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국립발레단 강수진 예술감독의 12년 임기가 막을 내렸다. ‘월드스타’라는 빛나는 아우라를 동력 삼아 부임했던 그는 한국 발레의 외형적 성장을 견인했다. 지난 시간 국립발레단 단원들의 기량은 상향 평준화되었고, 극장은 발레를 향유하는 관객들로 활기를 띠었다. 이렇듯 높아진 대중적 위상은 강수진이라는 리더의 헌신과 단원들의 노고가 빚어낸 성취이자 단체의 공이다. 하지만 비평의 시선은 이제 그 아우라 너머를 응시해야 한다. 가시적인 성과 이면에는 국립발레단이 지속 가능한 시스템과 고유의 내재적 역량을 온전히 갖추었는지 냉정하게 되짚어볼 때다.
조지 발란신, 존 크랭코, 존 노이마이어 등 거장들의 명작을 확보한 것은 관객들에게 수준 높은 미적 경험을 선사한 결실이다. 특히 해외 재단의 까다로운 라이선스 문턱을 넘어 세계적 레퍼토리를 국립의 자산으로 편입시킨 것은 강수진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발휘된 실질적인 성과다. 다만 지난 12년의 레퍼토리가 감독의 친정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전막 드라마 발레에 다소 편중되었다는 점은 아쉽다. 2026년 현재, 영국 로열 발레단과 파리 오페라 발레는 샤를 빈야미니, 아크람 칸과 같은 동시대 안무가들의 신작 초연을 전면에 배치하며 컨템퍼러리 비중을 전체의 50%까지 확대하고 있다. 심지어 보수적인 마린스키 발레단조차 엘다르 알리예프를 통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그 예술적 지평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 글로벌 발레계의 현실이다.
물론 각 발레단의 제반 환경은 다르나, 예술적 지향점만큼은 세계 발레계의 방향성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세계 주요 단체들이 자국 고유의 독자성을 바탕으로 컨템퍼러리 안무가를 적극 초청하며 미래지향적 예술 자산을 축적해 갈 때, 국립발레단은 다각적인 미학적 결을 발굴할 기회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이제는 특정 리더의 인적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단계를 넘어, 누가 수장이 되더라도 클래식부터 최신 컨템퍼러리까지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글로벌 레퍼토리를 다원화할 수 있는 행정적·예술적 전략을 체계화하는 것은 국립단체를 향한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12년이라는 긴 시간의 궤적을 단선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겠으나, 화려한 해외 레퍼토리 확보라는 성취의 이면에는, 한국 발레의 정체성을 담은 전막 창작물의 부재라는 결핍이 자리한다. 인프라가 척박했던 발레단 초창기에도 신작을 올렸던 과거의 역동적인 행보에 비춰볼 때, 강수진 감독의 12년이라는 재임기간은 국립발레단을 상징할 수 있는 전막 신작 하나를 내놓기에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지난 12년의 운영 기조가 클래식 공연의 안정적 수행에 힘쓰느라, 창작을 향한 세밀한 설계와 장기적인 로드맵에는 공백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백의 기저에는 1년 단위 예산 편성이나 불투명한 임기 체제 같은 구조적 난관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컬처가 대한민국만의 고유한 미학적 주권을 증명해 보이는 오늘날, 국립발레단은 더 적극적으로 동시대의 코드를 읽어내는 창작에 앞장섰어야 했다.
그간 단원들의 잠재력을 확인해준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통해 강효연, 송정빈 같은 가능성 있는 안무가를 배출한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안무가 개인의 역량에 기댄 일시적 성취를 넘어 리더십의 향방과 관계없는 지속 가능한 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뉴욕시티발레단의 ‘뉴욕안무 인스티튜트’나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안무 아카데미’처럼 신진 안무가를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상주 안무가와 협업하며 창작의 외연을 확장하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에 비하면 여전히 프로젝트성 기획의 범주를 맴돈 인상이 짙다. 이제는 안무가 육성의 기회를 내부 단원에만 제한하지 않고 국내외 안무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능동적인 협업으로 자생적 창작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 이것이 차기 리더십이 마주해야 할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지난 임기에 거둔 후원회 활성화와 단원 증원 등 행정적 성과 또한 유의미하다. 그럼에도 가시적인 숫자 이면에 무용수들이 성장할 수 있는 교육 환경과 조직의 투명한 운영이 제대로 맞물려 왔는지 점검해야 한다. 특히 해외 주요 발레단이 이사회를 중심으로 예술감독 선임 절차를 갖추는 것과 달리, 과정과 절차를 알 수 없는 문체부의 '밀실 인사'라는 고질적 관행으로 감독이 결정되는 것에 무용계는 가장 시급한 문제라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이사회가 유명무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내부 의사결정 기구가 단체의 예술적 방향성을 엄중히 진단하고 견제하는 본연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을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부실한 홈페이지 정비와 예술 자산의 아카이빙은 국립단체로서 수행해야 할 지극히 기본적인 소임이며, 이는 그간 전문가들 사이에서 국립 예술단체의 위상에 걸맞은 체계적 관리 시스템 구축을 강조해 온 사안이다. 수준 높은 발레마스터 등용과 교육 내실을 기할 전문 인력의 확보 역시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세계적인 발레단들이 국적과 인종을 넘어 글로벌 인재를 영입하듯, 우리 또한 해외 무용수 기용에 대해 열린 가능성을 검토해 볼 필요도 있다. 이러한 내부 체계의 견고함 이야말로 발레단의 질적 도약을 이끄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강수진의 지난 시절이 해외 작품의 이식에 안주했다면, 이제는 시대정신을 발레라는 문법 속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지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국립발레단이 명작을 전시하는 세련된 박물관을 넘어, 창작의 동력을 내부에서 길어 올리는 역동적인 창작발레의 산실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제 국립발레단은 강수진이란 리더의 아우라에 기대던 시대를 지나, 국립의 이름으로 ‘우리가 어떤 고유한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 앞에 당당히 서길 바란다. 차기 리더십의 과제는 강수진 체제가 다져 놓은 기술적 토대 위에, 글로벌 네트워크의 다원화와 창작 역량이라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을 한국 발레 유산의 체계적인 관리와 공공성이라는 내실로 채워가는 일이다. 국립발레단이 세계적인 클래식 발레의 훌륭한 소화력을 넘어 대한민국 발레의 독창적 발화지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장. 현장 비평가로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등단했다. 월간 <춤웹진>과 <더프리뷰>에 정기적으로 컨템퍼러리 창작춤을 기고하고 있으며, 국공립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단에서 심의와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세종시문화재단 자문위원이며 중앙대에서 비평관련 춤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