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엇갈린 재판 판결, 비평을 되새길 순간
김채현_춤비평가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명품 가방을 받은 행위에 대해 판사들이 엇갈린 판결을 내려 국민 여론이 분분하다. 12·3 내란 이후 설치된 특별검사팀이 김건희 여사의 그런 소행을 밝혀내어 기소하였고 또 그 가방을 김 여사에게 전달한 중개인도 별도로 기소되었다. 해당 명품 가방은 802만원 상당의 어느 샤넬백이라 한다. 액수를 굳이 명기하는 이유는 김 여사가 받은 여러 명품 가운데 이 한 가지에 대한 판결이 논란을 훨씬 더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여사가 그 외 다수의 곳에서 받은 다른 명품들까지 합하면 그 금액은 한껏 치솟는 모양이다.

명품을 동경하는 인간 심리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며 굳이 재물을 탐하지 않아도 저마다 애장 명품이 없지 않을 터여서 명품의 범위를 넓히면 품질이 탁월한 이러저런 소품과 도구, 심지어 명작, 명화 등도 동경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명품 그리고 대개 자본주의 시대에 동경 받는 국제적 명품은 과시적 용도의 럭셔리한 장신구 부류의 것이다.

명품을 받은 행위는 더욱 당시 김건희 여사의 신분에 비추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분노를 촉발하였다. 그런데 12·3 내란 사건과도 아주 무관하지 않을 형사 사건이어서 재판 결과를 엄중하게 기다리는 여론이 드셌던 상황에서 내려진 엇갈린 판결은 우선 어처구니없음은 물론이고 의분마저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명품 가방을 받은 행위를 두고 두 개의 다른 재판부에서 내린 엇갈린 판결을 그냥 지나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논란을 유발하는 엇갈린 판결처럼 예술비평에서도 엇갈린 비평이 발생할 여지는 상존하며, 이번 판결을 비평 측면에서 잠시 되짚어보는 것도 문화예술계를 위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802만원 명품 가방 사건 관련 1월의 재판에서 재판부는 의례적인 대통령 당선 축하 의사를 표현하는 용도로 전달되었을 뿐 청탁을 대가로 금품이 전달됐다는 인식이 김 여사에게 없었다고 판단하고 무죄를 선고하였다. 2월의 다른 재판부는 청탁을 예정하지 않은 의례적인 선물이기가 어려운 때문에 이미 묵시적 청탁 의사가 존재함을 김 여사가 알았다고 판단하고 샤넬백을 전달한 중개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중개인이 유죄라면 청탁 의사를 짐작하고서 전달받은 김여사도 응당 유죄일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혐의 사건 관련 최근의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비상계엄이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고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 행사되지 않았으며 비상계엄의 준비 기간이 3일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을 근거로 형을 감형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반면에, 이보다 10개월 전에 윤석열의 탄핵을 심판하면서 헌법재판소는 계엄군에 맞서 국회를 지킨 시민의 용기와 군경의 소극적 임무 수행이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막은 때문에) 비상계엄을 저지한 것으로 판단하고 윤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하였다. 1심 선고 재판부가 형을 감형하는 사유는 이미 헌법재판소의 판결에서 부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1심 선고 재판부가 몰랐을 리도 없다.

판사들의 판결은 다를 수 있다. 법관(판사 포함)이 법과 양심(良心)에 따라 재판한다는 선서를 엄숙히 지켜 재판을 진행해도 판결의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왜냐하면 판사의 여러 자질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양심은 개인의 도덕적 판단이고 그에 관해 명시적으로 확연한 객관적 기준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헌법과 법을 준수하는 법치주의를 기본으로 해도 개인의 도덕적 판단이 작용하는 한 판결은 차이가 날 수 있다. 양심에서 도덕적 판단이 핵심이겠지만 양심은 판사 개인의 관점과 의지, 식견까지 두루 포괄하는 개념일 것이다. 그런 개인적 요소가 작용할지라도 개인적 요소의 올바른 작용은 도덕적 판단에 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법은 3심제도를 두어 오판을 막아 판결의 신뢰성을 보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몇 가지 판결들은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에 우리 사회 전반에서 진행되는 재판들의 신뢰성에 대해 깊은 의문을 유발하고 있다.

위의 판결들을 보면 검사가 제기한 증거들이 재판부(판사)에 따라 인정되든가 아니면 기각되었다. 해당 증거들의 인정 또는 기각 행위는 재판부의 판단에 따른 것인데, 재판 과정에서 검사의 증거뿐 아니라 검사와 피고인이 주고 받은 신문 - 변론을 근거로 내려지는 판단이다. 여기서 재판부가 중시하는 것 아니면 경시하는 것, 또는 배척하는 것이 정해질 것이다. 이 같은 판단 과정은 비평 활동과 흡사하다고 생각되며, 일반적인 판단 과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일상적으로 비평과 유사한 활동을 무시로 행하며 살아간다. 비평을 아주 넓혀 보자면 여론조사도 일종의 비평일 것이고 뒷담화도 그에 속할 것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세평이라는 행위도 있고, 심사 같은 것도 그에 속한다. 주로 예술 분야나 다양한 전문 분야에서 비평이라는 말은 분야마다의 어느 특정한 사안에 대해 나름의 전문성 등을 갖춘 개인의 공적 활동을 뜻한다. 일상생활 속의 이런저런 활동을 비평이라 지칭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재판에 대해서도 비평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겠으나, 아무튼 형사 재판(내란 재판은 형사 재판 가운데 가장 엄중할 것이다)에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사건들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공적이며 개별적인 활동이므로 비평의 차원에서 잠시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판사는, 비유컨대, 재판의 세계에서 비평가이다. 판사는 공적으로 검사가 증거를 적시해서 제출한 공소장과 법정에서의 신문·변론을 근거로 판결을 내린다. 비평가는 창작자가 공적으로 제시한 객관적 실물을 근거로 판단한다. 둘은 상당히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법정은 일련의 기획된 활동이 일정한 제도·룰에 따라 전개되는 무대로 인식되며 또한 판사는 그것을 주시하는 관객 비평가에 해당한다. 하지만 판사는 누구든지 간에 만천하에 공표된 명시적인 법과 제도를 따라야 하는 데 비하여, 예술비평가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판사가 그 같은 의무를 지는 이유는 재판의 판결이 공적인 확정성을 갖기 때문이다. 특히 형사 재판에서 내려지는 형량은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강제 명령으로서 효력을 갖는다. 강제력을 내포하는 판결의 공적 확정성에 비하여, 예술비평은 말하자면 공적 제시성을 가지며 그 강제성을 운운하기도 어렵다.

판사에게는 법을 따라야 할 의무를 비롯해서 기소된 사건을 판결해야 할 의무, 양심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고 판결은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사회적 강제성을 띤다. 이처럼 재판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절차이므로 판사의 선발, 복무, 재판과 관련하여 제도와 기관을 두며 또 상시적으로 그 업무에 임해야 하므로 공공 재정에서 급여를 지급한다. 그러나 판사가 공공의 기관에 속하여 공공 재정의 급여를 지급받더라도 특히 양심에 따른 판결을 해야 하므로 법관(판사)의 개별적 독립성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양심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판사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더라도, 양심에 반한 판결을 판사의 독립성을 방패로 삼아 존중하거나 방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양심을 소중히 여겨 보장되는 독립성이 도리어 양심을 배반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면 아이러니이다.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에 못지않게 양심에 반하는 판결에 대해 응분의 사회적 제재가 가해져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전체주의 사회를 제외하고 민주 사회에서 예술비평의 세계는 재판의 세계에 비해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예술비평가를 위한 임의의 조직들은 있겠으나 법으로 정해진 비평 제도·규칙이나 기관은 물론 급여도 있지 않다. 말하자면, 예술비평은 개인의 공적이되 자발적이며 임의적인 활동인 것이다. 또한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것을 공개리에 선서해야 한다. 예술비평가는 이런 선서를 공개리에 할 의무가 없으며 비평가에 따라서는 선서가 묵시적으로 진행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판사의 선서를 예술비평가에게 대입해서 다시 생각해보자면, 예술비평가는 무엇을 따르면서 비평해야 하는가. 예술비평가는 전문성, 통찰력, 식견, 심미안, 집필 능력 그리고 양심에 따라 비평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외에 다른 자질이 더 고려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더라도 전문성, 통찰력, 식견, 심미안, 집필 능력 같은 자질은 양심과 마찬가지로 일단 추상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판사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 사항일 터이고, 판사의 재판에서 작용하는 자질은 그 외에도 많을 것이다. 판사와 예술비평가 각각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차이가 많이 나고 또 예술의 유동적인 본성으로 인하여 예술비평은 엇갈릴 수 있다. 아무튼 판사와 예술비평가는 양심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단적으로 말해서 양심은 판결과 예술비평을 뒷받침하는 마지막 보루이다. 판결이 엇갈릴 때 가장 먼저 들리는 흔한 언사는 ‘이번 재판의 판사가 정말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렸는가’이다. 양심을 따른다고 할지언정 예술비평은 정반대로 엇갈릴 수 있겠으나, 판결이 그렇게 엇갈린다면 합리적 이성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와중에 함께 거론되는 것이 국민의 법 감정과 상식이다. 더욱이 국가·사회적으로 중차대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특별검사를 임명해서 증거를 모으고 모아서 기소한 재판들에서 그렇게 엇갈린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형량에서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 용납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엇갈리는 판결들 가운데 분명 어느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일 것이다. 그 올바르지 않은 그릇된 판결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판사가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는 여론이 드센 계절이다. 평소 건성으로 듣던 판사의 재판 선서를 곱씹어 보게 된다. 지금은 또한 비평을 양심의 측면에서 새삼 헤아려 보는 계절이 아닌가 한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6. 3.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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