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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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26. 5. 25. 오전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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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경기도 퇴촌면 이순열 선생님 댁
매번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때면 공통으로 느껴지는 것이 예술은, 아름다움은 현실을 넘어선 세계를 볼 줄 아는 안목과 그런 세계가 있다는 그것을 믿는 능력과 밀접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대단한 힘이 아니라 작은 바람, 미풍이라는 역설적 상황까지 들으면 잠시 꺄우뚱해진다.
다분히 은유적인 ‘미풍’은 내게는 대단함으로 오해될 수 있는 그것을 막기 위한 ‘미약함’으로 관심을 돌리는 감각적 행위이자, 아름다운 자체가 갖는 다른 것과 차별화된 의식적 ‘이완’에 대한 강조로 받아들여진다.
미의 세계로 가고 싶은 사람이 ‘정화’를 거치고 몸의 이곳저곳에 날개를 갖췄다면 그는 작은 바람만 있어도 날아오르게 되고, 미의 세계와 한층 가까워지게 되는 신화 속 이야기...
나는 욕망에 휩싸이다가도 정화를 허용하여 금세 순수한 상태로 돌아갈 줄 아는가.
나는 몸 곳곳과 옷, 신발의 곳곳에 날개를 두었는가? 날개가 그곳에 있는 것을 허용하는가?
나는 작은 바람에도 기꺼이 날아오르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풀어 들어야 할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지난 1편에서는 그리스인들의 최고 가치 Arete, 대충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장 높은 경지까지 선과 덕을 추구하는 ‘마음 자세’ 얘기부터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전인교육’을 추구하고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결핍을 느끼고 강조하기 시작한 인문학의 뿌리가 됨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의 미래를 직업으로만 고민하고, 초등학교부터 의대 진학반을 꾸려 전문가로 키우려는? 강력한 우리의 현재 교육 풍조에서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있는 곳 어디라도 내려앉을 구석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나마 다음의 이야기는 변형_metamorphosis의 이야기에서 시작되니 약간의 희망이 보이긴 하지만, 그 역시 ‘위를 보고 날아오르려 해야’ 가능한 변형이다.
이지현 : 선생님 말씀은 K-wave가 지금 수준에 머물지 말고 더 고급문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죠?
지금 상태에서 만족하지 말고 엘리베이션, 격상을 시키는 정말 성스러운 작업을 해야
이순열 : 그러니까 우리도 토포테지아를 만들어 현실을 넘어서는 어떤 세계를 지향해야 하고 아까 얘기한 ‘날개’처럼 어딘가로 향하고, 추구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격상(格上)과 격하(格下)의 거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격하’ 한없이 땅으로 떨어지고 ‘격상’ 끝이 없이 올라가는, Alps on Alps Arise처럼 솟아 올라가는 건데,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메타모포시스 Metamorphoses〉 가운데 꿀 같은 구절이 있는데 “Pronaque cum spectent animalia cetera terram, os homini sublime dedit caelumque tueri jussit et erectos ad sidera tollere vultus”라는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animalia cetera 다른 동물들은 고개를 땅에 쳐박고 있는데, os homini 사람의 얼굴은, sublime dedit caelumque tueri erectos ad sidera tollere vultus, 즉 “숭고함에 받쳐진 인간의 얼굴은 하늘을 향해 별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야.
오비드의 〈메타모포시스〉가 위대한 것은 별을 향해 인간은 치솟아야 한다는 이런 구절이 다른 사람의 신화에는 없잖아.아까 얘기한 바날리제이션에서 엘리베이션으로 가야 한다는 거, 속된 땅에 처박혀 있는 데서 하늘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한류에 적용해 보면 지금 상태에서 머물지 말고 엘리베이션, 격상을 향한 성스러운 작업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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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열 ⓒ이지현 |
이지현 : 그리스 신화를 훑어보면 지혜의 보고(寶庫)처럼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수두룩한데 말씀하신 것 외에도 우리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 많겠지요?
이순열 : 그리스 신화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것 가운데 휴브리스(hubris/ 오만, 교만)라는 것이 잇어요.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신화에서 끊임없이 드높음을 추구했으면서도 그들의 신화에서 끊임없이 드높음을 추구했으면서도 상승에 취해 휴브리스의 수렁에 빠지는 순간 추락하고 만다는 제동장치를 마련해 놓았지. 너무 높이 날아 올라서는 아버지의 충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양을 향해 한없이 질주하다 마침내 추락하고 만 이카로스의 비극이 휴브리스 파국의 본보기일 거야.
토인비는 어느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은데 도취하여 오만의 투구를 둘러쓰고 날뛰다가 몰락하는 것을 휴브리스의 비극이라고 설파하기도 했지.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 못지않게 당당했던 루카 피티(Luca Pitti, 1389-1472)는 신축할 자신의 대저택 설계를 브르넬레스키에게 맡기면서, 우리 집 창문은 메디치 저택의 대문보다 더 커야 한다고 주문했어요. 교만의 극치야. 이렇게 설쳐대다가, 피티 궁전으로 불리던 그 대저택은 채 완성이 되기도 전에 피티 가문이 몰락하고 결국 메디치 가문의 소유로 넘어가게 돼요. 휴브리스 저주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지만 휴브리스와 관련해서 그리스인들이 마련한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 대칭 어로 겸허함이 아니라 ‘아레테’를 선택했다는 점이에요. 오만으로 우쭐거리는 추악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이야. 말로 아레테라고 못 박은 거지.무용 비평가들이 그런 점을 얘기해 줘야 하는데, 미학 미학 말들은 많은데 격상을 재촉하거나,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얘기하는 건 잘 들을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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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열 ⓒ이지현 |
대무미동大舞微動_정(靜)속에 많은 것을 압축해서 감추고 있는 춤이라야 큰 춤이다
이지현 : 무용에서 그 아레테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순열 : 로마의 격언 중에 알맹이 없는 말을 장황하게 지껄이지 말고(pauca multis), 적은 말속에 많은 것을 담아라(Multa paucis)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을 춤으로 옮기면, ‘큰 춤에는 움직임이 없다’ 대무미동(大舞微動)이야. 정(靜)속에 많은 것을 압축해서 감추고 있는 거라야 큰 춤이라고 나는 생각해요.아무도 논어 중에 그것이 제일 멋있는 말이라고 이야기 안 하지만은 논어의 ‘헌문편(憲問萹)’에 이런 말이 나와요.
제자들이 공자에게 이 사람 저 사람에 관해 물으면, 공자가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데, 제자들이 자서라는 사람에 관해서 물으니까, 공자가 이 자서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하고 싶지 않은 거야. 못마땅한 거지. 그러니까 뭐라고 하냐면 “피재(彼哉)라 피재(彼哉)라” “그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라고….” 하고 딱 끊어버려요.이것이 난 논어 중에서 제일 멋있는데, 아예 구체적으로 얘기를 안 하는 거지. 지껄이는 여러 말보다도 침묵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라고….” 하고 딱 끝내는 거지.
수사학에 ‘에포사이어페시스’ Aposiopesis라는 게 있어요. 이야기하다가 딱 그칩니다. 이 에포사이오페시스를 무용에서도 활용해 보면 어떨까.그리스인들은 위즈덤(wisdom)을 추구했는데, 융(Jung)이라는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어리석어지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지 않지만, 어리석음에서 지혜를 끌어내는 데는 온전한 기술이 필요하다. 어리석음은 지혜의 어머니이다."
stupidity와 wisdom의 관계는 noise와 silence의 관계와도 같은데, 소음이 결국에는 침묵이라는 가장 깊은 소리로 나아가야 거듭나야 하는데, 노이즈가 그냥 노이즈로 끝날 때 아무 의미도 없는 거지. 그런데 현대인들은 딱하게도 어리석음의 저속함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그걸 오히려 찬양하면서 그 속에 빠져 있다고 융은 개탄했지.
땅에서만 기어다니다 끝나지 말고, 정말 대무(大舞)로 그 격을 높이는 춤을 췄으면유교의 경전 중 ‘예기(禮記)’라고 있잖아요. 거기 ‘악기편’에 “樂由中出하고 禮自外作하나니 樂由中出故로 靜하고”라는 문구가 있어요. “음악이라는 것은 우리의 깊은 가슴 속에서 빚어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요란한 것이 아니라 고요한 것(靜)”이라는 말이지. 참으로 아름다운 음악과 춤은 정에서 시작해서 정으로 끝나는 것이 바람직한데 요즘 현대 무용이나 현대 음악이라는 것은 시종 노이즈로만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아요.
깊이 들이켜라, 그렇지 않으려면 아예 맛보지 마라
이지현 : 선생님께서 춥비평가협회 회장이실 때 어느 자리에서 알렉산더 포우프의 비평론(An Essay on Criticism)을 읽어 보았느냐고 추천해 주신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이순열 : 비평가라면 한 번쯤 꼭 읽어 보아야 할 에세이입니다. 그 중 널리 알려진 구절이 “A little learning is a dang'rous thing / Drink deep, or taste not the Pierian spring(조금 배우다 마는 것은 위험하다. 파이어리아의 샘물을 깊이 들이켜라, 그렇지 않으려면 아예 맛보지 말라)”라는 구절이에요.
A little learning이 A little knowledge로 잘못 인용되는 경우가 많아요. knowledge는 그냥 명사이고 learning은 동명사여서 지속성의 뜻이 담겨 있지요. 그러니까 ‘얄팍한 지식’이 아니라 ‘조금 배우다가 마는 것’이지요. 포우프는 구석구석 이런 데까지 신경을 썼어요.
Diacritics라는 학술지가 있습니다. 미국 코넬 대학교에서 1971년 창간한 비평 분야의 권위가 있는 학술 계간지인데, diacritics라니까 무슨 비평가인 것 같지만, 비평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움라우트, 악썽 그라브, 그레브 액센트와 같은 분음 부호를 말합니다. Jiří Kylián은 ‘지리’가 아니라 ř의 분음 부호 때문에 ‘이흐리’로 발음되는 것처럼, diacritics 때문에 발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비평학술지에 비평하고는 관계가 없는 엉뚱한 이름을 붙인 까닭은 비평할 때 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흐리’를 ‘지리’라고 읽어버린 엉터리 비평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 비평론 중에는 기지 발랄한 것들이 많지만 그 중 아주 멋있는 것 중의 하나가
"Correctly cold, and regularly low,
That, shunning faults,
one quiet tenor keep;
We cannot blame indeed—but we may sleep"
“비틀거리지 않고 곧바로 걸어가면 냉랭함을 피할 수 없고,
규칙을 충분히 지킨다면 격이 높을 수는 없다.
잘못을 피하려고 조용하게 중용(tenor)을 지키는 걸 탓할 수는 없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용에만 매달려 있으면 지루해서 꾸벅꾸벅 졸 수밖에 없다.”
그런 뜻이지요.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고서는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한다. 뭔가 새로운 값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미쳐도 보고, 비틀어 보기(swerve)도 해야 한다는 거지. 우리 동양에서 중용하면 어느 한쪽 치우치지 않고 아주 좋은 뜻도 있지만 어떨 때는 뜨뜻미지근한 뜻도 있어서. 여기서는 좋지 않은 뜻으로 쓰였어요.좋은 말들이 참 많아요. 이런 말도 있어.
Music resembles poetry; in each.
Are full of nameless graces which no methods teach,
And which master-hand alone can reach.
(음악이라고 써있지만 음악이나 춤이나 마찬가지야)
“음악이나 시나 춤에는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어떤 메소드도 가르쳐 주지 않은
오직 고수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런 뜻인데, 예술에서 우아함을 가장 높은 것으로 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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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론 |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 우아함
이지현 : 알렉산더 포우프의 비평론과 함께 동양의 탁월한 비평서 〈문심조룡(文心雕龍)〉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신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도 다시 한번 듣고 싶습니다.
이순열 : 서양에서는 5, 6세기 무렵에 중국의 문심조룡에 견줄만한 책을 찾아볼 수 없어요. 상상력의 중요성을 설파한 신사(神思) 편, 드러냄과 감춤의 오묘함을 들추어낸 은수(隱秀) 편, 멋과 힘의 융화를 촉구한 풍골(風骨) 편 등, 유협의 혜안이 빛나는 글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는 체성(體性, style) 편에서도 깊이 음미할 만한 분류를 해 놓았어요.
그는 글 스타일의 가장 드높은 경지를 전아(典雅)라고 생각했어요. 포우프가 그의 비평론에서 grace를 찬미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지. 그다음으로 그가 꼽았던 것이 원오(遠奧)인데 멀고도 깊고 드높은 표일(飄逸),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고고(孤高)한 기품이 풍기는 스타일이지. 그리고 그다음이 Multa paucis의 정약(精約), 고귀하게 솟아 오른 장려(壯麗) 등 바람직한 스타일 네 가지를 제시한 다음에는, 휘황찬란하게 겉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변욕(繁縟), 경박하고 알맹이가 없는 경미(輕靡), 감춤이나 오묘함은 없고 모든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현부(顯附)와 신기(新奇) 등 바람직하지 않은 네 가지 스타일을 예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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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심조룡(文心雕龍)〉 |
이지현 : 우리 무용가들도 자신의 스타일이 어느 쪽인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느 쪽으로 가꾸어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네요. 그 밖에도 우리가 특별히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대목이 있을까요?
이순열 : 많지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이 책에 관해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이 책의 끝자락 제2부의 49장 정기(程器) 편에서 비평서로서는 이례적으로 예술가이기를 지향한다면 마땅히 먼저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예술가가 탐욕, 뇌물, 오만‧방자, 질시, 아첨, 경망함, 편 가르기 등 진창 속으로 굴러떨어져서는 안 되다고 경고하면서, 덕성과 인품을 갖추도록 권장했어요. 우리 무용계에서도 그런 병폐는 없는지 끊임없이 반성해야겠지요.
이지현 : 선생님 이야기는 끝이 없을 듯해서 포식으로 체하기 전에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무용가들이 꼭 갖추어야 할 덕목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순열 : 오래전 뉴욕 타임스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었어요. 팔을 다친 환자가 팔 전문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는 손을 저으면서 당신의 상처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고 치료를 거부했다는 겁니다. 아니, 팔 전문병원이라는 간판을 보고 왔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의했더니, 의사가 말하길 나는 왼팔 전문인데 당신이 고장 난 팔은 오른쪽이라고 반박했다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 우스갯소리지만, 모든 것이 세분화로 치닫고, 아주 좁은 자기 분야를 제외하고는 모든 문을 닫고 골방에만 처박혀 있으려고 하는 스페셜리스트만 양산해 내는 우리 시대의 비극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글이었어요.
어느 무용과 교수 한 분이 다른 분야의 문을 모조리 닫고 춤에만 몰두하고 있어, 인접 예술 분야라든가 폭넓게 책도 좀 읽어 보도록 권했어요. 그러고 싶지요. 그렇지만 수업하랴, 개인 렛슨하랴, 공연 준비하랴 분주하게 뛰다 보니 책 읽을 틈은 없네요.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한 우물만 깊게 판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우물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우물과 연결된 여러 자원이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그 우물 하나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그 우물의 세계는 너무 왜소해지고 말지요.
스페셜리스트 전성시대를 크게 우려하는 분 중에 Peter Burk 교수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스페셜리스트를 향한 외길로 치닫고 있는 흐름 속에서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보이고 지식을 쌓은 폴리매스(polymath)는 바야흐로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야.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는 학문 간의 소통과 융화를 꾀하는 interdisciplinary studies 라는 과목이 많은 대학에서 개설되고 있어요. 파이데이아와 폴리매스를 향한 한 줄기 서광이랄 수 있지.
‘한 획을 긋기도 전에 풍류가 넘쳐흐른다(不着一字, 盡得風流)’라는 말이 있어요. 춤을 추기 위해 몸짓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의 내공과 깊은 멋(풍류)이 뿜어져 나온다는 뜻이지. 무용가들이 여러 곳에서 양분을 빨아들여 축적하고 발효시킨다면 저절로 이룰 수 있는 경지일 거야. 그 경지에 이르러 춤을 출 때 말라르메가 이야기했던 현실과 꿈을 연결하는 눈부신 무지개다리로 날아오르게 되리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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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열 ⓒ이지현 |
선생님의 이야기는 그리스에서 시작해 르네상스를 거치고, 다시 동아시아로 와서 예술에 대한 주요한 가치들에 대한 언급들로 풍부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라는 역사의 축과, 다른 문명권의 공간 축을 오가며 예술의 존재론을 탐구하며 예술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한 셈이다.
음악 대신, 글 대신 춤을 대체해 놓고 생각해도 그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그 자리에 춤을 넣어 다시 생각해 보면 춤만을 얘기하면서 형성된 ‘춤 담론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가치들을 만날 수 있어 눈이 커지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격상된 춤’을 추구하며 끝까지 가려는 의지,
끝없는 추구를 하다가도 다시 그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주 소박한 것에 몸을 맡기는 역설,
무슨 춤을 추든,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든 걸 멈출 줄 아는 ‘둔절’의 지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우아함에 대한 자각, 눈뜸….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준비해 오신 교재와 메모를 보여주시며 해주신 강의는 1996년 한예종 무용원 창립 때부터 시작해 코로나 직전까지 수업을 이어 오신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머지 할 일은 우리에게 떨어졌다.
다시 원전을 살피고, 공부하고, 그것을 지금 우리가 하는 예술에 적용해 보는 일은 소모적으로 되기 쉬운 현재의 창작 방식을 두텁게 해줄 또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선생님, 어서 쾌차하셔서 좋은 강의 이어서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