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피솃 클룬춘. 국내 무용계에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국내 무대에서는 좀처럼 다시 만나기 어려웠던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2007년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을 통해 프랑스 안무가 제롬 벨과의 공동작 〈Pichet Klunchun and Myself〉로 서울 무대에 오른 바 있다. 두 무용가가 무대 위에 마주 앉아 서로의 춤과 훈련 방식, 전통과 현대무용의 관습을 묻고 답하는 형식의 이 작품은 태국 고전 가면무용 콘(Khon)과 서구 개념무용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리였고, 당시 국내 관객에게도 적잖은 낯섦과 불편함을 남긴 것으로 기억된다.
피솃 클룬춘은 열여섯 살부터 콘 마스터 차이욧 쿰마니 문하에서 훈련을 시작한 콘 무용가이며, 동시에 콘의 형식과 원리를 동시대 안무 언어로 재구성해온 안무가다. 그는 2006년 태국 문화부 실파톤상, 2008년 유럽문화재단 프린세스 마르그리트상, 2012년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슈발리에를 받았고, 최근에는 2026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예술·문화상 수상자로도 선정되었다. 2010년에는 자신의 컴퍼니인 피솃 클룬춘 댄스 컴퍼니(PKDC)를 설립했다. 전통 콘 무용수라는 틀을 넘어, 태국 고전춤의 신체 언어를 동시대적 사유와 공연 형식으로 확장해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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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솃 클룬춘 댄스 컴퍼니(PKDC)의 Remapping Tradition in Southeast Asia Phase 2 랩 ⓒ이진아 |
지난 8월, 방콕 창 씨어터에서 열린 PKDC의 Remapping Tradition in Southeast Asia Phase 2 랩에 참관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디지털 아카이빙 사업이 아니다. 피솃 클룬춘이 오랫동안 손으로 그리고, 분해하고, 체계화해온 움직임 연구가 모션캡처, 다이어그램, 국제 협력 네트워크와 만나 확장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이 프로젝트를 단순히 '전통춤의 디지털 보존'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한 예술가가 수십 년 동안 붙들어온 질문, 곧 전통춤은 어떻게 몸 안에 남고, 어떻게 분석될 수 있으며, 어떻게 새로운 움직임의 언어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여러 나라의 무용수, 연구자, 기술자, 기획자를 불러 모은 것이다.
방콕에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장비가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무용수들, 태국의 전통춤 연구자와 실연자들, 모션캡처와 디지털 시각화를 담당하는 기술자들, 그리고 영국·독일·미국·프랑스·폴란드·중국·대만·홍콩 등지에서 온 학자와 공연예술 관계자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들이 단발성 행사에 모인 느슨한 참가자들이 아니라, 이미 서로의 활동을 알고 있고 다른 국제 프로그램과도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국·대만·홍콩에서 온 학자들 중에는 영국의 Across 프로그램 등을 통해 오랫동안 교류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홍콩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연구 논문으로 다루기 위해 별도의 연구팀이 방문해 있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무용 지식이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조직되고, 연구와 교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그 장면에서 이런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한국의 무용 연구자와 비평가는 이런 흐름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록하며,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에게도 선행된 연구와 축적된 경험은 있다. 하지만 그것을 국제적인 교류의 장에 적극적으로 내놓고, 다른 연구자들과 지속적으로 논의하는 일은 아직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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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DC의 Remapping Tradition in Southeast Asia Phase 2 랩 ⓒ이진아 |
랩의 방식도 흥미로웠다. 참가자들은 각국의 전통춤을 단순히 시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짧은 인텐시브 수업처럼, 각자의 춤에서 중요한 손의 방향, 발의 디딤, 몸의 기울기, 리듬의 특징을 설명하고 다른 참가자들이 그것을 직접 따라 배우게 했다. 왕실무용도 있었고 민속춤도 있었으며, 국가와 지역, 궁정과 공동체, 양식화된 움직임과 생활 속 리듬이 한 공간에서 교차했다. '전통춤'이라는 말로 하나로 묶이지만 실제로는 각기 다른 역사와 훈련 체계, 몸의 감각을 지닌 움직임들이었다.
5일 동안의 일정은 매우 빽빽했다. 오전에는 각국의 움직임을 배우고 관찰하는 시간이 이어졌고, 오후에는 다이어그램을 이용한 창작과 모션캡처를 통한 기록 작업이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거의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설명하고, 다시 기록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 장면은 공연 리허설이라기보다 무용수와 연구자, 기술자가 함께 참여하는 임시적인 컨퍼런스이자 실험실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춤을 가르치고, 누군가는 그것을 배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움직임의 구조를 질문하거나 데이터로 기록했다. 전통춤이 무대 위의 완성된 형식이 아니라, 관찰되고 자기화되고 다시 해석되는 지식의 과정으로 놓이는 순간이었다.
이후 쭐랄롱꼰대학교에서 열린 공개 행사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완성된 결과물'보다 과정의 노출이었다. 포럼과 현장 시연,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각국의 무용수들이 며칠간 나누고 배운 움직임은 다시 무대 위에서 설명되고, 시연되고, 디지털 이미지와 함께 제시되었다. 잘 다듬어진 하나의 공연을 선보이기보다, 움직임을 분석하고 도식화하고 기록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관객에게 공개하는 형식이었다. 이 공개 행사는 랩의 부록이 아니었다. 연구실 안에서 진행되던 실험이 외부의 시선과 질문을 만나는 자리였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방법론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대화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프로젝트는 이후 9월 방콕예술문화센터(BACC)에서 열린 〈Re-mapping Tradition in Thailand and Southeast Asia〉 전시로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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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DC의 Remapping Tradition in Southeast Asia Phase 2 랩 ⓒ이진아 |
랩을 지켜보면서 '넘버 60(No.60)'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도 조금 더 분명해졌다. 태국 고전춤의 기본 정형인 테파놈(Theppanom)의 59개 자세를 분석해, 그 안에서 움직임의 원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피솃이 처음 정리한 원리는 여섯 가지다. 축점(Axis Points)은 움직임의 기준이 되는 신체 내부의 관절과 외부 공간의 가상 지점을 함께 살핀다. 사지의 연동(Synchronic Limbs)은 여러 신체 부위가 움직임을 시작하고 끝내는 시점이 어떻게 맞물리거나 어긋나는지를 다룬다. 에너지(Energy)는 물리적인 힘의 크기뿐 아니라 그 흐름을 조직하는 호흡과 의도까지를 포함한다. 원과 곡선(Circles & Curves)은 몸이 공간에 그려내는 호와 곡선의 궤적을, 신체 외부 공간(External Body Space)은 몸의 윤곽 바깥과 신체 부위들 사이에 형성되는 공간적 관계를 살핀다. 이동 관계(Shifting Relation)는 몸과 공간, 시간, 그리고 다른 수행자 사이에서 연결과 방향이 어떻게 바뀌는가에 주목한다.
이번 랩에서는 여기에 허공에서의 정지(Suspension)와 얼굴의 표정·소리·호흡(Facial Expression)을 더한 여덟 가지 원리가 소개되었다.
여기서 60이라는 숫자는 59개 자세에 하나를 더 보탠다는 뜻이 아니다. 정해진 자세를 익히는 데서 나아가 움직임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새로 만들어볼 수 있도록 남겨둔 자리다.
내게는 이 방법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도 중요하게 보였다. 국제적인 동시대무용의 논의에서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분석 언어는 대체로 유럽과 미국의 무용 경험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아시아의 전통춤에도 고유한 이론과 분석 체계가 있지만, 국제 교류의 장에서는 종종 문화적 특수성이나 보존의 대상으로 소개되는 데 머무르곤 했다. 피솃은 태국 고전춤에서 출발한 분석 원리를 다른 전통을 이해하는 데까지 확장해보고 있었다. 기존의 방법론에 자신의 춤을 맞춰 설명하는 대신, 자신의 춤에서 얻은 방법론을 가지고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거창한 선언이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장에서 그런 역전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규모였다. 국립기관이 아니라 한 예술가가 세운 독립 컴퍼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태국 정부의 문화정책과 지역적 문화 네트워크, 국제 협력의 조건들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더 강하게 느껴진 것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국가의 정책적 계산보다도, 피솃 클룬춘이라는 한 예술가가 오랫동안 붙들어온 질문의 지속성이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디지털 기술에 관심을 갖고 전통춤을 기록하기 시작한 사람이 아니다. 20여 년 전부터 움직임을 손으로 그리고, 분해하고, 그 안의 원리를 찾아내기 위해 씨름해왔다. 그 집요한 시간이 오늘의 장비와 네트워크를 불러온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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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DC의 Remapping Tradition in Southeast Asia Phase 2 랩 ⓒ이진아 |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름은 질 조뱅(Gilles Jobin)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모션캡처 작업의 주요 기술 협력을 맡은 곳은 질 조뱅의 컴퍼니다. 제네바를 기반으로 한 이 컴퍼니는 자체 모션캡처·VR 스튜디오인 Studio 44 MocapLab을 운영하며, 안무와 디지털 기술을 접합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지속해왔다. 지난해 그를 심층 인터뷰했고, 그 내용을 올해 〈몸〉 2월호와 3월호에 나누어 실었다. 당시에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무용을 데이터와 가상현실의 언어로 옮기면서도 이를 단순한 기술 시연으로 다루지 않는 태도였다.
이번 방콕 랩에서도 그의 팀은 모션캡처 기술 지원과 시각화 작업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협력은 장비와 기술자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피솃의 오래된 손그림과 움직임 분석에 질 조뱅의 기술적 인프라가 결합하면서, 이 프로젝트는 전통춤 워크숍이나 디지털 기록 사업을 넘어 하나의 국제 협력 플랫폼으로 한층 더 선명해졌다.
이 국제적 구성에서 눈에 띄는 또 한 사람은 MIT 미디어랩의 팟 파타라누타폰(Pat Pataranutaporn), 현장에서 ‘PP’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인간과 AI의 상호작용, 사이버네틱스, 인간 경험을 연구하는 젊은 조교수다. 본래 전통춤 연구자는 아니었다. 그가 피솃과 협업하게 된 출발점은 조금 다른 데 있었다. 피솃이 오랫동안 다듬어온 움직임 분석 방법론인 '넘버 60'에 강하게 매혹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그 관심은 이후 전통춤과 AI, 디지털 아바타, 인간-기계 상호작용을 이어가는 실험적 연구로 이어졌고, 그는 이제 주요 공동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연구자의 개인적 관심이 프로젝트를 다른 분야로 확장시키는 동력이 된 셈이다. 이 대목이 재미있었다. 국제 협력을 설명할 때 흔히 정책과 기술, 자금, 기관 간 네트워크부터 살피게 되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의 작업을 다른 사람이 깊이 좋아하게 되는 일도 중요하다. 굳이 말하자면 팬심도 국제 협력을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건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정리된 아카이브나 다듬어진 공연을 먼저 내놓는 대신,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들까지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있었다. 손의 방향이나 발의 위치처럼 기록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가 하면, 움직임이 왜 그 순간 멈추는지, 왜 리듬이 한 박 늦게 도착해야 하는지는 도식으로 잘 옮겨지지 않았다.
어느 날 피솃에게 이 미완성의 과정을 이렇게 공개하는 것이 참 용감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사실 두렵고 겁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 대답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완성된 체계를 전시하는 게 아니라, 아직 불안정한 질문을 사람들 앞에 던져놓고 같이 씨름하는 것이야 말로 이제는 마스터의 반열에 이르른 안무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최선임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의문이 생기는 지점들도 있다. 며칠짜리 워크숍과 모션캡처 세션 안에서 한 나라의 전통춤이 얼마나 이해될 수 있을까. 왕실무용과 마을 춤, 의례와 무대화된 전통이 한 프로젝트 안에서 다뤄질 때 각각의 문화적 맥락은 어디까지 전달될 수 있을까. 움직임이 데이터가 되고 나면 그것을 해석하고 다시 쓸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걸까. 그리고 하나의 분석 방법론이 여러 전통 사이를 오가며 수정되고 확장될 때, 그 변화는 결국 누구의 지식으로 남게 되는가. 이 질문들이 프로젝트를 흠집 내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 계속 튀어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게 보존 사업이 아니라 논쟁적인 지식 생산의 현장이라는 뜻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전통'이 여기서 고정된 원형으로 취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물관에 넣어 지켜야 할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설명되고 배워지고 흔들리고 오해될 위험까지 감수하며 재구성되는 지식으로 놓여 있었다. 모션캡처와 다이어그램은 전통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전통을 다시 묻게 만드는 장치였다.
이번 랩에는 동남아시아 각국의 전통춤 수행자들, 동아시아 학자들, 유럽의 디지털 안무가, MIT의 젊은 연구자, 태국의 독립 컴퍼니가 모여 있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연구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과정이 매끄러웠던 것도 아니다. 일정은 빽빽했고 서로의 언어와 방법을 맞추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 각자의 작업을 보여주고 질문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전통춤이 국제적인 지식의 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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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apping Tradition Phase 2 ⓒPichet Klunchun Dance Company |
Phase 2 랩이 끝나자마자 피솃 클룬춘이 향한 곳은 치앙마이였다. 방콕의 창 씨어터에서 우리가 본 것은 움직임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다이어그램으로 옮기고, 다시 모션캡처 앞에 세우는 장면들이었다. 그런데 치앙마이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펼쳐졌던 모양이다. 아이들도 있었고, 나이 든 사람들도 있었고, 전문 무용수라고 부르기 어려운 사람들도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고 했다. 누가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 시연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까지는 가지 못했다. 런던 더 플레이스의 에디 닉슨(Eddie Nixon)이 남아서 그 장면을 보았고,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그곳의 분위기를 무척 아름답게 묘사했다. 방콕에서의 며칠이 전통춤을 국제적 연구와 기술의 언어 안으로 밀어 넣는 시간이었다면, 치앙마이의 장면은 그와는 조금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 춤은 프로젝트의 이름도 아니고, 연구의 대상도 아니고, 디지털 아카이브로 옮겨질 자료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오래 해온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이제 배우는 일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냥 그 자리에 함께 있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방콕에서 본 장면이 조금 다르게 남았다. 방콕의 랩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록하고, 분석하고, 멀리 보내고, 다시 쓸 수 있게 만드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사라지는 춤도 있고, 더 이상 충분히 전승되지 못하는 몸의 지식도 있다. 그런 것들을 붙잡아두려는 시도는 절실하다. 다만 치앙마이 이야기는 그 옆에 다른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춤은 기록되기 전에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고, 설명되기 전에 이미 누군가의 몸에 들어가 있으며, 아카이브가 되기 전에 이미 반복되고 있다.
방콕의 모션캡처 장비와 치앙마이의 춤판을 서로 반대편에 놓고 싶지는 않다. 하나는 현대적이고 다른 하나는 원형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다만 두 장면 사이에는 분명한 온도 차이가 있었다. 방콕에서는 전통춤이 질문이 되고, 구조가 되고, 데이터가 되었다. 치앙마이에서는 전통춤이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9월에 코로넷 시어터에서 첸이 스튜디오(Chen Yi Studio)의 〈Current/y〉를,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케빈 피터 허(Kevin Peter He)의 〈Vestige〉를 볼 기회가 있었다. 하나는 무용수가 모션캡처로 아바타를 조종하며 가상 세계와 듀엣을 이루는 작품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용수가 자신의 디지털 더블과 통제와 모방, 저항과 얽힘 사이를 오가며 서로를 다시 만들어가는 작품이었다. 두 작업을 보면서 방콕에서 남았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기술을 얼마나 빨리 따라잡느냐가 아니라, 그 기술로 무엇을 하려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 방콕에서 본 피솃 클룬춘의 작업이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새로운 장비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장비를 사용하기 훨씬 전부터 움직임에 대해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기술과 장비의 접근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그 앞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다시 묻게 할 것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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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취재 및 구술 자료
1. 피솃 클룬춘 현장 참관 및 대화, 방콕 창 씨어터, 2026년 8월.
2. 에디 닉슨(Eddie Nixon, The Place, London) 구술 전언, 치앙마이 현장 관련, 2026년 9월.
3. 이진아, 질 조뱅(Gilles Jobin) 심층 인터뷰, 《몸》, 2026년 2월호·3월호.
공개 자료
4. Jérôme Bel, 공식 공연 이력, 《Pichet Klunchun and Myself》, 서울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 2007년 5월 4–5일. https://www.jeromebel.fr/index.php?ann=all&p=1&tr=d
5. Fukuoka Prize, “Pichet Klunchun — Laureates,” 2026. https://fukuoka-prize.org/en/laureates/detail/11d7baa6-109a-48d9-967e-0670b29533a9
6. Pichet Klunchun Dance Company, “Re-mapping Tradition in Thailand and Southeast Asia — Embodied Knowledge: Public Forum & Performance Showcase.” https://pkdance.co/remapping-2026/
7. Pichet Klunchun Dance Company, “No.60 — What Is It?” https://pkdance.co/no-60-what-is/
8. Bangkok Art and Culture Centre, “Re-mapping Tradition in Thailand and Southeast Asia,” 전시 자료, 2026년 9월 22일–10월 4일. https://www.bacc.or.th/en/events/95757
9. Gilles Jobin, “Studio 44 MocapLab.” https://www.gillesjobin.com/en/studios44-mocaplab/
10. MIT Media Lab, “Pat Pataranutaporn — Overview.” https://www.media.mit.edu/people/patpat/overview/
11. MIT Media Lab, “Cyber Subin — Project Overview.” https://www.media.mit.edu/projects/cyber-subin/overview/
12. MIT Media Lab, “Open Dance Lab — Overview.” https://www.media.mit.edu/projects/open-dance-lab/overview/
13. The Coronet Theatre, “Chen Yi Studio: Current/y,” 2026년 9월 17–19일. https://www.thecoronettheatre.com/whats-on/chen-yi-current-y/
이진아
공연예술 연구자이자 무용 드라마투르그로서 동시대 공연예술을 미학적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적·제도적·국제적 맥락 속에서 탐구해 왔다. 2004년부터 현장 실천을 통해 한국 무용의 드라마투르기를 정립해 왔다.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의 수학을 바탕으로 (런던 골드스미스 칼리지, 로햄튼 대학교, 바우하우스 데사우 등) 움직임이 어떻게 사고를 확장하고 사회적·철학적 상상력을 촉진하는지를 연구와 수행을 병행하며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