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인은 삶과 죽음을 ‘숨쉬다’와 ‘숨지다’로 표현한다. 그리고 ‘한숨’ ‘숨결’ ‘탄식’의 언어 사용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사 여러 감정을 숨과 연결 짓는다. 뿐만 아니라 전통춤과 음악에서도 자연스러운 숨쉬기를 매우 강조한다. 부산시립무용단(예술감독:이정윤)의 〈남풍〉은 이처럼 다의적인 숨을 모티브로 한다.
수석 안무자 선정을 위한 공연시리즈(2019)에서 초연된 것을 새롭게 개작한 작품은 5월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소개되었다. 숨부림, 바람 숲 산조, The Sum, 옴파로스(Omphalos), 남풍의 눈이란 부제를 단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며, 앞뒤에 짧은 도입(Intro)과 마무리(Outro)가 있다.
광야를 연상시키는 음악과 함께 4명의 무용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리고, 날숨과 들숨을 반복한다. 쏟아지는 빛을 향해 모여들면, 다소 이질적인 여인들이 등장하여 주변을 맴돈다. 로코코풍의 장식적인 드레스, 희고 긴 면사포, 높은 하이힐, 공상과학영화에 내올법한 선 캡을 쓴 그들은 누구인가? 숨은 존재의 기원이라는 작가의 설명을 고려할 때, 숨의 여신(세계의 근원)을 상징하는 듯하다.
부산시립무용단 〈남풍〉 ⓒ부산시립무용단 |
여신의 퇴장과 함께 짧은 도입이 마무리된다. 1장 숨부림은 역경 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숨을 그린다. 청각을 압도하는 심장소리, 한 무리가 분절인형처럼 관절을 꺾어 뚝뚝 무너져 내린다. 길거리 소음이 뒤엉키고, 무너짐은 처절한 몸부림이 된다. 마침내 쓰러지고,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온다. 얼마쯤 지났을까? 서서히 밝아진 무대 위로 희망을 암시하는 남녀 이인무가 아름답게 이어지고, 쓰러진 이들도 짝을 지워 서로를 어루만진다.
저마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나 환경이 다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의 숨결은 저 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장 바람 숲 산조는 여기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여러 숨결을 산조 선율에 맞춰 그려내고자 한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소나무 영상이 무대 후면에 비치고, 청량한 가야금 소리가 흐른다. 많은 수의 여성 군무진이 등장하여 한 손을 들어 유려하게 감았다 풀고, 또 빙글 돌았다 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상체나 하체를 벌려 악센트를 준다.
부산시립무용단 〈남풍〉 ⓒ부산시립무용단 |
이 같은 움직임과 더불어 군무 대형이 다채롭게 변주된다. 중앙, 좌우, 뒤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이동하는 모습은 고전주의 발레를 연상시킨다. 이후 유사한 패턴의 남성군무와 남녀혼합군무가 스펙터클하게 이어진다. 끝자락에서 강강술래를 하듯 빙글빙글 돌고, 하나둘 숨을 쉰다. 어디선가 종소리 울리고, 그들의 여린 숨을 감싸 돈다.
3장 The Sum은 남녀 이인무로 진행되며, 관계에서 빗어지는 소통의 어려움을 숨쉬기에 견주어 표현한다. 마주 선 여자와 남자, 논쟁을 하듯 각자의 숨을 내뱉는다. 순간 멜랑꼴리한 음악과 함께 갈등이 진정되고, 유연한 접촉(contact)이 안정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여자가 쓰러지고, 싸움은 재계된다. 불화 속에서 괴로워하는 둘은 각자의 숨을 내쉰다.
부산시립무용단 〈남풍〉 ⓒ부산시립무용단 |
일반적으로 옴파로스는 중심 또는 중심점을 의미한다. 이와 무관하지 않게 4장은 삶의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심(丹心)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흘러가는 구름 영상과 함께 두건을 쓴 사람들이 보인다. 모이고 흩어지는 그들은 사막을 횡단하는 순례자를 닮아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순간 많은 수의 군무진이 등장하여, 좌우로 도열한다. 그리고 전투를 하듯 이리저리 대형을 바꾸며 분주히 오가고, 화살을 연상시키는 영상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피아노 소리와 함께 싸움은 진정되고, 대립하던 두 그룹은 마주 선다.
4장 전반부가 전투라면, 후반부는 그 같은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심, 즉 결코 변치 않는 정성 어린 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객석을 향해 쏟아지는 빛은 흡사 동굴과 같다. 하나둘 빛의 동굴을 향해 걸어가고, 흰 옷의 여인들이 나타나 여신마냥 춤춘다. 이어 반짝이는 모빌이 내려와 무대 후면을 장식하고, 남녀 이인무가 펼쳐진다. 아랍풍의 음악에 맞춘 움직임은 서정적이고, 말미에 하늘을 향해 벌린 양손은 순정을 담은 듯하다.
부산시립무용단 〈남풍〉 ⓒ부산시립무용단 |
5장 남풍의 눈은 부산 지역민의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다. 40명이 넘는 출연진이 전원 등장하여, 동일한 스텝을 무한 반복한다. 아래로 내려 박는 걸음은 심장박동처럼 이어지고, 대형은 절도 있게 변화한다. 이윽고 삶의 의지를 담은 날숨과 들숨이 쏟아져 나오고, 일렬로 도열한 그들 앞에 한 여인이 결연하게 서 있다.
마무리는 도입과 유사하다. 기이한 여신들이 재등장하여 사람들 사이를 오간다.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리던 넷도 다시금 나타나 숨쉬기를 반복한다. 신과 사람이 함께 호흡하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듯하다.
작품 〈남풍〉은 고통 받는 사람들(1장),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2장), 갈등하는 사람들(3장), 역경 속에서도 단심을 간직하는 사람들(4장), 의지에 찬 사람들(5장)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의 숨을 이미지화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대형의 변주는 문화회관 대극장을 빼곡히 메우며,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또 모노톤의 의상과 미니멀한 영상은 시각적 세련됨을 선사했다. 하지만 삶과 숨에 대한 공감과 울림을 일으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주제, 제재, 형식에 대한 보다 사려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하겠다.
송성아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