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경신ㆍ정형일
지구 종말과 현대과학의 남용
김채현_춤비평가

올해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가운데 김경신과 정형일의 공연은 지구 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욕망, 권력의 하수인이 된 과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컨템퍼러리댄스와 발레 양식으로 현대 문명을 도마에 올리는 의욕이 돋보였다.


지구 종말에 맞서는 포용적 존재 탐색

수십억년 후 태양의 소멸로 지구 종말이 있을 터이고, 목전의 일로서 인류 문명의 종말이 마치 지구 종말처럼 미구에 닥칠 것이라는 불안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지구가 우주에서는 매혹적인 푸른 구슬로 보인다지만 정작 그 안의 인간들은 지구 종말의 딜레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이 난감한 문제를 김경신은 〈제이슨 프로젝트〉(Jason Project)에서 부각시키고 전망을 찾아간다(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1. 24~25.). 이번 작업은 그가 문명을 일궈온 인간의 활동을 다각도로 조명했던 호모 시리즈와 연관이 있어 그의 끈질긴 작품 의식을 보여주었다. 김경신의 〈제이슨 프로젝트〉는 제이슨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에게 인간 존재를 비추어 내는 역할을 부여한다. 비가시적인 제이슨의 정체는 포괄적으로 제시되며, 관찰자가 그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지구는 탐구되고 기록된다.







언플러그드바디즈 〈제이슨 프로젝트〉, 18th ARKO SELECTION 제공 ⓒSang Hoon Ok



〈제이슨 프로젝트〉에서는 제이슨의 정체를 탐문하는 관찰자 한 사람(최우석 역)이 설정된다. 그의 시선은 인간 탄생 이전의 지구와 현재 문명의 지구로 향하며, 훗날 인간이 사라진 다음의 지구를 향한 그 시선은 미확정적이다. 공연은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모두 5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각 장의 내용은 두 행성의 충돌과 지구 생명의 순환, 제이슨의 탄생과 진화, 실험실 속의 실패와 창조, 제이슨의 탈출과 전환, 그리고 미완의 경이로운 세계의 순으로 압축된다. 관찰자의 집요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훗날 운명은 불투명한 상태로 남겨진 채 객석에 시사점을 던진다. 생명과 기원을 은유하는 지구본, 인간 문명의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테이블, 진화의 흔적을 담은 인간의 뼈 그리고 인간이 그려내는 것은 지구의 유구한 행로이다.





언플러그드바디즈 〈제이슨 프로젝트〉, 18th ARKO SELECTION 제공 ⓒSang Hoon Ok



공연에는 검은 수트 차림의 관찰자, 살구색 속옷을 입은 두 남녀, 검정색 다이빙수트를 입은 여섯 남녀가 출현한다. 공연 전반에 걸쳐 시종일관 매 장마다 그들은 어우러지는데, 관찰자는 그들 속에서 그들의 일원이 되어 운명을 함께 하는 내부자적 시선을 취한다. 생명체로 내세워진 살구색 남녀들과 진화의 변곡점에 위치한 생명체로 내세워진 검정색 남녀들이 뒤섞이는 현상은 다소 주목을 요하는 설정이다. 그 현상은 겉으로는 인간의 욕망에 따른 진화에 폐해와 파멸이 따른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하지만, 검정 남녀들이 살구색 남녀들을 무시로 접촉하거나 조리트는 순간들을 주시해보면, 예기치 않게도 거기에는 진화는 매 순간의 멈춤도 없이 진행되며 더욱이 죽음이나 멸종은 영원한 종결, 사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생명의 발현에 해당한다는 속뜻이 감춰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안무자가 특히 〈제이슨 프로젝트〉를 통해 추구하고 환기하려는 세계가 생사 구분을 뛰어넘는 무분별의 그것이라는 점은 포용성의 미학 측면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을 터이고, 이로써 〈제이슨 프로젝트〉는 안무자의 이전 호모 연작들을 넘어섰다고 하겠다.





언플러그드바디즈 〈제이슨 프로젝트〉, 18th ARKO SELECTION 제공 ⓒSang Hoon Ok



이번 공연에서 생명체의 남녀들과 진화 변곡점의 남녀들 사이에 움직임의 변별성이 옅고 제이슨의 실상이 희미하며 5개의 장들이 유사한 분위기를 이어나간 것은 보완되어야 할 부분들이었다. 배경 음악으로 쓰인 칼 젠킨스의 〈팔라디오 리이매진드〉를 제하면, 베토벤의 〈월광〉, 차이코프스키의 〈꽃의 왈츠〉는 역할이 약하였다. 아무튼, 〈제이슨 프로젝트〉의 주체라 할 제이슨은 지구 탄생 이래 편재(遍在)해온 존재이자 존재의 존재로 해석된다. 인간의 모태이자 문명의 기반인 지구를 보다 거시적인 시점에서 진단하고 파멸을 막는 일은 지구 종말의 딜레마가 갈수록 가중되는 오늘의 문명에서 심지어 절박해지는 중이다. 이에 동참하기 위해 제이슨 차원의 근원적 존재와 대화하고 감싸며 춤으로 구현하는 작업 또한 더욱 그러하다.



언플러그드바디즈 〈제이슨 프로젝트〉, 18th ARKO SELECTION 제공 ⓒSang Hoon Ok




과학 남용 비판 발레, 재해석의 진취성

고전(古典)은 계승되거나 변형되거나 파괴되거나 아니면 잊힌다. 고전의 타고난 운명은 그렇다. 잊히지 않는 고전은 소위 바탕 또는 샘물이 되며, 특히 재해석 작업에서 고전이 샘물로서 기능하는 바는 막대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 발레계에서 패러디를 포함 다채로운 재해석 작업이 성행하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국내에서 고전발레의 재해석이 뜸한 데는 여러 사정이 있을 터이나, 비단 발레계뿐만 아니라 춤계가 지적으로 나태하든가 안일한 것도 한 요인이 아닐까 한다. 정형일이 안무한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각성’〉(Sleeping Beauty ‘Awaken’)(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 6~8.)은 이 같은 경향과는 대조를 이룬다. 공연 시간이 긴 대작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재해석해서 〈각성〉을 100분 넘게 공연한 사실은 그의 재해석 작업이 열의를 바탕으로 성의 있게 진행되었음을 느끼도록 한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각성’〉, 18th ARKO SELECTION 제공 ⓒSang Hoon Ok



〈각성〉은 감성을 억누르고 신분제를 고수하는 권력이 유전자의 선별을 무기로 권력의 공고화를 꾀하는 어느 미래 사회를 그려내는 데 있어 원작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얼개를 차용하였다. 개인의 감정을 무작정 자제하도록 조종하는 완전 유전자를 선별하는 작업은 과학자들이 수행한다. 완전 유전자를 품지 못한 수정체는 불완전 수정체로 분류되어 폐기된다. 대리모에게서 얻은 왕자의 수정체에서 불완전 유전자가 발견되지만 어느 윤리적인 과학자에 의해 그 수정체는 구원받는다. 왕자의 수정체를 보호하는 요정들의 도움으로 왕자는 태어나 성인이 된다. 완전 수정체 소지자로 태어났으되 감정을 잃은 얼음 공주인 오로라는 왕자와 만나 서로 연정을 나누면서 함께 감정을 회복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나 공주와 왕자는 이별하고 감정을 잃지만, 요정들의 지지와 도움으로 다시 만나 감정을 회복하게 된다. 전체 서장-3막은 윤리의 붕괴, 탄생과 은폐, 감정의 폭발, 각성과 구원을 주제로 펼쳐진다. 풀이하자면, 〈각성〉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다 소설 〈1984〉 유형의 문제의식을 덧붙여 유전자 조작 같은 현대과학의 남용 풍조에 대해 메스를 가하였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각성’〉, 18th ARKO SELECTION 제공 ⓒSang Hoon Ok



〈각성〉의 캐스트는 왕비와 라일락 요정과 요정들뿐 아니라 유전자 감별 실험체(고양이, 빨간 망토, 다이아몬드, 파랑새, 사파이어), 다수의 유전자와 과학자로 구성된다. 유전자와 과학자 등 캐스트에 따라 원작과는 다른 움직임을 펼친 것은 물론이며, 무대에는 유전자를 상징하는 구체들, 수술 메스, 권력을 상징하는 수직의 대형 벽체 등이 설치되었다. 음악은 원작의 곡을 발췌한 것이 축을 이루고, 전체 25곳 정도의 씬들은 각기 짧은 시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10곳 정도의 씬에서 짤막한 소품으로 분류될 만한 춤 장면들이 펼쳐졌다. 이 가운데 다섯 씬에서 공주(박유진 역)의 순정한 연기와 왕자(김경원 역)의 순발력 있는 연기가 어우러져 공연의 밀도를 높였다. 그 보조 역할로서 요정들의 집단무, 그리고 하얀 가운을 걸친 과학자들의 춤이 각각 여러 곳 삽입되어 보는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정형일발레크리에이티브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각성’〉, 18th ARKO SELECTION 제공 ⓒSang Hoon Ok



이상의 전개에 비추어, 〈각성〉은 현대과학의 남용을 겨냥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발레 관객과 함께 대중적 공감을 확보하는 장치로서 원작 발레의 흥취와 구성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수긍이 가는 한편으로, 씬들의 수를 조절하고 원작 움직임들을 다른 시각으로 변주하거나 유전자 감별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등 내용 구성 면에서 검토할 만한 점들도 눈에 띄었다. 짧게 처리되었지만 왕자 뇌에 칩을 삽입해서 잠들게 하여 웃음을 정지시키는 대목은 ‘잠자는’ 그 원작의 의미를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의의가 있다. 가령, 이런 부분을 확대 보완하는 것은 〈각성〉이 지향하는 인간다움의 회복, 더 구체적으로는 감정의 회복과 직결됨 직하다. 이면적으로는, 〈각성〉의 작업이 넓게는 생명 윤리 의식과 통제(독재!) 사회에 맞서는 몸짓을 터치하는 의의를 품는다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6. 3.
사진제공_18th ARKO SELECTION , Sang Hoon Ok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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