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K-발레단 〈파리의 불꽃〉
화려한 파드되 뒤에 가려졌던 혁명의 광기
정옥희_춤비평가

5월 30일 일본 도쿄 분카무라 극장에서 일본 K-발레단의 신작 〈파리의 불꽃〉을 보았다. 무용 공연이 넘쳐나는 5월에 굳이 국내 무용 비평매체에 해외 단체의 현지 공연을 리뷰할 명분은 약하다. 하지만 이 공연이 오늘날 발레 프로덕션이 무엇을 고민하고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에 이 글은 엄밀한 리뷰라기보다 작품 해설과 감상, 그리고 이야기 발레에 대한 에세이가 될 것이다.



K-발레단 〈파리의 불꽃〉, K-BALLET TOKYO​ 제공 ⓒJoseph Marcinsky



K-발레단은 일본의 전설적인 발레리노 구마카와 테츠야가 1999년에 설립한 민간발레단이고, 이번 초연작 〈파리의 불꽃〉은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한 드람발레(drambalet; 소비에트 드라마발레)이다. 〈호두까기 인형〉 재안무가로 잘 알려진 바실리 바이노넨의 안무로 1932년 10월 혁명 15주년 기념일에 초연되었으니, 러시아 혁명을 프랑스 혁명에 비유한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전막 공연이 드물어졌고 소비에트 체제마저 붕괴하면서 오늘날에는 콩쿠르나 갈라에서 공연되는 화려한 파 드 되 정도로만 기억되는 작품이 되었다. 나 역시 프랑스 국기 문양 리본을 두른 무용수가 고난도 점프와 회전을 과시하는 춤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K-발레단은 왜 지금 잊힌 작품을 다시 호명했을까?



K-발레단 〈파리의 불꽃〉, K-BALLET TOKYO​ 제공Joseph Marcinsky



원작부터 들여다보자. 〈파리의 불꽃〉은 프랑스 작가 펠릭스 그라의 소설 〈남부의 붉은 사람들〉(Li Rouge dóu Miejour, 1896)을 바탕으로 한다. 이 작품은 귀족이나 혁명 지도자가 아니라 마르세유, 프로방스, 바스크 등 프랑스 남부 지역 민중의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을 다룬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젊은 연인을 중심에 두는 발레적 관습에 따라 농민 남매인 잔느와 피에르를 주인공 삼아 1792년 튈르리 궁전 습격과 왕정의 몰락을 그려낸다. 잔느가 귀족 백작에게 추행당한 사건을 계기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고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진군한다. 한편 베르사유에선 혁명 세력을 무력 진압하려는 은밀한 계획이 진행된다.

농민 여성이 상류 계급 남성의 폭력에 의해 각성하고 혁명에 가담한다는 설정은 이 작품뿐 아니라 중국의 프로파간다 발레 〈홍색낭자군〉(1964)이나 〈백모녀〉(1965)에서도 반복된다. 여성의 몸이 계급적, 가부장적 폭력의 현장이자 혁명의 출발점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흥미롭게 볼 부분은 발레라는 장르가 여성의 희생을 소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억압받던 여성이 집단적 역사의 주체로 변모하는 과정을 수행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발레는 노골적인 선전예술이면서도 여성 신체의 정치성과 행위성을 전면화하는 독특한 계보를 형성한다.





K-발레단 〈파리의 불꽃〉, K-BALLET TOKYO​ 제공Joseph Marcinsky



〈파리의 불꽃〉은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지만 실상은 1930년대 소비에트가 그들의 당대성을 투영한 기획물이다. 고전발레의 미학을 억누르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수용한 드람발레 답게 고전적 기교보다는 드라마와 캐릭터댄스를 강조한다. 작품 속에선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한다. 왕실에선 바로크 음악과 미뉴엣, 프티파식 황실발레의 우아한 춤이 펼쳐지는 반면, 거리에선 발구르기와 원무, 강렬한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남부 프랑스 민속춤의 에너지가 가득하다. 계급의 충돌이 곧 춤 스타일의 충돌로 번역되는 셈이다.

소련의 몰락 후 잊힌 이 작품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2008년 볼쇼이발레단 예술감독이던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재안무한 버전 덕분이다. 라트만스키는 창작뿐 아니라 무보를 바탕으로 잊힌 고전발레를 복원하는 데 탁월한 안무가이다. 그는 이념의 시대가 지나간 오늘날 〈파리의 불꽃〉을 단순한 혁명 찬가로 반복하는 대신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들의 복잡한 심리와 입장을 부각해 재해석했다. 특히 제롬(원작에선 피에르)의 연인으로 후작의 딸 아델린이라는 캐릭터를 추가한 점이 중요하다. 계급을 넘어 혁명에 자발적으로 합류했던 그녀는 아버지의 처형에 갈등에 괴로워하다 승리에 도취한 민중에 의해 단두대에 처형된다. 아델린의 죽음에 절망하는 제롬을 앞두고 잔느와 그의 연인인 혁명가 필립이 흥분한 민중과 함께 관객을 향해 돌진하는 결말은 혁명을 승리의 서사로 마무리 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주의와 선동이 어떻게 폭력과 광기로 변모하는지 섬뜩하게 보여준다.



 

K-발레단 〈파리의 불꽃〉, K-BALLET TOKYO​ 제공Joseph Marcinsky



K-발레단의 이번 버전은 구마카와 테츠야에 이어 신임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미야오 슌타로가 재안무와 연출을 맡았다. 프랑스 칸 로젤라 하이타워 발레학교 출신인 그는 K-발레단의 주역무용수로 활약해왔으며, 이번이 예술감독으로서의 첫 작업이다. 안무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해석력과 정확한 구현력을 보여줬다.

서곡과 함께 드러난 샤막에는 자크 베르토의 역사화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 습격사건〉이 그려져 있다. 이는 파리 시민과 혁명군이 루이 16세의 거처인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정이 사실상 몰락한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기(1789-1799) 중에서도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피로 얼룩진 거리와 널브러진 시체들은 혁명을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육체적 사건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1막에서 잔뜩 고양된 민중들이 마르세유를 떠나 파리로 진군하는 장면 위로 샤막이 내려오는 순간, 이들 상당수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해진다. 혁명의 열광 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K-발레단 〈파리의 불꽃〉, K-BALLET TOKYO​ 제공Joseph Marcinsky



미야오 버전은 라트만스키의 비판적 해석을 계승하면서도 또 다른 층위를 더한다. 1막 궁정 장면에서 궁정배우를 활용한 극중극 형식을 없애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그랑 파드되 형식을 삽입해 왕실의 장엄함을 강조하고 극적 논리를 강화했다. 2막에서는 이미 유령이 된 루이 16세와 처형 직전의 앙투아네트의 듀엣을 넣어 보다 인간적인 감정을 보여줬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잔느와 제롬 등 주요 인물을 선악 구도로 단순화하지 않고 각자 처한 상황에서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장점이다. 또한 원작의 잔느 성추행 대신 제롬과 아델린의 계급 차이를 혁명의 도화선으로 삼음으로써, 혁명의 근원적 원인을 사회구조의 충돌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새롭게 추가된 인물인 나폴레옹과 로베스피에르 역시 중요하다. 작품은 나폴레옹의 회고로 시작해 황제 등극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젊은 군인으로서 혁명 세력에 가담한 나폴레옹은 혁명의 참상을 목격하며 차세대 권력자로 성장한다. 한편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세력이 프랑스에 당도하여 만나게 되는 거물급 혁명 리더로, 냉철한 카리스마로 혼란스러운 민중을 이끈다. 구마카와 테츠야가 직접 더블캐스트로 출연해 바스크 댄스를 추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혁명은 거리의 열광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미야오 버전은 나폴레옹과 로베스피에르 두 인물을 더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프랑스 혁명사를 생생하게 이해하게 했으며, 무기를 나눠 드는 뜨거운 혁명과 서류에 서명하는 차가운 혁명이 동시에 존재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라트만스키 버전에서 드러났던 집단주의에 대한 성찰은 미야오 버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2막에선 시퍼런 칼날을 드러낸 거대한 단두대가 업스테이지에 위치해 있고, 처형 장면은 매우 직설적으로 연출된다. 속옷 차림으로 끌려온 앙투아네트가 엉덩이를 객석 쪽으로 향한 채 단두대에 엎드리면 칼날이 떨어지고 사형집행인이 그녀의 잘린 목을 번쩍 들어 올린다. 발레 작품에 수많은 죽음이 있지만 뱀에 물리거나 칼에 찔리는 것, 인당수로 떨어지는 것은 이에 비하면 양반이다. 드라마화된 죽음, 부드럽게 포장된 죽음이 아니라 몸의 육체성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이다. 그런데 죽음의 연출 또한 사뭇 다르다. 관습적인 발레 연출과는 달리 무대 위 모든 인물들이 단두대가 아니라 객석을 바라본 채 침묵한다. 약 5초 남짓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관객은 구경꾼이 아니라 공범이 된다. 혁명의 폭력에 연루된 것이다. 과장된 몸짓이나 음악적 고조, 관습적인 떠들썩함을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폭력의 냉혹함이 극대화된다.

엔딩은 더욱 잔혹하다. 잔느와 필립의 약혼식 직후 후작이 민중에게 끌려와 처형되고 그의 딸 아델린 역시 처형된다. 아델린의 처형을 막지 못한 제롬은 절망하고, 필립은 절규하며 항의하는 그를 혁명의 이름으로 사살한다. 제롬의 동생인 잔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혁명의 깃발을 흔들고 민중들은 원무를 춤춘다. 제롬의 시체 앞에서 홀로 절망하던 나폴레옹은 이내 차가운 얼굴로 일어나 계단 위를 천천히 오른다. 그 아래 하얀색 약혼복 차림의 잔느와 필립이 무기를 든 민중을 이끌고 관객을 향해 전진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려한 파 드 되 이후 피비린내 나는 내부 희생이 벌어지는 것이다. 막이 내린 후에도 한동안 들려오는 발소리는 혁명의 폭력이 끝나지 않음을 몸에 각인시킨다. 집단적 광기는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돌아온다. 혁명은 이상을 향한 열망인 동시에 폭력의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K-발레단 〈파리의 불꽃〉, K-BALLET TOKYO​ 제공Joseph Marcinsky



라트만스키 버전이 주역 무용수의 춤 비중이 높은 볼쇼이 프러덕션의 특성을 드러냈다면 미야오의 버전은 혁명이 서로 다른 계층과 직업, 출생지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사건이었음을 훨씬 생생히 보여준다. 주인공의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는 민중 개개인을 각자의 경험과 관점을 지닌 존재로 만들었다. 앙상블은 작품 전체를 끌고가며 명확한 안무 디렉션으로 살아 움직인다. 계급 차이는 의상 디자인을 통해 쉽게 전달되지만 움직임으로도 정교히 구현되었다. 루이 16세 부부의 파 드 되는 절제된 라인과 부드러운 움직임 질감으로 귀족적 우아함을 과시했으며, 특히 엔딩 포즈를 여유롭게 취하며 권위를 과시했다. 반면 민중의 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바닥을 쾅쾅 굴리는 바스크 댄스뿐 아니라 직선적이고 강한 팔다리 움직임과 리듬으로 단순하면서도 폭발적인 에너지를 드러냈다. 주역 및 솔리스트 무용수들의 뛰어난 테크닉과 캐릭터 해석력은 물론, 군무진 하나하나가 능동적으로 존재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K-발레단 〈파리의 불꽃〉, K-BALLET TOKYO​ 제공Joseph Marcinsky



기대했던 로버트 퍼지올라의 의상과 무대디자인은 놀라웠다. 손끝에 닿는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정교한 금실 레이스로 장식된 귀족 의상은 발레 특유의 화려함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실크의 반질거리는 질감 자체로 특권계급의 세계를 드러냈다. 반대로 민중 의상은 거칠고 매트한 린넨 질감을 강조해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대비시켰다. 혁명 세력은 동질한 집단이 아니라 프랑스 남부 민중부터 멋쟁이 파리 시민에 이르기까지 이질적인데, 의상이 이를 역사 고증에 가까울 정도로 섬세하고 충실하게 구현했다. 금색과 회색조의 무대는 왕궁 내부를 왜곡된 앵글로 구현해 화려하고도 불안정한 정서를 자아냈고, 구름 낀 하늘을 형상화한 배경막은 조명에 따라 드라마틱하게 변주되며 유화 같은 분위기를 형성했다.

시노그래피의 만듦새는 놀라울 정도로 치밀했다. 의상 디자인 원본 스케치 전시가 무용용품점 차코트 다이칸야마 매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직접 보니 이미 1년 전에 스케치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작품 프로덕션에 최소 2년 이상의 시간이 투입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세계 어디서든 민간발레단의 운영은 쉽지 않다. 그러나 K-발레단은 충분한 시간과 자본, 뛰어난 창작진과 꼼꼼한 프로덕션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전막발레가 여전히 압도적인 완성도와 유의미한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아주 충실히 제작된 프로그램북과 연계 전시까지도 부러울 따름이었다.

K-발레단의 〈파리의 불꽃〉은 오늘날 전막 이야기 발레를 왜, 어떻게 다시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발레는 고전과 창작 레퍼토리로 양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고전이 동시대적 창작이 될 수 있음을, 낡고 잊힌 레퍼토리로도 오늘의 현실을 비추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이야기 발레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 발레는 유치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장르가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한 이야기를 빌려 현실에 대해 우회적으로 말하고, 당대의 불안과 욕망을 비추며, 관객에게 현재를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장르였다. 〈파리의 불꽃〉은 바로 그 오래된 힘이 건재함을 증명했다. 200년 전의 프랑스 혁명을 호명하지만 이를 통해 결국 우리 시대의 집단주의와 폭력, 욕망과 희생을 되묻는다. 동시에 이 작품은 콩쿠르와 갈라 문화 속에서 파편화된 발레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오늘날 〈파리의 불꽃〉 파드되는 대개 무용수의 기량을 돋보여줄 고난도 태스크로 소비된다. 그러나 전막 속에서 그 춤은 피 묻은 웨딩드레스처럼 더럽혀지며 혁명의 열광과 폭력, 집단적 광기와 희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스펙터클에 몰두한 나머지 서사와 성찰을 잃어가는 시대에 K-발레단의 〈파리의 불꽃〉은 이야기 발레의 힘을 상기시킨다.

정옥희

춤 연구자 및 비평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Dance Chronicle 자문위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진화하는 발레클래스』(2022),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2020)가 있다.​​​​​​​​

2026. 7.
사진제공_K-BALLET TOKYO, Joseph Marcinsky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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