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브제-정신이 바라 본 '몸의 변형'들
김판선의 맨몸의 벗은 등이 바닥에서 분리되어 그 형체를 드러낼 때 그건 ‘무에서 유의 창조’가 무엇인지를 단숨에 알게 하였다. 살아있다는 것의 가장 큰 징표로써의 ‘몸’은 아름답기가 제일이다. 한순간 들이 쉰 숨이 뱉어지지 않고 멈춰 버리면 금새 시들고 어두어져 썩어버리고 말 이 ‘허약한’ 몸이라는 덩어리는 그것이 숨쉬고 있을 때, 심장이 뛰고 허파가 헐떡거리고 혈관이 팽창하고 수축하기를 반복하며 살아있을 때, 그 덩어리는 그 죽음을 상상할 수 도 없을 만큼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 매혹은 등의 표정하나로 존재의 탄생을 함축한 첫 장면 이래로 그의 ‘벗은 몸’이 가식없는 몸 자체를 보여준 30여분 동안 지속적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긴 바닥과의 밀애 후 서서히 일어난 몸은 쓰러질 듯 위태한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생명의 꿈틀거림을 드러내는 무정형의 형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마치 신의 창조물로써의 아담의 몸을 연상시키는 <Eating Spirit>
팜플렛을 통해서 보면 김판선은 춤추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충실히 하고 있어 보인다. 몸과 정신의 문제에서부터 외부세계와 존재와의 갈등, 의식의 모호성과 동시성 그리고 의식 내에 존재하는 외부의 것과의 혼용과 공존에 대한 성찰을 결국은 몸의 문제로 가져오는 별 혼돈없는 완결성도 갖고 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존재를 공간성을 이용해 시각화 했으며 상징적 오브제들을 사용해 명료하게 규정하였다. 무대 우측에 물이 고일 수 있는 바닥을 만들어 태반과 비슷한 살색의 껍질과 양수로 그 안을 채워 넣고 그곳을 생명의 출발지인 모태로 만들어 놓은 것, 그렇게 탄생된 후의 존재는 관보다 약간 큰 작은 방을 만들어 외부세계와 존재의 내면을 공간적으로 시각화 하거나 표면에 거울을 달아 존재의 반영성을 상징한 것 등 김판선은 검은 색 바지를 입고 하나의 존재가 되어 그 안에 갇히거나 밖에서 그것을 힘겹게 옮기고 그것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면서 힘겹거나 좌절하거나 그 자체를 즐기면서 세계내의 존재로써 자신을 확보해 나간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오브제는 ‘무거운 신발’이다. 로봇의 것처럼 크고 둔탁한 메탈느낌의 굽 높은 신발은 그의 몸과 가장 이질적인 대조를 이루는 물건이다. 그 신발은 어느 곳으로 그를 데려다 주기는커녕 그의 의지와 그의 생명력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지만 그는 무던히 그것을 신은 채 움직여 보려고 애쓴다. 점차 가기 위한 목적은 잊고 온몸의 힘을 신발을 들어 올리는 것에 모으는 일이 되어가는 과정은 몸과 정신의 분리와 갈등을 아주 잘 포착하여 보여준다. 정신의 입장에서 몸과 정신의 관계와 그것의 구조를 바라보게 되면 정신은 어느 순간 몸에 심각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몸을 자신의 속도와 방향에 동반하려고 하나 그것은 말 듣지 않는 무거운 물건에 불과하게 느껴지기 일쑤이나, 그렇다고 벗고 뛸 수 도 없으며, 때론 정신에 상처와 회복할 수 없는 상처와 구속감을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그가 다시 들고 들어 온 또 하나의 큰 박스와의 해프닝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요상한 박스는 그 안에서 꺼내 무언가에 연결시켜 놓았을 때 자동적으로 전동의 힘을 얻어 꿈틀대기 시작한다. 미친 듯한 내장의 광란은 그것의 추악함과 동물적인 저열함을 피부에 와 닿도록 보여주며, 그것을 바라보다 물거나 거칠게 내려치는 남자의 행위는 정신의 입장에서 아주 강렬한 몸에 대한, 혹은 외부세계에 대한 상대편의 추악함과 맞먹는 신경질적인 과민한 폭력의 극치이다. 그러나 이 광란은 도를 넘지 않으며 얌전하게 마무리 되고 그 정신은 스스로 밀밭 한 가운데 모자를 쓰고 가방을 든 모습으로 평정을 얻어 자신의 길을 떠난다.
어떤 작용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금지된 정서반응
이런 장면들은 거의 무채색의 느낌으로 투명에 가까운 질감을 가지고 진행된다. 초반 30분은 김판선의 몸 자체가 주는 강렬한 생생함으로, 이후 시간에서는 그가 사용한 오브제들 자체가 상당히 하드코어 한 것이었으나 우리가 그것을 보는 동안 별로 심하게 느끼지 못한 것은 전체적인 색감 자체가 무채색에 가까웠으며 투명한 정도로 모든 것이 조절되었기 때문 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심하지 않게 느낀 정도가 아니라 현장성 보다는 마치 오래전 바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또 하나 이런 느낌을 주는 원인으로는 정서적인 강도가 제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Eating Spirit>
몸의 세밀한 부분의 근육이 살아서 아우성치더라도 그것을 통합하여 한 인간의 존재로써 반응하는 정서적인 표현이 얼굴을 포함하여 몸 곳곳에서 그런 표현을 위해 움직여주지 않는 다면 관객은 춤추는 몸을 선뜻 따라 나서지 못한다. 그건 그저 쇼 윈도우 안쪽의 차가운, 결코 만지고 싶지 않은 그런 몸일 것이다. 초반의 벗은 몸의 춤이 그가 벗었다는 것을 안 이후 긴 시간동안 증폭되지 못하고 단순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얼굴과 몸 어디에서도 몸의 물질적 균형과 조화를 압도하는 정서적인- 이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말하면 ‘정신(spirit)’의 - 표정을 보고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가로써 한동안 우리의 현대춤이 철학적 성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워 하던 시절이 있었다. 소박한 자신에 대한 성찰, 보다 발전된 존재론적인 사유가 담겨있지 않고서는 동시대춤으로써 공감을 받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동시대에 대한 어떤 발언에 대해서도 기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김판선의 춤을 보면서 그런 기우는 접게 되었다. 오히려 지금의 문제는 엄청난 철학적 언술이 자연스럽게 무용가의 입을 통해 술술 나오기는 하나 그것은 고급적인 취향과 장식물로써 기능할 뿐 진정하게 철학함의 의미와는 겉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현대예술가로써 철학적 성찰과 사유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렇게 장식적인 멋을 충족시켜주는 아주 건조하고 핏기 없어진 철학함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정신을 다루려는 주제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그 주제는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만큼 겉돌고 있다. 만약 이 작품이 다른 작가의 작품이거나 안무자가 별도로 있고 김판선이 무용수로만 출연했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스스로 작가가 되고 춤을 추는 일을 동시에 할 때, 정서가 배제된 얼굴과 몸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자신의 주제의식임에도 그렇다면 그건 어디선가 남의 형식을 빌려와 자신도 익숙치 않은 식으로 말하고 있을 때 뿐일 것이다.
이 작품은 오브제의 설정, 논리적 사용과 개념적 구조 등 그 짜임새에도 탄탄하다. 투명성의 색감과 영상과 음악, 그리고 적절한 보이스의 사용 등 다른 형식적 장치들도 세련되었다. 특히 김판선의 완벽한 살아있는 몸은 훌륭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 모든 훌륭한 것의 총합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춤의 아름다움은 어떤 관념적인 것을 다루더라도 그것이 몸이라는 가장 정교한 정서적 장치를 통해 드러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함은 이 모든 것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며 객관성을 잘 확보해주어 예술가를 도와주는 뜨거운 힘이다. 김판선의 용기있는 시작엔 박수를 보내나 그가 접어든 작가적 입구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