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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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25.11.19.(수) 13:0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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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예술가의집 다목적홀(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김순정
솔로작들
김채현: 국립발레단을 완전히 그만두시고 1992년부터 대략 2000년 그때까지의 과정을 한 10분에 걸쳐 두루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김순정: 러시아에 가기 전까지를 정리해 보면, 저는 1991년에 국립발레단에서 〈돈키호테〉를 마친 뒤 사표를 냈습니다. 그때 제 아들이 세 살이었는데, 객석에서 “브라보!”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학자이셨기 때문에, 신문을 집에서 다 보셨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정보의 대부분을 신문에서 얻고 그랬습니다. 경제신문부터 종합지까지 거의 모든 신문을 다 보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그런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모든 가정이 그렇게 신문을 많이 보는 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위해 필요한 기사들을 스크랩해 주시고 그냥 그게 일상이었습니다. 집 안에는 책과 신문 뭉치가 가득 쌓여 있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다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신문에서 찾다가 청주대학교에서 교수를 공채한다는 공고를 발견했습니다. 근데 그 이전에 예원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예원학교 전임 교원으로 와 달라고 제안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임성남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서울예고 전임 교사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발레단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발레단 일만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원학교에서의 제안은 제가 청주대학교에 가기 전 시기였기 때문에 좀 고민했습니다. 만약 예원으로 가면 임성남 선생님과 마찰이 생길 것이 예견되고, 또 주변에서는 임성남 선생님과 어느 정도 맞서서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제가 그런 걸 잘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마침 그 무렵 청주대학교 무용학과에서 발레 교수를 새로 뽑았습니다.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예전에 국립극장장 하신 분 같았는데 예술대학 학장님이셨고 제가 〈돈키호테〉를 했다고 말씀드리자, 그분이 그 공연을 직접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돈키호테〉를 했기 때문에 교수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청주대 예술대학은 우암산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어서, 뒤편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릴 만큼 참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조용한 곳에 왔구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답답했습니다. 공연을 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한국무용 출신 김현주님이 서울 대학로에서 바탕골예술관이라는 걸 운영하셨는데 여기 소극장에서 한번 공연해 보라고 제안해 주셔서,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 해본 작품이 우리 인생에 다채로운 색깔이 있다는 〈빛깔〉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오신 분들이 대극장에서 공연하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작은 소극장에서 하느냐, 국립발레단 주역이 왜 이런 데서 공연하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주 즐겁고 재미있게 작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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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제1회 개인공연 〈몽유〉, 1994 |
그 뒤 1994년에 〈몽유〉는 제목으로 개인 공연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해야 한다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미술하는 사람이나 음악하는 사람이나 다 독주해야 하고 자기 개인 발표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몽유〉 작품으로 1시간 동안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솔로 공연을 했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지금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커튼도 이용하고 어떻게든 했습니다. 그 공연을 본 고등학교 3학년생 한 명이 나중에 제가 동덕여대에 있을 때 저를 보고 동덕여대에 진학했습니다. 그 학생은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지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에 제 아이가 정서 불안 증세를 보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저는 다른 지역에서 남의 자식들을 돌보느라 정작 내 아이 처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동덕여자대학교에서 발레 전공 교수를 새로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고, 체육학과 소속으로 발레 교원을 뽑는다는 점이 조금 생소했지만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여러 지원자가 있었고, 그때 역시 교육철학, 영어 시험 등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울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 때문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곧 보시게 될 〈길 위에서〉라는 솔로 작품을 1995년에 발표했습니다. 저는 그때도 여전히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늘 무대를 그리워했습니다. 공연 음악이 집시들의 구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구음이 있듯이, 집시들의 구음 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작품의 음악으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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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안무&출연 〈제로에서〉 시어터제로, 1997 |
1995년, 1996년, 1997년 계속해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무용가〉, 〈우리 시대의 춤전〉, 〈작가 시리즈〉 등 이런 곳에서 계속해서 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했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하는 걸 보고 저보다 한참 후배인 안은미가 “내가 언니라면 그렇게 안 해” 이렇게 얘기하면서 저한테 자극을 좀 주었습니다. 안은미 선생은 관객이 돈내고 공연장에 들어오는데, 전혀 모르는 관객이라도 작품을 보고 정말 공연을 보러 잘 왔다고 느끼게 해주고 즐거움을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저한테 그런 생각을 좀 불어넣어 줬습니다. 지금 보면 제가 봐도 좀 우스운데 한번 하고 나서 관객을 위해서 옷을 갈아입고 와서 또 다른 식으로 좀 하고 또 다른 식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흐름이 많이 끊기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자료를 다시 정리해 보면서, 그때 당시 제가 얼마나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그리고 그런 선택들을 왜 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유학 직후까지도 그렇게 계속 공연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안은미 선생이 연출 측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존에 제가 하던 방식과는 조금 다른, 저만의 색깔을 발견하게 되었고, 내가 이런 것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비판도 많이 들었습니다. 〈공주 무덤〉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 제가 외계인 공주로 나오는데 지금 봐도 쇼킹합니다. 저 자신도 내가 이런 작품을 했었구나 하고 놀랄 정도입니다. 작품을 보지 않고 소문만 들으신 분들 가운데에는 “어떻게 발레리나가 그런 작품을 할 수 있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직접 보셨습니까?”라고 여쭈어 보면, 대개 “보지는 못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안 보셨으니까 그렇지, 보신 분들은 다 좋아했습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1988년까지 작업을 이어 오다가, 동덕여대에 있을 때 학교 정기공연에서 마지막 공연으로 이원국님과 함께 〈검은 달〉이라는 작품을 했습니다. 그 공연에서도 저는 살색 타이츠만 입었고, 학교 주요 관계자 분들이 모두 객석에 계셨습니다. 당시 동덕여대에는 러시아 문화대학, 러시아 선생님들이 오셨는데 그 대학 출신의 연기 전공 교수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러시아에서 여러 교수들이 학기마다 초빙되어 오셨습니다. 그중에 올가 무호르토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30대였고, 선생님은 50대였습니다. 그 선생님께서 저에게 예전에 공연한 비디오가 있으면 보여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지고 있던 〈노트르담의 꼽추〉 공연 영상과 몇 가지 다른 작품들을 함께 보여드렸습니다. 다음 날 선생님께서 제게 오시더니 “어제 네 영상들을 보고 정말 많이 울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러시아 바가노바학교를 졸업한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다만 토슈즈가 조금 안 좋은 것 같다며 이번에 러시아로 돌아갈 때 함께 가자고 지금부터 공부하라고 하셨지요. 러시아에는 50세부터 좋은 선생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말씀해 주셔서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크게 울었습니다. 예전에 〈백조의 호수〉 음악이 나올 때 눈물이 뚝 떨어졌던 순간처럼, 펑펑 울고 집에 돌아가 그 이야기를 전했고, 남편이 가보라고 말해 줘서 바로 사표를 썼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려고 했는데, 마침 총장께서 학교에 계시지 않아 결재가 계속 미뤄졌습니다. 그 사이 올가 선생님의 귀국 날짜가 다가왔고, 왜 사표를 낸다고 해 놓고 아직 내지 않았느냐고 물으셔서 저는 아직 학교로부터 결재를 받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먼저 돌아가 있을 테니, 빨리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다릴 동안, IMF 사태가 터졌습니다. 남편도 공무원 신분이었고, 제가 직장을 그만두기가 좀 그래서 조금만 시기를 늦추자는 결론을 내렸고, IMF가 끝날 때까지 늦췄습니다. 제가 사표내는 게 바보 같다고 여기시기도 하는데 3년 동안 또 로드리나 선생님처럼 러시아 선생님들이 계속 바뀌었습니다.
러시아 유학
김채현: 참고로, IMF 사태는 1997년 11월에 터졌고 선생님께서 유학을 떠나신 시점은 1999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순정: 맞습니다. IMF 때문에 조금 늦춰졌고, 아까 말씀드렸던 〈검은 달〉까지 하고 1999년에 정식으로 사표를 내고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모스크바로 간 이유를 말씀드리면, 사실 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아는 분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혼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IMF로 인해 유학 시기가 늦춰지면서, 남편이 러시아 쪽에 임지 지원을 하고 가족과 함께 가야 하는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모스크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도 왜 나에게는 항상 모든 것이 이렇게 비껴가는 걸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치스(GITIS)라는 굉장히 유명한 학교가 있습니다. 특히 연극 연출, 영화 연출로는 세계적인 학교입니다. 보통 정말 많은 분들이 무용수 생활을 하고 그 다음에 교사 과정을 밟습니다. 그 교사 과정이 바로 기치스에 있습니다. 제가 사범대학을 나왔듯이, 일종의 사범대학입니다. 그곳에는 나이가 든 사람들도 있었고, 당시 볼쇼이 현역 단원들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문화적 환경을 충분히 체험하고 누릴 수 있었습니다. 기치스는 볼쇼이극장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집에서 출발하면, 차에서 가장 먼저 제가 내리고, 그다음에 남편 직장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아이가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쨌든 저는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클래식 발레 교수법은 물론, 발레 역사와 이론, 캐릭터 댄스까지 배웠습니다. 매일 러시아어 수업도 병행했는데, 러시아어 선생님께서는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이슈가 되던 칼럼 위주로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덕분에 당시 러시아의 사회 분위기와 무용수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폭넓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고, 그분들은 저에게 큰 용기를 심어 주셨습니다.
김채현: 그 당시에 두 학교에 재학 중이셨습니까? 기치스와 스타니슬랍스키극장 말입니다.
김순정: 스타니슬랍스키극장도 볼쇼이극장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연극을 공부하신 분들에겐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극 이론 이런 것도 있는데, 거기에 제가 연습하러는 갔는데 매일 갈 수는 없었고 학교에서 수업하고 교차로 할 수 있도록 이렇게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레퍼토리도 저희가 가서 볼 수 있었고 당시에 브리안 제프라는 조금 일찍 돌아가신 젊은 안무가가 있었는데 거기서 연습을 했습니다. 저녁에 연습이 진행되었습니다. 한 팀이 연습하는 동안, 다른 팀은 아래서 새 작품 안무를 받고 있었습니다. 매우 유기적으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볼쇼이발레단의 레퍼토리도 아주 훌륭하지만, 스타니슬라브스키발레단은 기존 작품을 새롭게 안무하거나, 예를 들어 오페라를 〈카르멘〉 같은 작품으로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했습니다. 제가 이미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상태에서 유학을 갔기 때문에, 기치스의 바이오키 학장께서 저를 많이 배려해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외국인은 안무가 과정을 들을 수 없었지만, 학장께서 제가 원하는 수업은 다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여러 좋은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국립발레단에서 주역을 했다는 것을 많이 인정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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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웹진 |
작품 흐름들
김채현: 이제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2부의 첫 순서는, 김순정 선생께서 직접 고르신 영상 자료를 보면서 선생님이 멘트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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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안무&출연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LG아트센터, 2003 |
김순정: 처음에 보시는 작품은 1995년에 만든 〈길 위에서〉입니다. 동덕여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 만든 작품으로, 집시의 구음에 맞추어 제가 춤을 춥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화면은 2003년에 만든 작품입니다. 이때는 청바지가 스트레칭이 잘 되는 바지가 안 나와서 뻑뻑한 청바지였고 러시아 갔다 와서입니다.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라는 작품인데, 어떤 중년 여성의 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대 초반에 큰 배 세트가 등장하고, 저는 그 배 위에 누워 졸다가 꿈을 꾸는 장면입니다. 이준규 선생님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다만 이준규 선생님과는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이 작품은 ‘현대춤작가 12인전’에서 했습니다.
〈길 위에서〉가 한 번 더 나오는데 제가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좋아합니다. 맨 처음에 보신 1995년 버전은 제가 30대일 때 작품이고, 아까 두 번째로 보셨던 작품은 40대였습니다.
이제 보시는 영상은 LG아트센터 초청으로 올린 작품입니다. 제가 코르셋을 입고 토슈즈를 신고 추는 장면이 나오고, 뒤이어 토슈즈를 벗고 춥니다.
그다음 나오는 작품은 2013년에 발표한 〈원더풀 언해피니스〉입니다. 제가 지원금 2천만 원을 받고, 몇 배를 더 들인 작품입니다. 제주도 설화를 모티프로 삼아 만든 창작 발레입니다. 이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조성주 무용수는, 제가 국립발레단 초기 시절에 가르쳤던 초등학교 2학년 제자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보니, 그 아이가 러시아 볼쇼이발레학교를 졸업하고 국립발레단 단원이 되어 있더라고요. 이 작품 〈시간의 꽃〉은 2008년 작인데, 이원국 씨와 임혜경 씨와 함께 출연했습니다. 제가 이제 연꽃으로 나오고 그 옆에는 연잎입니다. 지금 취리히 발레단의 임수정도 이 작품에 참여했습니다. 현대무용 전공자들과 지금 여기 서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예고 학생들입니다. 앞에는 염지훈 선생이셨습니다.
이 장면은 가을 씬이고 이원국 씨와 조정희 씨입니다. 이건 겨울 씬인데 예고 남학생들입니다. 봄·여름·가을·겨울 네 개의 시리즈입니다. 제가 서울예술고등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던 2010년 즈음의 작업입니다. 이 장면에는 고재석, 이인모 등이 함께 출연했습니다. 이때 저는 50대로 접어든 상태였습니다. 이형주 선생님과는 1990년대부터 계속해서같이 작업을 했습니다. 이 작품을 2010년에 초연했고, 2011년에 한 번 더 초청을 받아 재공연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솔로 앤 듀엣’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깃을 치다〉는 바이칼 지역에 브리야트족이라고 우리랑 외모가 유사한 민족인데, 그들에게는 ‘백조 여인’이라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우리나라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첫 장면은, 붉은 숄을 쓰고 있다가 남자 무용수가 그 붉은 천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무음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유관순 열사 순국 50주년을 기리는 페스티벌에서 초연한 신작이었습니다. 그때 윤민석 선생이라고, 원래는 한국무용을 하다가 프랑스 유학을 하면서 현대무용으로 바꾼 분입니다. 제가 아마 2010년부터 ‘2인무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아서 3년을 했는데, 그때 윤민석 씨의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김석중 씨와 또 다른 키가 작은 현대무용가 한 분이 함께 출연한 작품이었는데, 수제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구성이었습니다. 그 공연을 보면서 정말 좋다, 언젠가 함께 작업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인연이 이어져 지금 보시는 이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영상은 코로나19 직전에 준비했던 작업입니다. 원래는 세종시 국제무용제 초청작으로 만들어, 세종시에 직접 가서 공연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상황으로 현장 공연이 전면 취소되면서, 대신 댄스필름 형태로 영상을 제작해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댄스필름을 제작해서 보냈습니다. 제가 학장을 할 때인데, 무용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경영학, 미디어영상, 연기, 실험음악 전공 학생들이 함께 모여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화면이 세로 구도인 이유는, 학생들이 세로 모드가 연예인이 모드라며 의견을 냈고 수용해서 이 작품을 아예 스마트폰 세로 모드로 촬영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애숙의 나라〉라는 책에서 모티프를 가져왔습니다. 효종 때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들을 다룬 이야기인데, 우리가 흔히 ‘환향녀’ 이야기로 알고 있는 그 여인들, 특히 청 황제의 첩이 된 ‘애숙’이라는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고 기리는 것입니다. 작업 당시에는 저희가 춤을 출 때, 옆에서 실제로 그림을 직접 그리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나중에 그림과 촬영된 사진과 영상, 그리고 춤이 결합된 형태로, 나중에 필름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재창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유튜브에서 세로 화면 그대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촬영 장소는 성신여자대학교 교정입니다. 코로나 시기 동안, 대규모 극장 공연이 어려운 상황에서 학교 공간을 활용해 만들 수 있었던 작업입니다. 이 작품은 역사 속 여성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무용수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췄습니다.
아직 영상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이 작품에 출연한 학생들이 여기 여럿 있습니다. 제가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2018년에 처음 제작했습니다. 초연 당시에는 60분짜리 작품이었고, 이번에는 약 70분 분량으로 만들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고, 추천을 받았습니다. 제가 안데르센 전기를 읽었는데, 그 과정에서 안데르센의 거의 모든 동화에 작가 자신의 삶과 정서가 깊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안데르센은 원래 발레리노를 꿈꾸어 발레 연습을 다녔지만, 외모로 인해 포기했고, 음악에도 뜻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좌절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에는 율동성과 음율이 이야기 속에 살아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장면은 공중에 사는 까마귀입니다. 게르다 역을 맡은 박혜림 무용수는 원래 국립발레단 단원이었는데, 건강 문제로 잠시 단체를 떠나 있던 시기에 이 작품 연습에 참여했습니다. 이 작품을 하면서 다시 국립발레단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고, 현재는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 명은 성신여대 졸업생으로 유니버설발레단 인턴으로 들어갔습니다.
작품 안에는 아주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점이 발레에서 매우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의상이 반복 등장하는 장면이 보이실 텐데, 의상을 재활용하는 차원에서 2008년 작품에서 사용했던 의상들을 일부 다시 사용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장면은 눈의 여왕과 소년 사이의 장면입니다. 소년 역을 맡은 무용수는 뮤지컬 쪽으로 진로를 바꿨던 친구인데, 이 작품을 계기로 다시 발레를 하고 싶다고 해서 이번에 보니 서울예고에 갔더군요.
김채현: 영상 멘트에 곁들여 참고할 영상을 제가 좀 갖고 왔습니다. 방금 전에 보았던 1995년 〈길 위에서〉입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리는 건 바로 그 2년 후, 1997년 공연입니다. 〈머물며〉라는 작품인데요. 잠시만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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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안무&출연 〈머물며〉, 1997, 문예회관(현 아르코대극장) |
이지현: 의상이 여고생 같은 옷입니다.
김순정: 교복입니다.
장지영: 아까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에서도 조금 나왔지만, 의상은 다른 것입니다.
김순정: 이때 제가 동덕여대 교수를 할 때입니다. 처음에는 여고생 교복 차림으로 등장했다가, 극 중에서 타의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이후에는 자기 옷을 다시 입는데 반쪽만 입습니다. 이 장면에 흐르는 음악은 어어부밴드의 곡입니다. 가사가 나옵니다. 〈길 위에서〉와 같은 문예회관 대극장입니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사진 자료도 상당 부분 정리했습니다. 국립발레단 시절 공연 영상은 제게 남아 있지 않아서, 발레단 측에 문의했더니 열람은 가능하지만 외부로는 반출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국립발레단 관련 영상은 관심 있으신 분들이 직접 발레단 아카이브를 방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실제로 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영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지내던 시기의 제 작품 자료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했던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고, 그럼에도 제가 쉼 없이 뭔가를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채현: 시간 관계상 준비한 자료 가운데 일부를 생략해야 하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시간이 남은 시간 동안 패널 분들의 질문을 이어가겠습니다.
장지영: 선생님이 안무하신 걸 찾아보니, 영국에서 돌아오신 다음에 안무 활동이 본격화된 것 같습니다. 아까 언급하신 〈빛깔〉 이전에 〈변주〉라는 작품부터 안무 기록이 남아 있더군요. 평소에 안무에 관심이 있으셨는지, 언젠가 안무를 하게 될 때 구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평론가 김영태 선생님의 글을 보면 선생님이 무용수 시절 친숙한 고전 발레 스타일이 아니라 영국 유학 이후 모던 발레 스타일의 안무 작업을 보여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러시아 유학을 다녀오신 후에는 다시 다소 고전적인 방향으로 선회하신 흐름이 보입니다. 이런 안무적 흐름에 대해 직접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순정: 제가 본격적으로 안무를 시작한 것은 1990년 청주대에 있을 때였습니다. 1990년에 ADF(아메리컨무용페스티벌, American Dance Festival)에 참여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했는데 그때 정말 다양한 춤들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대학 시절부터 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를 좀 많이 배우러 다녔는데 재즈댄스도 배웠습니다. 미나유 선생님이 이대에 오셔서 특강을 하셨는데 재즈를 하셨어요.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배웠습니다. 그 시기에 피나 바우쉬(Pina Bausch)나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하고 영상도 보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5년에 프랑스 ‘몽펠리에댄스페스티벌’과 ‘아비뇽페스티벌’을 직접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고등학교 후배 김나영 선생이 피나 바우쉬가 이끌던 부퍼탈 탄츠테아터(Wuppertal Tanztheater)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연습하는 곳을 보겠냐고 해서 작업실에 들어갔습니다. 피나 바우쉬가 작업하는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의 긴장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평소에는 구도자 같은 모습인데 작업실에서의 긴장감과 카리스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현대무용을 할 것 같은데 발레 클래스를 연배가 높은 러시아 선생님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이 사람들이 할 때는 춤이 발레 같지 않은데도 이 사람들이 기본은 다 다룬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비뇽페스티벌에서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을 야외무대에서 보았습니다. 파리에서는 샤틀레극장에서 카롤린 칼송(Carolyn Carlson)의 솔로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한 사람이 무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이끌어 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나중에 제가 한 〈몽유〉 같은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봄의 제전〉을 야간 야외무대에서 보면서는, 돌아가면 학교 그만두고 여기 무용단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좀 했습니다. 그 당시 피나 바우쉬에 매료되지 않은 무용가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영향 덕분에 솔로 작업에 대한 관심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보니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영국 유학 이후에는 보다 실험적인 모던 발레와 독립된 안무 스타일을 추구했고, 러시아 유학을 거친 뒤에는 고전 발레의 구조와 언어를 다시 점검하면서, 두 방향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고민하는 시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김채현: 90년대 중반 선생님 작업을 보면, 개인 솔로 작품이 많습니다. 1995년 〈길 위에서〉 같은 작품도 그렇고, 〈머물며〉 도 그렇고 이후 90년대 후반에도 솔로 작업을 지속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이 시기에 선생님이 컨템퍼러리발레에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다시 생각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정이 있었겠는데, 그 시기에 그렇게 집중적으로 솔로를 추구했던 데에는 어떤 특별한 관점이나 자신만의 시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순정: 일단 연습할 때 여러 사람이 동시에 모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책임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겁내지 않고 솔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싶은 생각이 좀 드는데 그러면서 이것저것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다른 무용수들을 데리고 안무했더라면 그만큼 시도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을 것입니다. 러시아에 가기 전까지는 이것저것 다 해본 것 같습니다. 〈머물며〉라는 제목도 사실은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담은 반어법입니다. 그래서 〈머물며〉를 생각하면, 그때 내가 정말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는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때 붙인 제목을 지금 다시 되돌아보면, 내가 왜 이런 제목을 했었는지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참 치열하게 살았구나 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열정과 에너지
이지현: 지금까지 말씀을 쭉 들어보면, 사실 상위 1퍼센트 이하에 속하는 분이셨고 그 시절 발레를 했던 여성들 중에서도 최고의 교육 환경 속에서, 최고로 좋은 스승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그에 부합하는 능력도 지니셨습니다. 국립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오랫동안 유지하셨고, 그 이후에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여러 경험을 쌓으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터질 듯 말 듯한 열정과 고뇌, 무언가를 충돌하고 허물고 싶어하는 에너지를 느낍니다. 그리고 방금 언급하신 것처럼 내적으로 쌓여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본인이 걸어온 길 순탄한 길과는 좀 다른 거 같아서요.
김순정: 제 춤을 보고 왜 현대무용을 하는지 묻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게 왜 현대무용인가? 그냥 내 춤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는 ‘김순정의 춤’을 만들고, 그 춤을 추고 싶었던 마음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국립발레단에서는 오데트, 키트리 등 주역을 다 헸습니다. 그때도 물론 즐거웠지만, 제가 제 작품을 만들었을 때 보면 좀 초라합니다. 어떻게 보면 국립발레단 주역이 왜 혼자서 청바지를 입고 무대에 서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사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고, 그냥 제 모습 그대로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무슨 다람쥐를 쫓아가는데 거의 잡을 듯하다가도 다람쥐가 나무 위로 훌쩍 올라가 버리는 장면처럼, 뭔가 보여서 쫓아갔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또 쫓아가는 항상 그런 식입니다. 계속 저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끊임없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할수록 몰랐습니다. 그래서 〈머물며〉를 만들 때도 정말 머무르고 싶지 않은데, 나는 지금 어쩔 수 없이 여기 머물고 있다는 그 마음을 제목에 반어적으로 담았습니다.
그러다가 홍승엽 씨랑도 해보고 여러 안무가들과 협업을 해보는데 현대무용의 길은 나와 조금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예전에 김복희 선생이 서울대 시간강사로 오셨을 때, 현대무용으로 전공을 바꾸는 것을 제안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토슈즈 값도 많이 드니까 바꿔 볼지 잠깐 생각도 했습니다. 또, 최현 선생은 저에게 한국무용을 제안하셨습니다. 윗세대 선생님들도 그러셨듯이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다 배워서 다 잘했습니다. 송범 선생도 원래 발레를 하시다가 남방춤도 하다가 한국무용으로 방향을 바꾸시고 그러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제 몸 안에는 그런 게 다 들어있었고 그래서 김순정의 춤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굳이 왜 그렇게 하느냐, 이미 국립발레단 주역이었으면 그 타이틀 하나로도 평생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제게 그 타이틀은 어디까지나 과거였습니다. 저는 지금 현재의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러시아 유학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러시아식 교육을 간접적으로 받아오긴 했지만,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 갔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기치스 발레지도자 과정에 들어가, 러시아식 발레 교수법과 발레 미학을 체계적으로 다시 배웠습니다. 대학원 논문도 러시아 발레 교수법과 교습 과정에 관한 주제로 썼습니다. 러시아에서 느낀 것은 내가 정말 좋은 선생님들께 잘 배워 왔다는 점이었습니다. 세부적으로 1학년 때 뭘 하고, 2학년 때 뭘 하고 이런 건 그다음 일이고, 일단 거기 가서 내가 발레의 정신과 철학을 좋은 선생님들한테 배웠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이걸 할 수 있고 또 학생들한테 교육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모토는 배웠으면 창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배웠으면 결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배운 것으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설령 부족하더라도, 일단 한 번 만들어보고 부딪쳐 보라고 말합니다. 저는 학생들한테도 이제 그런 걸 강조하는데 저는 예전에는 그런 의식 없이 그냥 살았던 거죠.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에는 제가 조금 안정이 되었습니다. 귀국 후 서울예술고, 예원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박세은, 김기민, 김기완, 임수정, 최지영 등 지금 해외와 국내 무대에서 활약하는 훌륭한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제가 직접 시범을 보이면 학생들이 선생님은 쥬떼를 뛰는데 왜 소리가 안 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소리가 안 나야 발레라고 말했더니 그렇게 소리 안 나는 거 처음 봤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교사는 말로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성신여대 평생교육원에서 교사 교육을 할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들도 이제 뒤늦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그런 것들을 하면서 앞으로 또 가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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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안무&출연 〈사막〉 아르코대극장, 2005 |
이지현: 선생님께서는 여러 가지 교육과 경험을 자기 몸으로 기량화해서 테크닉으로 구현할 수 있는 몸을 가지셨고 그런 활동을 실제로 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다시 학생들에게, 일반인들에게,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발레 교육으로 전해 오고 계십니다. 교육을 하시면서 본인만의 방식, 본인만의 교육 체계, 발레 교육의 노하우라고 할 만한 것이 있으신가요?
김순정: 러시아에 갈 때는 거기서 알맹이를 빨리 배워 와서 한국에 돌아가 빨리 풀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기치스에 가 보니, 교수님들의 연세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저는 마흔 살에 유학을 갔기 때문에 스스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교수님들은 70대, 80대이셨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성신여대에 부임한 것이 쉰 살이었는데, 그때 러시아 선생님들의 모습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어릴 때부터 제 여동생이나 주변 사람들이 제가 춤을 추면 너는 정말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습니다. 한국 교육에서는 ‘같은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가에 대해 굉장히 고민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교수법 수업을 들을 때, 한 교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교수법이 있고 그것을 두루 배운 다음에, 너만의 교수법을 만들라고 말씀하시는데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몇 번 있었던 각성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체계적으로 창작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춤만 추고 창작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앞서 말한 이시다 다네오 선생을 봤을 때도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교육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법에 대해서도 선생님들이 정말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RAD도 마찬가지로 교사 재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예전에는 ‘교사 재교육’이라는 개념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모두 그 필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흐름을 조금 앞서서 해 왔습니다. 물론 교사는 피곤한 직업이기도 하고 먹고 살기도 힘들고 그랬는데 그러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학장·원장 역할도 맡게 되면서 비로소 제가 꿈꾸던 교사 교육 프로그램을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오랫동안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교육·공공 프로그램 형태로 누구나 와서 배울 수 있는 교수법 교육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배운 것도 그대로 그대로 하면 안 되고 자기가 다시 연구해야 합니다. 정말 끊임없이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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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영 안무 〈돈키호테의 사라진 기억들〉 둘시네아 역 출연(돈키호테 역 강준하), 2024 |
장지영: 선생님께서 안무와 교수법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2000년대 이후 직접 창작 작업도 하시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다양한 창작 프로젝트에 무용수로 나오고 계십니다. 최근에도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돈키호테의 사라진 기억들〉 〈베르나르다 알바〉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신 게 기억납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한번 떠나면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은 지금도 1년에 몇 차례씩 꾸준히 무대에 서시지요. 계속 무대에 서야겠다는 분명한 결심과 같은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서 계속 부탁해서 이어진 것인지,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순정: 저는 감사하게도 제 곁에 늘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가도 그런 사람들 덕분에 다시 무대에 섰고, 완전히 널브러진 상태에서도 다시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2005년에 폴 발레리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바람이 분다, 간다〉라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굉장히 힘들었는데, 누군가 저한테 무당이 굿을 해야 하는 것처럼, 너는 발표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했고 이번에는 여러 사람과 함께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이었던 박슬기, 원유진 등 아주 뛰어난 젊은 무용수를 남녀 각각 다섯 명씩 구해서 총 열 명과 함께 작업했는데 정말 신나게 안무했습니다. 그런데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공연 불허령이 떨어져서 학교 측에서 공연 시에 징계하겠다는 통보가 내려왔습니다. 눈물 나지만, 결국 학생들에게 지금까지의 연습비와 약속된 비용을 모두 지불하고 출연을 포기시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징계를 받아도 괜찮으니 그냥 공연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빼고 나니 남자 다섯 명과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 다섯 명과 제가 일주일 동안 다시 안무해서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는 김순정 욕심도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힘들 때였는데 무용수들과 함께 연습하던 과정 자체가 저에게는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 작품이 2005년 공연이었고, 러시아 유학을 다녀온 뒤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공연 일주일 전에 그런 일이 벌어졌지만, 어쨌든 하기로 마음먹고 밀어붙인 경험이 결국 저를 다시 살려낸 셈입니다. 그래서 가끔 솔로가 제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때 박슬기 발레리나와는 그런 인연이 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 같은 생각을 하는 발레하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주변에 뭔가 터놓고 같이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그럴 시간에 내가 더 연습하자고 한 것 같습니다. 러시아 유학을 다녀온 뒤 학교로 돌아왔고, 여러 작업을 병행하고 코로나라는 특수한 시기에는 댄스필름도 제작해 보았습니다. 돌아보면, 그때그때의 상황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작품을 만든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러시아에서는 무용수에게 ‘무용배우’라는 칭호를 줍니다. 무용으로 하는 배우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춤만 추고, 연기는 못 한다는 것은 제 생각에는 좀 아니라고 봅니다. 이게 다 겸비가 돼야 무용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2010년에는 지우영 안무가가 저를 찾아와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하는데 마리아 역을 해달라고 제안하는데, 그때 제 나이가 50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마리아를 하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우영 선생이 어릴 때 TV에서 본 〈백조의 호수〉에서 김순정 발레리나를 보고, 언젠가 안무를 하게 되면 꼭 저 발레리나와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저를 찾아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정말 좋아하던 작품이기도 해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파트너는 이원국 선생이었고, 저보다 일곱 살 아래였습니다. 그와 함께한 무대는 큰 반응을 얻었고, 저도 정말 신나게 처음부터 끝까지 나옵니다. 마리아는 그때 뛰어다니면서 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올해만 해도 한 4개를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스스로 하고 싶다고 나선 적은 없고 다 캐스팅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젊은 안무가 함도윤은 저를 염두에 두고 〈베르나르다 알바〉를 만들었고, 저는 그 작품에서도 주역을 맡았습니다. 또 작고한 문병남 안무가의 작품에서는 2015년 쇼케이스 무대에서 마리아 역을 맡았습니다. 이후 10주년 기념 공연을 작년에 했고, 내년에도 같은 작품을 다시 올릴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같은 마리아라는 배역이지만, 무대에 서면서 늘 마음이 다릅니다. 테크닉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되는 무용배우라는 생각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더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발레 교육의 일선에서
김채현: 이 질문은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평생 좋은 발레 교육을 찾아 암중모색을 해 오셨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훌륭한 분들을 만나셨고, 여러 정보를 얻으셨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한국 발레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다고 평가되곤 합니다. 선생님 스스로도 좋은 발레 교육을 찾아 자료를 구하고 직접 해외에 나가고,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오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았겠지만, 분명히 많은 깨달음도 있었음을 이야기하시는군요.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한국의 발레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어라 보십니까?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키워드 중심으로 간략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순정: 예전에는 발레를 하려면 스스로 연구하면서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만 켜도 그 안에 다 있습니다. 최근에도 ‘발레 데이’라고 해서, 각 나라 발레들이 다 나옵니다. 저는 잘 따라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개개인이 ‘나는 예술가다’라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임성남 선생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듯이,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술가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 안에는 인문학적 소양도 있고 그런 것들을 개개인이 하지 않으면 그 무용수 하나마다 고유한 표현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냥 복사만 한 듯한 카피본 같은 춤이 많이 보이는데 그런 데는 감동이 없습니다. 저는 교육에서 다시 근본적인 부분을 들여다보고 교육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용수를 움직이게 하는 내적 동기 찾게 해주고, 용기를 갖게 해주고, 학생들이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스승들이 부추겨 주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제 인생에서 그런 부추김을 해준 분들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두고두고 감사하게 떠올리게 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분들께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젊었을 때는 공부 욕심 이런 게 너무 강해 학생들이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쉰 살이 넘자 비로소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교수가 주가 아니라 학생들이 주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그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채현: 발레든 어디든 교육이 절대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든 말씀합니다. 전통 사회에서도 지금도 교육이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지금도 춤교육이, 발레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들을 할까요? 단적으로 교육답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김순정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들을 읽어 보면, 학생들에게 자극은 주되 그냥 내버려 둬라, 고정관념으로 끌고 가는 것은 교육도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하셨듯이,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술가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 안에는 인문학적 소양도 있고 그런 것들을 개개인이 하지 않으면 그 무용수 하나마다 고유한 표현이 나올 수가 없겠지요. 이 말의 뜻을 무용인들은 잘 새겨야 할 것이라 봅니다. 오늘 말씀에는 김 선생님이 수십 년 고품질의 교육을 스스로 품을 팔며 찾아 다니던 체험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오죽 고생하셨으면 이런 기본을 말씀하시는 걸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교육은 어려우며, 때문에 교육 앞에서 제 스스로도 언제나 물었었지요.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오늘 이 기회에 제 나름 덧붙이고 싶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강의실에서 하나를 배웠다면, 자기 스스로 열 가지를 더 공부해야 합니다. 강의실에서 하나를 가르쳤다면, 자기 스스로 열 가지를 더 공부하도록 자극하는 식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대학 교육은 그저가 아닙니다. 강의에서 들은 한 가지만 붙들고 졸업해 버리면, 결국 다 비슷비슷한 사람이 되고 창의력도 없습니다. 똑똑한 학생은 강의실에서 열 가지를 배우면, 스스로 백 가지를 파고듭니다. 교육자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강의실에서 하나를 가르쳤다면, 자기 스스로 열 가지를 공부하도록 자극해야 합니다. 학생을 혹사시키지 말고, 붕어빵틀로 찍어내듯이 찍어내지도 말 것이며 학생에게 여유를 줘야 합니다. 여유가 있어야 자극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24시간 학생을 무용실에서 붙들고 있으면 교육을 잘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 흔한 줄로 압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학생을 망치는 교육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학생의 착각은 개인 차원에서 그치겠지만, 가르치는 사람의 착각은 엄청난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겠지요.
이지현: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곧 퇴임을 앞두고 계십니다. 퇴임 후 무대 활동 계획, 그리고 선생님 노년의 춤에 대한 계획을 미리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김순정: 저는 지난 상반기에 춤을 너무 많이 췄습니다. 어느 원로 평론가 선생님께 공연 보러 오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나중에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퇴임 공연을 하는 줄 알고 오셨는데, 막상 와 보니 무용수로만 출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아직도 젊은 사람들 작품에 출연하냐면서 굉장히 기분 나빠하시는데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시각으로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저를 여전히 필요로 해서 무대에 불러준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직 제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 내년 2~3월에도, 다른 안무가의 추천으로 무대에 설 계획이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앞으로는 조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동안 흩어진 자료들도 모으고 기회가 된다면 그 자료들을 한 번에 보여줄 기회를 제가 직접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사주를 보니까 제가 이고 지고 끌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저는 제가 합니다. 그런 계획이 있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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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웹진 |
김채현: 선생님이 이고 지고 끌고 간다면, 밀어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포부가 잘 이뤄졌으면 합니다. 오늘 소중한 인터뷰 잘 들었습니다. 이전 인터뷰들도 그랬는데, 오늘 여기서 머물러야 해서 아쉽군요. 인터뷰 시리즈에 성심껏 참여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발레 교육을 찾아, 발레 현장의 돌파구를 찾아 심혈을 기울이신 노고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인터뷰에 참석하시어 진지하게 말씀하신 패널분들과 경청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김순정 선생님과 함께한 ‘비평 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