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언제부턴가 엄격한 전통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발레에 ‘모던(modern)’ 대신 ‘컨템퍼러리(contemporary)’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동시대 발레라는 뜻에서 이 새로운 이름에 무엇이 문제인가 싶다가도,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함을 아우르기 위한 ‘동시대’라는 용어의 취지에 굳이 발레를 갈라놓을 이유가 무엇인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발레단 이름 앞에 ‘컨템퍼러리’라는 라벨을 달고 출범한 서울시발레단은 그저 춤을 만들고 추어나가는 대신, 스스로의 정체성을 둘러싼 질문들을 면밀히 탐구하고 관객의 이해와 공감을 구해 나가는 방법을 택한 듯하다. 2026년 발레단 시즌을 연 〈더블빌: 블리스 & 재키〉 공연(세종M씨어터, 3.14~22)은 이러한 기획에서 매우 설득력 있고 효과적이었다.
〈블리스〉, 고전적이지만 재지(jazzy)하게
더블빌의 첫 번째 〈블리스(Bliss)〉는 2016년 이탈리아 국립무용단 아테르발레토(Aterballetto)를 위해 안무 된 요한 잉거(Johan Inger)의 작품이다. 발레로 단련된 무용수의 몸으로부터 안무가의 동시대적 발레 이상을 한껏 끌어올려 완성된, 10년의 역사를 지닌 컨템퍼러리 발레 교본이라 하겠다. 작품은 스웨덴 쿨베리 발레단(Cullberg Ballet),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 등 안무가 잉거가 거쳐온 유럽의 동시대 발레들의 원조 미학을 체화해 녹여내고 곱씹어 걸러낸 결과를 여실히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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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블리스〉 ⓒ세종문화회관 |
〈블리스〉의 춤은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Keith Jarrett)의 즉흥연주 〈쾰른 콘서트(The Köln Concert)〉(1975)를 바탕으로 한다. 음악에 기대온 무용의 역사가 그 탄생의 역사만큼 유구하지만 잉거의 안무는 음악에 의한 결과물이 아닌 음악과 함께 있고자 한다. 현대 발레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안무가 ‘음악의 시각화’라 칭해질 만큼 무용수 각자 음표가 되어 몸과 춤의 선율로 무대 위 오선지를 직관적으로 그려 보이고자 했다면, 잉거의 안무는 움직임의 제스처적 질감과 동작의 형태, 솔로와 듀엣, 군무의 반복과 중첩, 배치를 통해 재럿의 연주에서 드러나는 극도의 몰입 속에서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며 환희에 차 넘쳐흐르는 음악적 에너지에 대한 안무적 해석을 ‘음악과 나란히’ 배치한다. 건반이 망가지고 조율도 제대로 안 된 피아노로 즉흥연주의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그의 음악에 대해, 잉거는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마주하는 창작과 훈련의 고통을 넘어 마침내 도달한 삶의 생동과 몸의 활기를 드러내 보이는 환희의 춤으로 화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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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블리스〉 ⓒ세종문화회관 |
무엇보다 작품의 움직임은 동시대 발레가 걸어온, 이른바 ‘탈고전적 기교’라는 이율배반적 가치를 여실히 담아낸다. 토슈즈 대신 양말을 신고 행해지는, 발차고, 가슴을 손에 받쳐 치켜세우고, 스텝을 밟고, 발을 구르고, 천진난만하게 달리고, 어깨를 들썩거리고, 서로를 당겨 세우고, 돌리고, 포개고, 교차하고, 휘감고, 몸통을 구불대고,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시선을 건네고, 미소 짓고, 각자의, 둘의, 셋의, 넷의 미묘한 차이들이 점차 하나가 되어 합치된 움직임으로, 고양된 기쁨을 오직 몸과 춤으로 드러내는 극치의 기교를 완성해 낸다. 곧게 뻗기보다 각지고 비틀린 신체 선, 높게 들려진 가벼움보다 한껏 내려앉은 저중심의 무게, 숨이 차오를 대로 차오르게 한순간도 멈춤 없는 지속되는 흐름은 발레 전통에 철저하게 반대하면서도 철저하게 밟고 올라선 것이었다. 클래식을 섭렵하고 넘나드는 재즈연주자의 즉흥과 기교에 대응하는 명석한 안무전략을 면면히 펼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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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블리스〉 ⓒ세종문화회관 |
〈재키〉, 상업적이지만 지극히 순수(pure)하게
두 번째 작품 〈재키(Jakie)〉는 2023년 NDT 초연으로 완성된 샤론 에얄(Sharon Eyal)과 가이 베하르(Gai Behar)의 협력작이다. 18년간의 바체바 댄스 컴퍼니(Batsheva dance company)에서의 무용수와 안무가 경험으로 축적된 가가(Gaga)적 본능탐구 정신과 테크노 클럽 이벤트 프로듀싱 감성이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 컨템퍼러리 발레의 최신본을 엮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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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재키〉 ⓒ세종문화회관 |
〈재키〉의 춤에서 역시 음악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디제이와 드러머로서의 이해에 기반한 오리 리히틱(Ori Lichtik)의 음악은 안무 과정에서 발생되는 정서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비트와 샘플로 축적된다는 제작과정1)을 고려하자면, 춤이 음악의 출발이 되고 함께 생성되어 춤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춤인 총체적 유기체로서 관객에게 전달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춤과 음악의 실존적 결합은 엄격한 타이밍과 정서적 일치로 오려 붙여져 에얄과 베하르 만의 독특한 안무전략으로 작품 속에 그들의 이름표를 새겨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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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재키〉 ⓒ세종문화회관 |
특히 〈재키〉에서 그녀의 안무는 전적으로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들임에도, 무용수에 의해 복제된 무엇이라기보다 완전히 무용수의 몸을 고통스럽게 통과해 이해되고 완성된 충동적인 움직임의 기교적 완성이라 읽혀진다. 이유도, 근거도, 논리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들 붙잡아 “총체적 느낌(total feeling)”을 안무의 목표로 모든 안무를 직접 추어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작업방식2)은 그 어떤 언어적, 이성적, 감정적 구체성 이전의 오직 몸의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원초적인 움직임 충동을 끌어내어 보이고자 한다. 총제적인 느낌을 완성해내는데 있어 의도적인 의미의 표현과 해석에 대한 의례적 행위는 필연적이기보다 개연적이기에 재키가 무엇인가 또는 누구인가의 질문은 자못 부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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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재키〉 ⓒ세종문화회관 |
작품의 핵심인 원초적 충동적 움직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고도로 재단적인 순수한 형태(순수예술이 자신의 정체적 가치로 주장했던 미적 형식)로 조율되었다. 까치발로 선 채 버티며, 그랑과 데미 플리에 사이를 오가며 멈춰선 날선 근육들과, 불쑥 삐져나와 이죽거리는 엉덩이, 치켜세운 어깨, 관객을 등진 뒷태, 잘게 이어지는 파드브레 위에 얹혀진 뻣뻣하고 삐뚤어진 몸, 파티 신의 보깅(voguing)과 스트릿의 집단춤을 연상케 하는 안무배치와 움직임 형상들, 오와 열을 맞추지 않는 치밀한 계산된 부정렬, 충동의 급작성을 위한 흐름과 호흡의 전면 삭제 등이 움직임의 독특한 질감으로 버무려졌다. 이러한 충동적 날것의 안무적 타이밍들은 지쳐 쓰러질 듯한 반복과 중첩, 그리고 다시금 사선, 덩어리, 개인과 집단의 시각적 조형성 등 지극히 발레적이고 전통적인 구성방식으로 프로듀싱되고 정제되었다. 아주 조용한 음악과 극도로 느리면서 미묘한 움직임 변화로 단단히 버텨지는 작품의 에너지는 이내 후반에 이르러 켜켜이 쌓여 터지기 직전의 밀도 높은 테크노 음악 비트에 부딪히며 원자에너지 반응을 무대에 가득 채워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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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재키〉 ⓒ세종문화회관 |
서울시발레단과 그 무용수들로 다시 태어난 더블빌
각기 다른 맥락과 작가로부터 완성된 두 작품은 서울시발레단의 ‘더블빌’이란 모음 속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짧지만 혼란스러운 컨템퍼러리 발레의 예술적 전개를 짚어가는 단서들을 안무의 논리와 움직임 형식의 비교를 통해 마련해 주었다. 구체적인 서사를 버리고 안무와 몸과 움직임에 천착한 동시대 발레를 이해하기 위해 프로그램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사와 인터뷰와 작품해설을 친절히 담아 관객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더블빌의 안무가들은 지극히 논리적이었고, 무용수들은 더욱 성실하고 열정 넘쳤으며, 무대에 이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열정과 환희, 쾌감과 충동의 폭발은 짜릿하고 흥분되기보다 관조적이고 정론적이었다. ‘새로운 것은 이미 없다’는 미학적 선언에 컨템퍼러리 댄스 안무가들은 그 움직임의 근원을 막론하고 창의적인 무엇을 갈구하기보다 자신만의 이유와 논리를 단순한 움직임들로 집요하게 굳건히 세워나가야만 했다. 이번 공연에서 그것을 충분이 맛보았다면, 이제 탐구적인 레퍼토리를 통해 동시대 발레 무용수 양성과 관객의 이해를 구한 플랫폼을 딛고 서울시발레단 고유함을 춤추어 선보일 발레단의 짜릿한 차기 행보를 기다려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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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시발레단(2026), 〈더블빌: 블리스 & 재키〉 프로그램북, p.53
2) 앞의 글
이지선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교수, 댄스&미디어연구소 연구원으로 동시대 춤 미학과 비평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 실천연구에 관심을 갖고 공연현장에서 크리에이티브 퍼실리테이터로서 안무리서치, 기획 및 아카이빙 등에 참여하고 있다. 2004년 국제공연예술제 제1회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춤웹진, 몸, 춤과사람들, 춤in 등에 기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