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발레단 〈지젤〉 in 제주
삼위일체가 이룩한 낭만발레의 감동
이지선

제주아트센터 개관 15주년 기념 특별기획으로 2025년 10월 31일(금)-11월 1일(토) 양일간 펼쳐진 국립발레단 제주 공연은 맨날 똑같은 줄거리, 맨날 똑같은 춤, 맨날 똑같은 발레였을지도 모를 19세기 낭만발레 〈지젤〉을 나의 이야기, 우리들의 춤, 우리 공간의 춤으로 동시대 발레로서의 문화적 성장을 가득 담아내었다.



〈지젤〉 2막, 지젤 ⓒ국립발레단



참여하는 관객
- 서사의 다시 읽기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사랑’. 〈지젤〉을 관객에게 홍보하는 첫 번째 문구는 춤보다는 서사(narrative)다. ‘줄거리를 가진 춤’이라는 발레의 탄생적 기원을 고려해보더라도 자못 설득력이 있다. 〈지젤〉의 대본은 널리 알려진 바대로 낭만 발레리나 카를로타 그리시(Carlotta Grisi)를 짝사랑하던 낭만주의 시인 데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의 자기 투영적 감정 서사의 결과물이다. 동시에 〈지젤〉 대본은 여자라면 창백한 얼굴과 마른 몸을 갖기 위해 결핵에 걸리거나, 남자라면 정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해 권총으로 생을 마감해야 함을 찬미했던 19세기 낭만 서사를 발레 이야기로 적극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랑, 배신, 죽음, 용서”라는 서사는 〈지젤〉의 낭만적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는 테마로 굳건히 작품과 홍보문구 속에 자리 잡았다.

이 같은 서사의 테마는 아돌프 아당(Adolphe Adam)의 음악적 전개로 더욱 강렬해진다. 막이 오르기 전부터 몰아치는 서곡은 21세기 제주의 관객들을 일상으로부터 19세기 낭만의 극 속으로 빨려들어 갈 전이의 마법을 건다. 뿐만 아니라 음악은 극이 전개되는 내내 춤 움직임의 동세를 거드는 반주에 머물지 않고, “사랑, 배신, 죽음, 용서”의 테마를 귀에 각인시켜준다. 사랑의 감정이 싹틀 때, 꽃 점을 보며 설레는 마음을 주고받을 때, 감정의 소용돌이로 미쳐갈 때, 죽음의 위험이 엄습할 때, 사랑의 추억을 떠올릴 때, 윌리의 저주가 내려질 때, 용서와 후회가 가득할 때, 반복적인 주제선율(Leitmotif)이 감정의 스위치를 켠다. 사랑과 배신, 갈등과 용서,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테마는 장조와 단조, 알레그로와 아다지오의 변주로 관객의 감각에 대비와 긴장을 새겨넣어 준다.

1막에서는 주인공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의 서사적 설득력을 확립하기 위해 과도하리만치 친절한 마임이 이어진다. 순진하고 아름다운 시골 처녀 지젤, 지젤을 짝사랑하는 일편단심 시골 총각 힐라리온, 귀족임을 숨기고 평민행세를 하며 지젤에게 구애하는 외지인 알브레히트, 지젤과 알브레히트 사랑의 싹틈, 알브레히트의 신분에 대한 힐라리온의 집요한 의심과 폭로, 지젤의 심약한 몸을 걱정하는 엄마, 알브레히트의 정혼녀임을 지젤에게 밝히는 공작의 딸 바틸드, 자신과 사랑을 맹세했다는 지젤의 호소, 이 모든 일이 사실임을 믿을 수 없어 견디지 못하는 지젤의 광기. 오고 가는 감정의 회오리를 이해하는데 마임은 부족함 없이 이어졌다. 1막의 구구절절한 서사를 마무리하듯, 2막의 마임은 죽음 앞에 놓인 알브레히트를 용서해달라는 지젤의 애원으로 일축되며, 덕분에 관객들은 남녀노소 선행지식을 막론하고 작품의 이야기를 흐트러짐 없이 바짝 다가갈 수 있다. 2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젤〉의 관객들은 긴밀한 서사와 음악 속에서 변치 않는 고티에의 투영을 간파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젤〉 1막, 지젤과 알브레히트, 힐라리온 ⓒ국립발레단



하지만 또한 제주의 관객들은 고티에-아당 서사에 그저 머무르지 않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로비에서, 객석에서, 인터미션이 주어진 잠시의 휴식시간에, 공연이 끝나고 집에 나서는 발길에서, 함께 온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연인과 지젤의 서사를 채워갔다. 사랑마저 다원주의가 통용되는 동시대 관객들은 지고지순한 남녀의 ‘사랑과 용서’의 테마를 지금 여기, 우리의 시간으로 적극 끌어 당겼다. 지젤을 향한 순수한 자신의 마음과 믿음을 굴하지 않는 솔직한 힐라리온에게, 나약함을 미덕으로 여겼던 당대의 여성상에 맞서는 강력한 미르타에게, 정혼자가 있음에도 우유부단함과 무책임으로 순진한 시골 마을 처녀와 사랑에 빠진 철없는 알브레히트에게, 거짓과 기만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옛 애인의 생명을 구원하지만 냉랭한 시선과 몸짓으로 돌아선 망자 지젤에게, 동정과 경외, 질타와 공감의 목소리를 주저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고티에의 서사를 서로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이해를 애쓰면서도, 각자의 경험에서 자신만의 발레를 나누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야기하는 춤
-서사의 중심에 우뚝 선 군무

그러나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어 보이는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뚫고 나오는 것은 역시 춤이다. 1막 페전트 파드되(엄나윤, 문정우)에서는 밝고 건강한 젊은 남녀의 몸과 마음이 발레 무용 기교를 통해 선보인다. 카브리올, 파드샤, 피루엣 등 발레리나의 흔들림 없는 테크닉과 발레리노가 선보일 수 있는 그랑 점프와 턴으로 공중을 가로지르는 탄력과 균형미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와 나란히, 지젤과 알브레히트(박슬기, 허서명)의 춤은 감정의 서사 속에 가녀린 시골 소녀와 귀족다운 품위를 움직임으로 쌓아 올린다. 낭만발레의 환상을 만들어준 발레리나의 발끝 기교와 공중에서 당분간 내려올 것 같지 않은 묵직하고 기품있는 발레리노의 점프가 비현실적으로 시종일관 경쾌하고 발랄하기만 한 극의 에너지에 균형을 잡아 주고 있다. 또한 무대를 넘치도록 가득 메운 수확 축제의 춤은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민속무용적 군무로 다양한 대형과 일사불란한 움직임의 교차를 보여 주었다. 그 춤의 속도감은 가히 테크닉적이어서 손가락으로 스와이핑을 하듯 전개되는 춤의 감각적 에너지를 충족시켜 주었다.

2막의 춤은 기교를 넘어 진정한 ‘극적발레(ballet d’action)’을 이룬다. 그 중심엔 무엇보다도 군무가 우뚝 서 있다. 무대 가득 선 윌리들의 파드부레. 어둠이 짙게 깔린 숲에서 윌리들을 호령하는 미르타(안수연)의 강력한 손짓. 무덤에서 등장한 지젤을 맞이하는 관객들은 이내 일제히 숨을 멈춘다. 윌리들의 손짓과 발짓, 걸음과 동작들은 물리적인 육체를 지니지 않은 존재의 것처럼 떨어지지도 닿지도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무엇이었다. 원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무감정한 표정과 동작이 외려 서늘한 극단의 무게를 자아내기에 적절했다. 시시각각 대열변화로 움직이는 가운데 군무들의 고개, 어깨와 팔, 상체가 만들어내는 에뽈르망과 자세의 일치됨은 극도의 기교적 쾌감과 미적 정서를 충족시킨다. 그것은 단지 군무의 몸 방향과 모양의 정확한 일치를 넘어 온몸의 정성으로 온 방향의 공간을 춤으로 단호히 채워나간 결과이다. 윌리들은 아당의 음악이 주는 감정의 시간을 몸에 담아 공간의 움직임으로 새겨나갔다. 춤으로 일순간 혼령이 가득한 초현실의 공간으로 무대를 탈바꿈시켰고, 미르타의 저주가 그곳에 이르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죽음의 공포를 감도는 윌리의 정체성을 명백히 담아낸 군무의 빼어남은 15년 전 마린스키 발레단의 내한에서 로파트키나의 춤을 볼 수 있다는 나의 기대를 단숨에 압도해버렸던 마린스키 군무의 그것과도 같았다.



〈지젤〉 2막, 미르타와 윌리들 ⓒ국립발레단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파드되는 이미 망자가 되어버린 지젤을 현실에 붙잡고 싶은 알프레히트의 간절함이 춤으로 배어 나왔다. 날아가는 지젤의 아라베스크를 붙들어 잡는 알브레히트의 손길은 중력과 무중력의 엇갈리는 힘을 당김음의 리듬으로 그려놓는다. 그 애절함은 한순간도 멈춰짐 없는 그녀의 아라베스크와 한순간도 바닥에 온전히 무게 실어 올라서지 못하는 발끝의 섬세함으로 드러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라베스크가 반복적으로 싸여갈 때마다 절절한 알브레히트의 감정은 프로시니움에서 새어 나와 관객의 가슴 구석구석 깊숙이 파고든다. 허공을 휘젓는 지젤의 시선과 폴드브라는 초현실의 존재를 투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1막 폴드브라는 생기 넘침에도 병약했으나, 2막의 그것은 허공을 헤매이나 죽음을 막아내리만큼 강력했다. 윌리의 저주에 갇혀 죽음을 목전에 둔 알브레히트의 앙트르샤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발레 기교를 넘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삶에 대한 인간의 간절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지젤〉 2막, 지젤과 알브레히트 ⓒ국립발레단



함께하는 극장

〈지젤〉의 춤과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기에 극장의 준비도 친절했다. 공연되는 양일간 공연 1시간 전, 공연연계 프로그램으로 프리클래스(pre-class)가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에서는 발레에 대한 기초지식과 감상법에 대한 강의가 친숙한 언어로 이루어져 공연에 대한 기대와 이해를 한껏 끌어올렸다. 첫날 사전예약의 40명 정원이 꽉 차고도 추가 현장등록이 있었을 관객들의 열띤 참여를 볼 수 있었다. 청중들은 곧 보게 될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채워 작품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다짐으로 강사의 설명을 한마디 한마디 새겨들었고, 작품의 사진이 슬라이드에 등장할 때마다 탄성을 금치 못하는 준비된 애호가들이었다.

이번 기획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관하는 2025 국립예술단체 지역 전막 공연 사업에 지역의 참여와 준비로 마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중앙의 콘텐츠를 지역에 서비스한다는 일방향적 기획을 넘어, 공연은 제주의 관객과 국립발레단의 움직임 미학, 제주의 극장이 삼위일체를 이뤄 하나의 문화콘텐츠를 완성해내었다. 공연은 하나의 제의다. 공연을 고르고, 표를 사고, 그날을 기다리며, 마침내 극장에 갔을 때, 무대에 펼쳐지는 공연에 온몸으로 흠뻑 빠져, 집에 돌아오는 내내 감정으로 가득한 여정과도 같다. 아마도 이번 국립발레단의 〈지젤〉 제주의 공연은 관객들에게 그런 제의였을 것이다. 작품이 끝나고 몇 번의 인사 후 굳게 내려진 막을 보며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고 한참을 박수치는 관객에게서, 일순간 빠져나가는 관객들을 소화하지 못해 꽉 막혀버린 주차장에 단 하나의 경적도 들리지 않는 여유로움에서 그들의 여정이 꽤나 흡족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본 비평문은 「2025 지역대표 예술단체 지원사업」 주관측 제공 비평문으로서 춤웹진의 편집 방향과 무관함. -편집자

2025. 12.
사진제공_국립발레단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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