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35회 서울무용제 경연대상 부문
심각한 정체, 해법은 없는가?
방희망_춤비평가

 한국무용협회가 주최한 제35회 서울무용제의 경연대상 부문의 공연은 11월 18일부터 28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렸다.
 서울무용제는 경연부문에서 개인에게는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장르 별로 남녀 연기상을 시상하고 단체에게는 안무상, 우수상, 대상을 선정하여 수여한다. 사실 다 합하여도 이번에는 참가팀이 8개밖에 되지 않았으니 어느 하나라도 상을 받아가지 않을 단체는 없어 처음부터 경쟁의 의미는 크지 않다고 봐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연기상 수상자에게 병역면제 혜택이 주어지는 드문 기회라는 이유로 서울무용제는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올해는 현대무용에 Dancing Park Project, R.se Dance Company, 박나훈무용단이 참가하였고 한국무용으로 류무용단, 윤명화무용단, 고경희무용단, 발레단체로 백영태 발레 류보브, 한칠 Soul발레단이 참가했으며, 한 단체가 35분에서 40분 길이의 작품을 소화하며 하루에 두 단체씩 공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첫날은 안무가 박해준의 Dancing Park Project가 〈Somebody’s watching you〉(누군가 너를 보고 있어)를, 안무가 류영수의 류무용단이 <달의 비명>을 공연하였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모티브로 한 〈Somebody’s watching you〉는 소설 속 ‘감시’와 ‘지배’라는 키워드를 요즘 우리사회에 논란거리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CCTV, SNS와 연결시켜 제시하였다. 그러나 첫 장면의 상당분량을 수상한 타인에게 쫓기며 불안해하는 여성들의 걸음걸이로 반복하여 구성함으로써, 사생활 노출이 문제인 것인지 범죄가 문제인 것인지 스스로 초점을 흐리게 만들어 버렸다..
 이어지는 SNS 대화창 화면도 ‘그건 그렇지, 그러게 말이다, 그건 아니지, 그러게 누가 그러래? 앞으로가 중요하니 살펴보자’ 식의 앞뒤를 잘라 두루뭉술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언술로 명쾌하지 않은 작품구성에 한 몫을 하였다.
 작품은 안무가가 언급한 대로 시스템 자체가 병들어 있는 디스토피아를 제대로 그려내지도 못하고 개인의 두려움만 파편적으로 그렸다. 그런 뒤 마지막 흰 옷 입은 군무로 급작스런 화해의 무드로 흐른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졌다.

 류영수의 <달의 비명>은 공교롭게도 자유참가부문에 포함된 안정훈무용단의 <내 이름은 김복순 Vol.2>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가져왔다. <내 이름은 김복순>의 경우 꿈이 있었던 평범한 소녀의 모습과 그 모든 것을 잃은 할머니의 모습을 수미쌍관으로 두어 보다 복합적인 극 전개를 꾀하였다면, <달의 비명>은 위안부 여성들이 유린당하는 장면으로 바로 서두를 열면서 공연 내내 그 고통의 현장에 집중하여 전개했다는 점이 달랐다.
 그러나 여성 무용수들이 플라멩코 스타일로 겹겹이 이루어진 치맛자락을 일부러 잡아 들추면서 춤을 추게 한 안무구성은 작품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였다. 긴 치맛자락을 쥐는 동작은 한국무용에서 흔하게 쓰이는 것이긴 하지만, 의상의 디자인이나 안무는 그런 정도를 넘어 의도적인 화려함을 꾀한 것이었으며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비극의 당사자였던 여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설정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무대 위 무용수들이 눈에 띄는 몸짓으로 주목받고 싶은 욕구는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자태를 뽐내기 위해 몸에 익힌 습관들이 작품에 따라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날에는 백영태 발레 류보브의 <데미안>과 윤명화무용단의 <기오헌(寄傲軒)의 눈물>이 무대에 올랐다. <데미안>은 헤세의 소설에 차이코프스키의 제 6번 ‘비창’ 교향곡의 전 악장을 매치시킨 선곡이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 출신인 안무가의 이력을 떠올리게 했다. 그 자체로 흡인력 있는 음악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적절한 포인트를 남기는 안무는 생각보다 쉽게 작품에 흥미를 갖도록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렇지만 배경 장치로 십자가를 번번이 등장시키거나 에밀을 사이에 두고 흑과 백의 남녀가 각각 악과 선을 대표하며 추도록 한 구성은 이 작품의 제목을 가렸더라면 <파우스트>로 읽힐 만큼 변별력이 없어 보였다. 군무를 통해 에밀의 요동치는 내면을 그리거나, <데미안>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인 아브락사스를 V자 대열의 날갯짓으로 잠깐 제시하는 방식으로 활용하였으나 주요 배역에 안무가 집중된 탓에 그 효과는 미약했다.

 <기오헌의 눈물>은 창덕궁 후원 효명세자가 짓고 살았던 집인 ‘기오헌’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유난히 거칠고 뚝뚝 끊기며 뭉그러진 상태로 연주된 필립 글래스의 ‘Metamorphosis Ⅱ’가 깔리고 일렁이는 물결 조명 속에 등장한 효명세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듯 부자유스러웠으며 후반부 발작까지, 감정을 담아내는 마임 역시 어정쩡하였다.
 세도정치 속 간신들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관복을 기모노처럼 여미고 흉배를 얹어 만든 의상과 새하얀 가면을 씌워 국적불명의 무대를 만든 것이나 남성 무용수들로 하여금 작품의 맥락과 상관없이 앞섶을 헤친 채 무대를 활보하게 한 설정 역시 무리한 시도였다.
 효명세자를 기리기 위한 뜻은 무대 안쪽에서 그가 창작했다고 전해지는 ‘춘앵무’를 아스라이 등장시킴으로써 마무리되었으나, 그 전에 작품 전반에 걸친 표현방식을 품위 있게 만들어 인물을 진중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싶다.

 한칠 Soul발레단의 <질주-G Minor>는 더욱 정신이 없었다. 교향곡 40번에다가 피아노협주곡 21번의 2악장, 레퀴엠의 ‘라크리모사’까지 모차르트의 유명한 곡들을 이어 붙이고 그의 생애를 테마로 하여 시대를 뛰어넘는 ‘교감’을 시도한 작품인데, 무대 위 모든 것이 부조화의 극치를 달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일단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내린 형형색색의 무늬를 넣은 조명들과 거기에 가발로 짐작되는 무용수들의 어색한 금색 머리카락까지 과하게 번쩍였다. 거기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악상과 상관없이 나열된 싱거운 안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여성 배역들은 예쁜 장식으로서의 의미 이상을 찾을 수 없었고 모차르트 역은 음악이나 장면의 분위기와 겉도는 웃음으로 일관하였다. 이를 통해 모차르트는 그저 필요에 따라 내세웠을 뿐 처음부터 이 작품에서 그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마를 바꾼다 하여도 안무나 무용수들의 연기는 비슷하게 흘러갈 것 같은 인상이다.

 작년 자유참가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자동으로 경연에 참가하게 된 R.se 댄스컴퍼니의 〈MAUM〉(마음)은 지루했던 공연 일정 가운데 모처럼 활기를 불어넣은 산뜻한 작품이었다.
 보통 무용가들이 팜플렛 속 작품 소개 글에는 온갖 수사를 대어 놓고 막상 무대에 올린 작품에는 글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물을 품지 못해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이번 김동규의 〈MAUM〉(마음)은 춤이 글 이상의 것을 구현한 바람직한 무대였다.
 2층으로 구성된 방 모양의 세트와 회전문으로 들고 날게 한 장치는 본체 없는 ‘마음’에 우리가 이미 적용하고 있는 ‘열다’, ‘닫다’라는 표현을 시각화했으며, 우리 마음속에 서로 다른 수많은 인격들이 각자 방을 짓고 공존하고 있음을 떠올리게 했다. 2인 3각으로 묶은 쌍둥이 차림의 여성무용수 한 쌍은 한 쪽 발엔 하이힐을 신고 나머지는 맨발로 절뚝이며 누구나 가진 야누스의 두 얼굴을 나타냈고, 2층 방 안의 남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마음’ 안의 무엇, 혹은 마음들 간의 관계를 연상시켰다.
 우리가 일생동안 그 마음 한 번 뚝 떼어서 들여다보고 싶다는 충동을 얼마나 많이 느끼는가를 생각해볼 때 이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동시다발로 벌어지는 이질적인 그 풍경을 무대 위에 한 번에 늘어놓아 직관적으로 이해하며 보게 해주는 그런 속 시원함이 있었다.
 그 마음의 억압에서 해방에 이르는 전 과정을 어떤 방향을 지시하듯 특히 손에 방점을 둔 안무로 풀어나간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신체 전체를 털며 뛰어오르는 후반부 역동적인 군무는 전형적인 LDP 스타일이랄까, 막을 뜯어 드러난 거울 앞에 자신을 마주하게 한 연출도 살짝 진부한 감이 있었지만 다음 기회에는 좀 더 밀폐된 공연장에서 재공연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마지막 날 박나훈무용단의 <쉬어가는 고개>는 안무가의 전작에서처럼 규모 있는 오브제를 안무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끌어들였다. 도시를 상징하는 회색 벽, 조그만 창이 괴롭게 토해내는 인간의 굽은 신체는 휴양지인 해변을 암시하는 조명 속에 놓인 해먹의 대열에 대비된다.
 무용수들이 알록달록한 해먹 안으로 들어가 누울 때면 그 휴식의 공간이 아기들을 길러내는 인큐베이터처럼 보인다. 그렇게 쉬고 거기에서 벗어나 해먹의 천을 풀어 목에 감아 굴레로 만들거나 질질 끌고 다니는 동작은, 휴식조차도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결국 더 많은 생산력을 쥐어짜내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하는 워커홀릭들에 대한 비판일 수 있겠다.
 그러나 마지막 한 사람에게 모든 해먹 천을 덧씌우고 그 위로 노란 색종이를 뿌린 것은 조롱인지 축제인지 알 수 없는 다소 요란한 퍼포먼스였다.

 고경희 안무의 <곱사나비>는 <노틀담의 꼽추>를 한국무용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에스메랄다 역은 더욱 신산하고 설움 많은 여인으로 변모되었다. 한국춤의 춤사위가 지닌 정한(情恨)을 표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규정이 한국춤의 한계를 먼저 설정한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회색과 붉은색을 주조로 한 무대연출과 의상은 인물들이 내면에 품은 절망감과 정열을 앞서 암시하였지만, 다소 과장되게 스타일링한 군무의 모습이 꼽추와 여인과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인지 억압하는 군중인지 모호하였다. 대신 후반부로 갈수록 군무가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주역들의 춤에 힘이 실리면서 공연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꼽추 역 박정태는 유연하면서 무게 있는 춤으로 무대를 너끈하게 장악하는 힘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서울무용제 경연부문을 지켜보면서 남녀 연기상 선정을 위해 주역 구분이 선명하지 않은, 필요 없는 작품들까지 무용수들을 주역의 명단에 따로 올리는 이런 풍토가 서울무용제의 취지처럼 무용계를 성장시키는데 건강한 도움이 될지 의구심이 들었다.
 외모나 체격조건이 좀 더 나아 보인다는 것 외엔 기량에서 큰 차이를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작품의 주제나 맥락과 상관없이 한결같게 붙이고 나온 반짝이 분장, 노출과 시스루 의상 등은 서글프게도 관객의 시선을 온 몸에 받으며 그 몸뚱어리를 생업의 자원으로 삼아야 하는 무용수들의 그늘진 단면이었다.
 보통 사람의 눈이 발견하지 못하는 곳에 먼저 다가가 스스로 밝히는 빛이 되고자 하는 것이 예술가의 소명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성을 높이려는 고민보다 ‘빨리 타인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몸부림이 은연중에 젊은 무용수들에게 무조건반사처럼 입력되었다는 것을 읽게 되어 씁쓸했다.
 서울무용제의 연기상 선정으로 주어지는 병역 면제 혜택은 남성 무용수 개개인에게는 인생이 걸린 중요한 기회임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은 협력과 조화를 습득하는 것이 더 중요할 이른 나이에, 엇비슷하게 고만고만한 작품들 속에 받은 상으로 프로필에 한 줄 더 보태는 것이 진정한 예술가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회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알고 싶지 않아도 함성이 객석의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출연진의 관객 동원까지 저절로 확인하게 되는 공연장의 현실, 그 고인 물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서 눈감고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것일까?
 또한 차이코프스키, 모차르트, 필립 글래스 등 유명 작곡가들의 곡을 편집해 사용하고도 음악담당에 안무가나 편집자의 이름만 올린 채 곡명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것도 작품을 프로페셔널하게 다루는 무용제였다면 있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제자리걸음(혹은 오랜 기간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못한 점에서 퇴보랄 수도 있는)을 거듭하는 서울무용제의 이런 면면들은 무용계, 학계에 먼저 자리를 잡고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안무가들이 여전히 후학들의 발전이나 관객들의 눈높이 향상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들만의 잔치’ 같다. 특히 한국무용과 발레는 잘 알려진 이야기에 편히 기대고도 인물들의 개성, 그들이 무대 위에 존재해야 하는 구체적인 정당성을 그려내는데 실패한 작품들이 대다수라 장르 자체가 심각하게 정체되었다는 인상까지 주었다.
 깊이 있는 작품 세계를 갖춘다는 것, 가슴 속을 파고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비춰지는 모습에 신경 쓰기보다 오직 작품으로서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각오에 무게가 더 실리기만 하여도, 후배들과 관객들이 존경하고 아껴 먼저 찾는 안무가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2014.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