 막이 오르자마자 심청이 수면 아래에서 유영하는 플라잉퍼포먼스를 제시한 데서 드러났다. 좀 더 과감하게 풍덩 가라앉는 동작을 구사했더라면 기왕 천장부터 마련한 깊이를 제대로 활용해 구현하게 되었겠는데, 유영하는 ‘그림’으로 머물렀다. 그래도 긴 지느러미를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팔다리를 하늘거리는 모습은 심청에겐 시끄러운 바깥세상보다 고요하고 어두운 물속이 오히려 자유로운 공간이었을 거라 짐작케 했다.
 길쭉한 거울과 같은 대형 아크릴 판의 조합들로 연꽃을 대체하거나 같은 장치에 조명을 달리하여 반사시켜 만화경 같은 효과를 내고, 흰 막으로 덮인 평면의 세트를 돌출시키며 키워 눈의 조리개가 닫혔다 열리는 것처럼(또는 자궁의 입구가 열리는 것처럼) 연출하였다.
 이런 이미지 장치들은 <심청>이란 고전을 가로지르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업보, 죽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무게 있는 주제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삶을 짓누르는 운명의 무게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거기에 깔렸다면 심청이 아니다.
 안무가가 관객의 시선을 모처럼 돌려서 심청의 이면을 보게 한 김에, 죽음과도 같은 절망을 돌파해내는 강인한 성격까지 집요하게 추적하여 꿰어냈더라면 더욱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거대한 무대 장치에 무용수의 존재감이 눌리고, 혼돈스런 정서가 군무에 분산되면서 캐릭터가 명쾌히 확립되지 못해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표출하는 춤으로 박차고 나오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쉽다.




 트러스트무용단의 <계보학적 탐구>(안무 김형희, 12월 15일)는 인류 진화의 역사, 반복되는 사이클을 한 무대에 펼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무용수들이 초반 바퀴 달린 나무판을 타고 납작 엎드리거나 앉은 채 등장했다가, 몸을 점점 펴서 일으키면서 공간을 적극적으로 장악하는 동작으로 확장시키는 모습에서 인간이 호모 에렉투스가 되어가는 과정을 연상할 수 있었다. 거기에 동서양 배경을 딱히 짐작할 수 없이 모호하게 처리된 의상들을 적게 입거나 많이 갖춰 입음으로써 야만의 시대나 문명의 시대를 구분하여 표현한 듯 했다.
 그리고 장영규가 담당한, 첼로를 주조로 남성 보컬이 가미된 동유럽 풍의 처연하고 이국적인 음악과 태엽이 감기고 돌아가는 효과음이 가미된 모던한 음악 등이 번갈아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면서 장면을 뒷받침하였다.
 큐브 박스를 머리에 씌워 눈을 가리고 그것을 돌림으로써 목을 비트는 것을 은유하며 곤봉으로 내리치는 시늉을 하는 장면에서는 80년 광주의 역사나 킬링필드, 현재진행형인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의 테러들이 반추된다. 3D 안경을 쓴다거나 SF 영화에서처럼 기계장치에 인간을 연결시킨 장치들이 과학의 발전과 미래상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광기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지적(知的)발전이 그 슬픔과 공포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음울한 메시지가 깔린다.
 그러나 다양한 체격을 지닌 8명의 무용수가 2~3인조로 나뉘어 산발적으로 장면을 구성하다가도 함께 모였을 때의 의욕적인 집중력, 자율적인 움직임이 좋았던 것은 꽤 인상 깊었다. 희비의 양 극단을 모두 이해하고 무대 위에서 발산할 수 있는 그런 긍정적인 에너지라면 인류가 명맥을 이어나갈 힘이 될 것이기에, 딱히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없이 순환하는 기차모형의 모습으로 작품을 마무리하였어도 그 자체로 여운이 남았다.






 서울발레시어터의 〈RAGE〉(안무 제임스 전, 12월 18일)는 올해 3월 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렸던 ‘무용인 한마음축제’에서 발표했던 신작 <질주>(Rapide)를 변형하고 확장시킨 작품으로 보인다.
 <질주>가 5장 구성에 필립 글래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사용하였다면, 〈RAGE〉는 11장(공연 시작 전 김인희 단장은 13개 장면이라 설명했는데 심장박동소리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듯하다)으로 늘리고 필립 글래스 뿐만 아니라 존 아담스, 칼 젠킨스, 크로노스 콰르텟 등의 현대음악을 고루 사용하면서 분위기의 통일을 꾀했다.
 새롭고 과감한 동작을 시도하고 빠른 움직임 속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으며 신선한 생명력을 탐구했던 <질주>가 〈RAGE〉로 발전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안무가 제임스 전의 페르소나 같은 정운식이 제단 위에 누워있다 일어나면서, 연약하고 순진한 청춘은 가만히 앉아 희생당하길 거부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격렬한 분노, 살아남으려는 슬픔과 본능이 질주의 원동력이 된다. 킥복싱을 응용해 팔다리를 뻗치는 동작이 쉴 새 없이 구성되었고, 전면적으로 턴아웃된 자세는 특히 허벅지와 복부 코어 근육의 단단한 뒷받침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첨가한, 발을 구르고 손뼉을 부딪치거나 몸을 때려 소리를 내는 거칠고 원시적인 동작들이 특징적이었다.
 ‘세 개의 짐노페디’가 흐르며 죽음과도 같은 잠과 꿈을 그렸던 장면을 제외하고 쉴 새 없이 몰아친 작품을 몸을 아끼지 않고 수행해낸 단원들의 노력은 기대 이상이었지만, 하루 동안 프레스 콜과 본 공연을 모두 소화하기엔 체력이 버거워 보일 정도의 춤 구성이었다. 솔로일 때는 그 자체로 제임스 전의 뮤즈가 되는 김은정의 춤이, 듀엣으로 들어갈 때는 다소 둔해지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드라마투르기가 부재한 채 이미지 위주로 구성된 장면들은 무용수들이 작품의 마지막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할 의미를 부여하기엔 당위성이 부족해보였다.






 김선미무용단의 <천>(千)(안무 김선미, 12월 21일)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인 《쿠쉬나메》 속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영산재의 틀을 빌려 타국에서 삶을 마감한 공주를 위로하는 진혼의식을 펼쳤다. 천정의 조명이 달린 바에 쇠사슬을 여러 단 발처럼 늘어뜨려 매닮으로써, 천년 세월의 무게와 신비로움을 조성하고 그것을 들어 올렸을 때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에 묻힌 영혼들을 불러내 하나로 만나는 효과를 유도한 점이 돋보였다.
 붉은 옷을 입고 머리를 하얗게 물들인 김선미가 의식을 집전하는 만신이 되었고, 최지연은 아버지 왕을 그리워하는 수줍은 딸로서 켜켜이 쌓인 한을 삭여 풀어내는 춤사위를 보였다. 페르시아 영웅의 전투를 표현하는 검무, 현대적으로 변형시킨 금빛 바라춤은 쇠사슬과 같은 금속성 소재로 자칫 적막할 수 있는 무대에 짧고 간결하게 화려함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기실 ‘영산재’는 《쿠쉬나메》를 한국춤에 얹기 위해 유도하는 방편이었을 뿐, 제대로 된 틀의 역할을 맡기에는 정체성이 희미하였다. 우리 역사의 기록에 없는 신화적인 사랑 이야기를 발견하고 소재로 끌어온 점은 신선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영산재’를 덧씌워 의미 부여를 과하고 거창하게 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굳이 다소 진부하다고 할 수 있는 진혼의식의 형태로 풀어내었어야만 했는지는 되짚어 볼 점이다.






 소극장 부문 중 처음으로 공연된 김남진의 <눈>(EYE)(12월 22-23일)은 피터 쉐퍼의 희곡 <에쿠우스>에서 모티브를 얻어왔다고 했으나 ‘눈’에 대한 이미지 빼고는 <에쿠우스>의 흔적을 느끼기 힘들만큼 다듬은 작품이었다.
 조명이 밝아오면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소년의 몸 사이로 회색빛 우울한 얼굴의 마리오네트가 기어 나온다. 조로증에 걸린 것처럼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마리오네트는 분명 소년 안의 자아일 텐데, 소년을 내려다보다 그 손을 잡아끌고 가면서 무대 오른편에 마련된 자기만의 방 안으로 들어가 틀어박힌다. 그리고 마네킹의 하반신에 올라선 채 옷으로 감싸 작은 키를 감추며 등장한 소녀(짧게 바짝 깎은 머리로 사내아이 같은 느낌을 주는)는 성장을 거부한, 아니 처음부터 사회의 요구기준(8등신의 마네킹)에는 맞출 수 없이 태어난 소년의 또 다른 자아이다.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마리오네트를 사람이 움직여주듯, 소년은 소녀의 뒤에 바짝 붙어 소녀가 펼치지 못하는 범위까지 동작을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하였다. 소녀가 소년의 목에 올라타 한 몸이 되어 뒹굴면서 방안에 틀어박힌 마리오네트를 만나러 간 장면은 똑같은 옷을 입은 셋이 본래 하나의 존재임을 확인시켜준다.
 웅크린 등의 양감을 강조하고, 영장류처럼 쭈그려 손을 바닥에 대고 이동하는 동작, 골분(骨粉)을 연상시키는 하얀 가루를 쏟아내며 허물어지는 장면 등을 통해 성장을 멈춘 소년의 공허한 심리를 드러내었는데, 무대 위에서 펼쳐진 장면만으로 안무가가 의도한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나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까지 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선지 마음을 닫아버린 아이의 내면을 다양하게 변주하여 그릴 수 있는 김남진의 상상력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뒤이어 펼쳐진 정현진 안무의 〈FATAL〉은 모처럼 보는 즐거움이 있는 유쾌한 작품이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오른편 안쪽으로 엎드려 있는 두 남자와, 무대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는 나무판을 주우러 다니는 여자(무대미술 디자이너)가 보인다. 그녀는 판들을 모아 심사숙고하며 무대 왼쪽에 깔아 구분되는 어떤 공간을 만들고, 잠깐의 암전 후 조명이 밝아지면 그 바닥에 새로운 남자(처음부터 있던 두 명보다 키도 작고 얼굴에 여드름 자국도 보여 상대적으로 외모가 조금 떨어지는)가 들어와 엎드려 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까지는 아니어도 ‘아담의 탄생’이랄까? 그는 나무판 위에서 힘을 모으는 이런저런 움직임을 선보이며 일어나 관객의 주의를 끌고, 이윽고 무대에 상큼한 여자가 등장했을 때 키 큰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며 함께 경쟁한다. 이 때 세 남자가 자신들의 매력을 제시하는 방식은 60년대 제인 폰다나 브리짓 바르도 같은 글래머 여배우들이 풍미하던 시절, 그들의 몸매를 어필하기 위해 나른한 음악을 깔면서 공식처럼 만들어진 장면들을 위트 있게 살짝 비튼 것이었다.
 그 사이 무대 디자이너가 나무판을 드릴로 박아 상자를 만들고, 세 남자의 키에 따라 다르게 맞춰줌으로써 그것을 딛고 선 셋은 결국 같은 높이를 갖게 되고 키 작은 남자는 여자의 선택을 받는다. 외모만이 매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는 단순하고 솔직한 감성이 편하게 와 닿았는데, 안무가가 그것을 배려 있게 전달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원격조종기를 들고 무대를 가로질러 다니는 DJ를 등장시키고 춤이 진행되는 동안 춤의 요소로 쓰일 무대장치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노출시켜 무대 어디로 눈을 돌려도 골라보는 재미가 있게끔 복합적으로 구성하였다. 나무판과 박스에 불과하지만 ‘옴므 파탈’이 탄생하고 완성되는 공간이 여자의 손끝에서 나왔으니 ‘옴므 파탈’도 역시 여자가 가꾸기 나름이란 뜻도 되겠다.




 박나훈무용단의 <씨저테일 서전트>(안무 박나훈, 12월 27-28일)는 종족 보존을 위해 헌신하다가 에너지가 소진되면 생존을 위해 자신의 알을 먹는다는 열대물고기의 이름에서 작품의 제목을 가져왔다.
 한 달 전 제 35회 서울무용제에서 발표한 <쉬어가는 고개>가 워커홀릭들에 대한 풍경화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근래 안무가가 몰두하는 주제가 ‘가장들의 고민과 애환’에 있지 않나 짐작하게 된다. 요즘도 놀이터에서 볼 수 있는 회전놀이 기구를 받침으로 두고 네 귀퉁이에 접이식 다리가 부착된 식탁(혹은 평상으로 볼 수도 있다)을 얹고 그 위에 잔디를 깐 무대 장치는 ‘세대 간의 균형’이라는 화두를 상당히 감당해낸다.
 초반 세트 주변을 무릎 꿇은 자세로 기면서 돌다가 식탁 한 귀퉁이에 강아지처럼 나란히 모인 세 명의 무용수의 모습(그들이 유니폼처럼 입은 러플 달린 화이트 셔츠는 과하지 않게 ‘차려입은 느낌’을 준다)에서, 너른 잔디마당에 강아지를 풀어 키우고 평화로이 식사를 나누는 중산층의 여유로운 삶에 대한 로망이 엿보이기도 한다.
 1명의 여성과 3명의 남성 무용수들은 장치를 시소처럼 타면서 움직임을 펼쳐 나갔는데 각기 다른 조합으로 균형과 불균형을 오가며 시험하는 긴장감이 이번 작업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좁은 식탁에서 공존하기 위해서 양보하거나 장악하거나 저울질하는 과정이 주제와 맞닿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장치에서 내려와 바닥에서 춤을 전개한 중반 이후부터는 주제에 대한 탐색을 놓아버린 듯 장면을 구성하는 힘이 약해 보였다. 작품을 연이어 무대에 올리느라 피로가 누적된 탓일까. <쉬어가는 고개>에서도 맥락과 상관없이 튀어나와 어색했던 색종이 흩날리는 퍼포먼스가 이번에도 10여 분간 펼쳐졌다.
 그것은 보통 이별의 장면을 꾸밀 때라던가 경사를 축하하거나 환희의 감정이 터져 나올 때 연출하는 굉장히 익숙하고 전형적인 코드로 인식되고 있으므로 창작하는 입장에서는 피해서 갈 법도 한데, 굳이 반복하여 사용한다면 어떤 뜻이 있는지 궁금하다. 쇼케이스 때와 같은 깔끔한 마무리가 더 낫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경영 안무의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은 막스 에른스트의 동명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넣은 콜라주 기법으로 시작되었다. 구긴 신문지로 만든 장식과 소품을 착용한 출연자들은 바닥에 널린 신문지들을 주워 읽으며 실제 신문에 있을 법한 내용과 허구를 마구 뒤섞어 관객의 혼란을 유도한다. 얇고 낡고 가볍지만 그 안에 기록된 역사의 가치 때문에 결코 하찮게 취급할 수 없는 신문지, 신문지 왕관을 쓰고 나온 여자가 내는 소음과 유머러스하게 연출된 약간의 폭력적인 장면- 그로 인해 관객들은 이 작품이 뭔가 심각한 고발성을 지닌 게 아닌지 긴장하며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반부는 맥거핀 같은 역할일 뿐, 본판은 가난한 배우 지망생 남자와 잘 나가는 대기업 사원 여자가 현실의 벽 앞에서 지쳐 무너지는 사랑이야기였다.
 편안하고 친근한 음악을 바탕으로 둔, 토슈즈가 없는 비교적 단순한 발레 동작들은 참신하게 고안되었다고 보긴 어려웠지만, 남녀 배우와 남녀 댄서가 번갈아 등장하며 흐름을 꺾도록 교차 편집된 구성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또 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는 이야기라는 점이 발레 훈련이라야만 가능한 자연스럽고 풍부한 표정 연기와 합쳐지면서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을 의외로 발랄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배우들의 노래와 악 쓰는 소리 등이 보태지며 부쩍 지루하게 늘어진 후반부는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마지막 공연인 <안녕>(12월 30-31일)은 남현우와 김설진이 공동으로 안무하고 출연한 작품이다. 둘은 이 작품을 기점으로 ‘Mover’라는 이름의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이번 공연은 그들이 왜 ‘Mover’인지 꽉 채워 증명하였다.
 무대에 먼저 나와 있던 김설진은 조명과 음향 세팅을 핑계로 어슬렁거리며 관객과 대화하다 돌연 춤으로 돌입하여 공연 시작의 경계선을 무너뜨렸고, 음악을 맡은 정종임은 장치를 나르거나 남현우와 김설진의 뒤에서 천연덕스럽게 자세를 잡으며 배경의 요소로 작용하는 등 적극 개입했는데 그것은 장르와 형식을 해체한 뒤 한 덩어리로 융합시키는 ‘Mover’ 스타일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었다.
 마술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것 같은, 분해가 가능하도록 고안된 바퀴 달린 나무 상자와 거기서 나온 조각들을 가지고 요새, 탈의실, 고시원의 책상과 침대, 중국집 배달가방 등으로 조립시키고 흩으면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동물의 왕국’ 내레이션을 깔며 시작된 김설진과 남현우의 원초적이고 거친 몸싸움은 백조의 호수, 부채춤, 뽕짝, 경마 장면 등을 마구 섞어 버무려 웃음을 유발했지만 그 속에 녹아든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 은근슬쩍 집어넣은 방랑하는 유목민의 감수성과 비애는 곳곳에서 폐부를 찔렀다.
 작년 말부터 청년세대에서 제기된 구호 ‘안녕들 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마지막 장면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쁜 가구들이 들어찬 ‘마이 홈’에서 오순도순 사는 것은 어쩌면 요원한 꿈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듯 주어진 시간 동안 무대 전체를 한 판 자신들의 놀이터로 삼아버리는 ‘Mover’의 새로운 소유 방식은 ‘하늘은 이불, 산은 베개로 삼고, 바다는 술독이라 크게 취해 일어나 춤을 춘다’던 진묵대사의 선시처럼 호쾌하여 암울한 현실에 맞설 만한 힘을 보여 주었다.






 

 더 많은 관객들이 볼 수 있도록 기회 늘려야

 중간 검증 과정이 오픈되는 기회가 드문 여타 지원제도에 비해 창작산실 사업은 단계별 지원으로 작품의 예술성을 끌어올리는 디딤돌 역할을 일정 부분 해냈다. 시범공연과 안무가들의 인터뷰 동영상 등을 유튜브에 올려놓아 접근하기 쉽게 만든 것도 작지만 실속 있는 지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최종 결과물에 대한 심사만이 목적이 아니라면, 특히 대극장부문의 경우 공연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은 기회비용을 고려했을 때 아쉬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쉽게 구하기 어려운 규모의 막대한 지원금이 투입되는 기회인만큼, 안무가들이 욕심내어 무대 미술이나 라이브 음악에 과감히 투자하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창의적인 안무와 명철한 주제 의식을 담은 작품들이었다. 같은 지원금을 가지고 운용하여 내용물을 꾸민 방식에서도 각 예술가의 재기와 역량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은 흥미로웠다. 

2015. 01.
사진제공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