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무송(舞松) 박병천 타계 10주기 추모
“하나를 통틀어 보는 눈이 있고 무언가 이루려면 악가무 알아야”
이병옥_용인대 무용과 명예교수
 진도북춤의 명인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였던 고(故) 박병천 명인(1932~2007)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진도북춤과 진도씻김굿 등 선생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제자들의 추모공연과 문화예술계 저명인사들과의 회고담을 듣는 모임 등 다양한 추모 행사들이 열렸다.



 ■ 추모공연 현장스케치

 추모공연들은 박병천 10주기 추모공연 추진위원회에 참가한 10인의 진도북춤 전승무용가들과 고인의 아들 박환영(부산대 한국음악과 교수)과 진도씻김굿보존회 등이 기획한 다원 공연행사였다.
 먼저 박병천류 진도북춤을 전승하고 있는 대표무용가 10인은 김진옥(박병천류 진도북춤보존회 부회장), 황희연(전 리을춤연구원 이사장), 이경화(박병천류 진도북춤 이사장), 이재연(박병천류 전통춤보존회 부회장), 강은영(한국문화예술 명인), 임수정(국립경상대 민속무용학과 교수), 공민선(전 국립남도국악원 안무자), 염현주(새한대 전통연희학과 교수), 윤명화(박병천류 진도북춤보존회 부회장), 최원선(박병천류 진도북춤보존회 부회장)으로 각자 한국 무용계의 중견들이지만 박병천류 진도북춤의 전승자라는 공통점으로 타계 10주기에 함께 뭉쳐 박병천류 진도북춤 80인의 군무 등으로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박병천 타계 10년, 씻김

 이번 추모공연의 첫판을 연 것은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혁혁한 무공(巫功)을 기리는 장장 6시간의 굿판’이라는 수식어를 내세운 굿 공연 〈박병천 타계10년, 씻김〉이었다. 11월 19일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무려 6시간에 걸쳐 고 박병천 명인을 위한 씻김굿판을 열었다. 이번 행사의 총연출을 맡은 진옥섭의 사회로 막을 연 첫무대는 진도씻김굿보존회의 〈남도삼현〉 연주에 맞춰 굿상 앞에서 박병천 자녀가족들의 진작례였다.
 남도삼현에 맞춘 씻김굿소리로 영혼을 청하고 노래와 삼현악과 술을 올려 넋을 위로하고 산사람의 마음도 풀어주었다. 이어서 〈안당(안땅)〉에서는 박병천의 딸 박미옥이 징을 치며 조상신에게 굿의 내력을 아뢰면서 함께 어울리자는 뜻을 전하는 무가를 불렀다. 다음으로 망자를 불러들이는 초혼 〈초가망석〉과 제석신을 청배해서 복덕을 축원하는 〈처올리기〉은 송순단(진도씻김굿 전수조교)이 진행하였다.
 잠시 분위기를 돌려 이광수 명인의 비나리 소리를 듣고 다시 천연두 마마신(손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손님굿〉으로 장구를 비껴들고 채를 치며 축원하였다. 이어 가정번창과 자손수복을 기원하는 〈제석굿〉은 흰 치마저고리에 흰 고깔에 붉은 띠 가사를 어깨에 비껴 걸쳐 입고 복개춤을 추며 박미옥이 굿을 연행하였다. 악사들의 휴식을 취하고 분위기를 바꿔 염경애 명창의 심청가 중 방아 찧는 대목과 진유림 명무의 살풀이춤을 추었고, 윤진철 명창의 적벽가 한 대목을 이태백 고수의 북반주에 맞춰 불렀다. 

 


 다시 강은영의 지전춤과 장사익 가요명인의 〈목포는 항구다〉, 〈동백아가씨〉소리를 듣고 못다 했던 〈제석굿〉을 마무리하였다. 큰아들 박환영(대금 연주, 부산대 교수)의 감사의 말을 전했고 딸 박윤정(국립무용단원)이 복개춤을 추었다.
 이어 진도에서 제공한 저녁식사를 관객 모두가 로비와 홀에서 가졌다. 저녁 후 무악집안의 후예연주단 〈바라지〉들의 타악연주를 듣고 무명베의 매듭을 흔들어 망자의 한을 무가를 부르며 푸는 무녀 송순단의 〈고풀이〉부터 굿의 후반부를 시작하였다. 다음 영돗말이를 세워놓고 무녀 박미옥이 지전을 들고 〈씻김〉과 〈넋올리기〉를 하였다. 넋올리기는 망자 가족 박환영의 머리 위에 한지로 사람형상을 오린 넋을 올려놓고 넋전으로 들어올리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이어서 진도북춤 큰 제자들에게도 넋올리기를 하였다.
 무녀 송순단이 징을 치며 망자의 극락관문을 무사통과를 기원하는 무가를 부르고 마지막으로 넋이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길닦음〉에서는 넋당석으로 질베를 따라 옮겨가며 6시간 동안의 박병천 명인의 씻김굿을 끝맺었다. 박병천 명인을 기리는 씻김굿의 통해 다시한번 생전에 전통문화예술계에 끼친 업적을 되새기고 추모의 무대를 꽉찬 관객들과 연희자들과 진도북춤 전수자들 모두 함께 숙연하면서도 뜨거운 굿판 분위기를 시종 이어갔다.
 또한 긴 시간에 걸쳐 반주를 해준 박병원(보유자, 징), 김오현(전수조교, 장구), 이종대(피리), 홍옥미(해금), 박환영(대금), 이태백(아쟁), 장필식(북), 이석주, 박성훈(쇠), 김태영(장고), 정광윤(대금), 채규룡 등의 기악명인들의 구성진 악기연주가 굿판분위기를 한껏 높여주었다. 

 

 



 박병천, 그 남자의 춤 이야기

 박병천 추모공연 추진위원회 10명이 주관하는 10주기 추모공연 〈박병천, 그 남자의 추 이야기〉은 11월23일 밤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추모의 뜻을 기리면서 박병천의 진도북춤이 번창하고 있음을 보란 듯이 웅장한 무대를 꾸몄다.
 식전행사로 올린 공연은 파독간호사무용단 12명으로 이경화가 독일을 오가며 지도한 진도북춤이었다. 본 공연의 첫 무대는 박병천의 둘째아들 박성훈이 부르는 박병천이 남긴 〈축원 비나리〉였다. 젊은 시절의 소리버전을 듣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성음이 비슷하여 ‘피는 못 속인다’는 속담이 생각날 정도였다.
 다음 무대는 〈제석춤〉으로 박병천 명인이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제석거리에서 추어지던 굿거리춤, 지전춤을 바탕으로 임수정, 이재연, 공임선, 염현주, 최원선이 재구성하여 굿거리춤, 지전춤, 복개춤으로 재현한 굿춤이었다. 이어서 강은영 지도로 〈영돗말이 고풀이〉를 춤으로 재현하였다. 

 


 그리고 이번 무대에서 가장 핵심무대인 〈박병천류 진도북춤〉을 황희연, 이경화, 임수정, 공민선이 재구성하여 9명의 추진위원들이 참여하는 명무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박병천이 추었던 진도북춤은 한국 전통춤의 춤기법의 어느 유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독창적이고 진도지역만이 가지는 춤가락 특성과 박병천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개인적 기량이 어우러져 독특한 춤매력으로 발산했던 것인데 이제는 수많은 제자들이 각기 개성을 덧붙여 한껏 멋진 진도북춤을 선보이고 있었다.
 신명나는 진도북춤이지만 고운 티를 보이는 이경화, 감칠 맛을 내는 황희연, 다소곳이 매력을 발산하는 이재연, 파워풀한 강은영, 시원시원하게 뿜어내는 임수정, 멋드러진 최원선, 담백한 염현주, 남도가락이 묻어나는 공민선, 절제와 신명을 조화시킨 윤명화 등이 박병천류 진도북춤 2세대의 멋과 신명을 군무 속에서도 개인기들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어서 새한대학교 염현주 교수가 지도한 새한대 학생들의 〈강강술래〉는 박병천 연출로 다양한 민속놀이들을 집대성하여 1974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국가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지정되게 한 업적이 컸었다. 진양조의 긴 강강술래부터 자진강강술래로 이어지다 개구리놀이, 청어엮기와 풀기, 댕기꼬리 감자와 풀자, 가마타기, 손치기와 발차기, 지와밟기, 꼬리따기 등 다양한 놀이를 재현하였다. 끝으로 80명이 무대를 꽉 채워 펼치는 웅장한 진도북춤 대군무로 마무리하였다.




 진도북춤 제자들이 보여준 〈박병천 그 남자의 춤〉무대는 전통춤계와 무형문화재계에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지정된 종목들은 보유자 사후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는 모습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대물림에 있어 문화재청의 미온적인 대책으로 혼선만 가중되는 양상을 보이는데서 오는 파로감이 누적된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제자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관망만 하고 있는 반면,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던 박병천 진도북춤은 10년이 지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전승력이 배가되는 대조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진도씻김굿과 박병천 생애 회고 대담

 박병천 타계10주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행사로는 박병천 명인이 악사장으로 활동하던 한국의 집(korea house) 민속극장에서 2017년11월26일(일) 오후 1시30분부터 3시간에 걸쳐 ‘진도씻김굿과 박병천 생애 회고 대담’을 가졌다. 먼저 1부에서는 진도씻김굿 중 〈삼현〉, 〈초가망석〉, 〈제석굿〉, 〈길닦음〉을 30분 축소판으로 아주 짧게 진행하였다. 이미 6시간에 걸친 굿판을 19일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가졌던 터라 엑기스무대로 마무리 짓고 2부로 박병천 생애 회고 대담을 가졌다.
 대담에는 한명회(전 국립국악원장, 예술원 회원), 김매자(창무예술원장), 국수호(디딤무용단 이사장), 박주언(진도향토사학자), 고흥(새한대 교수), 이현표(진도문화원장), 설진석(진도 이장) 등 예술계 원로에서 고향마을 이장까지 함께하여 진옥섭의 진행으로 고인의 업적과 생애담을 논하였다.
 먼저 장남 박환영교수의 인사말로 시작하여 한분 한분의 추억담을 피력하였다. 국립 현충원 개원식에서의 진도씻김굿을 처음 초청의식 거행한 일화와 중앙아시아 순회공연(한명회), 당골네를 하찮게 생각하지만 당골의 손을 거치지 않을 없었던 지역의 실상과 박병천의 위상(설진식), 무용작품 〈춤본〉에서 박병천 선생님의 음악을 사용하게 된 일화(김매자), 강강술래에서 손치기 발치기놀이를 살린 일화, 진도북춤과 지전춤 등을 국립무용단을 통해 소개한 일화(국수호) 등 구구절절한 박병천 명인과의 인연과 전통문화예술에 끼진 업적 등 추억담을 나누었다. 

 

 



 ■ 박병천 명인의 발자취와 예술적 배경

 박병천(1933~2007) 명인은 진도신청(珍島神廳)의 당장(堂長)이던 박범준(朴凡俊)씨와 진도에서 굿을 제일 잘하는 단골무당이던 김소심(金小心)씨의 2남으로 1933년 11월 18일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세습무가(世襲巫家)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세습무가(世襲巫家)집안의 9대째 예인으로 일찍부터 가무악(歌舞樂)에 뛰어났다.
 1960년대까지 진도는 물론 인근 지역의 모든 가무악(歌舞樂)을 섭렵하고 1970년대에는 진도 민속예술을 발굴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통하여 이들을 발표하였다. 1972년에는 남도들노래(국무총리상), 1974년 강강술래(대통령상), 1975년 거문도 뱃노래(국무총리상), 1976년 진도만가(문공무장관상), 1977년 진도 다시래기 등의 발표를 통해 남도의 민속예술 복원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들 종목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병천 명인이 현대 한국 전통예술계의 독특한 보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박병천 명인은 진도(珍島)라는 남도예술의 보고(寶庫)의 지역적 토양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예향(藝鄕) 진도(珍島)태생문화’를 온전히 흡습한 명인이다.
 물론 진도는 ‘살아있는 인류학 박물관’, ‘민속문화의 보물섬’이라고 칭할 만큼 진도문화의 특징은 유배(流配)문화, 풍요(豐饒)문화, 접점(接點)문화, 도창(島創)문화라고 하여 유배자들의 본보기와 가르침으로 문화구조와 성향이 향토문화에 스며들어 고품격화된 상향(上向)문화로 변모발전하게 된 점, 생산이 수요보다 3배 이상의 풍농(豐農)과 풍어(豐漁)의 기쁨과 풍요(豐饒)의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는 옥주(沃州)란 점, 인구 5만도 안되는 섬고장의 ‘도폐(島閉)문화’를 넘어서 10여종의 무형문화재를 보유할 정도로 독창적인 전통문화를 전승 발전시킨 ‘도창(島創)문화’를 형성한 점, 대양과 육지, 열대와 온대, 남방과 북방문화, 남해안과 서해안 등 다양한 생태환경이 혼재, 융합, 복합, 다양, 이색성 등으로 ‘접점(接點)문화’를 고루 갖춘 점, 그밖에도 시(詩)·서(書)·화(畵)·창(唱)의 풍류문화가 한국 굴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점 등이다. 이러한 농어민의 풍요(豐饒)문화를 양반문화를 덧씌워 풍류(風流)문화로 승화시킨 진도사람들은 누구나 명창(名唱)이고 명무(名舞)라는 점은 익히 아는 바지만, 박병천 명인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춤의 명무, 구음소리의 명창, 굿반주와 징[鉦]의 명수(名手)이었다.
 둘째, 박병천 명인은 당골이라는 세습무 집안에서 만능예능을 접하면서 태어나고 학습하여 닦여진 태생적인 ‘당골 명가(名家) 혈통’을 지니고 있다.
 정만조(鄭萬朝,1858~1936)의 은파유필(恩波濡筆)에서 언급되었던 증조부 박덕인(朴德仁)으로부터 대금의 명인으로 호명되는 박종기(朴種基, 작은 할아버지)를 거쳐 박병천(朴秉天)으로 이어지는 가계도가 중심을 이룬다. 박미경은 그의 글 「진도 세습무 박씨 계보와 인물연구」에서 박씨 일가를 8대를 거처(박병천은 9대조부터 무업을 했다고 말함) 혈통으로 지속된 명가(名家)라고 정리하고 있다.




 셋째, 박병천 명인은 평생 진도씻김굿 연행에서 가무악 등 만능 예능을 발휘하는 ‘바라지악사의 정점(頂點)’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씻김굿에서 굿연행은 지무인 당골여인들의 몫이지만, 온갖 반주와 뒷바리지는 남자당골들의 몫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 모두 각각의 악기를 연주하면서 구음 등의 바라지를 하므로 일인 삼역 혹은 사역을 소화해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바라지는 모두 손으로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입으로는 구음을 하는 형태를 띤다. 김귀봉이나 박진섭, 박병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심지어는 오른 손으로 장구와 징과 꽹과리를 연주하고 왼손으로는 장구와 북의 궁편을 연주하면서, 때때로 피리를 불다가 구음을 하다가 무가를 합창하기도 한다. 진도 시나위 음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이 연행태이다. 진도 씻김굿의 바라지 악사들은 반주기능과 역할과 더불어 남도 특유의 시나위 선율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점이 남도 시나위라는 음악을 만들어 낸 요체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는 씻김굿판으로부터 생성된 것이며, 박병천의 구음시나위가 그 정점에 있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 곁은 떠난 후 누구도 신금을 울리는 박병천 명인의 ‘구음시나위’를 능가하는 이는 아직 없는 것 같다.
 넷째, 박병천 명인의 ‘탁월한 지도력과 연출력’으로 많은 진도예술에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커다란 업적을 남길 수가 있었다.
 1960년대까지 진도는 물론 인근 지역의 모든 가무악(歌舞樂)을 섭렵하였고, 1970년대에는 진도 민속예술을 발굴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통하여 이들을 발표하게 되어 남도의 민속예술 복원에 관여하여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들 종목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씻김굿의 원바라지들은 지무의 춤과 무가와 연행까지도 기획하고 지도하고 연출하는 예능지도자이다. 바로 박병천 명인이 남도 시나위와 악가무와 연행까지 갖춘 메커니즘(mechanism)의 총체적인 본보기이며 연출력까지 갖춘 명지도자였기 때문에 진도의 민속이 빛을 발할 수 있었고 많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도 박명천 명인의 ‘인물적 품격’은 익히 알려진 바로 기예능의 빼어남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배경으로 가름하였다.
 연행예술에서 인물치레는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보여주는 예술이기에 기예능과 더불어 빼어난 인물과 인품은 예능과 함께 암암리에 무대예술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여성편력, 아니 여성들의 그에 대한 편력에 대한 이야기 등도 명인의 예능뿐만 아니라 인기의 일면을 보여주는 젊은이들의 ‘k-pop스타’처럼 윗대의 ‘k-민속스타’였다고 본다. 

 


 한편 전통춤계에 비춰진 몇 가지 특징적인 현상은 첫째, 박병천이 예능보유자인 굿 명인보다 비지정인 진도북춤 명인으로 더 생명력을 지니고 춤이 살아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둘째,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춤 종목(승무, 살풀이춤, 태평무)못지 않는 전통춤으로서의 위상과 응집력을 보란듯이 보여주고 있어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가능성과 역량도 갖추어 나가고 있다. 셋째, 박병천류 진도북춤은 진도라는 지역성을 떠나 범한국적 지역 확대와 전통춤 종목의 중요한 범주를 차지하고 있어 이제는 ‘진도’를 빼고 ‘박병천류 북춤’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게 되었다. 넷째, 전남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도북놀이와는 다른 예술성과 독특한 춤어법을 지니고 있다. 즉 전남 진도북놀이는 진도소포농악의 농악적인 북춤, 북놀이 양상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박병천 진도북춤은 전통춤의 예술적 특성을 형성하고 있다.




 나가는 말

 박병천 명인은 무용계에서는 진도씻김굿보다는 진도북춤 명인으로 추앙받으며 전수자들도 많았고, 전통춤 레퍼토리로 자리 잡아 쌍채북춤을 추면 모두가 ‘박병천의 북춤’이라고 할 정도로 대표명칭이 되었다.
 박병천 명인의 춤바디도 우리가 흔히 아는 곱디 고운 기방계춤이나 고고하고 담백한 재인계춤 바디도 아닌 독특한 민간계 또는 무속계 춤바디를 지닌 분이다. 그래서 무용인들 특히 여성무용가들은 박병천류 춤바디를 제대로 수용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보니 제각기 자기식 또는 섞여진 춤바디로 추는 경향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진도 현지의 진도북놀이의 보유자들과도 사뭇 다른 춤기법이나 춤바디를 지니고 있어 이 부분의 연구도 필요하다.
 또한 박병천 명인이 보유한 예능 중 최고의 걸작은 ‘구음시나위와 징[鉦]소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소리는 ‘신의 경지’에 다다른 소리라고 해도 손색없는 기량이고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전통무용가들은 앞을 다투어 살풀이춤이나 입춤 등의 반주곡으로도 많이 쓰인다. 그런데 필자가 본 많은 공연무대에서는 박병천의 구음소리만 들리고 춤이 묻혀 버리는 공연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박병천의 구음소리가 워낙 심금을 울리니까 관객들은 춤보다 소리의 감흥에 매료되어 춤이 눌리는 분위기가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통춤의 기량과 끼가 박병천 구음소리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춤꾼이 아니면 소리에 매몰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니 이 시대의 명인 중의 거장임을 증명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박병천 연보〉
1932 진도 지산면 출생
1952 목포상선전문학교 졸업
1960 무무악 시작
1971~1976 전국민속경연대회 남도들노래(국무총리상)/ 강강술래(대통령상)/ 진도만가(문공부장관상)
1977 ‘진도 다시래기’ 발표
1978 ‘씻김굿’ 서울에서 공연
1980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기·예능 보유자 지정
1981 박병천문화재전수관 개설
1982~1995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악장 및 예술감독
1987~2007 사단법인 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 전통연희협회 이사장 역임
1996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객원교수, 전통예술원 전임 객원교수,
   대불대 연희학과 석좌교수, 한국문화재보호협회 한국의 집 악사장으로 활동
2007년 11월 20일 작고

〈수상〉
1972 제12회 전국민속경연대회 남도들노래 국무총리상
1973 제13회 전국민속경연대회 나주들노래 국무총리상
1974 제14회 전국민속경연대회 강강술래 국무총리상
1975 제15회 전국민속경연대회 강강술래 대통령상
1976 제16회 전국민속경연대회 진도만가 문화공보부장관상
1999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음반〉
〈박병천의 구음다스름〉, 〈한국의 슬픈 소리〉, 〈진도씻김〉, 〈강강술래〉

〈해외공연〉
1981 국제민속예술제 초청 유럽6개국 순회공연
1984 LA올림픽 개막축제공연 니카라과 민속음악제 금상
1985 베를린 국제민속음악제 국가대표 유럽 7개국 순회공연
1988 서울올림픽 개막식 ‘화합’ 협동 안무
1990 LA 아·태지역 토속신앙 페스티벌 공연
1994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공연 '진도씻김굿' 미국 순회공연
1999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무형문화재공연/독일세계문화의집 초청공연
2000 백남준 비디오 아트 씻김 공연지도 및 출연
2006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 기념공연
2007 한·베트남 수교 15주년 기념공연 
이병옥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7. 12.
사진제공_이병옥, 박상윤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