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세컨드네이처 댄스 컴퍼니 〈이방인〉
춤이 춤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다면
방희망_춤비평가

 올 봄 번역문학 관련 출판계는 한바탕 몸살을 앓았다. 진원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기존에 권위 있다고 인정받은 번역판에 공공연한 반기를 든 새 번역판이 등장하면서 벌어진 논쟁은 외국 문학, 특히 소위 ‘명작’이라고 평가받으며 권장도서 목록에 들어간 작품을 소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녹록치 않은 일인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구나 까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의 행동은 별의별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는 이즈음 세상의 기준으로 다양한 해석의 틀을 들이대 봐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 ‘문제작’을 김성한이 이끄는 세컨드네이처 컴퍼니가 작년 초연에 이어 올해 강동아트센터 상주예술단체로 선정된 후 첫 작품으로 다시 올렸다(5월 17-18일.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
 예술감독 겸 안무가 김성한은 1994년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2002년 귀국 후 2005년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를 창단, 2010년부터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게오르그 뷔히너의 <보이체크>, 그리고 이번 <이방인>까지 실존주의 문학작품들을 ‘세컨드네이처 3부작’으로 묶어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익히 알려진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안무를 할 때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안무가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소재를 찾거나 대본을 구성하는 수고는 줄일 수 있을 지라도 구체적인 대사를 통해 내용 전달을 비교적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연극이나 영화, 오페라 등의 장르와 견줄 때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춤으로 선보여야 한다면, 그 이유를 안무가는 철저히 증명해내야 한다. 어떤 언어나 기호의 이중삼중의 해석이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몸짓이 가진 우위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공연은 정면에 세로로 커다랗게 ‘이방인’ 세 글자를 새기면서 시작되었다. 소극장의 공간을 새롭게 활용해보고자 바닥과 앞쪽 객석의자 일부를 들어내고 그 위에 철제 프레임과 망을 얹어 무용수들이 들어가 있다가 손부터 뻗어 나오게끔 했다. 그 장치는 매달린 쇠사슬과 함께 지하 세계라던가 감옥 등 답답하고 억압된 공간의 이미지를 연출하였다. 객석을 들어낸 앞 공간은 나중에 무용수가 들어가서 눕도록 하고 관객이 그것을 들여다보게끔 하여 ‘관’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안무가는 팸플릿의 글에서 소설 <이방인>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과 원작을 서술하는 식의 전개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모티브를 얻었다는 설명은, 앞서 제시한 무대 장치와 두루마리 휴지를 붕대처럼 전신에 감는 등의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 안무자가 원작을 통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어떤 ‘억압’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방인임을 역설하려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춤 공연으로 형상화하면서 어쩔 수 없이 뭉뚱그리긴 했지만, 원작의 주요한 인물 간 갈등 관계와 그 장면들은 대체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그 방식은 다분히 연극적이었다.
 춤을 통해 인물 내면 정서의 흐름과 그 변화, 인물 간 갈등의 지형도를 읽고 싶은데 그 연속성을 파악하기엔 장면마다 단절되어 어려웠다. 춤 속에 연극이 살짝 들어간 형태가 아니라 연극 속에 춤이 들어갔다고 느껴질 정도로 춤의 장악력이 떨어졌다. 춤은 개별 인물들의 그때그때 단편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쓰였고, 그 감정도 분노, 짜증, 절망감 등의 발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그리고 주인공을 살인까지 몰고 가는 역할을 상당 분량 이정훈의 폭력적이고 거친 대사 연기에 몰아 두어 이럴 거면 무엇하러 춤 장르를 선택했는가 하는 의아심을 갖게 했다. 어색한 시선처리와 무용 공연치고는 많은, 그때문인지 미처 입에 붙지 않은 대사들은 그 분량만큼 안무의 부재를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출연진들이 욕설과 농담을 섞어 못 알아듣도록 큰 소리로 얼버무린 머머링(murmuring)을 하며 충돌하는 장면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연상시키면서 사람들이 서로 낯설다고 느끼는 것은 그저 말이 통하지 않아 그럴 뿐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후반부 긴 소파를 놓고 그 위에서부터 시작된 남성 무용수들의 비보이 스타일을 접목한 춤은 잠깐 숨통을 틔울 만큼 경쾌한 속도가 있었지만 어떤 맥락에서 사용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장면들이 안무가가 강조한 것처럼 ‘틀림’이 아닌 ‘다름’을 보여주기 위해 끌어온 것이라면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문학 작품으로서도 해석이 분분한 예민한 텍스트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당대에 파격적으로 등장했던 문학 작품일수록 이미 장외(場外)에서 파헤쳐질 대로 파헤쳐져 정작 무대공연으로 형상화했을 때 긴장감 없이 예견된 결말에 끌려 다니는 경우도 많이 보아 왔다.

 이번 공연도 시종일관 어두운 조명과 쇠창살이 깔린 무대 장치, 그 위에서 발을 굴러 소음을 내고 인공적이고 건조한 음향을 동원하여 무거운 분위기로 끌고 갔다. 안무가가 원작에서 받은 듯한 충격적인 이미지들 혹은 안무가가 특정적으로 추구하는 과격한 스타일이 먼저 지배하고 일관되게 작용하면서 원작이 제기했던, 우리를 둘러싼 일상의 환경, 관습, 판단이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고 중간에 제동을 걸어 우리의 의식을 소환시켰던 것 같은, 그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춤이 작품 안에서 주요 흐름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춤을 추는 이의 실존은 어디에 있는가이다. 춤을 제외시키면서 인간의 실존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문학의 무슨 무슨 사조 이전에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춤의 세계에서 표현에 동원할 수 있는 춤 문법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닐 터이다. 단편적인 인상들을 꿰어 내는 정도로는 안무가가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실존주의, 더 나아가 세컨드네이처라는 이름까지도 공감하기 어렵게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현상들을 느끼고 반응하는 본체인 몸뚱어리에 대해 끈덕지고 절실하게 탐문(探問)하는 작업을 기대한다. 

2014. 06.
사진제공_강동아트센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