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칼럼
1974년 '이애주 춤판'에 담긴 이애주의 춤길
김영희_전통춤이론가

예술은 당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인문(人文)의 표상(表象)이고 정수이며 역사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의 무용사 역시 예외일 수 없으니, 한영숙의 〈승무〉를 이어받은 예능보유자였으며, 〈바람맞이〉(1987)로 시대를 대변했던 이애주(1947~2021) 선생은 생전에 늘 춤으로 세상과 대화하고자 했다.

알다시피 이애주 선생은 어려서부터 전통무용가 김보남(1912~1964)을 사사하며 전통악무를 두루 접했고,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과 대학원을 마칠 무렵, 1970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의 예능보유자이셨던 한영숙(1920~1989)의 첫 번째 전수 제자로 입문했다.

당시에 선생은 가장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떠올리며, 우리의 고전문화, 고전문학을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했고, 고전문학 연구에 일가를 이루었던 국문학자 백영(白影) 정병욱(1922~1982)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정병욱 교수는 고전문학을 문학적 텍스트로만 연구하지 않은 학자였다. 그의 판소리 연구의 경우 문학적 텍스트 외에 음악적 측면에서 판소리의 본질을 해부함으로써 판소리 미학을 정립하는데 귀중한 공헌을 했다는 학계의 평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정병욱 교수는 민간음악에서 각기 지닌 ‘특징적인 원형’은 어디까지나 보존하여 ‘고전으로서의 전형성’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전통을 확립시킨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적인 감각에 맞도록 재창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애주 선생은 정병욱 교수의 이러한 관점을 춤에 적용하며 “춤에서 본다면 전통춤의 전형성 즉 전통춤을 제대로 체득하는 순간에 춤의 ‘재창조’인 ‘창조’가 이루어짐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창조의 지고한 단계를 이르는 중요한 언급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멋, 조화, 불균형, 맺고 푸는 원리, 너그러운 마음가짐, 해학, 한, 내면적인 힘 등의 개념들을 접하며, 이애주 선생은 전통예술론과 민족미학의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관점과 방향성은 이애주 선생이 생전에 보여준 여러 춤 작품과 공연에서 일관되게 관통하는 원칙이었던 것이다.

그즈음 이애주 선생은 서울대 문리대에 창립된 동아리 민속가면극연구회와 교류했는데, 그 회원들과 함께 전통 예인들을 찾아다니며 탈춤, 불교의식무, 무속 등을 학습했다. 당시 신무용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춤계의 흐름과는 매우 달랐으며, 민속춤 중심으로 전통공연예술의 발굴과 연구가 활발히 학계의 최신 경향을 실천했던 것이다. 1974년에 올린 선생의 첫 번째 개인공연에서 민속가면극연회 회원들이 일부 출연했다.



‘이애주 춤판’ (1974) 팜플렛 표지 ⓒ이애주문화재단



1974년에 올린 ‘이애주 춤판’은 원래 무형문화재 승무 학무의 전수(傳受) 공연이었다. 하지만 당시 학습한 전통춤들을 함께 선보이고자 했기에, 승무 학무를 포함하여 6 종목의 전통춤과 창작무용을 공연했다. 춤판은 장충동에 위치한 국립극장 소극장이었으며. 이 공연을 준비하며 춤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의 춤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우리의 춤이 무의식적인 태만과 무사상의 몸짓으로 저급하게 전락되어 버렸고 더구나 소수인에 의해 독점적인 전유물로 고립되어졌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춤은 모든 문화 형태 중에서 가장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같은 오욕과 슬픔으로 가득찬 문화 현실 속에서 춤꾼의 입장으로 아무 탈없이 있다는 것이 소름끼치도록 부끄럽기만 하다.” (이애주, 「춤판을 벌리며」, 『이애주 춤판』 팜플렛, 1974. 2쪽.)


당시 무용계는 신무용(최승희 조택원이 1930년대에 모던댄스의 기법으로 전통춤을 소재로 양식화한 춤들을 말한다.)이 대세였는데, 초기 신무용을 대체로 모방하였고 새로운 춤 정신이 제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은채 답보 상태였다. 또한 19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초래되는 사회문제 대한 비판의식도 희박하였다. 이애주는 장식(裝飾)적 역할에 머물렀던 당시의 춤계를 비판하며, 그러한 상황에 대한 오욕과 슬픔을 표했던 것이다.



‘이애주 춤판’ 공연 사진 ⓒ이애주문화재단



그리고 그날의 공연방향에 대해 “이번 춤판은 전통문화의 전승발전이라는 과업 아래 우리 춤의 원형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우리 몸짓에 바탕을 두고 오늘의 문제의식을 표출코저 하였다.”라고 설명했다. 프로그램과 출연자는 〈춘앵전〉에 이애주, 〈학무〉에 이애주와 정재만, 〈살풀이〉에 스승인 한영숙이 찬조출연했고, 민속탈춤이란 제목으로 〈뭇동춤〉을 채희완 외 7명이, 〈미얄춤〉을 이애주가 춤추었다. 불교의식춤에는 봉원사의 송암스님과 구해스님이 협찬했는데 〈삼귀의례〉에 김민기 외 10명이, 〈천수바라〉 〈요잡바라〉 〈명바라〉에 장만철 외 3명이, 〈도량계〉 〈사방요신〉 〈향화계〉에 유갑수 외 3명이, 〈타주〉에 김석만 외 3명이 춤추었다. 이어서 〈승무〉를 이애주 선생이 추었고, 마지막 작품 〈땅끝〉은 출연진 전원이 춤추었다.

승무와 학무 외에 춘앵전과 민속탈춤과 불교의식춤이 포함되었는데, 이애주 선생이 이미 학습한 전통춤들이었으며, 당시에 이러한 종목들을 모두 소화하는 춤꾼은 거의 없었다. 이애주 선생의 전통춤 학습의 내력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리고 미학자이며 무용평론가 채희완, 작곡가 김민기, 영화감독 장만철, 연극연출가 김석만으로 후일에 각 분야에서 활동한 이들은 이애주 선생의 공연에 참여한 문화운동 1세대들이었다. 그들이 청년 시절에 탈춤과 불교의식춤을 추고 창작무용에도 출연했다니 참 뜻밖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작무용으로 이애주 선생이 발표한 〈땅끝〉이 궁금한데, 작품에 대한 안무자의 회고가 남아있다.



“(‘이애주 춤판’ 공연의 – 필자 주) 1부에서는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힌 우리 춤사위와 가락을 전부 토해냈고, 2부에서는 그 춤사위들을 가지고 창작춤 〈땅끝〉을 공연한 거죠. 남해 외딴섬, 외부와의 통로가 차단된 외딴섬을 장악한 섬주의 폭압을 배경으로 해서 1970년대 당시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풍자한 작품인데, 처녀를 강제로 공출하려는 섬 주인을 상대로 소작인들이 벌이는 소작쟁의를 축으로 젊은이들의 투쟁과 사랑을 담은 내용이었지요. 내가 춤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때 이미 다 해버린 것 같아요. ‘이애주 춤판’은 우리 문화의 민족성, 또 당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다 담은 춤판이었죠.” (이애주, 『이애주의 춤 생각』, 「이애주 춤판 〈땅끝〉에 관한 인터뷰」, 개마서원, 2023. 319쪽.)


위 내용을 보면 1970년대의 시대 상황을 외딴 섬에서 벌어지는 섬 주인의 폭압에 비유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벌어지는 소작쟁의와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섬 주민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소재와 인물, 갈등의 표현은 당시 무용계에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 무렵 국립무용단이나 무용가들이 발표한 무용극들은 대개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 설화 등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공연 후 『조선일보』가 간단하게 기사를 냈다. “[젊은 세대에 번지는 전통의 우리가락 찾기 통기타 등 외래문화의 무비판적인 모방 지양] … 〈땅끝〉은 우리의 몸짓에 내재하고 있는 본연의 생명적 율동을 기저로 해서 오늘의 시대체험적인 예술의지를 미적 가치의 세계로 구상화한 작품이었다. 전통예술을 오직 골동품적 가치로 보거나, 탈을 쓰는 등 피상적 도입으로 계승된다고 주장해 온 일부 기성예술인에게 이들의 공연은 전통과 현실의 거리를 압축하는 시범적 가치마저 지니고 있다.”(『조선일보』 1974. 6. 25) 한국 춤계에 창작춤이 아직 본격 등장하지 않았던 시기에 전통춤으로 현실의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했던 작업이 매우 시범적이었고,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땅끝〉의 회고 마지막에 ‘내가 춤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때 이미 다 해버린 것 같아요. ‘이애주 춤판’은 우리 문화의 민족성, 또 당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은 춤판이었죠.’ 라는 표현에서 이애주 선생이 평생동안 춤추었고, 춤추고자 했으며, 그래서 이루고자 했던 뜻과 굳건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춤이 갖고 있는 생동성, 삶에 대한 경외와 자연에 대한 감사의 몸짓이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애주 선생의 첫 번째 춤판 ‘이애주 춤판’ 공연의 전반부에서 보여준 전통춤 종목들은 당시 춤 무대에서 보기 어려운 프로그램이었으며, 창작춤 〈땅끝〉 또한 여러 측면에서 되짚어볼만한 작품이다.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김영희춤연구소 소장. 역사학과 무용학을 전공했고, 근대 기생의 활동을 중심으로 근현대 한국춤의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전통춤평론집 춤풍경』등을 발간했고, 『한국춤통사』,  『검무 연구』를 공동저술했다. 전통춤의 다양성과 현장성을 중시하며, ‘검무전(劍舞展)I~IV’시리즈를 기획했고, '소고小鼓 놀음'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

2025. 8.
사진제공_이애주문화재단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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