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남정호의 춤 산책 17
마그레브 헬스클럽에서
남정호_안무가

동경과 제주를 오가며 산 지도 삼 년이 된다. 여행은 망명이다. 망명자 신분을 즐기다가 거주민이 될 양치면 도망치듯 빠져나오고 싶어진다. 왜냐고? 잘 모르겠다. 아마 호모 노마드(homo nomade)의 유전인자가 작동되는 것 같다는 변명으로 여태껏 잘 버티어 왔는데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할 수 없다

동경서 정붙이고 살려면 이곳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우선 일본인들의 친절한 미소 이면에 있는 것을 잘 읽어내기 힘들다.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추는 데 인간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사람보다는 시스템을 믿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사에 신중하여 실수가 없는 걸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면 주위 사람들은 애매모호한 말들을 늘어놓기만 하고 본질을 회피하는구나.

그간 한국에서 학교 사회와 춤계에서 자동으로 연결된 인간관계를 무심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는데 외국 도시 동경 한복판에서는 가끔 홀로 사막에 던져진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그다지 중요함을 안 가지고 살았잖아. 혼자서 내 할 일 열심히 하고 또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거라면 그쪽이 좋아할 만큼 열심히 해 주었는데... 그런데 일이 끝나면 맥이 빠져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왔지. 그동안 노고를 함께 한 이들과 나누는 덕담 같은 것은 지레 가식적이라 간주하고 일단 끝난 것에는 무관심하게 되어 더 이상 신경을 쓰는 대신에 다음 것을 미리 구상하는 성급한 즐거움을 노출하여 결과적으로는 함께 고생했던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행태를 남기지도 않았는지. 이제 와서 반성해도 소용이 없지요. 앞으로 남은 시간이라도 잘해 보자구요.



  



시간이 흐를수록 쇠약해지는 몸을 위하여 그동안 경멸해 왔던 일본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말았다. 혼자서 하는 스트레칭이나 산책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신호를 몸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가며 눈여겨본 전철 역 앞의 그 이름도 괴상한 마그레브 헬스클럽. 건물주는 재일교포라는데 왜 하필이면 건물에 아프리카 북서부를 가리키는 Maghreb라는 명칭을?

1층은 Amusement라는 게임장, 2, 3층은 Farmer’s Market이라는 동네에서 제일 싸고 큰 수퍼마켓, 4층은 닭요리로 유명한 야마우찌 이자까야, 5층은 실내골프장, 6~8층은 실내 수영장을 갖춘 헬스클럽이다. 밖에서 보기보다 규모가 크다. 지하는 가라오케와 카페, 가장 위 9층에는 아직 탐험하지 않은 Beauty와 Healing을 담당하는 마사지실이 기다리고 있다.

일단 회원으로 가입하는 절차가 까다로웠다고 할까. 건물 앞에 멋지게 전시된 전광판에서 눈길을 끌은 수영장과 운동기구에 관심을 갖고 갔는데 7층에 있는 커다란 연습실을 보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이곳에서는 끊임없이 몸을 쓰는 수업이 진행된단다. 역시 나를 따라다니는 몸 쓰기! 발레, 태극권, 라틴댄스, 훌라, 여러 종류 여러 레벨의 요가 등 놀라울 정도로 다채로운 실기수업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전부 1시간 대로 진행된단다. 게다가 탈의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밀스럽게 사우나까지^^우선 발레 수업을 듣는다. 그러니까 발레를 안 한 지가 꽤 되었구나. 이실직고하면 그동안 나는 발레의 바(barre) 엑서사이즈를 통하여 몸을 단련하는 습관을 유지해 왔다. 전공을 현대무용으로 바꾸었어도 나의 다리와 등은 어릴 적부터 경험하였던 이 고전적인 훈련 방법을 선호하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팔동작(port de bras)을 할 때 만나는 뼛속 깊이 우아해지는 느낌을 포기하긴 힘들다. 파리 유학시절에는 솔본느 체육관에서 이루어진 안마리 선생의 수업을, 한예종 시절에는 다행스럽게 안성수 교수의 발레수업을 청강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불편해하여도 어쩔 수 없다. 선생도 몸을 풀어야 하는데 모든 실기실이 수업으로 차 있으니 그 수업에 청강하여 몸을 풀 수밖에. 안 교수의 발레 수업은 파리서 경험한 체케티파의 단순명확한 스텝과 음악성이 잘 어우러진 수업이라 신뢰가 갔다. 그 후 무용단에 있을 때도 체면 불고하고 무용수들을 위한 발레 수업을 청강하였지. 그렇지. 바 엑서사이즈만 꾸준히 하여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곧은 몸을 가질 수 있단다.마그레브에서 발레를 가르치는 선생은 젊은 여자인데 얼굴이 크고 안짱다리라 발레리나 감으로는 한계가 있게 보이지만 꽤 오랜 기간 훈련을 한 안정된 기본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선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상냥함과 친절함까지. 오랫동안 바 엑서사이즈만 하다가 여기서는 전부 아마추어라 호기롭게 센터 엑서사이즈도 욕심을 내 볼까. 그랑주떼(grand jete)까지. 아마추어 동네 부인들 앞에서 해보니 으쓱해진다. 아마 수업을 마치면 모두 내 주위로 몰려와서 친구가 되고 싶어 할 거야. 나는 거만 떨지 않고 씩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어릴 적에 무용 좀 했다고 말할 거야. 물론 내가 그동안 몸을 움직이면서 살아왔다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국에서는 꽤 알아 주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거야. 좀 자유로워지고 싶거든.

그런데 수업이 끝나도 아무도 내 곁에 오지 않는다. 오히려 시선을 피하는가. 아 한 여자가 와서 왜 슈즈를 신지 않냐고 미끄럽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미끄럼 방지 양말을 신어서 문제가 없다고. 슈즈는 불편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마추어 발레 수업에 가짜 공주 훈련복같이 아래위로 타이츠를 갖추어 입고 꽃무늬 하늘거리는 치마를 두르고 연분홍색 슈즈를 신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서너 명 있는 남자도 민망스러운 타이츠 바람이다. 나처럼 통 넓은 연습복 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온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장이 다른 것에 신경 쓰여 내가 하는 동작이 얼마나 자기들보다 정확한지 보지도 못했나. 그렇다고 전족(纏足)의 냄새를 풍기는 슈즈를 신을 생각은 없고 또한 타이츠를 입고 치마를 두르고 가짜 발레리나 흉내 같은 내숭도 절대로 떨지 않으리. 일주일에 두 번 하는 이 수업은 수강생이 미리 이동 바를 설치하고 센터를 할 때는 코너에 밀어 두었다가 수업이 끝나면 다시 분해하여 원래 장소로 옮긴다. 이 노동을 솔선수범하면서 함께 하니 조금씩 미소를 보이는 것도 같다.





태극권은 아주 오래전에 잠깐 한 적이 있다. 생각을 비우고 몸의 감각에 몰입하고 긴장을 이완하는 이 운동은 한때 내가 몰두했던 택견에 비하여 느려서 들뜨지 않는 마음으로 신체를 천천히 관찰하고 조절하게 하여 안정감을 준다. 주에 두 번 있는 이 수업은 두 다른 남자 선생이 가르친다. 화요일의 중국인 선생은 나처럼 어눌한 일본어를 구사하지만, 타고 난 골격이 잘 자리 잡은 몸매를 자연스럽게 움직여 동작을 수월하게 시연하며 한때 잘 나가던 선수였을 풍모를 슬쩍 풍기기도 한다. 꽤 잘생긴 얼굴인데 사회주의 환경에서 살아온 탓인지 웃음이 없다. 좋게 보면 담백하여 상업적이지 않다고 할 수도. 고수의 자세를 지키는가.

수요일 선생은 일본인이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화요일 선생이 연습복을 아무렇게나 걸친 것에 비하여 무술복도 제대로 갖추어 입고 온다. 본격적인 동작을 하기 전에 세분된 몸풀이로 신체 각 부분을 조율시키고 미소를 띠며 정성을 다하여 시범한다. 수강생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업이다. 앞줄에는 상당 기간 수련한 이들이 진을 치고 있고 등이 굽은 노인들도 자리를 지킨다. 동네 노인들이 총출동하였나. 나는 돌아서도 순서에 지장 없게끔 좀 한다고 생각되는 이의 뒤에 자리 잡는다. 자리 말이 나왔으니, 일본인들은 자리에 민감하다. 동네 목욕탕에서도 자기 자리를 정해 놓고 있다. 나처럼 어중이떠중이는 제일 뒤에 서는 게 마땅하지만, 선생의 시범을 보기가 힘들어 안면몰수하고 가운데서 버틴다. 한 시간 동안 숨을 고르면서 이 완만한 동작들을 하고 나면 땅을 딛고 선 몸에서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요가는 내가 아침에 하는 것보다 그다지 효율성이 없는 것 같고 라틴댄스, 훌라는 내 몸과 마음에서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수업을 마치고 코너에 있는 사우나로 가서 알몸이 되어 나도 보여주고 남도 보면서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를 전송하는 신체 기호를 슬쩍 확인하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당신은 왜 아직도 이국에서까지 배우는 학생의 신분을 유지하려 하나요? 글쎄요. 일본 사회의 심장으로 쑤시고 들어가서 적응하는데 꽤 좋은 방법이잖아요. 흠~ 어쩌면 유년기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당신의 본능적 선택으로 보이는데요.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

2025. 7.
사진제공_남정호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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