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시발레단이 창단 2주년 공연(2026. 8. 14~16,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으로 크리스티안 슈푹(Christian Spuck)의 〈일곱 번째 파랑 Das siebte Blau〉과 알렉산더 에크만(Alexander Ekman)의 〈선인장 Cacti〉이 간택되었다. 2000년과 2010년에 각각 초연된 작품으로, 본디 같은집 태생이 아니었던 이 둘은 ‘컨템퍼러리 발레’라는 거대 세계 아래 〈죽음과 소녀〉라는 하나의 표제로 개체군을 형성했다. 200년된 음악, 시적 서정성과 풍자적 유희, 같은 선율에 다른 감각 등의 문구로 각종 매체의 뜨거운 지지와 호응 속에서 무엇보다 두 작품이 함께이기에 이룬 프로덕션의 성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1: 관계하는 몸, 그 미세한 온도 변화
기자, 비평가, 무용학자, 안무가의 작품에 대한 교과서 버금가는 친절한 배경설명과 무대 위 라이브로 연주되는 현악4중주의 강력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작품 〈일곱 번째 파랑〉에서 핵심은 몸이다. 무대는 거창한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거추장스런 장치, 조명과 의상을 비워내고 몸과 몸의 관계로 만들어지는 춤을 작품의 중심에 둔다. 춤은 음악의 선율과 리듬으로 드러나는 시간성과 성실히 조우하면서도 음악이 담아낸 죽음의 주제를 직역하지 않는다. 시와 음악이 직접적으로 은유하는 죽음을 마주한 소녀의 두려움도, 소녀를 압도하는 죽음의 엄숙함도 고도의 기교로 정제된 몸들의 펼쳐짐에 고개를 숙인다. 작품이 요구하는 절제된 섬세함에 지난 2년간 서울시 발레단 무용수들이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땀흘려 다져온 다양한 움직임 언어의 숙련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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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일곱 번째 파랑〉 ⓒ세종문화회관 |
질주하며 끊임없이 등퇴장을 반복하는 가운데 일곱 쌍의 무용수들이 만나고 떨어지고 서로에게 몸을 기울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파트너링은 누군가를 번쩍 들어 올려 기량을 과시하기보다 상대의 무게를 건네받고 되돌려주는 상호작용에 가깝다. 그 사이사이에서의 작은 어긋남이나 머뭇거림이 각각의 춤과 만남에 미묘한 의미의 결을 만들어낸다. 무용수들의 스텝은 매번 정성스럽게 바닥과 접촉하며 죽음의 세계를 그려낼 듯 물질적 신체의 무게를 기화시킨다.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무용수의 뒷모습, 무표정, 바닥에 쓰러짐은 춤의 정서를 직접적 감정이 아닌 움직임 그 자체로 집중하도록 한다. 꺾인 신체 디자인과 몸들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결과보다 그에 도달하는 몸들의 대응과 변화과정에 관객의 감각을 잡아당긴다. 발레 고유의 정교한 선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완결된 포즈로 멈춰 있기보다 끊임없이 다른 몸을 향해 이동한다. 관객들의 감각이 이동하는 몸들을 쫓아 유영하며 길을 잃어갈 때쯤 객원 수석으로 참여한 강효정의 등장은 확실한 찰나의 액센트를 만들어주었다. 단단함과 탄력의 극치 속에서 발휘되는 한치의 흔들림 없는 그녀의 빼어남은 결코 으스대거나 격렬한 호소가 아닌 방식으로 무거운 주제 앞에 당당히 설득력 있는 춤의 통찰을 그려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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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일곱 번째 파랑〉 ⓒ세종문화회관 |
움직임 기교와 안무에 대한 안무가의 동시대적 해석은 클래식발레와 발란신이 만들어낸 전통, 로사스와 포사이스를 거쳐 슈푹 자신의 몸을 통과해 밟아온 안무가의 춤여정이 뒤섞여 여과된 결과다. 그리고 서울시발레단의 무용수의 몸들을 만나 완성된 움직임 미감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온몸의 감각을 단단히 사로잡았다. 죽음에 대한 슈푹과 무용수들의 묘사는 관념적이고 감정적이보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을 취한다.
작품 1+1: 믿고 보던 춤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인터미션 뒤 〈선인장〉이 시작되면 묵직하게 내려앉았던 극장의 온도는 급격히 달라진다. 무대는 오르내리거나 카드섹션을 하듯 이리저리 움직여 모양 낼 여러 개의 이동할 수 있는 개별 단상들, 가로로 세로로 사선으로 따로 다같이 둥글게 네모나게 길게 사선으로 화려하게 점멸하는 디자인의 조명들, 손으로 내리쳐 흰가루가 스모그처럼 흩부려질 머리장식들, 길다랗거나 펑퍼짐하거나 동들동글거나 뾰족한 가지각색의 선인장 화분들, 천정에서 떨어지는 타버린(?) 고양이 등 에크만이 가진 오브제와 무대미술 연출에 대한 빼어난 감각을 총동원한 극장장치들로 가득차 있다. 여기에 더해 이분법의 대명제 아래 구축되온 미학적 진술들에 일침을 가하는 텍스트와 내래이션이 얹어진다. 공연 중 프로시니엄 박스 좌우 스크린으로 스쳐지나가는 영어발화와 번역 텍스트들이 자칫 놓쳐질까 프로그램북 삽지로 별첨되어 꼼꼼히 읽혀질 수 있도록 배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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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선인장〉 ⓒ세종문화회관 |
무대 위 움직임은 한껏 채워지지만, 역설적으로 안무는 총체극 속의 일부로 스스로의 무게를 덜어낸다. 그로테스크한 자세와 해체적인 몸짓이 최소한의 등퇴장으로 무대를 점거한 채 집단적으로 맞물렸다가 이내 흩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한다. 무용수들은 호흡과 성대의 떨림, 몸을 두드리고 바닥을 내리쳐 음악에 소리와 리듬을 더해 춤을 추어 낸다. 죽음을 다룬 음악이라는 주제적 관계는 삽입된 곡의 종류만큼이나 앞선 무대보다 억지스러운 모양새를 갖춘다. 춤은 기교적이기 보다 유희적이고 다듬어지기고 정제되었기보다 장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정교하게 그려진 극사실주의 회화들을 찢어 거칠지만 철처하게 계산된 방식으로 여기저기 붙여 패스티시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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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선인장〉 ⓒ세종문화회관 |
그 총체극과 장광설로 드러나는 것은 극장예술로서 무용과 비평이 쌓아온 순수예술탑에 대한 의심이다. 제의와 예술, 춤과 음악, 몸짓과 대사의 이분법으로 쌓아 올리고자 했던 그것은 무엇인가. 선인장은 무엇인가. 춤은 무엇을 의미하나. 안무가는 어떤 의도를 드러나고자 했나. 비평가와 관객은 어떤 의미를 해석해야 하나. 이러한 질문들에 둘러쌓여온 안무가의 외침과 각성이 일제히 해석놀이에 빠졌던 관객들을 웃음으로 깨워낸다.
더블빌 프로덕션, 작품에서 공연으로
여기까지 보고 나면 죽음에 관한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라는 표면적인 고리로 두 작품을 느슨하게 묶은 서울시발레단의 기획이 그럴싸한 설득력을 갖는다. 앞선 7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음악을 몸으로 들을수 있도록 선보인 세종인스피레이션 〈죽음과 소녀 콘서트〉와 함께 극장의 연간기획 프레임 안에 그 느슨한 고리는 관객들을 더욱 단단히 엮어 모았다. 작품을 하나의 표제로 묶어 올렸기에 관객들은 연이어 펼쳐지는 무대를 연결지었다. 침잠(沈潛)과 몰입을 종용하는 슈푹의 무대는 환기(喚起)와 거리두기를 외치는 에크만과 만나 첨예한 대비와 전환을 이뤄냈다. 두 작품을 마주한 관객들은 예술가가 완성한 춤적 기교와 예술에 대한 전복적 사유에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관객들은 더블빌의 기획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로 이동했다. 공공의 기금으로 고유한 정체성을 담은 레퍼토리 창작에 주력하기보다 해외 수입작들을 다양하게 선보인 그간의 행보도, 안정적인 무용수 확보 대신 시즌 무용수와 레퍼토리별 프로젝트 무용수, 해외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한국 무용수들을 함께 구성하는 방식도 이쯤해서 따뜻한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지지를 얻는다. 프로덕션 중심의 운영은 ‘무엇을 갖고 있는가’ 대신 ‘무엇과 무엇을 만나게 하는가’로 중요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공공발레단이 이룩하고픈 모두를 위한 발레는 가치 있는 레퍼토리도 친숙한 주제도 친절한 설명도 아닌 하나의 공연 안에서 자기만의 해석으로 즐길 수 있는 관객의 태도로 완성된다면 이번 더블빌 공연은 그 몫을 적잖이 이루어 낸 것이 아닐까.
이지선
춤연구자, 비평가.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교수, 댄스&미디어연구소 연구원으로 동시대 춤 미학과 비평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 실천연구에 관심을 갖고 공연현장에서 크리에이티브 퍼실리테이터로서 안무리서치, 기획 및 아카이빙 등에 참여하고 있다. 2004년 국제공연예술제 제1회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춤웹진, 몸, 춤과사람들, 춤in 등에 기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