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래오래
〈張紅心무용연구회〉 창립 인사로 2026년 새해 인사를 대신합니다
이지현_춤비평가/장홍심무용연구회 회장

한국춤을 사랑하고 아끼시는 선생님께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춤비평가 이지현입니다.
병오년 2월에 〈張紅心무용연구회〉 창립 인사로 새해 인사를 대신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1975) 때 ‘장홍심 고전무용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춤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4년 정도 무용연구소를 다니며 춤을 배우는 재미에 정말 즐겁고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독립문에 있던 연구소에서 서대문 로터리에 있던 집으로 오는 길은 그날 배운 장단으로 발디딤을 하며 뛰면서 집으로 날라오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엄마 친구의 딸이 발레를 하면서 추천을 하여 임성남선생님께 가게 되어 연구소를 그만뒀지만, 연구소의 한 귀퉁이에 합판으로 방을 만들어 그 안에서 기거하시던 선생님의 모습과 제가 도착할 때쯤에 맞추어 작은 시루에 고사떡을 쪄서 김이 모락모락하는 시루를 통째로 내주시던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당시 60대 초반 초로(지금의 내 나이 정도)의 나이였고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일제강점기에 함흥에서 태어나(1915년) 전쟁을 겪고 부산에서 16년간 피난 시절(1951~67년)을 보내고 명창 박초월 선생님께 의지해 서울 생활을 시작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근대 격동기의 파도를 그대로 맞으며 낯선 타지에서 전통무용가로서의 榮華와 실향민으로서의 喪失을 겪으셨을 것을 상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옵니다.



장홍심 수상(부산 시절, 50년대 초반)



장구 앞(부산 시절, 59년경)



경남 제2회 무용예술경연대회(부산 시절, 1959년 7월 3일)



당시에는 이런 배경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제가 비평가가 되고 논문을 보게 되면서 선생님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994년 돌아가시고 나서야 90년대 말부터 장홍심선생님에 대한 연구가 눈에 띠기 시작했고 그 후 논문이 간간이 이어져 오는 것을 알고 찾아 보고 있었으나 저도 제 일이 바빠 그저 흐릿한 관심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작년 11월 경 한국춤을 공부하는 지인들과 조선 후기 불상을 만든 ‘조각승’을 연구하는 최선일 박사와 함께 학제간 공부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하며 스터디 모임을 만들고 권번 예인 사진 자료와 조택원, 최승희 등 근대무용가들에 대한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제가 장홍심선생께 춤을 배웠었다는 얘기를 하자 재일교포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책과 영화를 만든 바 있는 최박사께서 관심을 가지며 여러 자료를 찾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최박사께서는 권번 예기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으고 있던 와중이라 금세 주제가 장홍심선생님께로 이어졌습니다. 장홍심선생님은 12살이 되던 1927년경부터 ‘함흥권번’에 적을 올리고 춤과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한 일제강점기 권번 출신이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인터넷 상에서 자료를 찾던 와중에 흔치 않았던 장선생님의 희귀한 사진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출처를 따라가니 ‘한국민속극박물관’ 블로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심우성 선생님의 아들이신 심하용 관장께 전화를 드리고 지난 12월 25일 공주의 박물관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저 사진 몇 장 있겠지, 왜 선생님 사진이 그곳에 있을까 정도를 궁금해하며 사진 촬영 허락이나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간 저에게 심하용 관장께서 선생님의 유품 트렁크를 보여주실 때까지 저는 전혀 사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차분히 박물관에 마련된 장선생님의 전시실도 보여주시고 미리 준비 두신 트렁크를 보여주시며 이 트렁크가 왜 여기 있는지를 설명하실 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과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도 좀 더 소화를 하고 좀 더 확인 과정을 거친 후 공개할 예정입니다).

그날 저는 오래된 트렁크 안에 있던 앨범과 작은 박스에 담긴 찢어진 사진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고, 도착하자마자 30년 동안 누군가를 기다려온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져 따뜻한 차 한잔과 향을 피워 올렸습니다. 아무 준비가 없었기에 달리 해드릴 게 없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최박사와 저는 눈이 시리도록 사진의 조각을 맞추고, 붙이고, 스캔을 뜨면서 선생님의 한 시절 한 순간들을 퍼즐을 맞추듯이 채워나갔습니다. 물론 논문을 찾고 책을 뒤지며 선생님과 선생님이 춤추며 사셨던 그 시절에 대해 공부해 나가면서요... 그런 시간이 한달이 넘어 가자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서 장홍심선생님에 대한 연구를 할 구심점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에 뜻을 모으게 되었고 그래서 오늘 이렇게 여러 선생님들께 〈張紅心무용연구회〉(공동회장 이지현, 최선일) 창립 소식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북 앞에서(서울 시절, 조각)



화관무(서울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
일제강점기에서 권번예기로 교육받고, 한성준선생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하며 왕성한 공연활동을 하시다가 해방 후 이북 출신으로 최승희와 관계했던 혼란한 시기를 넘기신 분, 이내 한국 전쟁을 맞닥뜨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 16년을 보내고 다시 빈손으로 서울에서 실향민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한 선생님, 단칸방도 마련하지 못해 옮기는 연구소마다 얇은 합판으로 벽을 만들어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방에서 홀로 여생을 보내시며 춤을 가르치신 장선생님...
그런 와중에도 전통춤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장선생님의 배경과 명성을 눈여겨 보시고 인터뷰를 하시고 연구를 이어가며 선생님의 흔적을 기록해 놓으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개인 사진들을 보면서 역사적 사실이나 의미로만 선생님을 삶을 환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난히 거칠었던 분단과 근대화라는 파도를 맞으며 느꼈을 혼란과 막막함, 자신이 가진 것을 제대로 인정받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다른 능력을 빗발치게 요구받거나 잠시 호흡을 늦추면 어느 틈엔가 소외되어 버리는 근대의 속도 속에서 전통 예인이었던 한 여인은 삶의 순간들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겐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제부터는 장 선생님께 무용을 배웠던 ‘장홍심고전무용연구소’ 이름을 생각하며 〈張紅心무용연구회〉라고 이름을 붙이며 선생님을 기억하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선생님이 보낸 시절을 반증하듯이 함흥에서의 사진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서너 장 뿐이고, 50년대 이전의 사진은 전쟁으로 챙겨지지 못했을 것이기에 공백 상태입니다. 부산에서도 한 시절, 서울에서도 한 시절로 사진은 몰려있습니다. 그나마도 찢어진 조각이 없는 것들이 많아 복원에도 여러 한계가 따릅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사진 복원에 애쓰고 사진의 맥락을 밝혀내며 그것이 모여지는 대로 학술강연을 열고 이 일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움직여 보려고 합니다.

한 분씩 찾아뵙고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글로 대신하는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장홍심선생님에 대한 복원과 연구를 응원해 주십시오. 그렇게 한 조각씩 메워질 선생님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함께 해주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병오년에 선생님과 댁내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하겠습니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26. 3.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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