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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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 2025.11.19.(수) 13:0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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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예술가의집 다목적홀(서울 대학로)
인터뷰이│ 김순정
한국춤비평가협회(춤비협)는 지난 11월 ‘원로·중견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공개 심층 인터뷰’로서 발레무용가 김순정님을 초청하여 진행하였다. 지난해 5차례를 열은 데 이어 이번이 일곱 번째이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공개 심층 인터뷰는 공개된 자리에서 복수의 인터뷰어가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예술인 즉 춤작가에 대한 인터뷰이므로 비평시각이 중심이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춤비협에서 재작년 연말에 제안되어 작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활성화지원사업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기준으로 춤비협 내에서는 지난해에 춤작가 5인(배정혜·미나유·제임스전·안애순·김은희)을 선정한 바 있다. 올해 프로그램은 박은화·김순정 2인을 초청하여 올 11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같은 유형의 심층 공개 인터뷰는 인터뷰의 일반적 관행과 형식을 탈피하므로 낯선 점이 있고 인터뷰이는 물론 인터뷰어에게도 사실상 선례가 없다시피 해서 그 형식을 모색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다. 심층·공개·비평시각이라는 3요소를 춤작가와의 인터뷰에 녹여내어 춤작가의 면모를 가급적 충실히 드러내고 또한 공개 형식을 취함으로써 내용 면에서 객관성을 견지할 것이 요망된다. 앞으로 지속될 본 프로그램이 무용인들의 작업을 깊이 있게 재조망하고 비평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김순정님 초빙 인터뷰를 위한 패널로 김채현(<춤웹진〉편집장)·이지현(춤비평가)·장지영(국민일부 선임기자), 3인이 정해졌다. 패널들은 김순정이 제공한 공연 및 비평 자료들을 숙지하고 사전에 비대면 예비 모임을 가져 이번 인터뷰의 주제를 몇 가지로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11월 19일 공개 인터뷰는 김영희(전통춤 이론가)의 사회로 참석자 소개를 간략히 가진 후 본론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공개 인터뷰 취지에 맞춰 참석자들이 의견을 표하는 기회도 제공되는 게 원칙이겠으나, 시간 관계상 그러질 못해서 아쉬움을 남겼다. 김순정님 인터뷰는 분량을 고려하여 〈춤웹진〉에 2회로 나누어 게재된다. - 편집자
<춤웹진〉 독자들을 위한 김순정 간략 참조 사항
서울 출생 / 서울예고 졸업 / 서울대 체육교육과 졸업 / 3개 대학 교수 재임 / 국립발레단 단원 역임 / 러시아 GITIS 연수 / 다수 창작 발레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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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9일 오후에 있은 춤작가 김순정 초빙 비평시각 공개 심층 인터뷰, 예술가의집, 서울 대학로,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춤웹진 |
김채현: 오늘 이 자리에는 김순정님 지인들과 제자, 그리고 평소 김 선생님을 눈여겨 보신다는 분이 많이들 오셨습니다. ‘춤작가 초빙 비평시각 심층 공개 인터뷰’, 오늘이 일곱 번째입니다. 이 공개 심층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패널들이 미리 회의를 했습니다. 비평 시각에서 김순정 선생님 활동에서 무엇을 주시하고, 무엇을 질문할 것이며, 본인의 생각은 어떠한지 주제를 정리해 보자는 취지였지요.
인터뷰는 주로 1대 1로 사석에서 진행하는 것이 상례입니다만, 이것은 심층 공개 인터뷰로서 공개리에 진행됩니다. 그렇더라도 말씀하시는 분이 충분히 편하게 말씀하실 분위기가 우선일 것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어떤 답이 나올지 크게 기대되고, 오늘 오신 팬 분들께도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심층 인터뷰라 해서 특별한 순서가 정해진 것은 아니겠지요. 통상적으로 춤계에서 한 분의 세계를 알아보려고 하면 대개 처음 나올 기본 질문은 유사할 겁니다. ‘춤을 왜 시작했는가, 발레를 왜 시작했는가.’ 거기서 말문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가급적 압축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참고로, 김순정 선생님은 1960년생입니다. 1967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셨고, 1970년에 서울 남산 어린이회관 무용실에서 춤에 입문했다는 자료를 제가 받았습니다. 이 정도는 우리가 오늘 기본으로 미리 알고 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말씀드립니다. 그럼 인사 말씀부터 겸해서 입문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춤 입문과 학창 시절
김순정: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를 아시는 분, 저를 좋아한다고 얘기해 주시는 분들이 오셔서 감사드립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대개 무용하는 사람들은 5살, 6살에 시작하는데, 저는 초등학교 4학년에 시작했습니다. 만 10살이었습니다. 그때 남산 어린이회관이 개관했습니다. 남산에 꼭대기에 있은 어린이회관이었지요. 거기에 어머니와 저희 4남매가 놀러 갔는데, 그 무용실이 있었습니다. 어떤 언니들이 한국무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너 여기 한번 다녀봐라” 하셔서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입문입니다.
김채현: 처음 입문하실 적에 발레냐 한국무용이냐 그런 구분이 있었던지요?
김순정: 처음에 봤을 때는 한국무용이었는데, 거기서는 하루는 발레, 하루는 한국무용, 하루는 현대무용,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용이 다 그런가 보다 하고 세 가지를 동시에 시작했죠. 그런데 저는 발레가 피아노 음악에 맞춰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순서도 그렇고 체계가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발레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이 정말 좋으셨습니다. 정미용 발레 선생님은 일찍 그만두셨지만 저의 첫 발레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동아무용콩쿠르 1회 발레 대상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을 보고 발레를 했기 때문에 발레리나는 저렇구나, 저래야 되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발레리나에 대한 저의 이미지는 그렇게 형성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떠나신 후 다른 선생님들이 오셔서 또 열심히 가르쳐 주셨지요. 이영숙 선생님이 오셨고요. 그때 지하에는 무지개극장이 있었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1970년 9월에 시작했는데 12월에 공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무지개극장 대극장에서 공연을 했고, 매년 공연했습니다. 그다음에 예원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예원학교에서 임성남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임성남 선생님을 저는 예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습니다. 입시를 하러 가는 날, 어머니와 저는 택시를 타고 서울 시내 정동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나 저나 그 학교를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택시 운전사는 아실 줄 알고 가자고 했는데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빙빙 돌다 학교 시험 시간에 좀 늦었습니다. 학교에 도착했더니 문이 닫혀 있었지요. 예원학교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그 앞에 어머니들이 쭉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막 문을 두드리면서 제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여 들어갔습니다. 그때 문을 안 열어줬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요. 정말 전속력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이미 시작하고 있었고 들어가서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데 마지막 표가 단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표를 받아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체형을 보니까, 나와서 팔을 벌리고 서라, 똑바로 뒤를 돌아라, 이런 것을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급히 들어가는 바람에 제가 슈즈를 어머니 가방에 놓고 옷만 챙겨 간 것입니다. 제가 슈즈가 없으니까 선생님들이 막 웃으시는 것입니다. 막 웃으시면서 "아가야, 너는 왜 슈즈가 없니?" 그래서 제가 "밖에 어머니가 갖고 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웃으시더라고요. 시험 볼 때 마지막에 저 구석에 가서 저 끝에까지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쉐네(Chaines)로 끝까지 가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들이 좋아하시더군요. 시험 끝나고 나서 임성남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선생님께서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누군지 알아요?" 하셔서 제가 "혹시 임성남 선생님 아니세요?"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좋아하시더군요. 임성남 선생님과는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원에 들어간 다음 서울예술고등학교에 갔습니다. 계속 임성남 선생님께 배웠고 임성남 선생님께서 굉장히 바쁘게 국립발레단 일도 하시면서 많은 학교에 나가신 것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국립발레단에 들어가서 느낀 점입니다만, 선생님이 참 바쁘게 인재 양성을 하러 다니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예원, 예고를 다니면서 좋았던 것은 국립발레단 공연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레슨을 할 때 국립발레단 선배들이 오셔서 함께 레슨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학교 때부터 국립발레단 선배들과 같이 춤을 추면서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고, 저의 길이 그렇게 정해진 것 같습니다.
김채현: 시간 절약을 위해서 짧게 하셔서 먼저 감사드립니다. 1977년에 국립발레단에서는 〈백조의 호수〉를 국내 처음으로 전막 공연을 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쯤인데 혹시 그때 출연하셨어요?
김순정: 고2 때 출연은 하지 않았고, 봤습니다.
김채현: 그런데 경력을 살펴 보니까 1978년에 이대 주최 무용콩쿠르 최우수 특기상을 수상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점이 좀 궁금합니다.
김순정: 임성남 선생님께서는 사실 콩쿠르에 가는 것에 좀 부정적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고3까지는 콩쿠르를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었고, 그 당시에 서울예고 학생들도 그렇게 콩쿠르를 많이 나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그래도 제 실력을 한번 검증받고 싶습니다, 나가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고트 폰테인이 콩쿠르 나가는 거 봤어요?"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당시에 마고트 폰테인이 누군지도 몰랐는데, 하여튼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안 나갔으면 좋겠다. 거기는 다 정해놓고 한다더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냥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콩쿠르에 나가서 즉흥도 내고, 또 자기 작품도 하나 냈습니다. 작품은 임성남 선생님께서 저한테 주신 〈슬라브 행진곡〉이고, 검정 튀튀를 입었습니다. 보통은 빨갛고 파랗고 예쁜 것을 입는데 저는 검은색, 그리고 ‘슬라브’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러시아와 연관되는 것을 그때 좀 감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다음에 즉흥도 나가고 싶어서 즉흥을 했습니다. 저는 음악만 나오면 그저 잘 움직였으니까 나갔는데, 마침 그때 주제가 '지각'이었습니다. 제가 예원학교 입시날 지각해서 갔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서울예고 다닐 때 제 집이 봉천동에 있었습니다. 학교는 평창동이었고, 그 당시에 눈이 오면 학교를 못 갔습니다. 왜냐하면 봉천동 고개를 버스가 못 올라갔던 그런 시절입니다. 아무튼 제가 고등학교 때 지각을 좀 했습니다. 그래도 졸업할 때는 개근상 아래 정근상을 받았지요. 제가 운이 좋다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어려서부터 결석이나 거의 빠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좀 건강했던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지각’ 주제 즉흥은 정말 제 이야기였고 지각할 때 심정도 잘 알고, 그래서 제가 생각했을 때 그 즉흥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즉흥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슬라브 행진곡〉을 했는데 그것은 최우수 특기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우수 특기상 이외에 또 1등, 2등, 3등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등+에 해당하는 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서울예고의 웬만한 학생들은 다 이화여대로 진학했습니다. 이화여대에서 부모님께 연락이 온 것 같았고, 이화여대를 생각하다가 저는 부모님 권유로 서울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저는 운동을 싫어했습니다. 발레 이외에는 제가 별로 다른 것을 안 좋아하는데, 할 수 없이 대학을 가기 위해서 체육을 했습니다. 임성남 선생님께서는 저보고 여기저기를 권유하셨는데, 그냥 서울대학교 가자, 체육교육과에서 무용 전공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일단 학력고사가 몇 점 이상이어야 하고, 그다음에 체육 실기를 해야 합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해야 했으니까 그때 레슨을 좀 받았습니다. 정말 그 눈이 내리는 운동장에 가서 달리기, 매달리기 하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내가 발레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왜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해야 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더니 40명 정원에 그때는 여자 TO가 따로 없었고, 무용도 TO가 따로 없을 때였는데, 운 좋게 여학생 2명이 입학했습니다.
김채현: 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하셨군요. 대학 시절까지 말씀해 주세요.
김순정: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다니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 아름다운 학교였습니다. 그때 임원식 교장 선생님이 계셨고, 서양 주택 가운데 마당이 있듯이 학교 가운데에 잔디밭이 있고 거기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그 잔디밭에서 저희가 춤을 췄습니다. 요즘은 그런 공연이 많겠지만, 그 당시 중학교 때부터 저는 그렇게 했고, 또 서울 시공관에서 학교 발표회를 했었고, 행복한 학창시절을 지냈습니다. 그 당시에 무용하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반에 음악과, 미술과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악하는 친구들, 미술하는 친구들과 지금도 교류하면서 지낼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어요. 그런데 서울대학교를 가니까 너무 삭막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유배지였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체조 시간에 물구나무를 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똑바로 서야지 왜 거꾸로 서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물구나무를 서기를 시작하다가 떨어져 발을 심하게 접질렀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한 10여 년 발목 부상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도 절룩거리고 다녀서 제가 발레로 입학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안 믿었습니다. 쟤 혹시 소아마비 아니야? 이럴 정도까지 절룩이면서 다녔습니다. 그런 가운데 레슨을 조금씩 시작하면서, 진수인 선생님과 박해련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는데, 두 분이 학원을 같이 하셨습니다. 후에 두 분이 나뉘어져서 진수인 선생님이 지금의 그 역삼동 사거리에 3층에서 교습소를 차리고 거기서 많은 인재를 키우셨습니다. 그때 제가 3학년 때 〈실비아〉라는 작품으로 콩쿠르에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학교에 발레 수업이 없었으니까, 저는 학교 수업만 끝나면 레슨 하러 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제가 대학교 1학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학교 문이 폐쇄되고, 굉장히 힘들던 시기였습니다. 대학교 시절 내내 지금 이런 시대에 내가 발레를 하는 게 맞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도 좀 많이 했었습니다. 대학 시절 저희 같은 과 친구들이 끌려가는 그런 것을 보면서 이런저런 사회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3학년, 4학년 때는 콩쿠르를 해야 저는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창작 발표회 같은 것이 있지 않았으니까요. 4학년 때는 동아콩쿠르를 준비했고요. 동아콩쿠르는 그때 2년에 한 번씩 했습니다. 그때 제 발목 부상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2년마다 한 번 있는 동아콩쿠르인데, 4학년 때 안 나가면 그 2년 뒤에 나가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도 연습을 계속하는데 정말 아파서 어떻게 하나 했어요. 그러다 콩쿠르 바로 전날 용두동에 선산한의원이라는 데를 갔었어요. 거기 한의사가 국가대표 축구팀의 팀닥터이셨습니다. 그것을 저희 어머니가 어디서 듣고 오신 것입니다. 콩쿠르 전날 밤에 거길 찾아갔습니다. 그 컴컴한 데서 문을 막 두드렸어요. 그 야밤에 누가 있겠어요? 그래서 콩쿠르도 포기해야 하나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어요. 수염이 하얗게 난 할아버님께서 나오셔서 무슨 일이냐, 우리 아들이 지금 독일에 전지훈련 따라갔다고 하셨습니다. 팀닥터라서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팀닥터의 아버지인데 무슨 일이냐고 하셔서 이야기를 했더니,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앉으라고 하시면서 절대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다리만 내놓고 진짜 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렇게 들어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 봤는데, 정말 대나무 같이 이렇게 긴 침, 대침이라고 하죠, 그것이 제 이 발 뒤쪽에 꽂혀 있었습니다. 대침이 발뒤꿈치 이쪽으로 해서 관통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거의 쓰러질 뻔했는데요, 그러고 나서 그분이 그것을 싹 빼는데 피가 한 방울도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그냥 한번 움직여보라 하시는데 포인트가 되었고, 너무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 날 콩쿠르에 출전해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정말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사범대학이라 교사 자격증이 바로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중고등학교에 부임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보수도 아주 좋았습니다. 저는 교사자격증을 교육위원회에 반납하고 국립발레단에 오디션을 통해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김채현: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국립발레단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시기에 대해 패널 입장에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장지영: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가셨는데, 차라리 이화여대 무용과를 가서 발레를 전문적으로 교육받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같은 것은 없으셨나요?
김순정: 제 친구들이 이대를 대부분 갔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하시니까 생각이 나는데, 제가 학교 다니면서 그때 당시에 역학, 운동생리학 그런 것도 배웠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분들이 가르치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하여튼 무용과는 배우지 않아도 될 그런 것을 배웠습니다. 해부학, 생리학, 또 체육교육과니까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학, 그리고 지도법, 이런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발레를 해야 되는 사람인데, 이것을 내가 왜 해야 하지? 이런 생각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제가 세종대로 편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김정욱 선생님께서 너무 좋아하셨어요. 당장 TO만 있으면 들어오게 하겠다고 하셔서 기다렸으나 티오가 나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체육교육과를 그냥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대 간 친구들이 저한테 그래요. "순정아, 너는 이대 갔으면 아마 그만뒀을 거야." 그것이 무슨 뜻인가 당시에는 잘 몰랐습니다.
이지현: 제가 정말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그런 기억의 몇 장면과 연결이 되는군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인 1977년에 임성남 선생님 레슨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김순정 선생님께서 대학에 1979년에 들어가셨잖아요. 그 겨울방학 때 레슨을 하는데, 수업 전에 임성남 선생님이 “김순정이가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많이 좋아하셨고, 전체에 자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는 이대를 가거나 다른 무용과를 갔고 서울예고에서 서울대 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신기한 일이었어요.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까만 레오타드를 입고 계셨고 임성남 선생님께서 시범을 보이는 바 옆에 잘하는 사람 2명이 서는 자리가 있는데 항시 거기에 서서 하시던 장면이 생각이 나네요. 그 당시 기억에 지금은 전설적인 존재가 되신 진수인 선생님도 가끔 수업에 오셨고, 박인자 선생님, 서차영 선생님, 조교였던 도정임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물론 대부분 중학생들이었구요. 나중에 한국 발레의 주역으로 활동하신 선생님들이 그때 거기에 다 계셨던 거예요. 임성남 선생님 자신이 너무나 예술가이시고 교육자이시기 때문에, 예원학교 별채 연습실에서 수업받던 시절과 서울예고 시절 내내 너무 행복했습니다. 다른 대학이나 현재의 예술고등학교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매우 예술적이고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김순정 선생님께서 얘기 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 당시 김순정 선생님은 다른 선배들과 비교해도 키도 크고 체격이 압도적으로 좋으셔서, 임성남 선생님께 더욱 특별한 관심을 받으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 기억과 연결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진수인 선생님은 우리 현실 속에서 굉장히 훌륭한 무용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하셨습니다. 당시 진수인 선생님께 레슨을 받지 않은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모두가 별도로 무용실에 가서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습니다. 김순정 선생님께서도 이후에 교육자가 되셨고 발레교육에 대해 많이 고민하셨는데, 중·고등학교 시절 임성남 선생님과 진수인 선생님께 받으셨던 발레 교육을, 나중에 러시아와 영국에서 교육을 더 공부하신 뒤에 다시 되돌아보셨을 때, 그 교육의 장점과 또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순정: 임성남 선생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늘 “여러분은 예술가입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여러분은 예술가하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방학 때가 되면 “여러분은 예술가예요. 아무렇게나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케이트나 스키 같은 운동도 발레리나에게는 좋지 않다고 하셔서, 저는 대학 가서도 스키를 타지 않았습니다. 스케이트는 꼭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두 번 정도 억지로 탔을 뿐입니다. 임성남 선생님께서는 발레를 하는 사람은 머리도 항상 길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숏커트를 하면 선생님께서 굉장히 화를 내셨습니다. “예술가는 외모부터 예술가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항상 존댓말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중에 다른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거나 “야, 뭐 어떻게 해라”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무용과를 정규 과정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무용계의 일반적인 문화와는 조금 다른 환경에서 교육을 받은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린이회관, 예원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까지 참 훌륭한 분들께 교육을 받았고 중·고등학교 시절 임성남 선생님이 제게는 절대적인 스승이셨습니다. 발레단에 입단하고 나서는 많은 단원들이 선생님을 무서워했지만, 사실 저는 오히려 선생님의 지도를 더 자주 받고 싶었습니다. 임 선생님께서 너무 바쁘셨고, 나중에 제가 나이가 들고 보니 선생님께서 담당하셔야 할 일이 정말 많으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발레단 시절에도 임성남 선생님께 저는 좀 당돌하다는 말씀을 종종 들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선생님, 이제 발레단에 자주 나오시면 안 돼요?”라는 식으로 장난 섞인 말을 했다가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셔서, 아무 의미 없고 저는 선생님을 더 자주 뵙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정도로 저는 임 선생님을 깊이 존경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유머 감각도 뛰어나셨고, 말씀도 아주 재미나게 잘하셨습니다. 근데 그 말씀이 굉장히 품격이 있으세요. 재미있게 말씀하실 때는 정말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웃기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흉내도 굉장히 잘 내셨습니다. 수업 시간에 동작을 잘 못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흉내를 내셨는데, 정말 똑같이 재현하셨습니다.
임성남 선생님께서 저를 항상 앞에 세워 시범을 보이게 하셨는지 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다른 분들께서 임성남 선생님은 항상 순정이를 앞으로 불러 시범을 시켰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 장면들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원래 앞에 나가 주목받으며 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편이었습니다.
진수인 선생님은 중학교 때, 임성남 선생님께서 학교에 자주 오시지 못하실 때 오셨는데, 정말 카리스마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무용실에 사각형으로 바가 둘러쳐 있으면, 선생님은 언제나 가운데에 올라가 계시고 눈이 부시고 모두들 무서워했는데, 저는 무섭다기보다 특이한 분이라 느꼈습니다. 많은 지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진수인 선생님께서 제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선생님은 몇 살 때 발레를 시작하셨어요? 정말 궁금했습니다”라고 여쭈었더니, 5살부터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수방 선생님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진수방 선생님은 진수인 선생님의 고모이시고, 조택원 선생님의 제자이십니다. 진수인 선생께서 5살 때부터 진수방 선생님께 배울 때, 바가노바에서도 처음에 체조 같은 걸 가르치는데, 아크로바틱을 그렇게 시키셨다고 합니다. 아크로바틱부터 하고 아주 혹독하게 발레를 가르치셨고 진수방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시작하시진 않으셨기 때문에 나이가 조금 들어서 생활 측면에서 러시아 선생님께 배우신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창작열이 매우 강하셔서 한국적 발레를 많이 만드셨고, 플라멩코도 잘 추셨습니다. 진수인 선생님이 어쨌든 공부를 싫어하면서도 열심히 배우신 것 같아요. 그래서 남들과 좀 다르게 아주 정확한 발레 테크닉의 전형을 보여주신 분으로서 당시 진수인 선생님을 따라갈 사람은 없었죠. 저는 임성남 선생님과 진수인 선생님 두 분께 발레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국립발레단 시기
김채현: 이제 조금 빠르게 진행해 보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발레단에 입단하셨죠.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텐데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순정: 국립발레단에 입단하고 나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당시 연습 공간은 지금의 남산 국립극장입니다. 장충동 거기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지만, 천장이 아주 높고 약 100평 정도 되는 큰 공간이었어요. 사실 서울대에 다닐 때도 제대로 된 무용실이 없었고, 늘 혼자 연습하던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습니다. 국립발레단 무용실을 처음 보았을 때 그렇게 마음이 떨릴 수가 없었어요. 그 넓고 좋은 무용실이 아침 시간에 계속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에 나가 혼자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편이라, 장갑을 끼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모자까지 쓴 채 새벽 연습을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2년이 지나면서 후배들이 들어왔고, 후배들이 “언니, 저도 새벽 연습에 같이 나갈래요” 해서 나중에 그게 클래스처럼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지도위원 선생님께서 그 상황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부러 대적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후배들이 함께하겠다고 하면 같이 하자고 했는데 좀 오해를 받았나 봅니다.
김채현: 당시 매일 아침에 자체적으로 수련하셨는데, 일주일 내내 하셨습니까?
김순정: 거의 매일 하다시피 했지만, 매일은 아니었겠죠.
김채현: 그럼 시간은 몇 시부터 몇 시 정도까지였습니까?
김순정: 그때 국립발레단은 오전 10시에 시작했습니다. 개인 연습을 새벽에 가서 한 2시간 정도 했으니까 8시 정도에 시작했습니다.
김채현: 그 당시에 주거지가 어디였습니까?
김순정: 당시에도 집은 계속 봉천동에 있었습니다. 그때 지하철도 없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그쪽은 가기가 불편한 편인데, 당시에는 더 그랬습니다.
국립발레단에서 처음에 기억나는 게 〈동물의 사육제〉, 저희가 동물 탈을 쓰고 출연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레실피드〉도 재미있게 추었고, 거기서 솔로도 맡았습니다. 처음에 들어가서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라일락 요정을 했습니다. 그때 고마키 마사히데 선생님이 오래 전에 상하이 발레 뤼스에 계셨었고 국립발레단에 오셔서 〈목신의 오후〉, 〈셰헤라자데〉를 하셨습니다. 지금 국립발레단에서는 〈셰헤라자데〉를 잘 안 하는데 그걸 해서 최태지 씨가 조베이다 역을 하러 왔었고, 저는 네 명의 오달리스크에 뽑혔습니다. 그래서 언니들한테 굉장히 미움을 받았죠. 하여튼 고마키 마사히데는 러시아식 스타일을 받아들인 만큼 아주 엄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용수가 잘 못하면 굉장히 혼을 내셨고 저희 선배 중에도 어떻게 너가 그 자리에 있느냐 이렇게 대놓고 직접적으로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셰헤라자데〉는 음악이나 동작이나 굉장히 자유로웠고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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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첫 주역 오데트 역,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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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첫 주역 오딜 역, 1984 |
김순정: 그다음에 1984년에 〈백조의 호수〉에서 주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도 정말 놀랐죠. 그래서 임성남 선생님을 찾아뵙고 “선생님, 제가 어떻게 감히 주역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내 눈은 눈이 아니에요?”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흑조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조는 좀 자신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럴 정도로 제가 사실은 선생님들한테 좀 격의 없이 막 그랬었나 봅니다. 중학교 때부터 선생님께 늘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자주 혼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임성남 선생님께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입단한 지 1년 정도 지난 시점에 당시 남자 파트너는 신입 단원이었던 문병남 씨였습니다. 둘 다 〈백조의 호수〉의 파드되를 본격적으로 추는 것은 처음이라, 연습 과정에서 많이 다투었습니다. 그때 김학자 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님들께서 “그렇게까지 싸우고 나면 자존심 안 상하냐, 나라면 안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저는 잘하려고 하는 거고, 결국 무대에 나가 관객 앞에 서는 사람은 나니까 이건 좋은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나가서 실수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무대 바닥은 지금처럼 전문적인 탄성 플로어가 아니라, 일반 마룻바닥이었습니다. 토슈즈도 국산 미투리 토슈즈를 신었습니다. 저는 동아콩쿠르에 나갈 때 미국제 토슈즈를 한 번 신어 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 상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에 토슈즈 값이 많이 들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를 하는데 지방 공연을 했습니다. 저랑 같이 더블 캐스팅 된 최태지 씨가 객원으로 왔었고 김금수님은 후에 단장이 되셨지요. 정말 눈물 흘리면서 연습했습니다. 당시 지방 극장이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마산실내체육관 같은 체육관에서도 하고, 대구, 목포 등지에서 공연했습니다. 그때도 저는 즐거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거기서 충분히 연습하고 그다음에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아마 11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국립극장에서 올리고 그때부터 제가 국립발레단을 나오기까지 계속 주역을 했습니다. 보통은 어떤 작품에서 주역을 한 번 맡았다가 다시 솔리스트로 가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데, 저는 그냥 그때부터 제가 그만둘 때까지 거의 주역에 빠지지 않았던 것에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백조의 호수〉 이후
김채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게 1983년, 〈백조의 호수〉에서 주역을 맡은 게 그다음 해인 1984년이고, 국립발레단이 한국 최초로 〈백조의 호수〉 전막을 한 게 1977년입니다. 기록을 보면 1984년에 국립발레단이 한국에서 두 번째로 〈백조의 호수〉 전막을 올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백조의 호수〉 전막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매우 일반적인 레퍼토리가 되었고, 그만큼 그 사이에 한국 발레의 전반적인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1984년 공연에서 김순정 선생님이 맡았던 역할이 어느 정도의 의의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순정: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면 1977년 공연과 1984년 공연의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1977년에는 백조와 흑조를 서로 다른 무용수가 각각 맡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박해련 선생님이 백조, 안승희 선생님이 흑조를 맡아 하셨습니다.
김채현: 그렇다면 김순정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한국 최초로 1인 2역을 〈백조의 호수〉에서 하셨네요. 그렇게 한국 최초로 1인 2역 한 것이 그다음에 쭉 이어졌습니까?
김순정: 네,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처용〉도 초연은 아니지만, 재연에서는 제가 다시 주역을 맡았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의 경우에는 국립발레단을 그만둘 때까지 매년 정기 공연, 혹은 어린이날 기념 특별공연 등으로 가장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호두까기 인형〉의 그랑 파드되는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기술적으로 상당히 어렵습니다.
또 1980년대에는 매년 한 편씩 창작 발레를 제작해야 하는 극장의 요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성남 선생님께서는 원래 피아노 전공을 준비하셨다가 집안의 반대로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하신 분이지만, 음악에 조예가 워낙 깊으셔서 안무 작업을 하실 때 악보를 펴 놓고 엄청난 속도로 안무를 하세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조지 발란신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 임성남 선생님은 그렇게 동작 어휘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조합을 잘하신 거죠. 예를 들어 국군의 날 공연에 나가야 하면, 국방색을 활용한 의상을 입히고 음악에 맞춰서 어쨌든 해내세요. 저는 그런 작업 과정을 보면서 우리도 언젠가 이렇게 안무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하게 되었고, 임성남 선생님께서도 해볼 만하다고 용기도 좀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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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기념공연 국립발레단 〈춘향의 사랑〉 초연, 춘향 역 출연, 1986 |
김순정: 그리고 그렇게 빠르게 하셨으니까 그때 1986년 아시안게임을 기념한 창작 발레 〈춘향의 사랑〉을 제가 처음으로 초연할 수 있었습니다. 1987년에는 일본 안무가 이시다 다네오 선생님의 창작 발레 〈노트르담의 꼽추〉에 출연했습니다. 그 작품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다시 올리기가 어렵지 않을까 할 정도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영국을 다녀온 뒤 다시 발레단에 복귀했고, 그때 한러 수교가 됐습니다. 그래서 1991년에 〈돈키호테〉 초연을 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볼쇼이발레단 출신의 마리나 콘드라체바 부부가 한국에 와서 저희를 지도했습니다. 그때 콘드라체바 선생께서 제게 지금 같이 러시아에 가서 활동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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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돈키호테〉 초연 리허설, 키트리 역, 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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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돈키호테〉 초연 후 단체사진, 1991 |
김순정: 하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요즘은 무용수들이 결혼과 출산 후에도 출산휴가를 갖고 다시 무대에 복귀해서 활동합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결혼하면 대체로 무용을 그만두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고, 최태지 선생도 그렇고, 아기를 낳고 다시 발레단으로 복귀한, 아주 드문 사례였습니다. 그 자체가 당시에는 상당한 이슈였습니다. 어떤 신문 기사에서는 그것을 ‘주부 발레리나가 무대에 선다’는 식으로 표현했는데, 아주 유감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흔치 않았던 거죠.
김채현: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영국 라반 센터와 RAD에서 연수를 받으셨고, 다시 국립발레단에 잠시 복직하셨다가, 이후 대학교에 가시게 됩니다. 패널의 질문 시간을 갖겠습니다.
장지영: 국립발레단에 계실 때, 여러 작품에서 주역을 맡으시면서 큰 성취감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남편 분도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시지만, 결혼을 결심하실 때 결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셨나요? 당시 무대에 더 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셨나요?
김순정: 저는 스물여덟 살에 결혼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스물여덟도 노처녀라고 했습니다. 〈노트르담의 꼽추〉를 할 때 몸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몸이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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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노틀담의 꼽추〉 초연, 에스메랄다 역, 이시다 다네오 안무, 1987(페뷔스-김긍수, 프롤로-남상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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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노틀담의 꼽추〉 공연 후 무대인사, 임성남 국립발레단장님과, 1987 |
김채현: 참고로 말씀드리면, 〈노트르담의 꼽추〉 초연이 1987년입니다. 이시다 다네오 선생이 안무를 맡으셨고, 당시 무대 이미지 자체가 현대적이었습니다. 그때 보신 분들이 여기 있을 듯한데 저는 당시 국립발레단의 다른 창작 발레와 이시다 다네오의 감각은 참 다르구나 하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계속 말씀하시죠.
김순정: 제가 대학 시절에 당한 발목 부상이 고질병처럼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발목에서 시작된 통증이 무릎, 골반, 허리, 목, 어깨까지 번져서 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대에 올라가면, 작품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통증을 잊어 버렸습니다. 아마 많은 무용수 분들은 공감하실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제가 아픈 걸 잘 몰랐을 겁니다. 근데 저는 거의 매일 재활 차원에서 침을 맞으러 다녔고 허리 같은 부분도 마사지를 받고 그랬습니다.
김채현: 아까 말씀하셨는데 발목에 대침을 맞고 그때 굉장히 효과를 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효과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까?
김순정: 임시방편이었습니다. 치료를 받은 뒤 잠시 좋아졌지만, 발레를 계속하다 보니 다시 통증이 쌓였습니다. 나중에 〈노트르담의 꼽추〉할 때, 아침에 스튜디오에서 롱드장을 해 보려면 안 됐습니다. 침을 맞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침 맞고 진통제 먹고서 5회 공연을 5일간 하는데 제가 5일을 다 했습니다. 연습도 해야죠, 리허설 해야죠, 공연해야죠. 그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그 과정을 버텨낸 덕분에 제 정신력이 많이 단단해진 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행복했던 점이 있었지요. 이시다 다네오 선생님이 나중에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만, 선생님께서 러시아에 가서 〈에스메랄다〉를 보시고는 “나라면 저렇게는 안 하겠다. 나는 나만의 에스메랄다를 만들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나중에 러시아에 가서 〈에스메랄다〉를 직접 보기는 했지만, 원작을 어떻게 창작하신 건지 여쭤봤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원작을 못 봤기 때문에 어떻게 다른 건지 잘 몰랐지만, 이시다 다네오 선생님이 계실 때 보여주신 태도, 그리고 우리에게 전해주신 메시지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이시다 다네오 선생님을 통해 나도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인문학도셨죠. 미학 전공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역시 다르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선생님은 굉장히 조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타임 스케줄에 맞춰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어떤 장면을 연습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군무를 맞추고, 마지막 밤 시간에는 주역이 나와서 리허설을 한다는 식으로, 하루 일정을 시간 단위로 세밀하게 짜서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콰지모도는 남아서 선생님께 직접 안무 지도를 받고, 연기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발레를 할 때 동작을 수행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시다 다네오 선생님의 안무를 통해서 저는 정말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굉장히 철저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저희에게 딱딱한 마분지 같은 두꺼운 종이를 사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두꺼운 마분지를 사다 드렸는데, 다음 날 연습에 가보니 그 마분지로 작품의 무대 세트를 축소한 완벽한 미니어처를 만들어 오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모형을 두고 구체적인 동선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희는 크게 놀랐습니다.
이시다 다네오 선생님과 작업하면서 또 한 번 인상 깊었던 순간은, 연기 지도를 받던 장면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노트르담의 꼽추〉가 초연된 뒤 10년 후 재공연 때 다시 이어지게 됩니다. 10년 뒤 재공연에서 저는 에스메랄다의 어머니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그때는 김용걸 발레리노, 이원국 발레리노, 김지영 발레리나, 그리고 당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주역이었던 강수진 단장까지 함께 참여했습니다. 강수진 단장은 제가 출연했던 비디오를 보고 동작 순서를 외워서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년 뒤 새로운 캐스트로 재공연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다시 만난 이시다 다네오 선생님은 교통사고를 겪으신 뒤라 콰지모도 느낌으로 나타나셔서 말씀을 제대로 못 하셨습니다. 10년 전 초연 당시에는 눈빛과 말투에서 총기가 살아 있던 분이셨습니다. 그때는 우리에게 연기 지도를 해 주시면서, “뒤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사람이 지금 막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너는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와 같은 방식으로 저희한테 숙제를 던져 주셨습니다. 여러분 집에 가서 해보세요.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번 거기서 생각을 하게 한 다음에 본다는 겁니다. 근데 그런 것은 저희가 처음 받아보는 지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연기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군중 장면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장면을 설명하시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네덜란드 화가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농민들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그린 화가였는데, 선생님은 그 화가의 그림들을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군중이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설명해 주셨어요. 나중에 저도 그 화가의 화집을 사서 계속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작품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작품을 하면서 육체적으로는 거의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힘들었지만, 5회 공연을 모두 마칠 때까지 정신만큼은 또렷하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발레를 그만두더라도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도 좀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잠시 쉬었습니다. 근데 사표 수리는 계속 안 되었고, 그냥 결혼을 강행했습니다. 그후에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그때 제 마음속에서는 사실 발레를 완전히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영국에 가서 다시 하게 되었긴 하지만 당시 제 마음으로서는 발레를 그만두었습니다.
RAD 연수
김채현: 계속 질문을 이어주시죠?
이지현: 그러면 직업 발레리나를 하는 동안의 혹독한 시간을 쉬시면서 좀 정리하고, 결혼이라는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도 하고, 그 다음에 영국으로 건너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영국에 가서는 저절로 다시 발레를 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혹은 처음부터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순정: 저는 남편과 함께 영국 옥스퍼드에 머물렀는데 정말 아름다운 중세 도시입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처음 느낀 것은 세상이 이렇게까지 조용할 수가 있나 하는 놀라움이었습니다. 근처에 유니버시티 파크(University Parks)라는 공원이 있었는데 너무 평화로웠습니다. 그 이전까지 저는 늘 시끄럽고 경쟁이 치열한 세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려서부터 늘 경쟁 속에 있었는데 그렇게 조용한 환경에서 지내다 보니, 내가 지금까지 너무 달려왔다는 생각도 좀 들면서 가서 그냥 쉬니까 몸은 조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때, 남편과 함께 나탈리아 마카로바 예술감독의 〈백조의 호수〉를 보러 갔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고 첫 음악이 딱 나오는데, 그 순간 제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발레를 안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공연이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울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남편 말인데 이 여성은 발레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김채현: 잠시 정리해 보면, 선생님은 발레를 아예 하지 않을 생각으로 영국에 갔다 그러셨습니다.
김순정: 그렇습니다. 결혼도 했고, 마음속으로는 발레를 완전히 포기하고 영국에 갔습니다.
김채현: 그렇다면 당시에는 RAD나 라반 센터 같은 곳에 정식 연수를 받으러 간 것이 아니고 무작정 가셨습니까?
김순정: 발레단에 들어가는 건 아니었고, RAD나 라반 센터의 경우 정식 과정보다는 단기 과정들이 있어서 연수를 했습니다.
김채현: 그러면 연수할 목적으로 가셨던가요?
김순정: 아니요. 그것도 아니고, 저는 그냥 발레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김채현: 그러면 발레를 그만두기 위해서 영국으로 갔다는 거죠?
김순정: 결혼을 한 거죠. 결혼을 했고 남편이 영국에서 외교관 연수가 있어서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김채현: 네, 그렇군요.
장지영: 선생님께서는 발레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고 영국에 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영국에는 발레를 할 수 있는 환경과 기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처음에는 발레를 완전히 그만두었다가도, 다시 조금 더 배워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습니까?
김순정: 네 계기가 있었어요. 저는 정말 쉬고 싶었는데 남편이 옥스퍼드 어딘가에 발레 선생님이 사신다더라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그 선생님 집을 찾아갔습니다. 직접 찾아가서 뵈었더니, 선생님께서 무용실이 있는 건 아니고, 교회를 빌려서 수업을 한다고 해서 다시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그 장소에서 선생님은 실제 피아니스트를 옆에 두고 발레 레슨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성인 취미 발레 같은 느낌으로 하다가, RAD(Royal Academy of Dance) 관련 정보를 알게 되어서 배우게 됐고, 그다음에는 라반센터에도 가게 되었습니다.
RAD에서는 1년 과정이 있어서 그걸 하면서 저하고는 썩 잘 맞는 건 아니다는 느낌을 조금씩 받았습니다. 그 1년 과정을 하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잘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아기를 낳아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단기 과정이었고 런던까지 1시간 거리여서 자유롭게 다니며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라반 센터에 가서는 공연을 봤는데 어떤 연세가 지긋한 한 분이 의자 하나, 탁자 하나 놓고 반팔을 입고서 그냥 이렇게 서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그러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제가 그걸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분도 왕년에 무용을 하셨던 분인데 그렇게 하시는 것이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지금은 이야기하는 무용공연을 많이 하지만, 그때 저는 이런 형식도 공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라반센터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건축가, 미디어 아티스트, 철학 전공자 등 여러 분야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의아했습니다. 이렇게 다방면의 사람들이 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제 생각의 폭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RAD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들이 저한테 굉장히 잘 배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좀 하면서 약간 지루한 느낌도 많았는데 그분들은 저한테 굉장히 관심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바닥을 사용하는 방법이 굉장히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지현: 그러면 임성남 선생님께 배우고, 진수인 선생님을 거쳐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무대 경험을 쌓으시고, 또 나중에는 러시아 출신 부부가 함께 러시아에 가서 활동해 보자는 제안까지 할 정도였는데 그때 그분들이 선생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런 제안을 했다고 느끼셨습니까? 그리고 이후 영국보다는 러시아에 더 가까운 테크닉과 품을 갖추게 된 과정에 대해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순정: 〈돈키호테〉에서 키트리 역은 제가 정말 사랑하는 역할입니다. 당시 그분들께서는 제가 굉장히 어린 줄 아셨다고 합니다. 나중에 제가 서른이 넘었다고 하니 깜짝 놀라셨고, 그럼에도 지금 같이 러시아에 가더라도 활동할 수 있다고 제안하셨습니다.
예전에 〈백조의 호수〉 등에서 주역을 할 때에도, 임성남 선생님께서는 제게 지금 외국에 나가도 솔리스트는 하지만, 지금 한국에는 너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스스로도 당시에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느꼈고, 아직 외국 무대에 설 만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호기심이 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러시아에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일본을 통해 러시아 발레 비디오를 저희 아버지도 많이 가져다 주셨고 많이 보면서 연구했습니다. 그후에는 회현동 지하상가에서도 많이 팔았습니다. 저는 월급이 모자랄 정도로 그런 자료를 사 모으는 데 돈을 많이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식 테크닉과 표현 방식이 제 몸에 어느 정도 흡입된 것 같습니다. 진수인 선생님도 러시아 스타일로 가르치셨고, 임성남 선생님 역시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별 무리 없이 제가 동작도 하고 그러니까 그분들께서 그렇게 얘기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제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선생님들이 너는 어떻게 러시아 무용수처럼 움직이느냐고 많이 말씀하셨고, 제가 시범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그쪽에 연세 드신 분들은 요새 볼쇼이발레단 너무 이상하게 한다며 자기가 원하는 걸 김순정이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를 칭찬하셨습니다. 러시아 학생들, 볼쇼이단원들도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고 선생님들이 굉장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한러 수교가 더 일찍 되었으면 제가 더 일찍 러시아를 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안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나에게는 항상 이렇게 모든 게 비껴가나?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나? 이런 생각도 안 한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그랬기 때문에 제가 양쪽을 다 경험할 수 있었고 그래서 비교 연구가 좀 더 깊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제가 교육하는 데 굉장히 큰 자산이 된 듯합니다.
- 이하 김순정 공개 심층 인터뷰 제2편(춤웹진 2026. 1월호)으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