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2026년 4월 7일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국내 예술평론 1세대 박용구 평론가를 추모하는 ‘박용구를 기억하는 어깨동무 모둠 잔치’가 열렸다. 당시 포럼 현장에서 시간 관계상 미처 다 전하지 못했던 두 발제자의 원고를 원문 그대로 싣는다. - 편집자
한반도 르네상스를 염원한 거목(巨木)
김채현_춤비평가
박용구(1914~2016) 선생 타계 10주기를 맞아 2026년 4월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열은 ‘박용구를 기억하는 어깨동무 모듬 잔치’에서 발표자는 ‘박용구의 삶과 예술’을 주제로 발제를 의뢰받았다. 이 글은 당일 발표된 PPT 자료를 중심으로 손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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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박용구 선생을 잘 모를 분들이 이제나 앞으로도 많아질 것이어서 왜 박용구 선생의 삶과 예술을 소개해야 하는지부터 말씀을 드려야겠다. 발제문의 제목대로 선생은 우리 예술계의 거목이셨고 평론 활동으로 수많은 예술인들에게 선한 영향과 자극을 주셨다. 선생은 20살이던 1934년 일본에 유학하여 5년 동안 서구와 일본의 현대 문화예술을 섭렵한 선구자였고 1946년 탄압을 피하여 일본으로 밀항하여 귀국할 때까지 15년 동안 역시 서구와 일본의 현대 문화예술을 섭렵하였다. 당시로는 아주 희귀한 일이다. 일본에서 20년 동안 쌓은 음악, 연극, 영화 방면의 전문 지식과 식견은 선생의 자산이었고 또 선생이 수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작업함으로써 자연히 우리나라 문화예술인들의 자산이 되었다. 또한 1966년에 창설한 예그린악단은 한국(적) 뮤지컬 단체의 선구였고(예그린악단 현장 작업에서 많은 음악인과 연극인들이 양성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문화예술 기획단장으로서 실행했던 프로그램은 선생이 구상한 한국적 문화예술의 본보기를 올림픽 식전행사 중계를 통해 전세계에 알렸다.
오늘 젊은 세대가 얼마나 실감날지 모르겠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었고 1960년대 초반까지는 세계 최저빈국(最低貧國)으로 꼽혔던 한국에서 1970년대에도 독재와 반공 이데올로기까지 겹쳐 모든 분야의 해외 정보와 문물은 소소한 언론 보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틀어 막혀 있었다. 그래서 당대에 해외 유학이 성행했던 것이고, 해외에서 직접 접한 사람의 체험과 연구가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박용구 선생이 일본에서 쌓은 지식도 당대 한국 문화예술인들에게 귀중하게 수용된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선생은 한국인의 시각으로 한반도에서 현대문화예술을 주체적으로 세우고 문화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활동을 견지하였다. 장수하신 덕에 90대의 최고령에도 그런 꿈을 전파하는 데 열중하였다.
인연
발표자는 2003년에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 채록 사업’(문예진흥원)을 위해 박용구 선생과 가진 7차례 면담들 가운데 춤 분야를 중심으로 2차례 진행하고 동시에 개인 캠코더로 면담을 따로 녹화한 바 있다. 박용구 선생 1주기 때(2017년) 있은 ‘박용구를 기억하는 어깨동무 모듬 잔치’ 행사에서 발표자는 2003년의 그 면담 녹화분에서 발췌해서 편집한 10분 가량의 영상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2026년의 같은 행사에서도 발표자는 이전의 영상 편집본을 보완하여 소개하였다.
발표자는 1987년 한국무용평론가회(한국 최초 무용평론가의 공식 조직)가 결성될 적에 박용구 선생 및 여러 분들과 함께 공동 참여하였으며, 당시 최연소 회원으로서 총무 일을 맡아 회지 발간을 위한 연락 등 박용구 선생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인연은 지속되었다. 간접적으로는, 선생께서 1966년에 펴낸 〈교양의 음악〉(전 5권)이라는 서양 클래식 음악 1200곡의 해설 소개서를 대학시절부터 탐독하여 선생님을 발표자 나름의 음악 멘토로 모셨고, 음악 서적이 아주 드물던 그때 〈교양의 음악〉은 발표자 개인에게는 음악 바이블이었다. 당시에 발표자와 엇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믿는다. 지금도 이 책들은 나의 서재에 비치되어 살아 있다. 올해 10월은 나의 음악 바이블이 발간된 지 60년이어서 개인적 감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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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음악, 박용구 지음 |
〈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
1960년대 이후 국내 음악계 및 예술계에서 박용구 선생은 무대예술의 여러 분야를 망라하여 단연 당대의 독보적인 예술평론가였고 이 한마디로 선생의 명성이 요약될 것 같다. 박용구 선생을 따르고 칭송한 사람은 참 많았다. 왜 그러했을까. 이번 10주기에 참석하신 원로들은 선생의 예술계 활동을 회고하며 선생을 영걸(英傑), 준걸(俊傑)이라 표현하였다. 공감할 일이다. 발표자는 이번 발제를 준비하면서 선생을 ‘한반도 르네상스를 염원한 거목(巨木)’이라 소개하였다. 서로 상통하는 표현일 것이다.
선생을 아는 분들은 많지만 선생의 삶을 소개한 글들은 적은 편이다. 선생의 명망에 눌려서였던가, 아니면 선생의 명망만큼 남들이 선생을 잘 안다고 여긴 것인가, 아니면 후학들이 게을러서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런 글들이 적었던 이유는 왜일까. 혹은 평론가의 작업이 자신을 말하기보다 타인을, 타인의 활동을, 타인의 작품을 논하는 데 주력하는 특성 때문인가. 발표자 역시 선생의 지나오신 삶들에서 궁금증이 많았고 갈증도 있었다. 그러던 터에 2003년 문예진흥원(지금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전신)이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 채록 사업’을 시작하여 선생을 구술 채록 주역으로 모셨던 것이 그간의 애로를 타개하는 결정적 돌파구가 되었다. 이번 기회에 강조하자면, 구술 채록 사업의 그 첫 번째 주역이 선생이었던 것은 막중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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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구 채록집 단행본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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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구 채록집 단행본 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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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구 채록집 단행본 내용 |
선생의 구술 채록은 2011년 단행본(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 수류산방)으로 출간되었다. 크라운판의 제법 큰 책으로 500쪽 분량인데, 활자 폰트는 작은 편이다. 20세기 이래 한국 근대와 초기 현대라 할 70년대까지 선생의 삶과 예술을 소상하게 정리하였다. 책의 거의 절반은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술 분야 인명, 단체, 작품에 관한 세밀한 주석이 차지한다. 박용구 선생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이 책은 결정본이다. 이번 발제문은 이 책의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가급적 발제문을 원문대로 소개한다.
성장 시기
박용구 선생의 할아버지는 1894년(동학혁명 시기) 평양에서 경북 풍기로 남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관리의 선발과 진급에서 평안도 지역 출신자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고, 이를 피하는 뜻에서 남쪽으로 이주했던 것이라 한다. 1906년 집안이 모두 경북 영주 풍기읍에 정착했고, 선생의 부친은 한의원을 운영하여 집안 형편은 넉넉하였다.
풍기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 시절
- 당대 유교의 꽉 막힌 분위기...
- 신문물 흡입: 유랑 극단 옥외 노천 연극, 무성영화 전성 시대, 연쇄극
- 초등교사인 자형(박용구 선생의 담임 교사)의 엄청난 문화적 자극
- 성당 다니기: 학예회(5, 6세 경부터 다님, 자아 발견 단초로서 큰 역할)
- 신문 연재소설 〈승방비곡〉 탐독
- 십전짜리 소설 읽기 시작
- 코팍춤(코백이춤) 목격: 해삼위(블라디보스톡)조선학생음악단 방문(1921) 여파
- 레코드 접촉 경험- 음악에 눈뜨다: 초등학교 친구 집에서(1926년 윤심덕 〈사의 찬미〉 레코드 첫 경험)
- 5세 때: 풍기에서 삼일운동 현장 목격
- 6세 때: 몰인정한 영주 군수를 청년들이 응징한 소식 들음
- 초등 4때: 사회주의 노동조합 창설자 강택진 농민장(葬) 참가
박용구 선생은 유교 일변도의 분위기를 벗어나 근대 사상에 젖어들었다. 선생이 눈뜬 근대 사상은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으나 개인, 자유, 평등, 개방 등의 언어들로 짜인 사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 평양고보 진학 이유: 학비 조달- 선대에 소유한 농토 소작료가 학비 조달 수입원
- 입학 경쟁율 11:1 / 완전 일본어 교육
- 정규 음악 시간 부재: 하모니카밴드 / 스케치연구회 가입
- 평양제1관에서 다수 영화, 평양기생학교 발표회 접함
- 셰익스피어 번역본, 좌익 소설 탐독, 노동조합 집회 참가
- 최승희무용발표회 접함
- 1932년 학내 독서회 사건으로 퇴학 풍기로 귀향
박용구 선생은 평양고보 시절 학업을 등한히 한 학생이라 스스로 밝혔다. 당시 선생은 계급사상에 물들었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탐독하였다. 선생은 초등학교 때부터 조숙하였고, 반골(反骨) 성향(유교에 대한 반감,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 계급의식)을 뚜렷이 보였다. 이 반골 성향은 선생의 한 평생을 관통한 삶의 태도였던 것 같다. 선생이 1990년대에 조택원 춤비 건립 운동에 친일을 이유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청소년 때 자유인을 지향했던 동시에 문화 지향의 품성을 키워갔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인(문화예술 중심의 교양인)을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꿈을 위해 선생은 20살 되던 해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일본 유학을 결행하였다.
일본 유학 시기
- 1934년 3월 일본 유학 결행: 니혼대학교 미학과(시험을 거쳐 입학, 학교에 籍만 걸어두고 공부는 등한히 한 상태)
- 김문보(국립동경음악학교 출신, 피아니스트)에게서 피아노 사사(1년간)
- 동경의 하숙집(檜風莊·회풍장)에서의 문화예술인 교유 및 스스로 학습
- 1934년 5월 무용가 이시이 바꾸 무용연구소 오디션 입단(곧 그만두지만 그와 계속 접촉하고 일본 현대무용가들과도 교유함)
- 하숙집 동료 이시이 따로오: 최승희 공연 의상 디자이너로서 최승희 공연 관람을 권유한 것이 최승희를 알게 된 계기였음
- 1936년 사립 일본고등음악학교 3학년 편입: 성악 전공으로서 레슨 받음
- 1937년 동경학생예술좌(座)가입: 동경 유학생들의 연극 연구 토론 모임
- 1937년 사립 일본고등음악학교 졸업: 음악평론사 기자 입사
- 1939년 부친 별세로 귀국하여 당시 문화예술이 활발했던 만주 하얼빈으로 감
1940년대
-1940년 9월 귀국: 라미라가극단(콜롬비아가극단 후신) 참여(일제의 우리말 말살에 대항하여 우리말 수호 의지로 결성함), 한반도 향토가극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하고, 몇 년 동안 한반도와 일본 순회공연을 장기간 하였음
- 1946년 임시 중등음악교본 발행(음악 전문인들과 힘을 합쳐 발간함)
- 1946년 작곡가 김순남 체포령: 1948년 김순남 월북
- 1949년 평론집 〈음악과 현실〉 발간, 초판 매진, 재판 압수(김순남 평문이 원인)
- 1949년 12월 반공검사 오제도가 주도한 반공공연예술제에서 월북 작곡가 김순남의 귀순을 권고하는 메시지를 박용구에게 맡기자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박용구 선생은 1950년 1월 일본으로 밀항함
1950년대
- 1950년 일본으로 밀항한 직후, 동경에서 발레인 고마끼 마사히데를 우연히 만났고, 고마끼발레단 문예부장(일본 활동 이름: 아리마 류시(有馬笠史))으로 활동(박용구 선생은 고마끼씨를 1940년 하얼빈에 체류할 당시 일본어 방송국에서 그를 만나 친분을 쌓았으며 고마끼는 당시 러시아로 발레 연수를 가기 위해 잠시 하얼빈에 있었다고 함)
- 1955년 〈日輪〉(일륜 · 박용구 대본, 안무: 고마끼 마사히데, 선생은 일본 최초 창작발레라 함) 발표, 공연
1960년대 이후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6월 귀국
-1966년 예그린악단 단장: 북한과 문화 대결에 대비한 공공 단체, 한국 뮤지컬의 시작
박용구 선생의 이후 활동은 글들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으므로 오늘 행사의 시간 관계상 그 기간의 주요 약력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1960년 일본에서 귀국
1962년 KBS방송 음악 해설 프로그램 진행
1966년 〈교양의 음악〉 발간
1966년 예그린악단 단장
1976년 음악펜클럽 회장
1987년 한국무용평론가회 공동 결성(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전신)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장, 식전 행사 시나리오 집필 제공
1989년 방송문화진흥회(MBC) 이사장
1993년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회장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에서 거론되는 이름들(1945년 이전)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에서 선생의 성장기 때부터 1945년(31살)까지 그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인상을 남긴, 또는 접촉한 문화예술인과 단체, 작품은 아주 많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일부만 소개한다. 일부만이라도 이 명단들은 성장기 이후 청년기까지 선생이 현대 문화예술을 아주 왕성하게 섭렵하였음을 보여준다. 명단들은 선생이 그저 먼발치서 바라보고 기억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접하고 소화해서 명단 각각에 대해 소견을 길거나 짧게 남긴 것들이다.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는 물론 선생의 100년 일생에서 그렇게 소견을 남길 만한 명단이 얼마나 길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한국 문화예술인 및 단체·작품 이름 (부분)
·최독견(승방비곡) ·현성완(연쇄극) ·장한몽 ·이광수 ·해삼위조선학생음악단 ·김인식(한국 양악 선구자) ·평양기생학교 ·최승희 ·홍난파 ·김사량(작가) ·오영진(작가) ·김동진(음악) ·이용준(음악) ·조택원 ·안익태 ·채동선 ·안기영 ·이상준 ·윤심덕 ·김우진 ·김동인 ·배구자 ·설정식 ·김문보(피아니스트) ·김민자 ·동양극장 ·동경학생예술좌 ·김동원 ·주영섭(연출) ·오화섭(극작) ·안영일(연출) ·이쾌대 ·이진순(연출) ·박외선 ·유치진 ·극예술연구회 ·최정우 ·함대훈 ·이효석 ·서만일(극작) ·김인수(첼리스트) ·백성규(발레) ·김영수(극작) ·최인규(감독) ·이철혁(영화 제작) ·김생려 ·라미라가극단 ·반도가극단 ·오케악극단 ·조선악극단 ·이서향(연출) ·임화 ·박노수...
해외 문화예술인 및 단체·작품 이름 (부분)
·셰익스피어 ·고단샤(講談社) ·투르게네프 ·베토벤 〈월광곡〉 ·루나차르스키(예술론)·고바야시 다끼치(좌익 작가)등등 ·가이조(改造) ·주오꼬론(中央公論) ·로시니 ·쓰보우치 쇼요 ·이시이 바쿠 ·크로이츠베르크 ·마리 뷔그만 ·다까다 세이꼬 ·에구찌 다카야 ·우에노음악학교 ·앙드레 지드 ·슈만 ·강문야(대만) ·요셉 로젠스톡(지휘) ·피아티 고르스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음악평론(音樂評論) ·당대 일본의 수많은 음악인들 ·당대 일본의 수많은 연극인들 ·축지소극장(築地小劇場) ·신협(新協,일본 극단) ·스타니슬랍스키 ·체홉 ·단첸코 ·메이에르홀드 ·액터스 스튜디오 ·찰리 채플린 ·무소르그스키 ·고마끼 마사히데...
박용구가 중시한 음악가 · 극예술가
박용구 선생이 〈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를 비롯 여러 글들에서 예술적 의의를 기준으로 중요하게 보고 자주 거론한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 다음의 네 사람이 두드러지게 언급된다.
- 루트비히 베토벤: 자유, 평등, 자아 각성, 인류 해방 지향, 구세력에 도전
-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하층민 현실에서 음악적 감동·표현 발견, 확대
- 김순남(金順男): 로칼리티의 민요색을 5도음계가 아니라 전음계로 표현함 / 조선 가곡을 국제적 수준에서 논할 계기를 성취함
-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연기술·연출·연극론
박용구가 말하는 21세기 미래형 예술 (〈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에서 발췌)
“저는 21세기 새로운 예술 장르로 심포닉 아트(Symphonic Arts)를 생각하고 있어요. 연극이라는 실상과 영상이라는 허상이 결합되고, 극장이라는 닫힌 공간과 위성 방송이라는 열린 공간이 공존하고 거기에 음악과 무용과 연극과 같은 기존 예술 장르가 전부 다 뭉친 그런 종합적인 예술을 말입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그때 우리나라가 한반도 르네상스를 성취하고 성숙기를 맞아야 제구실을 할 것이다. 지금은 경제하고 문화하고 이렇게 차이가 있다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21세기다운 양식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 양식을 나는 심포니가 종합적인 것처럼 ‘심포카’라 이름을 붙여봤다고.”
요약: 박용구의 삶과 예술
박용구는 빈한했던 한반도 실정에서 아동기 때부터 근 95년 동안 자기 스스로의 능력, 호기심, 노력으로 여러 분야와 세계를 아우르는 거시적 안목(巨視的 眼目 · comprehensive perspective)을 남다르게 함양하며 필생의 작업으로서 한국의 문화예술계를 개척하고 선도한 창의적 선구자였고, 군계일학의 거목이었다.
박용구의 비평 정신
박용구 선생은 반골(反骨) · 자유(自由) · 개방(開放) · 분방(奔放) · 총합(總合)의 픔성으로써 비평 정신을 견지하고 자기 시대 그리고 미래와 함께하기를 지향하였다.
박용구가 한국 발레에 끼친 영향과 구술사의 오류 고찰
장지영_국민일보 선임기자
I. 들어가며
박용구(1914~2016)의 삶과 활동상을 따라가다 보면 헤겔의 역사철학에 나오는 ‘세계사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세계사적 개인이란 자신의 개인적 욕망과 열정을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 역사적 변혁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20세기 한국 문화예술의 르네상스맨’으로 불린 박용구는 특히 한국의 음악, 뮤지컬 그리고 무용 분야의 발전에 기여했다.
박용구는 음악 평론가로서 1949년 한국 최초의 음악 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출간하는 등 평생 음악 비평에 매진했다. 특히 1980년대 월북 음악가들에 대한 해금이 이뤄지면서 그의 기록과 구술은 한국 음악사를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1966~1968년과 1970~1971년 두 차례 예그린 악단 단장을 맡아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만드는 등 한국적 뮤지컬의 토대를 놓았다.
무용 장르 중에선 발레의 발전에 박용구의 역할이 컸다. 특히 예그린 악단 단장 시절인 1967년 일본 안무가 고마키 마사히데(小牧正英, 1911~2006)를 초청해 동아일보와 손잡고 〈백조의 호수〉 한국 최초 전막공연을 올린 것은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박용구가 1950년 1월 밀항해 1960년 6월 귀국하기까지 고마키 발레단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발레와 인연을 맺은 것이 바탕에 있다.
사실 박용구와 고마키 마사히데의 관계가 한국 발레에 깊은 영향을 끼쳤지만, 국내 발레계가 일본 발레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니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올해 박용구 타계 10주기를 맞아 일본 발레사를 배경으로 박용구와 고마키 마사히데의 관계, 이를 토대로 이뤄진 1967년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의 추진 과정과 함께 그동안 국내에 잘못 알려진 내용을 짚어보고자 한다. 국립예술자료원의 예술사 구술 총서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2003) 등 박용구의 여러 구술자료에 오류가 여럿 있는데도, 그동안 국내 발레계에서 검증 없이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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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안무가 고마키 마사히데(왼쪽)와 박용구. - 수류산방 ‘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2011) |
II. 고마키 마사히데는 누구인가
고마키 마사히데의 본명은 기쿠치 에이이치(菊池榮一)다. 꿈꾸던 프랑스 파리 유학이 어려워지자 그는 중국 하얼빈에서 발레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하얼빈은 원래 중국 청나라 땅이었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제정 러시아의 만주 지배 거점 도시로서 개발돼 러시아 문화가 꽃피었다. 일본이 1931년 하얼빈을 점령하며 만주국에 포함됐지만, 소비에트 혁명 이후 넘어온 백계 러시아인들이 계속 거주하고 있었다. 고마키는 1933년 중국 하얼빈음악발레학교에 입학해 7년 동안 러시아 출신 발레 교사에게 배웠다.
박용구가 고마키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하얼빈이다. 1934~1939년 일본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박용구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1940년 3월 하얼빈으로 떠났다. 하얼빈에서 동포들의 주선으로 독창회를 가진 박용구는 현지 방송국을 통해 하얼빈 발레단에서 활동하던 고마키를 만났다. 고마키가 1940년 봄 상하이 발레뤼스의 초청을 받고 떠났다는 기록을 볼 때 박용구와는 짧은 기간 친분을 쌓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상하이 발레뤼스는 디아길레프가 이끌던 발레뤼스 및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레퍼토리 계승을 목표로 한 직업 발레단이다. 소속 무용수들은 대부분 러시아 혁명을 피해 상하이까지 온 백계 러시아인들이었다. 상하이 발레뤼스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고마키는 1943년 수석무용수가 됐으며 다양한 레퍼토리에 참여하다 1946년 일본에 돌아왔다. 이즈음 일본에서는 시마다 히로시(한국명 백성규, 1919~2013)를 중심으로 ‘일본 발레의 어머니’ 엘리아나 파블로바의 제자들이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을 추진하고 있었다. 파블로바는 생전에 〈백조의 호수〉를 올리고 싶어했지만 여건이 안돼 2막만 공연했었다.
〈백조의 호수〉 전막을 춰본 경험이 있는데다 악보까지 가지고 돌아온 고마키가 안무와 연출 그리고 로트바르트 역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됐다. 도호(東宝) 그룹의 지원 속에 만들어진 ‘도쿄 발레단’ 은 1946년 8월 도쿄 제국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초연했다. 이 공연은 일본에 발레 붐을 일으키는 등 발레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 당시 참가했던 인물들 그리고 공연을 보고 발레에 입문한 인물들이 일본 발레계 지도자들이 됐기 때문이다.
1947년 설립된 고마키 발레단은 195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젊은 무용수들이 러시아 발레 교육을 받은 데다 다양한 레퍼토리들을 섭렵한 고마키에게 배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당시 도호 그룹의 후원을 받으며 여러 발레 레퍼토리를 일본 초연하는 것은 물론 해외에서 소니아 아로바, 노라 케이, 마고 폰테인, 로이 토비아스, 안토니 튜더 등 유명 무용수들을 초청해 공연을 올렸다.
하지만 일본과 구 소련의 문화교류 일환으로 1957년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이 이뤄진 데 이어 1960~1964년 ‘차이콥스키 기념 도쿄 발레학교’(약칭 도쿄 발레학교)가 설립되면서 고마키 발레단은 위축된다. 구 소련 정부가 발레 교사들과 볼쇼이 발레단 및 키로프 발레단 단원들을 직접 파견해 가르치거나 합동 공연을 했기 때문에 일본의 젊은 무용수들이 도쿄 발레학교에 몰렸기 때문이다.
박용구는 1950년 일본에 밀항했다가 고마키와 우연히 재회했다. 그리고 1960년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고마키 발레단의 문예부장으로 일했다. 1950년대는 고마키 발레단의 전성기였던 만큼 박용구는 자연스럽게 발레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는 고마키 발레단에서 단보(團報) 만드는 역할을 주로 했으며, 1955년엔 고마키의 창작발레 〈니치링(日輪)〉 대본을 쓰기도 했다.
III. 박용구가 남긴 구술 자료의 오류들
박용구는 국립예술자료원의 예술사 구술 총서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2003)를 비롯해 월간 객석에 연재된 〈원로 박용구의 삶에 비춰본 한국예술사-그토록 겨운 바람의 세월)(1989~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저 〈내가 겪은 해압과 분단〉(2001), 지식산업사의 〈20세기 예술의 세계-박용구 옹의 증언〉 등 4종의 구술 자료를 남겼다.
구술 기록은 증언자의 기억에 의존하는 만큼 과장이나 왜곡 또는 망각으로 인한 신빙성 문제가 있는 만큼 후대 연구자들의 검증이 필수적이다. 그동안 박용구의 구술 자료 가운데 발레와 관련해 반복적으로 인용된 오류를 짚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박용구의 구술을 가장 광범위하게 담은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를 토대로 한다.
우선 1950년대 고마키 발레단의 후원자에 대해 박용구는 도호 그룹 창립자 고바야시 이치조(小林一三)의 아들인 고바야시 가쯔오(小林嘉津雄)라고 언급하고 있다. 고바야시 가쯔오가 무용을 좋아해서 고마키 발레단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바야시 이치조의 아들 가운데 고바야시 가쯔오라는 인물은 없다. 고바야시 이치조의 장남으로, 고마키 발레단을 후원했던 고바야시 후사오(小林富佐雄)의 오기로 보인다. 고마키와 친분이 두터웠던 고바야시 후사오는 도호그룹 산하 제국극장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고바야시 후사오는 박용구가 한국에 돌아오기 전인 1957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박용구에 대한 국내 저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고마키 안무 창작발레 〈니치링(日輪)〉과 관련한 부분이다. 〈니치링〉은 일본 작가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의 동명 단편소설에 시미즈 오사무(清水脩)의 음악을 가지고 만들었다. ‘태양’이란 뜻의 〈니치링〉은 일본 고대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의 이야기를 그렸다. 박용구는 고마키 안무 발레 〈니치링〉에 대해 ‘일본 최초의 창작발레’라고 언급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고마키의 첫 번째 창작발레도 아니다. 〈니치링〉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고마키가 일본 소재로 만든 첫 번째 창작발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일본 신국립극장이 1900~1985년 일본에서 공연된 서양무용(발레, 현대무용)을 연도별로 정리한 〈일본양무사연표(日本洋舞史年表)〉 만 보더라도 바로 확인된다. 사실 1940~50년대 고마키 발레단 외에 일본의 다른 발레단들은 고전 레퍼토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악보도 없었기 때문에 창작 발레를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니치링〉이 발표된 1955년만 보더라도 발레리나 모리시타 요코가 지금도 활동하는 마쓰야마 발레단의 대표작 〈백모녀(白毛女)〉(2월)나 하토리-시마다 발레단에서 시마다 히로시(한국명 백성규)가 안무한 〈영양 줄리(미스 줄리)〉(5월) 등 여러 창작발레가 〈니치링〉(11월)보다 먼저 나왔다. 〈영양 줄리〉는 1955년 말 문부성 무용 부문 예술대상을 받았는데, 박용구는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에서 “신문에 〈니치링〉하고 〈영양 줄리〉하고 나란히 소개된 걸 보니 기분 좋더군요. 같은 한국 사람인 줄 아니까”라고도 말하고 있다. 참고로 임성남과 조광 등이 1950년대 초반 시마다 문하에서 발레를 공부했다.
〈니치링〉 외에 〈백조의 호수〉 한국 전막 초연과 관련해서도 구술 자료 오류가 발견된다. 박용구는 예그린 악단 무용수들 훈련이라는 명분을 활용해 1967년 고마키 마사히데를 초청하는 한편 동아일보와 손잡고 발레 〈백조의 호수〉의 한국 최초 전막 공연을 성사시켰다. 당시 국내에 발레 무용수의 층이 얇았기 때문에 대학 무용과와 예고 학생들까지 동원됐다. 다만 오데트/오딜 등 주요 배역은 고마키 발레단 소속 일본 발레리나 4명이 맡았고, 왕비 역은 대만 출신의 서울화교소학교 무용교사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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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백조의 호수〉 공연을 위해 내한한 고마키 마사히데와 한국 발레계 인사들. |
“내가 십년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고마키 발레단 문예부장 격으로 어깨 너머로 보고 느낀 게, 한국 발레를 살리려면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을 해야겠다. (중략) 전막 공연을 해야 우리나라도 제대로 발레가 발전 할 계기를 갖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박용구의 구술은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의 취지를 알려준다. 실제로 1967년 공연에 임성남, 김성일, 김학자 등 국내 발레계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한 경험은 국립발레단이 1977년 임성남 안무 〈백조의 호수〉를 올릴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다만 박용구가 한국 최초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일본에 이어 한국이 아시아에서 두 번째라고 강조한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중국에서 〈백조의 호수〉의 첫 전막 공연은 1958년 이뤄졌다. 중국에선 1954년 설립된 베이징무도학원(北京舞蹈学院, 현 베이징 댄스아카데미)에는 소련 발레 교사들이 파견됐다. 그리고 1958년 베이징무도학원실험발레단은 표트르 구세프 안무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을 올렸다. 이 성과를 토대로 이듬해 베이징 국립발레단이 창단됐다.
또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박용구가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발레뤼스)이 20세기 초에 세계를 풍미하다시피 했는데, 처음 유럽에 가지고 온 게 〈백조의 호수〉”라고 말한 부분도 오류다. 1909년 시작된 발레 뤼스는 1911년 런던에서 프티파-이바노프 안무 〈백조의 호수〉를 선보이긴 했지만, 안무가 미하일 포킨이 압축한 버전이다. 호수 장면에 초점을 둔 발레 뤼스의 〈백조의 호수〉는 처음엔 2막으로 공연됐지만 이후 1막으로 더 압축됐다. 1929년 해산될 때까지 발레 뤼스는 기본적으로 〈백조의 호수〉 같은 전막 고전 발레가 아니라 짧은 단막의 창작 발레를 올렸다.
IV. 나오며
구술 자료에 일부 오류가 있지만, 1967년 〈백조의 호수〉 한국 최초 전막공연을 성사시키는 등 박용구가 한국 발레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1967년 〈백조의 호수〉에 국내 발레계의 주요 인물과 학생들이 참여해 작품을 익혔기 때문에 1977년 국립발레단이 한국인만의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고마키의 경우 〈백조의 호수〉 공연을 계기로 1970년대까지 동아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여러 차례 왔는데, 당시 콩쿠르 수상자에게는 부상으로 고마키 발레단 연수가 주어졌다. 고마키는 1983년엔 국립발레단에서 〈세헤라자데〉 초연 안무를 맡았다. 또한 박용구는 1971년 일본에서 활동하는 시마다 히로시(한국명 백성규)를 처음 초청해 예그린 악단의 창작 뮤지컬 〈바다여 말하라〉의 안무를 맡겼다. 이후 시마다는 1976년 임성남의 초청으로 국립발레단의 〈코펠리아〉 초연 안무를 맡았다. 고마키와 시마다는 1973년 국립무용단에서 분리된 국립발레단이 전막발레를 잇따라 올리며 성장할 때 한국 발레 발전의 조력자로서 역할을 했다.
박용구의 정체성은 아무래도 음악 평론가에 가장 방점이 있다. 하지만 무용계에서도 그는 조동화와 함께 ‘1세대 무용 평론가’로도 꼽힌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잡지 〈춤〉, 〈객석〉, 〈공간〉에 꾸준히 무용에 대한 글을 썼다. 그의 글은 무용 작품 리뷰나 장르 비평이라기보다는 주로 무용 관련 시평이 많다. 비록 그 자신은 스스로를 무용 평론가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 시평을 통해 무용계의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좌담회 등을 통해 무용가를 주목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박용구에 대해 무용 비평가 못지 않게 조명해야 할 부분이 무용 대본 작가로서의 활동이다. 박용구는 예그린 악단에서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해 여러 뮤지컬의 대본이나 노랫말을 단독 또는 공동으로 쓰며 작가로서의 역량을 뽐냈다. 이후에도 서울시립가무단의 뮤지컬 〈사랑은 물이랑 타고〉(1983)와 서울시 산하 6개 예술단체 합동공연 〈아침의 나라〉(1982)의 대본을 썼다. 그리고 오페라 대본으로는 백병동 작곡 〈줄리아〉(1980)와 김성태 작곡 〈춘향전〉(1981) 등이 있다.
무용은 어떤 장르보다 박용구가 대본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한 분야다. 서울시립무용단의 〈바리공주〉(1978)과 〈님의 침묵〉(1981),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1986), 국립발레단의 〈바리〉(1998), 안은미컴퍼니의 〈춘향〉(2003)과 〈바리-이승편〉(2007) 그리고 〈심포카 프린세스 바리〉(2010) 등을 썼다. 주로 무용극, 적어도 드라마성이 있는 무용의 대본인 것이 특징이다. 한국 전통무용에는 무용극의 전통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용극에 대한 박용구의 각별한 애정은 바로 고마키 발레단 활동 등 발레와의 친연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다 .
끝으로 박용구 연구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공식 출간된 음악 평론집과 교양서들을 제외하면 자료가 소실되거나 전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국립예술자료원의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 기획자〉가 있어서 전체적인 흐름은 이해되지만, 박용구 사후 자료들이 국립예술자료원에 기증되지 않고 여러 곳으로 흩어지거나 사라져서 깊이 있는 후속 연구를 어렵게 만든다. 지금이라도 남은 자료를 모아서 전모를 파악하고 정리함으로써 후대 연구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