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때로는 앞에 펼쳐진 길이 너무나 또렷해서, 도리어 그 행보가 더딘 경우가 있다. 아리송한 지점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명료해 보이는 〈셩율전26〉(2026년 3월 14~15일, 더줌아트센터)을 두고 떠올린 생각이다. 노른자가 두 개인 알, 움직임을 연속사진으로 기록한 이미지, 별명에서 따온 이름으로 조합한 공연 제목까지. 공연은 이 선입견을 깨고 무엇을 보여줄 것이며, 또 그 안에서 관객은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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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셩율전26〉 ⓒ권택기 |
중견 무용가 이소영·배유리 두 사람이 마련한 무대는 작고 소박하지만, 서사와 드라마로 가득 차 있었다. 소극장의 네모반듯한 무대 위로 첫 곡 헨델의 오페라 〈아리오단테〉의 선율이 퍼졌다. 바로크 음악을 배경으로, 바로크 시대를 연상케 하는 복장을 한 무용수가 등장했다. 프릴 달린 블라우스와 재킷, 무릎 선에서 떨어지는 바지, 페티코트처럼 곡선을 살린 스커트. 사랑했다는 믿음이 무너진 데 따르는 깊은 슬픔과 상심, 절망을 담고 있는 음악을 배경으로 두 사람은 신뢰와 유대, 호흡이 돋보이는 움직임을 펼쳐나갔다. 느릿하고도 긴밀하게, 접촉즉흥에 가까운 움직임이 차근차근 쌓이면서 공간에는 드라마가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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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셩율전26〉 ⓒ권택기 |
공연의 시작을 연 첫 번째 듀엣 이후 두 사람의 솔로가 교차로 총 네 차례 진행됐다. 그사이 음악은 바흐와 헨델을 지나 팝과 현대음악에 이르며 믿음과 슬픔, 고통과 해방에 이르기까지 사랑에서 비롯하는 다양한 이야기와 정동을 차차 펼쳐냈다. 그 움직임은 굳이 ‘춤’으로 불리기보다 ‘몸으로 말한다’는 설명이 어울릴 것 같다. 온전하게 장면에 몰입해 발현되는 다양한 표정, 끊이지 않고 선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리듬, 몸으로 불리는 모든 구성 요소가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음악이 바뀔 때면 능숙하게 춤 스타일을 변화시켜 폭넓은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가운데 배유리에게 비친 ‘천의 얼굴’은 그 시절 공옥진의 공간사랑 무대를 상상하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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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셩율전26〉 ⓒ권택기 |
제한이 많은 무대임에도 50분 길이에 맞춰 짜임새 있게 구성한 것도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극장의 크기는 작지만, 조명을 다채롭게 사용해 무대가 전환되는 동안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한 것은 섬세함이 돋보이는 장치였다. 구성상 첫 번째 듀엣은 서곡 혹은 프롤로그, 마지막 듀엣은 에필로그 격으로 느껴지도록 해 여섯 장면과 커튼콜이 결국 ‘한 편’임을 강조했다. 소품 외에 무대 세트가 마련된 것은 아니지만 장면의 독립성과 연계성을 위해 의상을 계속해서 갈아입고 등장하는 등 면면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사와 사조가 뚜렷하게 강조되는 음악을 선택한 것에 장단점이 있겠으나, 연극과 다원 작품에서 활발히 작업해온 강화정 연출의 장점을 살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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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셩율전26〉 ⓒ권택기 |
두 사람의 이름 뒤에 ‘-전’을 붙인 제목처럼, 배유리·이소영 두 사람이 그간 추구해온 춤의 궤적을 마치 포트폴리오처럼 보여준 무대였다. 파드되 혹은 듀엣에서 가능한 2인무의 매력 또한 잘 살렸다. 뮤지컬·연극 등 다수의 극 작품에서 안무와 움직임 구성을 맡아온 이력처럼, 두 무용가가 추구해온 춤의 특장점이 돋보였다. 서사는 배제되고 (극단적으로는 비인간에까지 이르는) 움직임에 집중하는 동시대 춤 트렌드에서 드라마가 만드는 감동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랄까. 춤으로 불리는 움직임이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해석될 수밖에 없는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이 만든 무대에 몰입, 그 이상의 의미 혹은 시너지가 있었냐고 한다면 섣불리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춤추는 이들의 온도는 상당했으나, 맞은편 객석에 자리한 관객 또한 그 정도로 몰입했을까? 너무나 유명한 라벨의 ‘볼레로’를 선곡한 마지막 듀엣에서 오히려 이들의 케미스트리가 좀 아쉽다고 느낀 것은, 결국 이 무대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부재하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수행자로서 무용수였다면 충분히 훌륭했다고 하겠으나, 이미 중견으로 자리매김한 두 사람에게 보고 싶은 것은 그 이상일 테니 말이다.
그와 별개로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을 갈망하게 한 것은, 춤에 목말랐다는 듯 그 시간을 들이키는 두 무용가의 춤판 자체였다. 춤을 짓는 사람의 역할에 집중해온 이들이니 자신만을 위한 무대가 주어졌을 때 누구보다 고민도 욕심도 많았을 것이다.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발현하기 위한 춤 역시 중요하지만, 이 네모난 한 뼘 땅을 매개로 시대와, 관객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고민한다면 공연의 방향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현재를 기록하는 무대로 남을지, 미래를 위한 마중물로 삼을지는 두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김태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무용이론으로 석사 학위를 마쳤으며,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SPAF 젊은 비평가상으로 등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