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하늘의 비밀을 아는 법: 한국 전통 춤 창작법
서정록_춤연구가

한국의 전통 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창작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전통 춤은 한 사람이 갑자기 ‘창작’하였다기 보다, 오랜 시간 동안 공동체의 생활과 의식, 예술적 경험이 축적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통 춤은 정확한 창작자를 알기 어렵고, 여러 세대를 거치며 발전해 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춤들 가운데 창작자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서는 그 시기의 춤을 비롯한 예술 작품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창작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통 춤의 보존뿐 아니라 한국 예술 창작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성찰해 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한국 전통 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과 동아시아의 전통 예술 창작 방식을 현대 예술 창작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특히 “당시 다수의 궁중 춤 즉 정재(呈才) 작품들을 창작한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어떠한 방식으로 영감을 받았나?"라는 질문을 가지고 3회에 걸쳐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효명세자가 창작한 대표적 작품 두 가지 즉 〈춘앵전〉과 〈무산향〉의 사례를 중심으로 작품의 구상과 착상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후기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재위 기간은 흔히들 “궁중 정재의 황금기”라 부르기도 하는 한국 춤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이다. 이때가 한국 춤 역사에 중요한 시기라 할만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기록상 이 당시 새롭게 창작된 향악정재만 19종목으로 다른 시대와 비교하여 춤 창작 건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조선 전기에 창작된 향악정재 작품이 모두 8종목인 것과 비교하면,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이 짧은 기간에 창작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둘째로, 이 시기에 창작된 상당수 작품의 성격이 이전 시기의 춤들과는 그 성격에 있어 매우 다르다. 이 당시 만들어진 궁중 춤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혹은 서양예술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점이 있다. 여기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외부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예술 자체에 중점을 두는 예술 형태를 말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예술의 본질은 자기 목적적이며 예술은 그 자체로 완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창작된 예술 작품들은 대부분 예술가가 내면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특정한 목적이나 실용성을 초월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들 작품은 예술가의 창의적 표현과 독창성을 특히 중시한다.

순조 시대에 창작된 작품들의 상당수는 이전 시대 여러 한국 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주술적, 정치적, 사회적, 또는 오락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있다. 이들 정재 작품들 대부분은 창작자의 내면적 감흥과 생각을 표현하는 즉 예술 그 자체를 목적한 작품의 성격을 제법 지니고 있다. 뒤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이 당시 창작된 예술 작품들은 창작성과 독창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시대 예술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근거한 작품들처럼, 이 당시의 작가의 의도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이들 작품이 대부분 한 인물이 직접 창작하였거나 혹은 창작에 관여하였다는 점이다. 그 인물은 바로 순조(純祖)의 아들인 효명세자다. 그는 이들 작품들을 창작하여 자신의 어머니인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4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궁중 잔치에서 선보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당시 궁중 행사를 자세히 기록한 〈순조무자진작의궤(純祖戊子進爵儀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창작된 19개 작품 가운데 무려 11 편이 그가 직접 창작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작의궤〉에서는 그가 직접 창작한 작품의 경우 설명 첫머리에 “높으신 분이 친히 만듦”라는 뜻의 “어제(御製)”라는 단어로 따로 표시하고 있다. 또 〈진작의궤〉에 보면 그가 이 행사를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어, “어제(御製)” 표시가 없는 나머지 작품들도 그가 간접적으로 창작 작업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효명세자의 창작 방식

이제 효명세자가 어떻게 창작의 “영감”을 받았는지 당대의 기록을 바탕으로 알아보자. 예술 작품의 구상과 착상 즉 영감을 받는 부분은 창작 과정의 첫 단계이자 중요한 부분이다. 이 단계는 예술에서 독창성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모방(模倣)·모사(模寫)·모작(模作)과 대비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 후기 정재 작품들과 더 나아가 당시의 예술 작품들이 어떤 구상과 착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기록과 자료를 통해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 창작의 동기, 그리고 작품의 구조와 형식 등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지면의 한계를 고려하여,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 그리고 창작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효명세자가 활동했던 조선 후기는 문화와 예술의 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특히 한양과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하며 조선 후기 사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지식인 계층인 경화사족(京華士族)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들이 중심이 된 예술적 흐름 역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술적 흐름이 효명세자의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창작의 동기라는 측면에서, 효명세자가 어떤 방식으로 정재 작품이나 예술 작품을 구상하고 착상했는지도 함께 밝혀보고자 한다. 효명세자의 창작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기록과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실록, 의궤(儀軌), 그리고 그가 교류한 인물들의 문헌 자료가 포함된다. 이와 같은 자료들은 그의 창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효명세자는 기존의 자료를 참고하되 이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옛 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독창적인 해석과 창의성을 더해 새로운 작품을 창작했다. 예술에서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옛 것을 단순히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독창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려는 태도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예술가의 창의적 표현과 독창성을 특히 강조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과 닮았다.

예술 창작에서 독창성에 관한 인식과 이러한 자세는 효명세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독창적인 예술 작품을 창작하려는 효명세자의 노력은 그의 글을 모은 〈학석집(鶴石集)〉의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말한다. 하늘에 꽃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시가 있다…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는 여가에 두루 시학에 비쳐서, 두세 궁료들과 왕왕 수창하였는데, 혹 시각 소리가 고요해지며 밤에 촛불이 자주 사그라들고, 혹 봄바람에 햇살이 곱거나, 혹 눈 위의 달빛이 희거나, 경치를 마주하여 감정을 느끼어 저절로 드러내었으니, 이것은 나의 잘나고 화려한 것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보는 이들이 어떠한 꽃의 품격으로 매길지는 알 수 없지만, 옛 시를 답습하지 않고 천기에서 독자적으로 낸 것에는 가깝다.”

위의 기록에서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예전의 시와 노래를 답습하지 않고 천기에서 독자적으로 낸 것에는 가깝다(而窃庶幾不襲古譜, 獨造天機者也)”라는 문구에서 효명세자는 창작의 순간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천기(天機)”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서양 예술에서 ‘신성(神聖)을 통한 통찰’을 의미하는 “에피파니(epiphany)”이라는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다음으로 그는 “예전의 시보를 답습하지 않고”라고 하며, 자기 작품의 독창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독조(獨造)” 즉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다시 한번 자기 작품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술의 독창성은 바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 특히 중요시 여기고 지향하는 바이기도 한다.

그런데 효명세자가 창작 과정에서 단순히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천기”를 알게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많은 고전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경서와 사서를 공부하며 시를 연구했고, 궁중에 있는 동료들과 교류하고, 또 다양한 사건이나 대상을 통해 비로소 “천기”를 알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효명세자의 창작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참조한 자료들이 어떤 배경에서 선택되었고,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정재 작품들을 창작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먼저, 그가 영향을 받은 당시 예술 창작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예술가들은 경전과 사서를 깊이 연구하고 시와 문학을 통해 “천기”를 아는 경우가 많았다. 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효명세자도 이러한 방식을 따르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더해 작품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그의 창작 과정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깊은 고찰과 창의적 변용을 통한 결과물일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예술 창작의 양상

이러한 사실에서 효명세자의 창작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영향을 받은 동시대 사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효명세자와 동시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대부 중 북학파(北學派)에 속한 인물들이 당시 예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학파는 조선 후기 청나라의 학술 및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의 현실을 개선하고자 했던 집단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서유구(徐有榘, 1764–1845), 신위(申緯, 1769–1845),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그리고 박규수(朴珪壽, 1807–1877)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경화사족에도 속하는데 주로 서울과 그 인근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명문가 출신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중앙 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이들 중 상당수가 사행(使行)에 참여하여 청나라의 문물을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북학파 인사들은 청나라 문물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이를 조선 사회에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기존의 청을 야만시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청의 선진성을 배우고 이를 통해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이들은 중국의 문물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리고 조선의 실정에 맞게 받아들이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효명세자의 창작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며, 이러한 관점은 그의 작품에 담긴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런 주장은 이들 북학파가 예술에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다. 대표적인 예는 북학파의 거두(巨頭)인 박지원(朴趾源)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글 〈답창애(答蒼厓)〉에서 그는 당시 상당수의 조선의 예술가들이나 지식인들이 글을 지을 때, 한양을 장안이나 낙양으로 표기하고,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승상으로 표기하는 등의 행태를 지적했다. 그는 이렇게 되면 명칭과 실제가 혼동되어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글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맹목적인 모방을 땔감 장사가 소금을 사라고 외치는 것과 같고, 전국시대 미인 서시(西施)의 가슴앓이병을 마을 처녀들이 무작정 따라 하는 효빈(效嚬) 고사에 빗대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고전(古典)이라 할지라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할 줄 알고, 새로운 것을 창안하면서도 능히 전아(典雅)할 수 있다면, 오늘날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된다(苟能法古而知變創新而能典今之文猶古之文也).


박지원이 주창한 유명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구절이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박지원은 작품에서 창작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조선 후기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박지원의 사상은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독창적인 해석을 더해 새로운 미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또 다른 북학파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미술가이자 시인인 신위(申緯) 역시 조선의 선비들이 맹목적으로 당나라 시풍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예술 작품에서 개성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적하며, 중국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창작에서의 독창성을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신위는 송나라 시인인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큰 영향을 받아, 스스로 “소집벽(蘇集癖)” 즉 "동파의 시를 모으는 집착”이 있다고 밝히면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독창성을 추구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대표적인 그림 〈방대도(訪戴圖)〉에 쓰여 있는 그의 시에서 작품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햇살이 얼어붙고 바람은 세차게 부는데(日脚凝氷風怒號),
누각 그림자와 검푸른 산이 합쳐져 희미하다(樓隱山黛合糢糊).
꿈이 돌아오고 술이 깬 자리(夢回酒氣全消席),
인적 고요하고 화로에는 아직도 향 연기가 서려 있다(人靜香煙尙在罏).
한 점 눈 날아들어 벼루에 떨어져 녹고(一點斜飛融暖硯),
매마른 소리 휘몰아치니 차가운 갈대 요동치네(乾聲驟至變寒盧).
우연히 황공망과 미불을 참고해 수묵을 그리니(偶然水墨參黃米),
홀연히 정신이 노닐으니 대규를 찾아가는 그림이다(驀地神遊訪戴圖).

첫눈 내린날 술마신 후 내 스스로 읊조리다(初雪酒後自題).
황공망이면서 황공망이 아니고, 미불이면서 미불이 아닌 필법(黃不黃米不米法)”



신위 〈방대도(訪戴圖)〉 ⓒ국립중앙박물관



〈방대도(訪戴圖)〉는 고사성어인 “자유방대(子猷訪戴)”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동진 시대의 명필 왕휘지(王徽之)의 자(字)가 바로 자유(子猷)이다. 왕휘지는 어느 날 밤, 눈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갑자기 친구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 작은 배를 타고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대규의 집 문 앞에 도착해서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흥취가 일어 찾아갔을 뿐인데 흥취가 사라지니 돌아온 것이다(乘興而來 興盡而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이다.

〈방대도(訪戴圖)〉에 있는 신위의 글에 등장하는 황공망(黃公望, 1269–1354)과 미불(米芾, 1051–1107)은 각각 중국 원나라와 송나라의 유명한 화가들이다. 여기서 신위는 이들의 필법을 참조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는 이들의 필법을 섞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필법을 창안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이를 “내 스스로 읊조리다”를 뜻하는 “자제(自題)”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이는 앞서 살펴본 효명세자의 글에 “독조(獨造)”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또한 "첫눈 오는 날 술을 마신 후"라는 표현은 창작의 신비로운 순간을 묘사한 효명세자의 "천기"라는 단어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신위나 효명세자 모두 옛 것을 참조하되 이를 단순히 모방(模倣), 모사(模寫) 혹은 모작(模作)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독창성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신위와 효명세자가 예술 창작에서 유사한 점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효명세자의 교우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효명세자와 신위의 교우 관계는 효명세자의 외삼촌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조순은 신위의 뛰어난 재주를 보고 그를 효명세자에게 소개했다. 신위는 당시 시(詩), 서(書), 화(畵) 모두에 능통한 만능 예술가로 유명하였다. 이후 효명세자는 국정을 대리하게 되면서, 문사(文詞)를 즐기고, 자주 궁중의 관료들과 모여 자주 함께 모여 시를 창화(唱和)하며 교류했는데, 이때 신위도 함께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앞서 살펴본 효명세자의 글에서 "두세 궁료들과 왕왕 수창하였다"는 대목에서 신위가 아마도 이들 두 세명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효명세자는 북학파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들과 직접 학문을 배우거나 교우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신위는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들로부터 사상적, 학문적, 예술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박지원의 후배이거나 친구 사이였고, 신위 역시 박지원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교유 관계는 효명세자의 창작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효명세자는 북학파의 사상과 예술적 접근을 통해 단순히 예전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전을 변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 노력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효명세자는 동년배로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도 친분이 깊었다. 그들의 우정은 박규수의 책 〈환재집(瓛齋集)〉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첫 만남은 효명세자가 16세, 박규수가 18세이던 을유년 즉 1825년 여름에 효명세자가 박규수의 집을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대화 가운데 뜻이 통한 두 사람은 이후 자주 만나 교류하며 우정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1828년 봄 즉 〈순조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에 보이는 여러 정재 작품이 창작되기 전, 효명세자가 박규수에게 그의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과 박규수의 글인 〈상고도설(尙古圖說)〉을 빌려달라고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효명세자는 이를 다 읽고 난 후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말과 함께 필묵(筆墨)과 부채를 선물로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효명세자가 〈순조무자진작의궤〉에 기록된 여러 정재 작품을 창작할 당시, 박지원의 사상이 당시 정재 작품에 영향 주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 설령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의 사상이 효명세자에게 충분히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간략하게 북학파를 대표하는 박지원의 예술 창작 방식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박지원의 예술 창작 방식

박지원의 예술 창작 방식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법고창신(法古創新)"과 "합변지기(合變之機)"라는 두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 이 두 개념 모두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 방식과 중점에는 차이가 있다.

먼저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문구인 ‘법고창신’은 현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전통을 중요시하자”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본래의 뜻은 옛날 것을 참조하되 이를 무조건적으로 답습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현재 상황과 현실에 맞게’ 고전을 변용하여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박지원은 지나치게 옛날 것에 매달리면 고루해질 수 있고, 새로운 것만 창조하려 하면 근거가 없어 위험하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법고”에만 치중해 옛날 것에 얽매이는 것을 피하고, “창신”에만 집중해 맥락이 없는 정체불명의 작품을 만드는 것도 동시에 경계한 것이다. 즉 박지원은 고전이 담고 있는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해석하고 발전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법고창신’의 창작 방식 즉 고전을 참조하되 작가의 현재 상황과 현실에 맞게 이를 변용하고 적용하는 방식은 당시 많은 예술가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1801년 작품인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는 ‘법고창신’의 대표적인 예다. 이 그림의 제목 “삼공불환(三公不換)”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벼슬을 다 준다 해도 내 앞에 펼쳐진 이 강산의 경치와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원래 이 고사는 본래 송나라 시인 대복고(戴復古)의 시 〈조대(釣臺)〉에 나오는 구절로, 이 시 역시 후한(後漢) 시대 중장통(仲長統, 180–220)의 〈낙지론(樂志論)〉을 그 원전(原典)으로 하고 있다.



김홍도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삼성문화재단



흥미로운 점은 이 고사가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홍도는 고사의 내용은 담되 이를 조선의 산수(山水)와 풍속(風俗)을 적절히 활용해 전원생활의 정취를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으로 재해석했다는 사실이다. 즉 높은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강산의 경치는 중국의 경치가 아니라 한국의 경치인 것이다. 김홍도는 이처럼 중국의 고사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이 그림은 그러므로 조선의 산수(山水)가 대단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 이런 조선의 산수와 조선의 풍속에 익숙한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법고창신’의 방식으로 옛날 것을 당대의 시각과 장소, 사회적 맥락에서 재해석하여,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창출하려 했다.

한편, ‘합변지기’는 “합하여 변화하는 기미”라는 의미로, 기존의 여러 요소들을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합변”이라는 단어는 본래 공영달(孔穎達, 574–648)의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 유래한 것인데,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통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역(周易)〉 즉 〈역경(易經)〉이라는 책 자체가 “변화에 관한 책”이라는 뜻이다. 박지원은 이에 대해 그의 글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에서 예술 창작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장(戰場)의 상황과 같다고 설명했다.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라는 제목은 자체가 전쟁과 같은 "소란한 상황에서 빨간 깃발을 이끌다"라는 뜻이다. 그는 이 글에서 전투에서 병력을 합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예술 창작에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고 자유롭게 창의적인 자세로 여러 요소들을 상황에 맞게 변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서, ‘합변지기’는 예술가가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유연하고 창의적인 접근 방식을 의미한다.

‘합변지기’를 통한 창작 방식은, 앞서 언급한 신위의 그림 〈방대도(訪戴圖)〉에 신위가 황공망(黃公望)과 미불(米芾)의 필법을 참조하되 이들의 필법을 섞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필법을 창안하였다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

또 다른 사례로 미불(米芾), 구양순(歐陽詢, 557–641), 채옹(蔡邕, 133–192) 등의 여러 서체를 참조하되, 이러한 여러 서체들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새롭게 창안한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의 추사체(秋史體)의 경우도 바로 ‘합변지기’를 통한 창작 방식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17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김정희와 신위는 문예(文藝)로 격의 없이 교류한 것은 유명하다.



김홍도 〈지장기마(知章騎馬)〉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그림 〈지장기마(知章騎馬)〉도 역시 ‘합변지기’ 방식의 창작을 찾아볼 수 있다. 이 그림에 써 있는 글에는 “지장은 말 타기를 배 타듯 한다. 취중 몽롱하여 우물 가운데 떨어져 잠드네(知章騎馬似乘船眼花落井水底眠)”라는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중 첫 구절인 하지장(賀知章)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두보의 〈음중팔선가〉는 당나라의 유명한 술꾼 8명을 묘사한 유명한 시(詩)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림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지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중팔선가〉의 두번째 구절은 여양왕(汝陽王) 이진(李璡)을 묘사하고 있는 “여양왕은 술 세 말을 마셔야 조정에 나가고, 길에서 누룩 수레만 만나도 침을 흘리며, 주천으로 옮겨주지 않음을 한스러워하네(汝陽三斗始朝天 道逢麴車口流涎 限不移封向酒泉)”인데, 당장 보면 김홍도는 여양왕 이진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우선 김홍도가 하지장과 이진을 착각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음중팔선가〉는 당시 워낙 유명한 시로 김홍도가 이를 착각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하지장의 고사와 이진의 고사 중 공통으로 보이는 말을 타고 가는 것에 주목하여 이를 중심으로 이 두 가지 고사를 섞어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즉 김홍도의 〈지장기마〉는 말을 타고가는데 “취중 몽롱한” 모습은 〈음중팔선가〉 중 하지장의 고사에서 그리고 “누룩 수레만 만나도 침을 흘리는” 모습은 여양왕 이진에 고사에서 가져와 이 둘을 교묘히 합친 것이다. 그리고 그림으로는 묘사가 약하다고 생각되는 하지장의 고사는 그림의 글로 보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김홍도의 〈지장기마〉는 ‘완전히 만취한 사람이 여전히 술에 홀려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김홍도는 두보의 〈음중팔선가〉에 등장하는 유명한 술꾼들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지독한 술꾼을 ‘합변지기’를 통해 새롭게 창작해 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박지원의 사상은 조선 후기 사상과 예술에 중요하였다. 그의 사상은 조선 후기 신위, 김정희, 그리고 김홍도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 시간에 좀더 살펴보겠지만, 효명세자 역시 이러한 창작 방식을 통해 전통을 당시의 상황으로 재해석하고, 전해오는 다양한 요소들을 합하여,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롭고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창작

그렇다면, 옛것을 참조하기만 하고, 또 여러가지를 섞기만 하면, 무조건 새로운 것이 창작되는 것일까? 혹시 여기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점에 대해, 앞서 살펴본 신위의 글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첫번째 “우연히”라는 표현, 두번째 “돌연히 마음이 일어”, 그리고 세번째 “첫눈 내린 날 술 마신 후 내 스스로 읊조리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 세가지 표현에는 모두 “우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창작의 순간 창작자의 이성적 의식이 개입되어 있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첫눈 내린 날 술 마신 후”라는 표현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무의식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효명세자의 경우도, 앞서 살펴본 그의 글에서 이것을 “저절로 드러내었으니”라고 표현하였다. 분명 이것은 창작이 이루어지는 매우 중요한 순간일 것이다. 도대체 이 순간은 무엇일까? 질문을 바꾸어서 해보면, 이 순간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을 동아시아에서는 어떻게 설명하였을까?

이러한 순간은 사실 예술만 아니라 창작이 포함된 모든 분야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 공학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먼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Ἀρχιμήδης, BC 287경–BC 212경)의 유레카 이야기를 들 수 있다. 그는 왕으로부터 금관을 손상시키지 않고 진위를 판별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방법을 고심하던 중, 지친 몸을 이끌고 욕탕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몸이 욕탕에 있을 때, 물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부력과 비중의 개념을 깨닫게 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아르키메데스는 알몸으로 거리를 뛰어나가며 “유레카!”라고 외쳤다. 이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순간 특히 약간 몽롱해지는 상태에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 현상을 잘 설명해준다.



벤젠 구조와 우로보로스 ⓒWikimedia Commons



또 다른 사례로 독일의 화학자 아우구스투스 케쿨레(August Kekulé, 1829–1896)의 벤젠 구조 발견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당시 케쿨레는 벤젠의 구조를 찾기 위해 거의 매일 실험실에서 밤을 새웠다. 하지만 그는 탄소와 수소의 배열을 아무리 시도해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벤젠의 구성 원자들만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반쯤 잠든 상태에서 그는 꿈속에서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둥근 고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곧바로 이 구조를 벤젠의 분자 구조에 적용해 보았고, 그 결과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것과 같이 탄소 6개로 이루어진 육각형 고리 구조가 바로 벤젠의 정확한 분자 구조임을 깨닫는다. 이 사례 역시 연구자가 의식 가운데 문제에 깊이 몰입하다가 결국 꿈 즉 무의식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수학에서 최적화 이론을 개발하고 현대 컴퓨터 알고리즘의 기초 제공한 프랑스의 수학자 자크 아다마르(Jacques Hadamard, 1865–1963)는 그의 책 〈수학에서 발명의 심리학(An Essay on the Psychology of Invention in the Mathematical Field, 1945)〉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수학적 발견과 문제 해결 과정을 다음 네 가지 단계로 설명했다. 첫째, 문제를 면밀히 살펴보고 준비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한다. 둘째,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연결하고 시도하며 숙성시키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문제의 여러 측면을 고려하며, 점차 무의식 속에서도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셋째, 문제 해결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깨달음의 단계다. 이 순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며, 문제의 핵심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깨달은 내용을 다시 의식으로 검토하고 입증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자크 아다마르의 네 단계 모델을 아르키메데스와 케쿨레의 사례에 적용해 보자. 첫 번째 단계는 문제 인식 단계로, 아르키메데스의 경우 왕으로부터 순금관의 진위를 판별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고, 케쿨레의 경우 벤젠의 분자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문제 숙성 단계로, 아르키메데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고, 케쿨레는 다양한 가설을 시도하며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 번째 단계는 깨달음의 단계로,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서 반신욕 중 물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케쿨레는 마차에서 반쯤 잠든 상태에서 꿈속에서 본 뱀의 모습을 통해 벤젠의 육각형 고리 구조를 떠올리게 된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이 발견을 확인하는 단계로, 아르키메데스와 케쿨레 모두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실험과 검증을 통해 확인하고,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다시 이 네 단계를 앞서 살펴본 신위의 그림과 그 그림에 써 있는 글에도 엿볼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기로 하는 것이고, 두번째 단계는 “황공망과 미불을 참고”에 해당하고, 세번째 단계는 “대규를 찾아가는 그림” 즉 주제를 정하는 것과 “첫눈 오는 날 술을 마시고 자기 스스로 그렸는데”라 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황공망의 화법인지 아닌지 미불의 필법인지 아닌지”라고 하며 자기 그림의 독창성을 평가한다.

이런 사례에서,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즉 의식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간 단계에서 중요한 발견을 하고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 몸을 담갔을 때, 케쿨레는 마차에서 반쯤 잠든 상태가 여기에 해당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상태는 신위가 말하고 있는 "첫눈 오는 날 술을 마시고"라는 표현과도 유사하다. 신위 역시 이 표현을 통해 그가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쯤 단계에서 창작하였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새로운 창작이나 발견이 의식적, 이성적, 논리적 사고를 넘어서는 혹은 벗어나는 순간에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효명세자의 글에서도 역시 엿볼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글의 맨 처음에 언급한 “나는 말한다. 하늘에 꽃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시가 있다” 이다. 두번째 단계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는 여가에 두루 시학에 비쳐서, 두세 궁료들과 왕왕 수창하였는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세번째 단계는 “감정을 느끼어 저절로 드러내었으니”와 “천기” 부분이다. 네번째 단계가 “보는 이들이 어떠한 꽃의 품격으로 매길지는 알 수 없지만, 옛 시를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낸 것에는 가깝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과학적으로 무의식의 단계에 대해 아직 명확히 입증된 바는 없다. 다만 몇몇 과학자들은 아마도 렘(REM, Rapid Eye Movement) 수면 상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램 수면 상태에서 우리의 뇌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그 동안 학습한 많은 정보를 정리하고 저장한다고 한다. 이 상태에서 뇌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재정리하는데, 바로 이때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과학으로 이를 설명하기에는 규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효명세자는 이 단계를 “천기(天機)” 즉 “하늘의 비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흔히 ‘하늘의 기밀이 새어 나갔다’는 뜻의 ‘천기누설(天機漏洩)’에서 이 단어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천기’는 정신적 깨달음과 창의적 생각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자크 아다마르에 의하면 무의식적 단계에서의 깨달음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무의식(Unconsciousness)은 인간의 정신 활동 중에서 의식되지 않는 부분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하거나 통제할 수 없지만, 우리의 행동과 사고, 감정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신의 영역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거나 탐구 중인 영역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여전히 신비로운 영역이기도 하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은 알고리즘과 데이터에 기반한 의식적 설계의 산물이며, 감정이나 주관적 경험이 없는 논리적 프로세스이다. 인공지능의 결정 과정 또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데 무의식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감정을 느끼거나 경험할 수 없는데 무의식은 감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에 무의식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점에서 감정, 기억, 욕망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는 창의성 즉 “천기(天機)”야 말로 아마도 인간의 고유한 특성일지도 모른다. 비록 인공지능이 창작을 한다는 보고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이 이전까지 창작하였던 데이터의 패턴을 뽑아 이를 가지고 생성한 것으로, 이 자체로도 경이적인 부분은 있으나, 패턴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제시하는 인간의 창작과는 여전히 다른 것 같다.

여기서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앞서 살펴본 예술에서 창작 과정, 혹은 과학의 발견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무의식의 상태에서 ‘천기’가 드러나기 직전에 의식의 상태에서 창작자나 발견자들은 이전의 것들을 가지고 고심하는 상태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르키메데스나 케쿨레도 그들의 발견 전에 오랫동안 고심하였던 상태가 이 단계이다. 신위의 경우도 황공망(黃公望)과 미불(米芾)의 필법을 참조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를 익히기 위해 그는 아마도 오랜 세월 이를 모방하고 연마하였을 것이다. 효명세자의 경우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는 여가에 두루 시학에 비쳐서, 두세 궁료들과 왕왕 수창하였는데”라는 대목이 바로 이러한 단계일 것이다. 보통 이런 오랜 시간의 궁리와 연마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가 완전히 본인의 것이 되는 과정은 보통 매우 지난하기도 하고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들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극복할 확실한 동기가 있었기에 이를 감내할 수 있었다. 관심에서 시작된 사랑이 그들을 지탱했고, 이 사랑 덕분에 지루함, 고통, 혼란 속에서도 끝까지 견딜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며,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것이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보통 이렇게 어려움을 감내하는 과정을 동아시아적 용어로 “성(誠)”이라고 한다. 성(誠)”에 관한 유명한 구절은 우선 〈맹자(孟子)〉의 이루상(離婁上)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성이란 것은 하늘의 도이며, 성(誠)해지려고 하는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 지극히 정성스러우면서도 남을 감동시키지 못한 이는 아직까지 없었다. 반대로 정성스럽지 못하면서 감동시킬 수 있는 자는 없다.”

맹자는 ‘성(誠)’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타인에게 감동을 주기 전에 본인부터 깊은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알몸인 것도 잊은 채 거리를 뛰어다니며 "유레카"를 외친 것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술 작품 역시 이러한 성(誠)을 통해 탄생하며, 이러한 작품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이러한 감동의 순간은 종종 예술이 윤리나 사회 규범 조차도 넘어서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맹자〉의 이 구절은 아마도 〈중용(中庸)〉의 구절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성이란 것은 하늘의 도이며, 성(誠)해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 성이란 것은 열심히 하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지고 조용히 있어도 도에 적중하니 성인(聖人)이다. 성(誠)해지려고 하는 것은 선(善)을 가려 택해 견고히 잡고 나가는 것이다. 배우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배울 바엔 능숙해지지 않고서는 그치지 않는다. 질문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질문할 바엔 알게 될 때까지 질문을 그치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생각할 바에 파악할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변별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변별할 바에 분명해질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할 바엔 독실해질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은 한 번에 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백 번이라도 하고, 다른 사람은 열 번에 할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천 번이라도 한다. 과감히 이 도를 행할 수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명철해질 것이며, 유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인해 질 것이다.”

이 글의 첫 부분은 〈맹자〉의 구절과 거의 같다. 그리고 이 구절은 인간이 성(誠)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성(誠)을 통해서 사람은 새로운 과학이나 수학의 발견이나 새로운 예술적 창조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성(誠)한 것은 하늘의 도(道)이고 이는 항상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부력의 원리는 원래부터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누구나 물이 넘치는 것을 보며 아는 사실이었고, 케쿨레가 꾼 뱀이 자기 꼬리를 물면서 도는 것도 고대사회부터 전해오는 유명한 이미지인 “우로보로스(ουροβóρος)”다. 신위의 경우도 황공망(黃公望)과 미불(米芾)의 필법은 유명한 서체이며, 효명세자의 경우 그가 읽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역시 당시 선비라면 누구나 읽고 읽어야 할 책이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듯 의심할 바 없이 당연한 것이 성(誠)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나 작품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주역(周易)〉 계사상전(繫辭上傳)에 이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한편으로 음이고 한편으로 양인 것을 도라 한다. 이 도를 이어가는 것이 좋은 일이고, 이루는 것이 본성이다. 어진 이는 그것을 보고 어짊이라 하고, 지혜로운 이는 그것을 보고 지혜라 하는데, 사람들이 날마다 그것을 쓰면서도 알지 못하니, 이런 까닭에 군자의 도가 드물다.”

여기서 “사람들이 날마다 그것을 쓰면서도 알지 못하니”라는 구절은 앞서 이야기한 ‘의심할 바 없이 당연한 것’이면서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닮았다. 이런 의미에서 “성(誠)”은 이 〈주역〉의 구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군자의 도”에 이르는 방법이며, 이런 맥락에서 “군자의 도”는 바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군자의 도” 즉 ‘창조’는 너무 쉬우면서도, 이를 알고 깨닫기 전까지는 무척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선불교(禪佛敎)의 돈오(頓悟)가 떠오른다. 깨닫고 난 후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의 〈중용〉의 구절 역시 흥미롭다.

“군자의 도는 넓으면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부부라도 가히 함께하여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일지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천지의 위대함에도 오히려 사람에게는 한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해도 천하에 실을 수 없게 되고, 작은 것을 말해도 천하에 쪼갤 수 없게 된다. 시경에 이르길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을 뛰어오른다.” 그것이 위아래로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부터 발단되고, 그 지극함의 이르러서는 천지에 드러난다.”

이 구절 이 역시 “군자의 도”를 설명하고 있는데, 앞서 살펴본 〈주역〉의 내용과 닮았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몇몇 보인다. 우선 “사람들이 날마다 그것을 쓰면서도”라는 표현과 유사한 표현인 “어리석은 부부라도 가히 함께하여 알 수 있는 것이지만”이라는 대목입니다. 왜 하필 “부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또 이 구절 마지막에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부터 발단되고”라는 대목도 역시 “부부”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동아시아의 기본 사상이 되는 〈주역〉의 개념인 ‘음양(陰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음양(陰陽)의 관점에서 이 구절을 보면, “큰 것”과 “작은 것”, “하늘의 솔개”와 “연못의 물고기”도 같은 맥락 즉 ‘음과 양’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위아래로 드러남을 말하는 것”라는 대목에서 이것이 ‘음양’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주역(周易)〉 계사상전(繫辭上傳)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끊임없이 낳고 낳는 것을 일러 역(易)이라 한다. 그 상을 이룬 것을 건(乾)이라 이르며, 법을 본받는 것을 일러 곤(坤)이라 하고, 그 수(數)를 끝까지 미루어서 미래를 아는 것을 점(占)이라 하며, 변화에 통하는 것을 일러 사(事)라고 하고, 음과 양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

이 구절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끊임없이 낳고 낳는 것 원문에는 이를 “생생(生生)”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세상에서 낳고 낳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부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탄생에는 마치 해산의 고통이 따르는 것처럼 종종 참고 인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성(誠)이다. 그러니까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것은 바로 생생한 것이며, 이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이 바로 “역(易)” 즉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며, 살아있는 것에는 반드시 변화가 있다.

여기서 “음과 양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는 마지막 구절은 그 궁극에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역〉에서는 이를 “신(神)”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성경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결론적으로 창조는 곧 삶이며, 이는 신비한 것으로, 이것은 효명세자가 말하는 “천기(天機)”와 닮았다. 그리고 이를 따르는 것이 ‘군자의 도’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창조가 없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이 인간과 인공지능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닌가 한다.

이 점에서 박지원이 변화 즉 생생함을 주제로 하는 책인 〈주역정의〉를 참조하여 “합변지기”라는 개념을 궁리할 때, 예술 창작을 마치 전쟁이 벌어지는 급박하고 변화무쌍한 상황에 비유하여 설명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가 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마치 음과 양이 만나는 것처럼 옛날과 오늘이 만나고, 전혀 다르다고 생각되는 이것과 저것이 만나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것을 각각 ‘법고창신’과 ‘합변지기’이라 할 수 있겠다.

효명세자 역시 박지원이 제시한 ‘법고창신’과 ‘합변지기’의 창작 방식으로 정성을 다하고 “천기(天機)”를 담아 정재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고전(古典)들이 담고 있는 사상과 가치는 유지하면서도 이를 당시 조선의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법고창신"의 방식으로 창작한 대표적인 작품이 〈춘앵전(春鶯轉)〉이다. 또 여러 전혀 다른 고전들을 가지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이러한 ‘합변지기’의 방식으로 창작한 대표적인 작품은 〈무산향(舞山香)〉이다. 이들 작품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정록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춤문화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

2026. 5.
사진제공_국립중앙박물관, 삼성문화재단,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Wikimedia Commons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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