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발레단〈왕자호동〉 & 유니버설발레단 〈춘향〉
빈약한 대본과 안무가 가장 큰 문제
방희망_춤비평가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지속하도록 이끄는 ‘공감’이라는 화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세상사, 자연만물에 대해 누구나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지만 예술가들은 자신이 한층 더 섬세하고 예민하게 감각한 것을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거쳐 작품으로 내놓는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과 작품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섣부른 예측을 불허한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경험해왔다. 너무나 선구적일 경우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해 혹독한 비난에 시달린 당사자들을 고통과 우울로 몰아넣게 되었고, 시류를 잘 탈 경우 흥행에는 성공했어도 훗날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잊히는 일도 다반사다. 사사로운 인간관계에서조차도 소통은 쉽지 않은 터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작품이란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더욱이 국가와 문화 배경이 다른 불특정 대상들까지 염두에 두고 명작으로 남을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한 달 여를 사이에 두고 한국을 대표하는 두 발레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창작 발레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국립발레단의 <왕자 호동>(8월29-30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 춘향>(9월 27-2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 그것이다. 국립과 민간의 대표로서 한국적인 발레를, 그것도 대형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취지로 각기 적잖은 공을 들인 것으로 안다. 초연의 어수선함이 어느 정도 가신 후의 재공연인 만큼 이제는 그 취지를 넘어서서 작품의 완성도를 들여다 볼 때가 아닌가 한다.
 앞서 ‘공감’의 문제를 언급했지만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춘향의 이야기를 소재로 선택한 것은 우리 문화유산이 인류 보편의 정서, ‘사랑’을 관통하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왕자 호동>의 경우 국가브랜드사업 1호로 출발했으며 <발레 춘향>의 경우 문훈숙 단장과 박보희 명예이사장의 숙원 사업처럼 진행되어 왔다. 아무래도 이러한 ‘위에서부터의 주도’에 의한 선택은 안무가 개인의 영감과 열망에서 비롯된 작품에 비해 뚜렷한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예술성을 공고히 하는 것을 놓치게 된다.




 ‘사랑’이 인류 보편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무조건 보편인 것도 아니다. 후손인 우리들조차도 태어날 때부터 규정된 신분으로 인해 사랑이 금지되는 현실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안전한 몇 개의 익숙한 코드만으로도 관객 개개인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전생사(前生史)나 공유된 집단 정서가 건드려져 작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다면 편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영민한 관객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예술가의 존재 이유가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감응(感應)하여 보이는 세계로 이끌어내 창조하는 것, 두 세계를 잇는 통역자인 예술가는 그 통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이 진화하려는 방향이 지적인 능력의 격차를 좁혀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성과를 누릴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데 있듯이,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그런 설계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그 설계가 적용되는 곳이 바로 작품의 뼈대가 되는 대본이다.
 대본은 줄거리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소재일지라도 새롭게 보이게 만드는 힘은 탄탄하게 구축된 대본에서 나온다. 각자 다른 의지와 욕망을 가진 인물들이 장면마다 주동, 반동의 입장이 교차되며 입체적으로 다가올 때, 여러 장치들을 통해 불가항력적으로 안배된 ‘운명’과 인물의 처절한 투쟁이 생생하게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설화나 소설은 우리의 마음속으로 쑤욱 걸어 들어오게 된다. 또한 철저하게 다듬어진 대본은 그 자체로 안무와 음악 선택에 구체적인 영감을 줄 수 있다.
 <왕자 호동>과 <발레 춘향>에서 가장 크게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 대본이다. 주인공들은 작품 속에서 사건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정된 결말을 향해 순서대로 달려갈 뿐이다.
 <왕자 호동>의 경우 타이틀 롤인 호동의 갈등과 고뇌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국가와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것이 낙랑만의 심정은 아니었을 터, 그녀를 밀어붙이기까지 호동이 받는 압박도 설득력 있게 구성되었어야 했다.
 대무신왕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원비가 유혹하는 장면이 삽입된 것도 생경하며, 길조인 흰 사슴을 사냥한 것이 파국의 전조로서 복선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애써 만든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폐기하고 그것을 사냥한 직후 두 나라가 관계를 맺는 것이 너무나 수월했다. 매력적인 드라마 발레로 수렴될만한 좋은 소재였건만, 평이하게 그친 것이 못내 아쉽다.




 <발레 춘향>은 갈등의 핵심인 신분 차이, 그것을 극복해내는 춘향의 의지를 그려내는데 실패했다. 춘향이 왜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신분의 여인인지는 월매의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완성되어야 설명이 가능하다. 판소리에서 푸진 입담과 행동으로 닳고 닳은 퇴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월매와 달리, 이번 작품에서 월매는 마치 지젤의 착한 어머니 역할이 그러한 것처럼 배경으로만 존재했다. 어미가 기생이었으니 딸도 쉬울 법 한데 그렇지 않다는 데서 춘향 캐릭터의 의외성이 나오는 것이지만, 여러 모로 지금의 전개대로라면 춘향은 백마 탄 왕자님에게 구원받는 청순가련 여주인공에 다름 아니다.
 또한 몽룡의 아버지가 드러내야 할 반가(班家)의 엄격함 역시 차림새와 형식적인 마임으로만 규정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몽룡이 춘향을 만나러 나간 그날 밤 책상머리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와 대칭되게 자리를 비운 것을 발견하고 진노하는 장면을 첫날밤 파드되 끄트머리에 넣을 수도 있다. 몽룡과 아버지가 갈등하는 장면에서도 가만히 선 채 손의 마임으로만 표현할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어 벌을 받듯 혹은 애원하듯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요 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고려하지 못한 대본을 바탕으로 안무 작업에 들어가면 장면마다 생기는 빈틈을 모두 춤으로 메꾸어야 하므로 부담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맥락과 상관없는 춤을 삽입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왕자 호동>에서 호동과 낙랑의 결혼식 장면에서 축하사절들의 디베르티스망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이나, 클래식 튀튀도 입지 않은 낙랑의 32회전 푸에테는 어색하게 돌출되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왕자 호동>이나 <발레 춘향> 모두 그러면서도 모던한 감각을 위해 한국무용 동작은 배제하였다고 하는데,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무용과 발레를 결합한 메소드를 개발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위임받은 안무가는 그 작품만을 위해 급조하는 것이 어렵고, 무용수들도 그 감각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 서양 발레 역사에서도 각 나라의 민속 음악과 무용을 발레 언어로 유입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이루어져 왔고, 현재 캐릭터 댄스로 남아있는 것들이 그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글씨’ 테마를 어떻게 풀어냈는지 살펴보자. <왕자 호동>에서 낙랑이 호동에게 받은 자명고를 찢으라는 서한은 아주 긴 천에 흘리듯 쓴 글씨가 채우고 있었는데, 낙랑은 그것을 몸에 감으며 추는 춤으로 내면의 압박과 갈등을 그려낸다.
  <발레 춘향>에서는 몽룡의 ‘일필휘지’가 있는데 당당한 어른 남자로 성장한 몽룡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바리아시옹이라고 할 수 있다. 서체가 선비의 얼굴이었듯, 두 장면에서의 스텝은 춤과 인물의 내면이 일체화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또한 한국적인 정취를 춤과 결합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낙랑의 편지 장면이나 춘향의 옥중 장면은 여주인공의 두려움과 절규를 표출하기에 급급하여 슬픔을 억누르는 서정적인 연기를 간과한 면이 있는데 그럴 때 한국 춤이 결합된 메소드의 부재가 아쉽다. ‘일필휘지’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배경에 먹물이 힘차게 번지며 글씨를 이루는 동영상이라도 있었다면 입체감을 더했을 텐데, 과거시험장의 시제를 대신한다며 한자 대신 걸어둔 활자본 한글은 오히려 그 모양의 딱딱함으로 인해 춤의 활력을 반감시키는 느낌이었다.
 또한 사랑하므로 춤이 자동으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하지 춤을 추기 위해 사랑을 설정한 것이어선 안 될 것이다. <왕자 호동>의 침실 파드되는 ‘침대’라는 단어에 갇혀 버린 케이스다. 누운 채 리프팅을 한다거나 서로의 몸을 굴리는 로맨틱한 동작들이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안쪽에 자리한 좁은 침대 위에서만 펼쳐져 빛을 잃었다. 밀실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나누는 그 순간만큼은 둘에게 그 공간이 세상의 전부라면 설령 침대에서 굴러 내려와 무대 공간 전체로 춤이 확장된다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발레 춘향>에서는 단오날의 만남이라는 것이 좀 더 의미심장하게 그려졌어야 했다. 유교사회의 도덕률에 갇힌 남녀가 양기(陽氣) 충만한 이 날 세상에 나왔다가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한낮 축제의 씨름이나 처녀들이 달빛 아래 창포물에 머리감는 장면은 몽룡과 춘향의 첫날밤을 이끄는 마중물처럼 건강한 에로스를 구현할 좋은 소재인데 스치듯 잠깐 나왔다 사라져 버렸다.




 이런 것들을 보면, 세계 시장에 통하지 않는 것의 원죄를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코드 자체가 짊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을 음미하여 해석하고 구현해 내는 심미안, 감성을 작품 제작에 최대한 발휘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무대장치, 의상, 조명 등은 부가적으로 결합하는 요소이므로 대본, 안무, 음악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변화를 준다한들 작품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

 <왕자 호동>의 음악은 북의 퍼포먼스와 다양한 국악기의 편성으로 색깔은 주었으나 주인공들의 테마가 부재하고 발레음악으로서의 완결성이 부족했다는 점, <발레 춘향>의 차이코프스키 음악은 극적인 포인트는 있었지만 천편일률적인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지나친 무게감, 장황함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선뜻 합격점을 주기 어렵다.

2014. 10.
사진제공_국립발레단, 김경진/유니버설발레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