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지난 6월 14일 토요일 오후 5시, 춤비평가이자 음악평론가 이순열 선생의 ‘구순’과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 석좌교수 취임 축하행사가 종로구 서촌에 있는 크레디아클래식클럽 지하 스튜디오에서 있었다.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원 16명 중 12명과 클래식음악 애호가 40~50명이 참석해 하객은 모두 60여 명쯤 되었다.
8세기에 58세를 살다간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는 그의 시 ‘곡강이수(曲江二首)’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인생 칠십 살기는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 했다. 하지만 이제 수명이 길어져 크게 벌이던 환갑잔치는 사라진 지 오래고, 칠순잔치 고희연도 어색해졌다.
그런데 인생 100세 시대, 125세 시대를 말하지만, 어떤 통계를 보면 막상 90세를 넘겨 사는 경우는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가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그 연세에 허리만 조금 굽었을 뿐, 그날도 여전히 명석한 정신으로 대담을 하셨다.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경영대학원이 된 매력적인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이 경영학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구순의 선생을 올해 석좌교수로 영입한 아름다운 사연은 긴 이야기라 생략한다.
행사는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와 김송현 피아니스트가 선생이 좋아하시는 슈베르트와 슈만의 곡을 협연으로 연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한예종 무용원 교수였으며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을 지낸 남정호 무용가가 〈빈사의 백조〉를 헌무로 추었다. 최초에 러시아의 안나 파블로바가 생상스(Saint-Saens)의 곡인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에 맞춰 발레로 추었던 것을 남 교수가 자기의 춤으로 만들어 춘 것이다. 백조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스튜디오 무대에서 뱅글뱅글 수십 회 돌아, 거의 빈사의 백조가 되어 춘 춤은 선생에 대한 최고의 헌정이었다. 안영신 첼리스트가 ‘백조’를 직접 연주했다.
남정호 무용가의 헌무 〈빈사의 백조〉 ⓒ이만주 |
젊은 시절부터 음악 담당 기자로 이순열 선생의 클래식 음악 세계를 잘 아는 이지영 ‘클럽발코니’ 편집장이 ‘90 평생, 춤과 음악을 벗하게 된 연유와 경위, 일화들을 알아보기 위한 대담’을 진행했다. 그 춘추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무불통지의 지식으로 삶과 예술의 깊은 경지를 들려주셨다.
이어 이순열 선생과 사모님의 케이크 커팅과 기념촬영이 있었다. 그리고는 2012년에 내신 춤비평집 〈더욱 아름다운 춤으로〉 저자 사인회 시간을 가졌다. 대중들에게는 잘 안 알려진 책이지만 그 책을 보면 선생이 박람강기에 독특한 문체를 갖는 스타일리스트인 줄을 알게 된다. 이어 2차는 인근 한식당에서 저녁 자리로 이루어졌다.
오래전, 선생이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을 원숭이 같은 녀석이라고 해서 다소 물의가 빚어진 적이 있다.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안 나 같은 사람도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가이자 관현악 지휘자에게 원숭이 표현은 평론가로서 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날의 대담을 듣고 내가 갖고 있던 의문이 풀렸다. 선생의 말씀은 “번스타인은 서울에서 오후 7시 공연인데 동경발 오후 5시 비행기를 예약하고, 그마저 연착해서 연주장에 9시에 나타났다. 그렇게 무례한 지휘자가 어디 있는가? 모든 게 늦어져서 앙코르에 응하지 않은 것을 그의 긍지니 뭐니 좋게 해석해 미화해서 쓴 문화사대주의자들을 도저히 보아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문필가이기도 한 남정호 교수는 언젠가 “한국문학의 천재 문인, ‘이상’이 27세에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노년의 모습이 이순열 같지 않았을까” 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탁견에 놀랐다. 하지만 ‘이상’이 오래 살았더라도 더욱 큰 문학적 성취는 이루었을지 몰라도 선생만큼 깊은 철학과 지식의 세계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리라. 더욱이 영어와 불어에 일가를 이루고 희랍어와 라틴어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신 선생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나는 선생이 너무 서구적인 지식 세계에만 경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런데 선생은 한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적은 수의 한국춤비평가협회에 선생을 회원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긍지이다.
이번 축하행사는 ‘먹고 놀자 판’처럼 점점 천박해져 가는 우리 사회에서 근래에 보기 드문 기품 있는 행사였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한국적 전통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런 잔치 자리였다.
이만주
춤비평가. 시인. 사진작가. 무역업, 건설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고 ‘터키국영항공 한국 CEO’를 지냈다. 여행작가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다. 사회성 짙고 문명비평적인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과 「삼겹살 애가」, 「괴물의 초상」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