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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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26년 10월 13일(화) 오후 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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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아카데미아인(서울 동교동)
인터뷰이│ 김영숙
기 록│ 김유리
한국춤비평가협회(춤비협)는 지난 10월 ‘원로·중견 무용인 초빙 비평시각 공개 심층 인터뷰’로서 전통무용가 김영숙님을 초청하여 진행하였다. 2024년부터 열은 이후 이번이 여덟 번째이다. 이 프로그램은 춤비협에서 재작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활성화지원사업으로 선정되어 진행되어왔다. 이를 기준으로 춤비협 내에서는 배정혜·미나유·제임스전·안애순·김은희·박은화·김순정 님들을 초청하여 작년 11월까지 진행하였다.
매 인터뷰에서는 초빙 무용인이 제공한 연관 자료들을 숙지하고 사전에 비대면 예비 모임을 가져 인터뷰의 주제를 몇 가지로 정리하는 사전 모임을 갖는다.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공개 심층 인터뷰는 공개된 자리에서 복수의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무용예술인에 대한 인터뷰이므로 비평시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 같은 유형의 심층 공개 인터뷰는 인터뷰의 일반적 관행과 형식을 탈피하므로 낯선 점이 있고 인터뷰이는 물론 인터뷰어에게도 사실상 선례가 없다시피 해서 그 형식을 모색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심층·공개·비평시각이라는 3요소를 춤작가와의 인터뷰에 녹여내어 춤작가의 면모를 가급적 충실히 드러내고 또한 공개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용 면에서 객관성을 견지할 것이 요망된다. 앞으로 지속될 본 프로그램이 무용인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재조망하고 비평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공개 인터뷰 취지에 맞춰 초빙 무용인이 의견을 밝힐 시간을 넉넉하게 갖고 참석자들이 의견을 표하는 기회도 제공되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이전에는 시간 관계상 그러질 못해서 아쉬움이 컸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올해부터는 특정 공간을 고집하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장소를 옮겨 열릴 예정이다. 김영숙님 인터뷰는 분량을 고려하여 〈춤웹진〉에 2회로 나누어 게재된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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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3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김영숙 초빙 비평시각 공개 심층 인터뷰, 아카데미아인, 서울 동교동,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춤웹진 |
여는 말
김채현: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행을 맡은 김채현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김영숙님 지인들, 평소 김 선생님께 수련한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무용인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오늘이 여덟 번째입니다. 이 공개 심층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패널들이 미리 회의를 했습니다. 비평 시각에서 김영숙 선생님 활동에서 무엇을 주시하고, 무엇을 질문할 것이며, 본인의 생각은 어떠한지 주제를 정리해 보자는 취지였지요.
인터뷰는 주로 1대 1로 사석에서 진행하는 것이 상례입니다만, 이것은 심층 공개 인터뷰로서 공개리에 진행됩니다. 사실 드물거나 유례없을 이런 공개 심층 인터뷰는 우리 춤계가 그 만큼 역량을 축적했다는 증표로 해석될 만할 겁니다.아무튼 말씀하시는 분이 충분히 편하게 말씀하실 분위기가 우선일 것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인터뷰라는 것은 신문하는 자리가 아니지요. 서로 마주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보면,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갑자기 기억나는 수도 있겠지요. 그러려면 편안한 분위기에서 말은 부드럽되 내용은 깊이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오늘 김 선생님도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실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답이 나올지 크게 기대되고, 오늘 오신 분들께도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패널로는 전통춤이론가인 김영희 선생님, 무용원의 서정록 선생님이 함께하십니다. 이전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예술가의 집에서 할 때는 통상 2시간 반 정도 했는데, 시간의 제약이 컸던 때문에 할 이야기가 남았는데도 부득이 중단하곤 했어요. 그런 폐단을 벗어나려고 이번에는 아카데미아인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심층 인터뷰라 해서 특별한 순서가 정해진 것은 아니겠지요. 통상적으로 춤계에서 한 분의 세계를 알아보려고 하면 대개 처음 나올 기본 질문은 유사할 겁니다. ‘춤을 왜 시작했는가, 어떤 춤을 언제 왜 시작했는가.’ 거기서 말문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가급적 압축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전공은 흔히 한국 무용, 전통 춤, 더 좁히면 일무(佾舞)라고 하는데요. '처음 춤을 어떻게 시작했습니까'라는 질문은 상투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춤을 시작했으니 오늘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럼 인사 말씀부터 겸해서 입문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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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무연구가 김영숙 ⓒ춤웹진 |
춤 입문 - 국민학교 시절
김영숙: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의 일무 전승교육사이자, 사단법인 정재연구회와 아악일무보존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이름이 가장 흔한 김영숙 중 한 명입니다(웃음). 저는 서울 서대문구 서울금화국민학교에 다녔어요. 오래전 일이라 '었'을 많이 붙여야 하는데 숨이 차서 덜 붙였네요(웃음). 집에서 학교 가는 길에 무용학원이 있어 장구 소리가 늘 울렸을 텐데, 제 귀에 들어온 건 3학년 때예요. 지나가다 소리가 들려 학원에 올라가 한참 구경하고, 집에 와서 '무용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아버님이 1909년생이시고 제가 4남매 중 막내라 연세가 있으시니 '그런 거 하면 기생 된다'며 반대하셨죠.
나중에 보니 당신(아버지)이 기생집에 좀 다니셨나봐요. '모란은 화중왕이요' 이런 노래를 부르셨는데, 그런 노래는 기생집에서나 부르던 거였어요(웃음). 그래서 제가 그런 곳에 갈까 봐 반대하신 것 같고, 반대로 어머니는 제가 TV 쇼 프로그램에서 춤추는 걸 따라 흉내 내는 걸 보시고는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저를 데리고 가 등록해 주셨어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다녔는데, 그 선생님이 이매방 선생님 제자분이셨던 것 같아요. 그곳을 아지트처럼 해서 오신 분들이 더러 계셨는데, 이름들이 좀 있으셨어요. 거기서 배운 춤들이 나중에 이매방 선생님의 검무 같은 춤들과 같더라고요.
중·고등학교 시절 - 이매방 선생님과의 인연
김영숙: 중학교 갔을 때 그 학원 선생님이 저를 이매방 선생님께 연결해 주셨던 것 같아요. 국민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경기여중을 가겠다며 단발로 잘랐다가 어머니한테 되게 혼나고, 결국 좀 기른 상태로 이화여중을 갔죠. 그때 소개받고 간 곳이 창덕궁 길 건너편 일본 적산가옥의 좁은 공간이었어요. 거기서 승무와 외북을 2학년 때까지 배웠고, 하루는 레슨 시간이 지나도 선생님이 안 오시다가, 한잔 걸치시고 신발짝을 두드리며 춤추며 들어오시는데, 갑자기 선생님 머리 위 번개가 번쩍하는 모습이 보이더니 전기가 끊겼어요. 그때 뵌 선생님 모습이 마치 귀신 같아서 많이 놀랐어요. 사흘을 앓고, 그때부터 무서워서 이매방 선생님께 발걸음을 끊었죠. 이매방 선생님께 배울 때 봄에 창경궁 벚꽃 축제에서 가설무대를 만들면, 선생님이 승무를 추려고 엎드려 계시다 또 한잔 걸치셔서 안 일어나시니, 무대 만들고 남은 각목으로 뒤에서 쿡 찌르니 그제서야 일어나 추신 적도 있어요(웃음).
나중에 대학 졸업 후 김천흥 선생님 모시고 다닐 때 이매방 선생님이 계셨는데, 저는 지레 겁먹고 멀찌감치 서서 인사만 했어요. 어렸을 때 배운 거라 이매방 선생님은 제가 배운 적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셨을 거예요. 그 놀란 일로 무용을 한동안 쉬었죠. 고등학교 입시에서 이화여고를 떨어지고 경희여고를 갔어요. 시험 볼 때 창밖 언덕길로 가는 사람이 꼭대기까지 몇 분 걸리나 재고 있었는데도 합격했죠(웃음).
경희여고는 '1인 1기'를 강조해서 제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 무용반에 들어갔어요. 제가 고2일 때 고1 학생으로 ‘리틀엔젤스’ 단원 출신 친구들이 많이 들어왔고, 문선희 선생도 한 학년 후배로 들어왔어요. 선생님은 김아정 선생님이셨는데 2학년 때까지 계시다 그만두셨어요. 학교 근처 학원을 운영하셔서 그 학원을 또 다녔죠. 선생님께 배운 것을 갖고 콩쿠르에서 상을 받아오곤 했죠. 개교 기념 행사를 서울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했는데, 승무를 추고 들어가던 친구가 뒤에 세워둔 삼북의 맨 끝을 건드려 도미노처럼 다 쏟아진 일이 있었어요(웃음). 다시 세워 마무리하고 나왔는데, 제가 무용반 반장이라 대표로 선생님께 손바닥을 되게 맞은 기억도 있습니다. 고3 올라갈 때는 사실 무용과를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옛날에 놀란 기억도 있고 해서요.
이대 콩쿠르와 무용과 진학
김영숙: 고3 때 '무용반에 뭔가 흔적을 남겨야겠다' 싶어 무용 콩쿠르를 나가기로 했어요. 같은 무용반 친구도 이대 콩쿠르를 나가겠다고 해서, 경희대에 계시던 김백봉 선생께 가서 둘이 오디션을 봤죠. 선생님이 저더러 나가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콩쿠르 때 제 앞 친구 순서에서 오디오가 찌지직거렸고, 제 차례에서 음악이 안 나와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해서 삼 세 번 만에 3~4분짜리 춤을 마무리하고 나왔어요. '이젠 틀렸다' 싶어 집에 왔는데, 거기에서 끝까지 기다렸던 친구가 집에 쫓아와 '학교 가서 상 받아야 한다'고 해서 받아왔죠. 이대 콩쿠르 한국무용 부문에서 1등 상을 받아서 '쉽게 대학 가자' 해서 이대 무용과에 진학했어요.
김영희: 처음 선생님이 서진희 선생님이라고 하셨는데, 선생님께 배운 춘향전은 어떤 작품이었어요?
김영숙: 춘향전은 춘향이·이도령·방자·향단이가 나오는데 제가 방자 역을 맡았어요. 그분이 창작하신 짧은 무용극이겠죠. 당시 '한국의 집'에 관광객이 많이 와서 거기서 공연한 적도 있어요.
김영희: 이대 콩쿠르 전에는 안 나가셨어요? 1등 하신 작품은 이름이 뭐였어요?
김영숙: 그 전엔 ‘리틀엔젤스’ 단원 후배들과 군무로만 나갔어요. 1등 작품은 약간 산조춤 같은 창작인데, 제목은 안 떠올라요. 3~4분짜리 독무였고, 노란 치마저고리에 보라색 고름 달린 걸 입고 맨손춤으로 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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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 공개 심층 인터뷰. (왼쪽부터) 서정록, 김영희, 김영숙, 김채현 ⓒ춤웹진 |
대학(이화여대 무용과) 시절
김영희: 이대 재학시 무용학과 분위기가 어땠는지, 전통 춤 수업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지요.
김영숙: 제가 생각할 때 이대 무용과가 아마도 가장 분위기가 좋을 때였어요. 현대무용은 육완순 교수님이 〈수퍼스타〉 같은 공연을 많이 하셨고, 발레는 홍정희 선생님, 한국무용은 정승희 선생님이 연구조교로 강의에 나오셨어요. 저흰 정승희 선생님이 교수가 되시려나 했는데, 2학년 때 김매자 선생님이 교수 임용을 받아 오셨어요. 김 선생님이 '창무회에 나와라' 하셨어도 저는 안 나갔죠. 나중에 졸업 후 국악원에서 전통만 하니까, 선생님이 저를 불러 창무회 회원들에게 진주검무, 춘앵전을 가르치게 하셨어요.
김채현: 육완순 선생님이 73년 부활절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처음 하셨거든요. 분위기가 좋았다는 말씀이 맞습니까?
김영숙: 네. 당시 경희대 계시던 박명숙 선생이 저보다 선배신데, 그런 분들이 〈수퍼스타〉에서 활동을 많이 하셔서 공연들이 좋았어요. 수업 중 전통춤은 김천흥 선생님이 양주별산대·춘앵전 등을, 한영숙 선생님이 살풀이를, 이정범 선생님이 설장구를 가르치셨어요. 이정범 선생님은 제가 고등학교 때 설장구를 배울 때 가르치셨던 분이에요.
김영희: 대학 다니며 제일 재미있던 과목은요?
김영숙: 그냥 노는 게 제일 좋았죠(웃음). 김매자 선생님의 어느 과목은, 시험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또 본다고 하니 다 같이 단합해 안 들어갔어요. 부산에서 온 두 사람만 재시험을 보고, 저를 포함한 여러 명은 전공인데도 F가 나와 재수강했죠. 평점도 떨어지는 일을 겪었어요. 그래도 학교는 재미있게 다녔어요.
김영희: 김천흥·한영숙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모습은 어떠셨어요?
김영숙: 김천흥 선생님은 환갑이 좀 지나셨을 텐데 그냥 할아버지처럼 편안하게 쉽게 배웠죠. 그때 저는 전통에 특별히 애정을 가졌다기보다, 저에게는 '창작무용보다 전통이 맞는다'고는 생각했어요. 집안 분위기가 언니가 저와 11살 차이라 오래된 분위기여서 그런지 중학교 때 특별 과외처럼 가야금을 배웠는데, 그분이 나중에 보니 서울대 국악과 김정자 선생님이셨어요. 대학 때 통기타가 유행했지만 저는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아 최충웅 선생님께 가야금, 정악을 배웠죠. 이매방 선생님께 승무를 배울 때도 '이 춤을 춰야 내 성질머리를 고칠 수 있어' 하며 느린 동작을 따라 했어요.
김채현: '춤을 왜 계속 했냐니까' 하니 '성질머리를 고치기 위해서'라 하시는데, 한평생 춤으로 나쁜 성정이 교화되었습니까?
김영숙: 그렇죠, 춤의 힘이죠. 성질을 못 이겨 많이 울기도 했지만, 그 일념으로 췄기에 성정이 많이 나아졌어요(웃음). 제가 막내라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어머니 장사 관련 서류 처리 같은 걸 고등학교·대학 때 다 하면서 일찍 철이 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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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2.4. 심소 김천흥선생과 정재연구회 팸플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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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소 김천흥선생과 정재연구회 공연 커튼콜 |
졸업과 국립국악원 입단
김영숙: 이대 무용과를 졸업하기 전, 육완순 선생님이 과장을 맡고 계실 때 국립국악원에서 무용단원 추천 의뢰가 와서 두세 명이 1월 초부터 출근하게 됐죠. 대학 졸업자로는 저희가 처음이었고, 그전엔 봉산탈춤 하는 친구들 셋이 있었어요. 여자 단원 중 나이 많은 분이 새로 온 우리더러 먼저 있던 단원을 '언니'라 부르라고 했는데, 제가 '여기가 무슨 기생방이냐, 우리는 대학에서 공부했으니 언니라곤 못 하겠다, 대신 선생이라 불러주마' 하고 수습했죠.
궁중무는 주로 김천흥 선생님이 지도하셨어요. 검무·무고·가인전목단 같은 걸 배웠고요. 문일지 선생, 이애주 선생도 강사로 나오셨어요. 1975년이 광복 30주년이라 당시 원장이신 김기수 선생님이 '81530'을 작곡하고 문일지 선생님이 안무하셔서 공연도 했어요. 국악원에 가서 보니 김천흥 선생님이 계셨는데, 선생님이 '일무를 좀 해 봐라' 하셨어요. 그 용어 자체를 처음 들어서,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호기심이 발동했죠. 그게 1975년이에요.
일무(佾舞) 입문 — 1975년
김영숙: 그때 주로 배운 게 문묘일무와 종묘일무에요. 가을 학기에 국립국악고등학교 강사로 나가, 9월에 64명을 모아 가르쳐 추계석전에 처음 나갔어요. 국악고는 한 학년 50명씩 두 반인데 무용 전공자는 없고 악기 전공 학생들이었고, 남학생이 많았어요. 말도 되게 안 듣는 학생들을 데리고 8일무를 했죠. 국립국악원은 옛 이왕직아악부, 국립국악고등학교는 아악부원양성소의 기능을 이어받아, 행사에 나가면 제례악은 국악원이, 일무는 국악고 학생들이 맡았어요.
1975년 9월은 추계 석전, 76년 5월은 종묘에서 했어요. 국악고가 75년엔 무용 전공이 없다가, 76년에 입학생 100명 중 8명씩 16명을 무용 전공자로 만들었어요. 당시 국악과가 서울대에만 있다시피 해서, 학생들을 무용 쪽으로도 분산시키려 한 것 같아요. 그래서 75년 석전에서 일무를 한 친구들은 음악 전공이었고, 76년에 처음 무용 전공생 16명이 생긴 거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 8일무가 안 맞아요. 대한제국 시기에 대사는 종묘·사직만이고, 선농·선잠·문묘·산천은 중사라 원래 6일무를 해야 해요. 일제강점기에도 6일무였는데, 1928년 추계 석전 때 '일본 천황의 예'로 한다며 8일무로 늘린 거예요. 광복 후에도 되돌리지 않고 8일무로 유지해 온 게 일제의 잔재죠. 종묘·사직은 대한제국 예전에 준해 8일무가 맞지만, 석전은 6일무를 해야 하는데 지금도 '석전대제'라며 8일무를 하고 있어요. 이건 잘못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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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일소당 음악회’에서 〈정대업지무〉 중 ‘소무’ ‘선위’의 장면 |
일무 학습 과정과 스승들
김채현: 김천흥 선생이 '일무를 해 보라'고 하셨을 때 어떤 이유나 비전이 있었나요?
김영숙: 구체적인 말씀은 없으셨어요. 제 큰 병 중 하나가 어른 말씀을 거절 못 하는 거라서, 하라고 하시니 해야 하나 보다 했죠. 또 하나는 약속 장소에 30분씩 일찍 가는 병이에요(웃음). 그냥 '새로운 거니 재미있겠다' 싶어 한 거고요. 사실 일무는 그때 처음 들어봤어요. 종묘일무보다 문묘일무를 먼저 배웠는데, 일제강점기에 악사가 줄어 고용 악사들이 하다 보니 '약식 삼방배'로 간단했어요. 북쪽·서쪽·동쪽·다시 북쪽을 보며 한 동작씩 여덟 번 반복하면 한 곡이 끝나죠. 아헌은 간척을 들고 네 번째 박에 내려치고, 종헌은 어깨에 메고 한 바퀴 돌아 내리치는 차이가 있어요.
김영희: 학습 과정은 어땠어요?
김영숙: 주로 토요일에 학교 상설공연으로 학생 발표가 있었어요. 교장이신 성경린 선생님, 김천흥 선생님이 오셔서 봐 주셨죠. 문묘일무는 쉽게 배웠고, 종묘일무는 한 장 한 장씩 배웠어요. 전체가 아니라 종묘대제에 필요한 희문·기명·귀인·소무·독경 정도만 우선 배웠죠. '전장(全章)을 다 외워 발표하라'고 하신 건 김천흥·성경린 선생님이셨어요. 국악원 원장이자 국악고 교장으로도 오신 죽헌 김기수 선생님까지, 이분들이 다 이왕직아악부 양성소 출신이라 시간 되는 대로 배웠어요. 선생님마다 성격·체형 차이로 동작이 크거나 작거나 부드럽거나 조금씩 달라서 공통분모는 제가 찾아야 했죠. 76년에 국악고로 직장을 옮기고 79년에 대학원에 가면서 자료를 찾아 살을 덧붙였어요.
서정록: 무보를 보면서 하셨나요?
김영숙: 네, 지금도 쓰고 있어요. 김기수 선생님이 악보 정리를 많이 하셨어요. 악기별 악보도 만드시고 정간보를 5선보로 옮기는 작업도 하셨죠. 일무는 '종묘제례악의 악장과 일무보'라는 책이 있어, 동작 용어가 다 설명돼 있어요. 선생님들이 설명하며 동작도 해 주셔서 그 무보를 중심으로 본 거죠. 현재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김채현: 일무를 전수해 주신 분이 김기수·성경린·김천흥 세 분이시죠?
김영숙: 다른 선생님들도 공연할 때 '이건 이렇다'고 말씀은 해 주셨어요. 당신들도 다 배우셨던 거니까요.
국립국악고등학교 전임교사 임용
김채현: 국악고 출근은 75년 연초부터, 전임교사가 되신 건 76년 4월부터죠? 임용 과정은요?
김영숙: 교무과장 선생님이 '무용 교사로 채용하려는데 올 수 있겠느냐'고 하셨는데, 교장이신 성경린 선생님이 오히려 반대하셨대요. 나중에 들으니, 어렸을 적 송월동에서 저희 집과 성경린 선생님 댁이 돈을 합쳐 집을 사서 한 집에 살았어요. 저를 어렸을 때부터 아시니 채용하면 비리에 얽히실까 봐 반대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교무부장 선생님이 '무용 전공은 꼭 있어야 한다'고 하셔서 제가 가기로 됐죠. 전임 무용 교사는 저 하나, 여자 선생도 저 하나였어요. 나중에 (학교가) 포이동으로 옮겼고, 제가 그만둔 한참 후에 두 명이 됐고요. 무용 전공도 16명에서 학생 수가 늘며 30명 정원이 됐어요.
일무 학습의 애로
김영희: 일무 배울 때 애로사항이 있었을까요?
김영숙: 제일 어려운 건 음악이죠. 종묘제례악은 '한 장단에 4박·6박'처럼 정해진 게 아니라, 통째로 외워야 했어요. 전장 발표를 한다니까 한 선생님이 '정말 다 외워요?' 하시며 '내가 구음을 해 볼 테니 해 봐' 하셨는데, 앞머리가 같아서 '기명'인 줄 알고 시작했다가 아니었어요. '선생님, 이거 아닌데요' 했더니 '알긴 아네' 하셨죠(웃음). 그 곡은 진찬곡이라 일무가 없는 곡이었어요. 일무 없는 곡을 시험 삼아 시키신 거죠. 음악을 통으로 외우고, 악곡별로 한 박일 때와 네 박일 때까지 다 외워야 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김채현: 그 음악을 어떻게 머릿속에 입력시켰어요?
김영숙: 그냥 무식하게 듣는 거죠. 60년대 말에 나온 카세트, 그리고 릴 녹음기를 썼어요. 요만한 릴 녹음기인데 스피커도 다 나오고요. 아마 70년경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서정록: 그때 악장에 대한 설명도 같이 해 주셨나요?
김영숙: 죽헌 선생님의 '악장과 일무보'에 악장이 한자로, 악보로, 한글 풀이로 다 나와요.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셨죠. 그런데 79년에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며 보니, 막상 악장과 일무 동작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었어요. 내용은 이해했지만 그런 어려움이 있었죠.
1988년 종묘일무 전장 발표
서정록: (질문) 88년 전장 발표를 준비하며 선생님들은 뭐라고 하셨나요? 자료엔 '능력이 출중해서 하게 됐다'고 나오던데요.
김영숙: 그건 어려운 걸 시켜놓으셨으니 좋게 포장해 주신 거겠죠. 그 전에 선생님들이 6·25 때 종묘제례악을 지킨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종은 거적에 싸 화단에 묻고, 경은 우물에 담가놓고, 악서는 보따리로 지고 부산까지 피난 가셨대요. 전쟁으로 국악원 개원이 미뤄져 이듬해 용두산에서 개원하신 이야기도요. 71년부터 종묘대제를 다시 시작했는데, 헌관들이 각 실에서 짧게 하다 보니 뒷부분이 사라질 염려가 있었어요. 그래서 '전장을 다 암기해 발표하라'는 취지로, 사명감·소명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김영숙: 85년 2월에 국악고를 그만뒀는데, 학교 수업하며 진득하게 못 하니 그만두고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만두고 더 바빴어요. 학교에선 주 22시간이었는데, 강사를 나가면서는 거절 못 하는 병 때문에 주 32시간씩 뛰었거든요(웃음). 그래서 86년부터 운전을 했는데 벌써 40년, 1년이면 4만~4만 5천 km씩 뛰었어요.
김채현: 전장 발표는 어디서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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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25. 김영숙종묘일무발표회 팸플릿 |
김영숙: 국립국악원 소극장(지금의 우면당)에서 했어요. 어르신들이 반주를 해 주셔서 영광스러운 자리였죠. 김천흥 선생님은 늘 무보를 가져와 제가 틀리는지 보셨어요. 정대업은 합흉한 자세로 한참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생각이 안 나 그러는 줄 알고 무보를 넘기시기도 했죠. 당신도 다 외고 계신 게 아니니 넘겨가며 엄격히 봐 주셨어요. 그날 원로 선생님들이 다 오셔서 '누구도 한 적 없는 걸 해냈다'고 하셨죠. 그런데 전장을 다 외운 이후로 뇌 용량 때문인지 옛날 일을 그다지 잘 기억 못 해요(웃음).
김영희: 무용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공연이었다고 생각해요.
김영숙: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작년엔 64명이 전장 발표를 해 줬어요. 64명이 8일무로 전장을 다 하는 건 불가능하다 싶어, 한 친구가 하겠다기에 '그거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 했더니, 공연 끝나고 '선생님, 제가 장을 끓여 가겠습니다' 하더라고요(웃음). 당시 전장 발표 영상은 없어요. 그때는 비디오 촬영을 생각 못 했어요. 팜플렛은 있어도 사진은 별로 없고요.
'운명'이라는 자각, 그리고 일무 50년
김채현: 종묘일무 발표를 하고 한 달쯤 지나니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입문 12년 만에 1단계 과업을 정리한 셈인데요.
김영숙: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 운명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올해가 종묘대제에서 일무를 한 지 50년이에요. 75년에 국악원에 들어가 일무를 공부하기 시작한 게 작년으로 50년이 됐고요.
김채현: 그 운명의 구체적 내용이겠습니다만, 내가 어떤 활동을 하게 될지 예측해 본 적이 있습니까?
김영숙: 특별히 미래 계획을 세우진 않았고, 주어진 일에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88년 전장 발표 공로로 90년에 전수조교(지금의 전승교육사)가 되면서 정식으로 일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99년부터 이수자가 나오기 시작했죠. 26~27년 동안 그 이수자들이 나와 작년 64명 전장 발표가 가능했던 거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맥이 끊어지지 않게 잘 가르쳐 이어가게 하는 것이지요.
일무에 대한 제도적 대우와 '아악일무보존회'
김영숙: 50년간 정식으로 배운 게 문묘일무·종묘일무인데, 사직대제는 2000년에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어요. 그런데 국가유산청이 참 문제인 게…
김채현: 그건 있다 말씀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88년 전장 발표 전에 다른 분이 하신 적이 있었나요?
김영숙: 없었죠.
김채현: 그래서 국내 제1호입니다. 70년대 중반은 유신이 극심하고 경제 건설에 한창일 때, 88년은 그 시대를 넘어선 때라 분위기가 다릅니다. 일무에 전념하는 여건도 나아졌을 텐데, 그런 느낌은 안 드셨나요?
김영숙: 전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일무에 대해 국가유산청이든 종묘제례악보존회든 '지원해줘야겠다'는 분위기가 전혀 없어요. '일무보존회'라는 명칭을 제가 쓴 줄도 몰랐는데, 회원 여럿이 출연할 때 주최 측이 넣어 준 거였어요. 그런데 종묘제례악보존회 선생님들이 '그게 동급처럼 보이니 쓰지 말라'고 하셔서, 결국 '아악일무보존회'라는 명칭을 따로 썼죠. 작년 64명 전장 발표 때도 지원금을 '아악일무보존회'로 받았는데, 천만 원을 떼어서 종묘제례악보존회에 반주를 부탁했더니 '격이 떨어진다'며 공연 직전에 못 하겠다고 했어요. 무구·의상·사무실 경비가 드는데도 지원이 전혀 없어요. 그렇게 일무를 대우해 주는 분위기가 없습니다.
김채현: 그럼 잠시 휴식하고 이어가겠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 이하 김영숙 공개 심층 인터뷰 제2편(춤웹진 2026. 12월호)으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