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갈리나 울라노바 박물관 탐방기
자유를 갈망하는 이사도라의 영혼이 깃들었던 건 아닐까?
김순정_발레.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갈리나 울라노바(Galina Ulanova,1910-1998) 박물관 방문을 결심한 것은 꽤 오래 전이었지만 올 여름에야 드디어 가보게 되었다. 작가나 음악가, 화가들의 박물관은 많이 가 보았지만 발레리나 개인을 위한 박물관은 생소했다. 물론 울라노바를 제외하고 러시아 발레를 얘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할 정도의 존재감이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정부가 개인의 집을 사들여 관리하면서 예술가를 기린다는 문화적 마인드에 경외감마저 들었고 더욱 내 눈으로 이를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예전 러시아로 유학을 간 때가 1999년이니 아쉽게도 이미 그 때는 그녀가 88세로 삶을 마감하고도 1년이 흐른 뒤였다. 이제는 울라노바의 애제자인 막시모바(1939-2009)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시간은 그렇게 무심히 흘러가는가보다.

 



 나로서는 마야 플리세츠카야의 팬이었기에 모든 면에서 상반되어 보이는 울라노바 역시 늘 연구대상이었다. 선과 악 중에서 늘 선(善)을 담당하는 발레리나, 1928년 발레스쿨 졸업 후 죽을 때까지 키로프발레단과 볼쇼이발레단, 세계 곳곳에서 춤추고 죽기 전까지 볼쇼이발레단에서 무용감독으로 선망의 삶을 살다간 무용가가 바로 갈리나 울라노바였다.
 그래서인지 탄탄대로를 걸었다고 생각된 그녀에 대해서 솔직히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왠지 진정한 예술가라면 시대와 불화하고 시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을 내심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지도 않았으면서 한 인간을 어찌 타인이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그간 그녀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편협했던 것인지 이번 울라노바 박물관 방문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되었다.

 



 7월 14일 아침 일찍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모스크바 시내에서 약간 동쪽으로 떨어진 따간스카야역 근처 까쩰늬스카야 거리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아파트 앞에 내린 나는 엄청난 크기의 건물을 빙빙 돌며 출입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주소에 출입구 번호가 나와 있지 않아서였다. 이곳은 건물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길고 높기 때문에 곳곳에 여러 개의 출입구를 만들고 그에 따른 고유 번호가 있다.
 물어물어 겨우 도착해서 호화로운 출입구를 열고 들어가니 중간 문이 있었고 또 이를 열고 들어가니 중앙에 천정이 높고 아름다운 회랑이 보였다. 데스크 안쪽에는 안내원이 두 명이나 앉아 있었는데 다 중년 여인들이었다. 통역을 데리고 왔느냐고 다그치길래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고 했더니 금새 퉁명스러움이 누그러졌다. 아직은 박물관 직원이 출근 전이니 기다리라고 하며 저 쪽 빈 의자에 가서 앉아있으라고 했다.
 박물관 문을 열려면 30분 정도 기다려야했는데 조금 전의 퉁명했던 안내원이 오더니 얇은 잡지 3권을 읽으라며 주고 갔다. 오전 11시 개관인 걸 모르고 내가 너무 일찍 서두른 것이다. 펼쳐든 잡지에는 얄타에서 휴가를 즐기는 셀러브리티들의 사진이 나와 있는데 발라치코바의 수영복을 입은 민망한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예전 브누아 드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시상식에서 그녀가 관객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이유는 더 뛰어났다고 생각한 자하로바가 발라치코바의 유명세(?) 때문에 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관객 수준은 그만큼 높고도 정확한 것으로 기억이 된다.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만든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이렇듯 정치적인 면은 뛰어나지만 크게 존경을 받는 인물은 아닌 듯 했다. 카메라 세례와 파티를 좋아한다는 발라치코바의 모습은 여전히 방송과 사진 등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묘하게도 우아함과 고귀함의 대명사 울라노바를 방문하는 초입에 이러한 발라치코바의 틈입은 재미있는 시작을 예고했다.

 



 스즈키 쇼가 쓴 <발레리나의 초상>에 울라노바에 관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춤추고 싶지 않았다”고 한 울라노바의 말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춤을 오래 많이 춘 그 녀가 춤추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무용수였던 부모의 힘든 생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대목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돌봐 줄 시간이 부족해서 울라노바를 기숙사가 딸린 발레학교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나로선 짐작도 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러시아의 최초 발레무용수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 출신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고 울라노바의 춤의 여정도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울라노바는 마린스키발레단원 출신이고 발레교사인 어머니로 부터 6년간 발레를 배웠고 마지막 3년은 바가노바의 제자가 되었다. 1928년 졸업과 동시에 단 3명만이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울라노바였다. 안무가 로뿌호프(1886-1973)는 1929년 그녀에게 오데트, 오딜 1인2역의 주역 자리를 주었고 1930년에는 바이노넨, 레오니드 야캅손, 체스나코프 공동안무 <황금시대>의 주인공을, 1934년에는 <바흐치사라이의 샘>의 마리야 역, 1939년에는 볼쇼이발레단에서 가보비치, 에르몰라예프와 <백조의 호수>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서 1944년 자하로프 안무의 <바흐치사라이의 샘>을 모스크바에서 재공연 했고 아사프 메세레르의 남성 클래스에 들어가 수업을 받으며 춤의 도약과 호흡에 있어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그녀는 오랜 기간에 걸쳐 기록한 자신의 작업일지에 적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제서야 박물관 여직원 둘이 한가로이 출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안내원의 말을 듣고는 내게 다가오더니 박물관 정리를 한 뒤에 곧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십분 정도 기다리니 두 직원 중 다샤란 이름의 젊은 여직원이 와서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6층에 내리니 원형 로비가 있고 울라노바의 크바르티라(아파트)박물관 입구가 보였다. 스탈린양식의 호화 아파트는 예전의 부와 영화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그녀가 매일 드나들던 집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묘했다. 생전 많은 손님들이 이곳을 드나들었을 텐데 사후에 방문객들이 들어와 거실, 침실, 부엌, 욕실을 들여다보는 것을 과연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천정이 높은 거실 창밖으로 멀리 크레믈린궁과 구세주성당이 보이고 모스크바강이 시원스레 흐르는 것이 보였다. 많은 손님들이 충분히 않거나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넓은 거실에는 긴 의자와 암체어가 놓여 있고 장식거울 앞에나 창가에는 작은 조형물들이 눈에 띄었다.
 유심히 보는 내게 울라노바가 특히 이사도라 덩컨(1878-1927)의 조형물을 좋아했다고 직원이 귀띔해 준다. 테크닉보다 연기력이 출중했던 울라노바의 내면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이사도라의 영혼이 깃들었던 듯하다. 이사도라 덩컨의 영향은 안나 파블로바(1881-1931), 미하일 포킨(1880-1942) 등을 비롯해 러시아 문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며 이는 덩컨의 전기를 읽어보면 보다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울라노바의 침실은 정갈하고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작은 침대는 말년의 그 녀가 살았던 조용한 생활을 짐작케 한다. 오래 전 톨스토이 생가를 방문했을 때 그의 침대 역시 작고 소박한 걸 보고 놀랐던 것처럼. 반대편 벽 앞 의자에는 헝겊으로 만든 동물인형 등 장난감들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작은 소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친구의 손녀라 했다.
 침실에서 서재로 가는 복도 코너에는 커다란 호두까기 인형이 서 있었다. 그녀의 생일날 무대에서 발레단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인데 그 때의 상황이 액자 속의 사진으로 걸려 있었다. 막시모바와 바실리에프가 주인공으로 나온 공연이었다.
 서재로 가는 길목에 네 사람의 사진이 한 액자에 가지런히 꽂혀져 있었다. 네 사람의 남편이었다고 한다. 지휘자, 연출가, 배우 등. 예술가의 길에 동행해 준 그들의 이야기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서재는 다양한 책으로 가득했다. 러시아 태생의 전설적인 제작자이자 공연매니저였던 솔 휴록이 미국공연 후 울라노바에게 선물한 호화로운 책을 직원이 흰 장갑을 끼고 살살 넘기며 보여주었다. 1959년에 받은 책인데도 말끔했다. 책장 윗칸에 그레타 가르보의 사진이 눈에 띄게 놓여져 있어서 물었더니 울라노바가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레타 가르보는 우수에 잠긴 눈과 멋진 분위기를 지녔던 배우로 말년에는 사람들을 피해 칩거를 하다 죽었다고 하는 은막의 스타다. 영국의 팬이 주었다는 미니 책장과 미니 사이즈 책들이 가지런히 걸려있기도 하고 동양화 느낌의 타피스트리도 걸려 있었다. 한국 것 아니냐고 직원이 물어 보길래 매란방과의 교류도 있었던 걸로 보아 중국 것이 확실할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서재를 나와 긴 복도를 지나는데 마지막 공연에 입었던 드레스 두 벌이 걸려있고 아래에는 두 켤레의 구두가 놓여 있었다. 복도에는 해외공연 포스터들이 걸려 있었다. 작은 방에는 그녀의 스승인 바가노바를 비롯해 니진스키, 메세레르, 플리세츠카야, 그녀의 제자들인 막시모바, 세멘야카, 그라쵸바 그리고 일본의 모리시다 요코 등의 사진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그녀가 신던 포인슈즈(토슈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녀가 입었던 지젤 의상도 걸려 있고 그녀가 애용하던 액세서리, 디올 루즈 등이 주인을 기리며 놓여 있었다.

 



 욕실은 살구빛 부드러운 색감의 타일로 마감이 잘 된 고급 취향의 공간이어서 놀랐다. 중간에는 장식물도 놓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1980년대에 욕실을 개조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 당시에 이런 시설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울라노바에 대한 예우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옆방은 부엌으로 좁지만 효율적으로 일과 휴식을 할 수 있도록 팩스와 전화기가 놓여져 있었고 에스프레소 기계가 한 구석에 있었다. 커피를 좋아했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마지막으로 본 곳은 그녀의 여행을 위한 준비실인 듯 여행가방과 망토, 버버리 코트 등이 걸려있는데 모두가 최고명품으로 즐비했다. 소비에트 시절 특권층들은 이렇듯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는 듯이.... 주인을 잃은 그 옷과 가방은 아직도 새 것 같아 보였다. 그녀가 다녔던 수많은 나라의 무대와 관객들, 그 환호가 어떠했을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떠오르며 아쉽게 이번 방문을 마쳐야 했다.

 



 따간스카야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데 20여분이 걸렸다. 중간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에서 잠시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쉬었다. 왠지 20세기 러시아 발레의 역사를 쭉 훑고 나온 듯 약간은 지쳤고 멍한 기분이었다. 울라노바의 88년간의 생애를 단 몇 시간에 알 수는 없겠지만 어렴풋하게 느끼던 것을 보다 명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굳이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의 수십년 무용생활 속에서 그래도 밝은 희망이 되어 준 것은 글로 남겨진 앞 선 세대의 진솔한 기록들에서였다. 마침 모스크바의 돔 크니기 라는 서점에서 울라노바에 관한 책을 발견한 것도 이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원고청탁을 해온 <춤웹진>에 감사드리고 덕분에 소중한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어 기쁘고도 감사하다.

2015. 08.
사진제공_김순정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