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예효승이 연출과 콘셉트(박진영)를 맡고 김보람, 이대호, 이재영, 장혜림, 정철인, 최사월이 공동으로 창작한 〈우리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는 컨셉이 일방적이지 않아 자연스럽다. 작품은 예술가라는 특정집단의 고민이나 그 이상을 포괄한다. 예술가들만의 특별한 일상(창작을 하는)처럼 보이나 보는 이에 따라 자신의 일상을 복기하며 힘을 내고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상호 소통적이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이유를 파헤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과거의 기억과 일상의 시공간이 무대 위로 이동되어 있을 뿐이다. 지금-여기의 현실 속에서 긴요한 질문은 대단하게 포장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미래를 예감하게 한다. 다소 싱겁게 보일 만큼 루틴의 반복으로 꾸려지나 그 곳에는 출연자 마다 축적된 창작 경험과 기법 그리고 이야기가 틈새에 녹아 있다.
통상적으로 국립현대무용단은 전후반기마다 외부 안무가를 기용하여 다양한 동시대 창작의 향방을 조망해 오고 있다. 초개인적인 시대이나 예효승은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안무가 아닌 공동창작 방식을 선택한 점이 주목된다. 안무가의 지시에 따라 무용수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랙티브하게 출연진과 함께 창작하려는 예효승은 안무가 타이틀을 소거한다. 오랜 시간 안무를 해온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공동의 문제로 공론화하려는 콘셉트이다. “무엇을 만들기 보다는 어떻게 계속해서 춤출 수 있을지”, 창작 과정과 동기에 집중하며 신작증후군에서 한 발 떨어져 보자는 의도이다. 무분별한 작품 생산이 아니라 창작의 출발 지점을 상기하며 협업의 미덕으로 실행한다.
국립현대무용단 〈우리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Hwang |
무대는 먼저 활력이 넘친다. 이층 구조물 위에는 대형의 캔버스가 있고 의식의 흐름대로 페인팅을 하는 퍼포머들이 자유로워 보인다. 그 아래 공간에 자리한 밴드와 팝가수가 퍼포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생동감 있는 연주를 더한다. 의상부터 편안하게 트레이닝복을 입은 퍼포머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솔로와 서로에게 스며드는 군무를 오간다. 무대위에 널브러진 여러 소품들을 함께 옮기기도 조립하기도 하나 목적 없는 행위에 가까운 놀이처럼 보인다. 6명의 퍼포머들은 자신들 특유의 작품 접근방식을 보여준다. 김보람은 분절되고 날샌 움직임 조합으로, 장혜림은 소리를 이용한 공명으로 상대를 전염시킨다. 정철인은 물리적인 집중력을 요하는 자신의 창작 몰입 기법을 편집적으로 반복한다. 이대호, 이재영, 최사월도 자신들의 전작 시그니쳐로 보이는 행위를 이어간다. 이들은 따로 또 같이 한 공간에서 자신들을 증명해 보였던 춤 작업의 당위성을 공유한다. 서로 응시하고 대응하며 감응하는 관계 속에서 질문의 정의를 되뇌어 본다.
국립현대무용단 〈우리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Hwang |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추적하고 증명해 보이려는 연출은 복잡하지 않다. 나의 작업을 되돌아보기, 상대의 작업을 관찰하기, 함께 재조합 해보기 그리고 다시 내면의 소리를 듣기 정도로 이해된다. 이를 표현하는 장치도 달리고 돌고 오르고 내리며 일상적인 동작에 가까운 형태로 특별하지 않다. 무대에 한살림 가득 나열된 갖가지 물건들을 이동시키고 재배치하며 유의미한 공간으로 설치해 보는 과정이 주요 장면이다. 화분, 탁자, 소파, 벽돌, 유모차 같은 소품들은 퍼포머들이 예전 창작작업에서 사용했던 오브제들로 과거 잊혔던 의미를 부활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소품을 옮기고 허무는 일련의 과정에서 지난한 창작과정이 엿보인다. 이삿짐 같이 쌓여 있던 무의미해 보였던 물건들이 어느 순간 원형의 달리기 레일 형상으로 배열된다. 순간 질서 정연해지며 묘한 안정감을 갖게 한다. 파편적이었던 퍼포머 각자의 이야기가 깃든 물건들이 공동의 세계로 전이되는 효과를 일으킨다. 사물로부터 연결되어 새로운 관계 구성이 촉발되는 순간이었다.
국립현대무용단 〈우리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Hwang |
요란했던 대용량의 소품이 사라져 버린 텅 빈 무대에서 퍼포머들은 일제히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다. 한참을 함께 달린다. 즉물적이나 숨이 있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움직일 것이라는 의지로 읽힌다. 6명의 퍼포머들은 공동창작이란 방식으로 ‘주목받는, 경계에 있는, 알려진, 잊히는, 멈춰 있는’이란 키워드를 기반으로 상대를 관찰하고 함께 관계했다. 6명의 창작세계가 모인 복합적인 네트워크 공간에서 퍼포머들은 한 방향으로 동화되지 않고 자기색도 비교적 잘 보여줬다. 물론 예술가로서의 숙명론적 정의를 꿰뚫는 절박함이나 서로 다른 우주적 존재들이 촉수를 맞대고 충돌하지는 않는다. 그저 공동의 질문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동료들과 뒤섞여 고민을 연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무대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극단적이고 일방적인 사회로 치솟는 현실에서 개인의 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공적 터전(무대)에서 함께 추적하고 전망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이다. 미소, 동료, 지지, 동변상련 같은 단어가 떠올려지며 온기를 느낀 편안한 무대였다.
김혜라
현장 비평가로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등단했다. 월간 <춤웹진>과 <더프리뷰>에 정기적으로 컨템퍼러리 창작춤을 기고하고 있으며, 국공립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단에서 심의와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세종시문화재단 자문위원이며 중앙대에서 비평관련 춤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