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한국춤비평가협회 2020년 춤계 진단
코로나 대책으로 부심했던 2020년
  • 일    시
    2020년 12월 10일 오후 2시, 차후 속행
  • 장    소
    아카데미아인(서울 동교동) 외
  • 참석자
    채희완 김태원 이종호 김채현 장광열 이만주
    권옥희 김영희 이지현 서정록 김혜라 송성아 방희망

예년과 마찬가지 계획으로서 한국춤비평가협회 단위로 2020년도 춤계를 진단하는 연말 집단 좌담을 방담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이 좌담은 대면 형태로 진행한 내용을 축으로 추후에 스마트폰과 이메일을 통해 수렴한 의견을 더하여 재정리될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좌담 장소도 실제로 여러 곳이 되겠지요. 올해 춤계는 코로나19로 지샌 1년이라 할 만큼 무엇보다도 코로나 재난이 춤계에도 던진 충격파가 엄청났습니다. 그로 인한 제반 변동과 부작용, 향후 전망, 과제 등을 살피고 진단해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춤계의 2020년 올 한 해를 진단하도록 하지요. 우선 올해 기억할 일, 주목할 일부터 난상토론 식으로 열어놓고 소개해 봅시다.




12월 10일 춤비협 좌담은 코로나 방역을 위해 비대면 화상 회의를 동시에 진행하여 일부 회원들만 대면 회의에 참석하였다 ⓒ춤웹진




2020년도 춤계 동향

-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2020년 춤계의 활동 양상은 예년에 비해 크게 달라졌습니다. 2월 이후 춤 국제교류 활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연 연기, 취소가 이어졌습니다. 실연을 하더라도 일정 거리 유지를 위해 한정된 관객들만이 공연을 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입장료 수입이 감소되어 어려움이 가중되었습니다. 많은 공연들이 비대면 온라인으로 치러졌고, 랜선 아카데미 프로그램이 많아졌습니다. 외국 안무가와 단체의 공연 작품을 볼 기회도 대폭 줄어들었는데 LG아트센터와 시댄스, 또 외국의 유명 축제와 무용 마켓 등에서는 온라인을 통해 공연 영상을 송출했습니다. 4차산업혁명 및 연계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공연 작업도 늘어났습니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인공지능과 로봇을 이용한 작업을 선보였고, 이정인크리에이션은 증강 현실을 이용한 작업을 했습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국민발레체조’, ‘아빠야 발레하자!’, 최보결씨의 방구석 댄스 등 집콕 춤 프로그램이 증가했습니다. 김나이무브먼트콜렉티브는 드라이브인 춤 공연으로 코로나19 상황을 반영을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 코로나19 재난 상황을 고려해 공공 무용단에서 펼친 새로운 작업도 주목할 만했습니다. 국립발레단의 ‘Beyond the Stage’, 〈우리, 다시: The Ballet〉, 국립무용단이 실연과 해설을 곁들인 랜선 아카데미와 아티스트 특강, 국립현대무용단의 ‘댄스 온 에어’ 등 여러 동영상 서비스 프로그램, 대구시립무용단의 온라인 극장 ‘텅빈 객석’과 언택트 인터뷰 프로그램 등이 있었습니다.

- 올해 비평적 시각에서 거론할 새로운 춤 현상은 무용예술의 공공재 성격이 강화됐다는 겁니다. 그동안 주로 극장을 통해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나던 데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로 사회 및 관객들과 소통했습니다. 공익광고, CF 출연 등 미디어 부문의 진출이 활발해졌고, 온라인을 통한 춤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일반인들과 소통하고, 영유아, 어린이, 청소년,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커뮤니티댄스 작업 등이 늘어난 것이 그 예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갑작스럽게 생겨난 아티스트 지원 프로그램이 주로 영상 쪽으로 치중되면서 기존 작품의 영상화 작업과 댄스 필름, 다큐멘터리나 작업이 많아졌고 이는 무용 영상 콘텐츠가 다양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춤 저작권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는데, 무용예술계에만 저작권 협회가 없다는 점도 지적되었습니다. 음악 연극은 물론 방송댄스도 저작권 협회가 있는 만큼 가칭 무용저작권협회의 출범도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 춤 사회, 춤 환경, 춤 기획에서도 코로나19로 인한 영향이 컸습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가들이 코로나 사태로 입국, 국내 체류 기간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작업을 했습니다. 프랑스의 이선아씨, 오스트리아의 이정인씨, 네덜란드의 이미리씨, 독일의 김윤정씨, 벨기에의 허성임씨, 프랑스의 남영호씨가 국제 무용축제, 각 지역문화재단과 연계해 안무과 공연,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복지 면에서 춤계의 혜택이 늘어난 한해였습니다. 모든 지역문화재단이 예술인 재난기금을 지원했고, 예술인 사회보험료 지원, 무용인 일자리 창출 지원 외에도 12월에 예술인 보험료 지원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 무용역사기록학회에서 한 학술 작업도 무용예술을 통한 사회와의 소통 확장이란 점에서 눈여겨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와 퍼포먼스를 같이 엮은 탈북무용가 김옥인의 〈몸의 이주〉, 화상으로 진행된 국제 심포지엄인 ‘국경 너머의 무용사’, ‘근대 춤유산: 신민요춤의 재발견’ 퍼포먼스는 무용과 사회 간의 보다 적극적인 소통을 위한 시도란 점에서 눈여겨 보게 됩니다.

- 거명된 단체나 개인의 활동 이외에도 올해 춤계에서 눈여겨 봐야 할 점들이 더 있을 듯한데, 방담의 취지를 고려하여 일단 이 정도 선에서 소개하고 진단을 이어가도록 하지요

- 무용역사기록학회의 여러 활동은 분명 관심을 끕니다. 그런데, 신민요춤 재현과 관련해서 짚고 싶습니다. ‘신민요춤’은 1930년대 레코드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신민요에 맞춰 추던 춤의 총칭으로, 근대춤의 한 양태입니다. 이러한 재현 작업은 근대춤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 보존에 강조점이 있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전통춤에 권위를 부여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좀 신중하며 객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탈북 무용가 관련 작업도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여기서 길게 말할 일은 아닙니다만, 무용역사기록학회가 남북한 교류 문제와 관련해서 열은 심포지움에서 독일 통일 이전 동독의 춤 관련 문건과 자료의 실태를 동독에서 성장한 전문 연구자의 작업으로 소개해 시의성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국가사회주의를 국민사회주의로 옮기고 독일말 Volk를 볼크라 하는 등 발제문 번역에서부터 아쉬움들이 없지 않아서 섬세한 소개가 더 필요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 해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코로나 상황으로 국내에 들어와서 하는 작업을 보며 실질적으로 그만한 의미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유럽 쪽에서 하는 것의 복사판에 맴돈 케이스가 적지 않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 앞으로도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용인들의 국내 활동이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일 텐데, 참고할 지적이 아닌가 합니다. 해외에서 노력해 익힌 것을 국내에 와서 공유하는 것은 긍정할 수 있고 국내 활동을 검증하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해외에서 해외인이 하는 것을 판박이로 국내에서 반복하기보다는 자기대로 소화해서 소개하는 그런 남다른 과정을 곁들이거나, 소개하는 내용의 연유를 제대로 밝힐수록 국내에 소개하는 의의도 더 강조되겠지요.

- 커뮤니티댄스 활동은 바람직하고 권장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일반인들의 춤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는 데 치중하는 활동을 커뮤니티댄스 개념의 중심에 놓는 경향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커뮤니티댄스를 부각시키다 보면, 커뮤니티댄스만의 특성을 놓치거나 오도할 부작용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국내 커뮤니티댄스 활동 가운데는 참여자 개개인의 자발적 소통 의지를 배제하거나 등한시하는 오류가 우려되는 점이 참고되었으면 합니다.

- 올해의 현상으로서 기록의 방식, 전달의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댄스 필름처럼 또 다른 양태의 표현 방식이 늘고 있습니다. 새로운 양태로 출현한 것들이라지만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몇 가지 예들은 있어서 굳이 새로운 양태는 아니겠습니다. 이전에 대상화하지 않은 것을 주목하고 논의의 폭을 넓히자는 취지는 동감입니다.

- 저는 올해 두드러지거나 새로 나타난 현상을 뚜렷한 기준 없이 거론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크겠나 생각이 듭니다. 무용인들이 익히 잘 알고 있어서 건너뛰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용인들이 코로나라는 돌발 상황을 겪으며 느끼는 세세한 여러 가지 문제들, 감정들, 해결하려는 활동들을 먼저 짚고 그 다음에 해결 방안으로 새로운 현상이나 새로운 방법으로 등장하였다고 얘기되는 것이 순서인 거 같아요.

- 사회 변동을 재촉하는 무수한 요인들로 인해서 앞으로 새로운 춤 활동들이 불어날 것은 예상되는 일이고 최근 몇 해 그런 추세가 뚜렷해지고 있지요. 그래서 이전에 비하여 두드러지거나 새 현상들을 만나기가 다반사입니다. 이런 가운데 올해는 코로나 재난이 새 현상들을 촉진하였습니다. 그러한 현상을 비평적 관점에서 수렴하는 기준을 설정하기가 실제 까다롭겠지만 그런 기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요. 비평가들이 현장에 더욱 밀착되어서 현장을 제대로 걸러내는 노력과 그것을 개념적으로 설정해가는 작업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다양해진 전달 방식 속의 춤 영상

- 올해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무용 영상의 대대적 활용이 손꼽힙니다. 춤 영상으로 표기가 정리되었으면 하는 무용 영상은 국내에서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입니다. 현장 작업에서나 논의에서나 그렇지요. 그러나 무용 영상의 비중이 갑자기 커진 상황은 앞으로도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무용 영상을 비껴갈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무용 영상의 순조로운 정착이 필요하고, 우리 방담에서도 차후를 위하여 다소 두서가 없지 않겠지만 난상토론을 해보도록 하지요.

- 공연을 대체, 대리하는 방법으로 랜선 송출, 온라인 방영 등이 흔해졌지요. 공연 실황을 기록 중심으로 촬영하는 것과 춤 영상으로 촬영 재편집하는 것은 경비 면에서 수백만원 정도 차이가 납니다. 현재 여건에서 그만한 비용을 추가로 감당해낼 무용인이 얼마나 됩니까. 이 점에서 올해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우려를 산 해였다 봅니다. 아마도 이런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내년 이후 상당 기간 재연될 거로 봅니다. 코로나 시국이 아니더라도 춤 영상이 댄스 필름으로서도 실황 기록으로서도 중요하고, 말하자면 춤에서 영상의 구실이 커지고 있습니다. 영상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경제 사정이 어려운 사람은 안무 재주가 있어도 눈에 띄지 않게 도태될 확률이 높지요. 특히 춤 영상과 연관해 쉽게 지적해볼 점으로서 춤 영상감독이나 제작자의 수완에 따라서 해당 춤 무대 작품, 춤 영상 작품이 돋보이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지요. 무용가의 안무력과 상관없이 촬영 영상 스탭의 역량이 매우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 매체화에 따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춤이 영상이라는 매체 혹은 VR, AR 같은 경로로 관객,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중간 매체의 영향이나 매체의 조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게 훨씬 많아 어떤 역량과 시각을 가진 매체 전문가를 만나느냐에 따라 무용 영상의 결과물이 확연히 달라지는 겁니다. 이 상황에서 전반적으로 활동의 폭이 다양해지며 여러 시도가 있었는데, 현장에 밀착된 논의가 더 필요합니다.

- 영상 작업이 안무를 자칫 이차적이며 부차적인 작업으로 돌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다음 문제로 춤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에 이것은 비평적 입장이나 미학적 측면에서 결정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무용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그걸 극복하는 대안으로 영상을 택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영상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점은 대개 짐작하는 대로입니다. 그 이점에 가려진 부작용을 무용인들과 함께 인식함으로써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될 논의들이 있어야 하겠지요.

- 기본적으로 온라인에서는 한 번 걸러내어 보이는 거라서 심사숙고해볼 면이 있습니다. 춤은 춤이지만 대면하지 않는 이런 춤들을 비평적으로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 고려해야 합니다. 영상을 통해 보는 춤을 전문인들처럼 춤을 많이 본 사람은 그 전모를 상상할 수 있지만 춤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걸 춤으로 안 보고 영상으로 대할 것입니다. 영상은 춤의 본원적인 기능과 역할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살아남으려는 자구책으로 그러는지 몰라도 필름 쪽으로 가는 건 다른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스크린을 통해 춤을 보겠지만, 공연예술이라는 건 현장 속에서 같이 소통하는 건데, 춤과 무용 영상은 장르가 다르잖아요. 댄스 필름, 온라인 송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별도의 문제일 것입니다.

- 춤을 부분 부분 짜서 짜깁기하고 새롭게 편집을 잘해서 하나의 영상 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춤을 대면하는 것은 서로 성격을 달리하잖아요. 좀 넓게 이야기하면, 춤을 주제, 소재로 만든 〈카르멘〉 〈스파르타쿠스〉 같은 영화가 있는데, 앞으로 그런 류의 작품이 우리 주변에서 나온다면 비평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을까요.

- 춤 정체성을 얘기하자면, 관중과의 현장 호흡이 없어도 현장 공연 방식을 택하여 춤의 정체성을 지키고 스트리밍 식으로 소통을 하는 것은 공연 작품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춤을 소재로 영상물로 만든 작품, 그것이 춤의 영역에 속하느냐 영상의 영역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요. 영상은 춤예술과 춤의 정체성을 확대시킨 것이어서 춤의 중심은 아니지만 또 다른 유형의 특별 케이스로 고려할 점이 있어 보입니다.

- 인간의 몸은 근원적인 것, 전달되는 생명력과 에너지, 그리고 있는 자체로서의 물질적인 몸입니다. 정신이나 영성, 이런 것들은 영상이 아니라 직접 봐야 전달됩니다. 코로나 시국에 자구책으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는 이럴 때일수록 춤은, 현장은, 관객은, 생명은, 움직임은 무엇인지 근원을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큽니다. 영상의 시대로 가서 영상을 통해서 하더라도 그런 고민을 하고 만드는 춤과 그렇지 않은 춤과 분명히 다를 거라 봅니다. 현장에서 춤을 보면 시각적 환영(幻影)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각적인 요소나 현장성의 주제가 불분명해도 환영이 주는 게 있어요. 정서 전달, 환영, 색다른 형식, 그런 것들이 있는데 영상을 통해서는 그런 것들이 잘 안 보여요. 춤을 대상으로 말씀드리자면 정말 가능성이 없어요. 앞으로 영상이 발전하고 비전이 있다 해도 그런 영상의 춤을 안 볼 거 같습니다. 그런 때문에 이런 고민을 더 깊숙이 해야 합니다. 영상의 시대가 와서 영상과 접목되더라도 춤이 살아 남으려면 분명한 주제 의식이 있어야 하고 그런 것 없는 춤은 외면당할 겁니다. 발레도 서사 구조가 있어서 영상으로 보는 겁니다. 춤은 말도 없고 스토리도 흐릿합니다. 영상의 시대라 해서 영상으로 송출될 수는 있으나 관객 수는 더욱 줄어들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 클릭할지 몰라도 또 호기심 있게 볼 수 있어도 고정 관객이 되긴 어려울 겁니다. 차라리 댄스 필름이나 다큐멘터리식, 작품의 결과가 아니라 춤을 만드는 과정, 안무가의 이야기, 댄서의 이야기,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말로 풀어낸 다큐멘터리는 좋더군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여러 면에서 복합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다큐멘터리 방식이면 모를까 그냥 공연장에서 편집 송출하는 데 대해 저로선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 전통적으로 춤의 매체는 움직임이고, 영화의 매체는 영상입니다. 코로나19로 영상이 춤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폭되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주제와 제재, 형식과 내용, 매체와 재료에 대한 선명한 자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작품은 현장 공연뿐만 아니라, 영상으로 전달될 때에도 내용 포착이 어렵습니다. 물론 영상의 화려한 테크닉이 춤의 모호함을 감출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상기술과의 결합에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하기를 원한다면, 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고민을 선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자기 중심을 명확히 하면서, 변화하는 조건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보수적 시각인지 모르겠지만 춤의 참다운 가치는 현장 예술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춤추는 사람의 신체는 직접 그 앞에서 목도했을 때, 그러니까 무용가의 신체 자체가 감상의 주된 재료가 되는 거라서 그 현장성이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강합니다. 물론 아직 개발 단계여서 그 수준을 논하기가 조심스럽지만, 현재까지 시도된 댄스 필름들을 봤을 때도 그 안에 안무가의 아이디어를 온전하게 녹여낸 것은 드문 듯합니다. 무용가들부터 영상 작업이 돌아가는 원리를 다 이해해야 거기에다 자기 생각을 녹여내고 또 의견을 조율할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영상 작업을 우선으로 해온 감독의 연출을 쫓아 작업하는 편입니다. 안무가가 서브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댄스 필름이 전개되는 거 같아서 이런 작업들이라면 춤 공연의 매력을 얼마나 대신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생각입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떨어져 있어 봤기 때문에 한데 모여서 감상하는, 춤의 현장성이 소중하다는 걸 오히려 더 느끼게 되는 거 같습니다.

- 안무자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해도 전반적으로 춤계 현장에서 안무상의 문제점은 누적되어 왔지요. 다시 말해 영상 작업에서 영상 스탭의 작업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서 안무가를 무조건 변호할 일은 아니지요. 그것은 그것대로 지적되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춤계에 해결 과제가 더 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안무에서도 허점들이 많았는데, 이와는 별도로 영상 작업을 하다 보니까 영상 촬영감독의 수완에 따라서 작품 자체가 달라지는 폐단 내지는 긍정적인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 이번 시댄스는 미리 필름으로 제작했습니다. 안무자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어떤 사람은 댄스 필름에 가깝게 해서 극장 공간이 아닌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연출해서 만들었고 그렇지 않고 그냥 공연 공간, 자유소극장이나 서강대 메리홀에서 찍기도 했습니다. 미리 작품들을 찍고 만들어서 일정한 시간에 온라인에서 상영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댄스 필름을 민간에서 만드는 주체적인 활발한 양상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게 시댄스였고, 이번 시댄스 작품들의 수준 여하를 떠나서 유의미했다고 봅니다.

-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 접속이 되면서 글로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상반기에는 MODAFE도 그렇고 환경에 의해서 국내 작품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면서 오히려 국내 작가들과 레퍼토리를 다시 볼 수 있던 것인데, 앞으로 글로벌화 추세에서 그것을 강화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하반기에는 다양한 유료 콘텐츠, 네이버TV를 통해서 외국에 가지 않으면, 외국 작품을 부르지 않으면 볼 수 없던 것들을 보는 장점도 있었지요. 가령 해외에서 온라인으로 안무 제안을 받고 한국에서 작품을 만드는 협업 방식과 과정을 보면서 앞으로 코로나가 극복되어도 이런 방식의 협업들이 지속될 거라 봅니다.

- 이미 글로벌화는 진행되고 있지요. 글로벌에 대처할 국내 콘텐츠가 문제되는 거지요. 그 콘텐츠 가운데 라이브 스트리밍, 댄스 필름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 양질의 활동들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 무용 영상에서, 실시간 중계와 댄스 필름은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댄스 필름은 연출이나 촬영, 편집에 따라서 질적으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오겠지요. 영상 작업을 잘한 것은 그 장르를 영화로 분류하든 무용으로 분류하든 예술적 가치를 갖겠지요. 저는 일단 라이브 공연을 실시간 중계해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그것을 갖고 평가하는 건 별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을 극장에 부를 수 없으면 그런 식으로 일반 대중들한테 제공하는 차원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영상 필름은 필름 쪽으로 장르를 따로 해서 예술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소비하는 건 필요할 겁니다. 라이브로 실시간 중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걸 갖고 리뷰나 평가를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필름 쪽은 다른 장르로 해서 앞으로 그 작업을 계속해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실시간 라이브는 비평 대상이 아니며 영상 필름 쪽은 영화처럼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공연의 라이브 중계에서는 정확히 볼 수 없을 뿐더러 기록에 머문다는 생각입니다.

- 올해 코로나19로 인해서 춤에서 영상이라는 장르나 방법 자체가 돌발적으로 너무 빨리 들어왔는데, 무용인들은 준비되지 않았어요. 무용 영상은 독립 장르로서 자리 잡아야 하고, 이미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지요. 국내는 지금 그 수준이 안되고 또 올해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이라 문제가 되는 거지요. 한국에서 무용 영상을 경험해본 무용가가 얼마나 될지요. 무용 영상에 대한 개인적 연구나 면밀한 관찰이 무용인들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혹시나 앞으로도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아마 올해 처음 제기된 이 문제, 완성도가 낮은 폐단이 누적될지 몰라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던 상황을 벗어나, 스스로 익히면서 자기 학습으로 진전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나마 문제의 악순환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원점에서부터의 논의들이 필요합니다.

- 이 부분의 논의에서 아직 축적된 것이 미미하여 현장에서는 개념이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가장 큰 혼란은 무용을 영상화한 것을 무용 영상이라고 통칭하여 영어로 바꾸면 댄스 필름과 혼동이 오는 거 같습니다. 공연을 영상 송출하는 것은 크게 ‘라이브 스트리밍’과 ‘레코딩 브로드캐스트’(녹화 방송), 즉 공연시간에 동시에 송출하느냐, 녹화를 해놨다가 송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실시간에 틀면 편집기술이 끼어들 틈이 아주 적어 카메라 대수나 현장 연출력, 그것을 믹싱하는 기술이 더 중요해질 것이고, 녹화 방송을 한다면 현장의 분위기를 최대한 담는 한도 내에서 편집의 기술이 많은 것을 결정하겠지요. 지금은 라이브 스트리밍 경우가 우세한 거 같구요. 간혹 녹화를 한 후 편집을 좀 더 매끄럽게 하고 다른 영상도 풍부하게 붙여 송출하는 작품들도 보입니다. 그것과는 다르게 공연장에서 이뤄진 공연을 보다 양질의 영상기법을 통하여 공연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해주는 온 스크린(on screen) 작업입니다. 이런 작품들은 다시 공연장에서 상영하거나, 디브디로 소장하게 하거나 하는 유통경로를 갖지요. 이 작업은 영화적 유통경로를 활용하기 때문에 필름의 범주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영화의 범주에 가까운 것으로는, 원래 있었던 춤과 영화가 결합되어 영화장르의 한 부분인 ‘댄스 필름’이 있고, 공연을 ‘온 스크린’한 작업들이 영화에 가까운 것이고, 요즘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대책으로 마련한 라이브 스트리밍과 녹화 방송은 공연의 현장성을 담아내려고 영상매체의 도움을 받은 형태로 그나마 공연 중심의 매체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거기서 문제는 우리가 보았던 라이브 퍼포먼스를 매체가 끼어들어서 기록의 형태로 보여주고 잘 만들어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현장 그대로 좋은 볼거리로 전송시켜주는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이 현상을 미학적 관점, 비평적 관점, 공연예술의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겠지요. 그 다음에 그것이 어디까지 미숙함의 문제인가, 어디서부터는 이 매체가 결합하면서 생긴 문제인가, 거기에 예술가, 안무가들은 어떻게 대응해서 준비해야 하는지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 비디오 기록 말고는 국내에서 춤과 영상의 결합 작업이 사실상 드물어 이런 작업을 지칭하는 용어도 잘 쓰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용어를 정립해야 할 때이지요. 저로서는 편의상 광의의 춤 영상이라는 용어를 쓰겠습니다. 그 대개념 속에 현장 기록, 현장 녹화, 현장 송출(라이브 스트리밍), 댄스 필름, 비디오댄스, 씨네댄스, 스크린댄스, 무용영화 등의 용어가 들어가겠지요. 아무튼 실연 실황 공연이 있고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보는 공연이 있고 또 댄스 필름이 있습니다. 댄스 필름이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요. 반면에 라이브 스트리밍이 한국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로서 무엇보다도 라이브 스트리밍을 해내는 촬영 솜씨, 앵글 자체에 문제가 많습니다. 세계 유수의 극단으로 영국 국립극단 같은 곳들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대형 스크린으로 상업화시킨 것은 공연 현장을 찍은 겁니다. 그런데, 며칠 걸려 여러 경로로 찍은 것이든 바로 현장에서 찍은 것이든 잘 찍은 것은 잘 찍은 겁니다. 공연의 실체나 영상 작품의 의도, 안무자의 의중을 제대로 전달하면 일단은 잘 찍은 것이겠지요. 지금 집중 언급되는 건 무대 실황을 영상으로 전달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비평 대상이 되는지 안 되는지 거론되고 있는데, 이와는 별도로 이것이 여러 면에서 가치를 갖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현실적으로 한국 안무가들이나 춤계에서 라이브 스트리밍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춤 기록 영상 작업도 안무가들이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단순 기록 차원을 맴돌지요. 이는 무용인들이 춤과 영상의 관계를 대하는 태도가 협소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영상의 잠재력을 간과하지 않았나 싶지요. 그러던 터에 올해 갑자기 춤 영상이란 걸 해야 할 급박한 상황이 밀어닥친 겁니다. 라이브 스트리밍 작업에서나 댄스 필름에서나 지금까지 안무가 얼마만큼 존중되(었)는지 회의적입니다. 긍정적인 점을 무시하지 않아도 부정적인 점을 간과하면 문제가 누적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요.

- 해외에서 발레 작품 같은 경우는 그동안 영상물로 출시하면서 앵글을 어떻게 잡는다든지 그런 면에 대한 나름대로 노하우는 축적이 되었을 겁니다. 작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촬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도 많이 느껴지고 그러니까 보통 무용가들이 기록용으로 남겨두는 영상들도 무미건조하게 작품의 흐름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했을 경우에는 정말 중요하게 보여야 할 것에는 집중을 못 하고 그냥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봅니다. 또 반대로 어떤 걸 더 흥미 있게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색깔을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영상물 쪽으로 발전시키려면 무대용으로 작품을 올리되 촬영하는 입장에서 어떤 것을 감상자가 더 가깝게 느끼도록 촬영해야 할지를 연구하는 게 우선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 댄스 필름의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는 선에서 참고로 생각해봅니다. 댄스 필름을 지금 현단계에서 과도하게 강조하다 보면 자칫 무용 현장을 왜곡시키는 부작용도 예상됩니다. 안무자나 영상 작가 선에서 이전에 댄스 필름에 관계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해도, 국내에서는 댄스 필름에 전념하는 안무자나 촬영감독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 아닙니까. 이런 상태에서 가령 댄스 필름 촬영감독이나 그 작업을 부각시키다 보면 오히려 공신력 문제를 비롯하여 혹시라도 촬영감독의 입지만 높여서 시중에서 무용 촬영 편집 제작 비용을 전반적으로 오르게 하는 등 현장에 끼칠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 말씀 중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영상 매체 전문가들의 역량에 따라서 그리고 무용가들이 얼마나 준비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퀄리티가 엄청나게 차이 날 수 있고, 결과물이 안무가의 손을 떠나 있다고 하셨잖아요. 라이브 스트리밍의 문제로서 시간 문제를 얘기하고 싶어요. 현장 공연에서는 한 시간을 집중할 수 있는데 언택트 라이브 스트리밍에서는 퀄리티가 어떠하든 좁은 화면에서 평상의 조건으로 봤을 때 우리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20분 내외 같습니다. 이미 하나의 매체를 건너뛰면서 다른 조건들이 조정이 많이 되어야 하고 이미 우리가 관람하는 조건이 바뀌고 있다는 점도 관람하는 쪽에서 지적할 사항이라 봅니다.


거리두기 대책과 춤계의 대처

- 현장 공연을 중계 방송하듯이 하면 스트리밍이나 다른 방식으로 소통이 가능하여 오히려 넓은 의미에서 기회가 늘어날 테지요. 반면에 춤은 연행 장르 중 하나이고 작품이 벌어지는 현장이 일차적인데, 이런 상태로 계속 간다면 관중을 염두에 두지 않을지 모릅니다. 공연 현장이 확대된다지만 기본적으로 연행 장르가 갖는 춤의 매체적 특성, 소통 방식으로서의 현장 그 자체를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지는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앞으로 코로나 사태가 계속되면 극장 공연, 현장 공연이 특히 관중이라는 기본 조건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지 않을지, 그 문제가 우선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춤 영상은 영상 장르에 속하지 춤 자체는 아닐 테지요. 영상 매체가 춤 매체와 결합되어 더 좋은 양태로 춤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는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현장연행 예술 장르인 연극이나 음악연주, 오페라, 뮤지칼, 퍼포먼스, 나아가 온갖 양태의 축전, 의례, 페스티발 등이 공동으로 부닥친 생존과 정체성 문제입니다. 특히 관중과 공동으로 문화복합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마당극이나 거리극, 퍼포먼스, 판의 예술은 자신의 존립 근거조차 위협 받는 상황으로 내몰릴지 모릅니다. 비대면, 사회적 거리 두기가 코로나 상태 극복의 지속적인 대응방식인 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겠지요.

- 올해 국내 공공무용단에서나 민간 단체에서나 새롭게 나타난 현상으로서 온라인을 적극 활용하였지요.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온라인 스트리밍을 계속 내보냈는데, 국립현대무용단이 그만큼 콘텐츠를 갖췄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겁니다. 특히 창설 10주년 행사와 맞물려 비교적 풍성하게 진행할 수 있은 듯합니다. 국립발레단도 영상으로 내보내기에 열심이었지요. 지방에서도 울산시립무용단, 부산국악원은 무관중 실시간 송출로 진행했습니다. 또 MODAFE나 SIDance는 외국팀을 실제 무대작으로 초빙하지 못하고 영상도 여의치 않으면서 국내 단체의 영상 또는 무대 실황으로 진행했습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도 마찬가집니다. 글로벌 시대인데 해외 단체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해 보입니다. 국립현대무용단 이야기를 한다면 온라인 활동이 활발한 덕분에 콘텐츠를 그런대로 내보낼 수 있었다 봅니다.

- 국립현대무용단은 초장에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몸풀이 영상을 내보냈을 때 영상 퀄리티도 낮았고 아이템도 나이브했어요. 얼마간 시간이 흘러서 영상으로 라이브 스트리밍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인 거 같았어요. 국립현대무용단은 새 예술감독 신작을 어쨌든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만들어서 발표한 데 비하여, 국립무용단은 꽤 오랜 시간 준비했는데도 그 공연이 취소되어 좀 의아했습니다.

- 대구시립무용단은 공연보다는 애초에 영상 필름에 집중한다는 계획을 잡고 전 후반기 두 작품 모두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공연 실황을 할 생각은 왜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공공단체로서 책임 있는 자세였는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무용 영상 작업만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대구시립국악단 등 대구의 다른 공공 단체에서 그 기간에 공연한 경우도 있어서 대구시립무용단의 결정이 시립 단체로서 과연 적절한 결정이었는지 살펴볼 점이 있습니다.

- 이해되는 지적으로서, 국립현대무용단은 다만 전례 없는 사태를 맞아 적절한 방법을 탐색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초장에 보였습니다. 국립무용단은 무관중으로라도 기록해서 내보였어야 했는데, 자구책으로서 공연을 살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국립무용단의 신작 공연 취소는 당시 2차 코로나 확산 시기에 50인 이하 집합을 공적으로 금하는 갑작스런 조치에 따른 결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출연 인원과 스탭이 모두 80여명에 이르고 실제 기술적인 면이 따르는 작업이라 제대로 된 공연을 진행하기가 곤란했던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대미문의 초유의 사태에 당면하여 특히 공공 단체들은 사태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을 겁니다. 여기서 올해 사태와 그에 대한 대응을 돌아보면서 전반적으로 공공무용단뿐만 아니라 공공극장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고 앞으로에 대비할 바가 크다고 봅니다. 코로나 시국에서 시민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공공이 역할을 해내고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문화적·예술적 책임과 방역 책임 사이에서 방역 책임에 치우친 선택을 성급히 내리기보다는 신중을 요하는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환기되어야 하겠습니다.

- 대구시립무용단의 11월 온라인 작품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는 대구시립무용단과 대구 MBC가 콜라보 차원에서 만든 거 같아요. 대구 MBC 촬영팀을 통해 전세계로 송출한다고 좀 거창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것이 현장 송출이든 녹화 송출이든 어느 쪽이었던 간에, 실제 조회 수가 500회 미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회 수가 절대적인 건 아니나 참고는 됩니다. 세계를 향한 송출이라지만 글쎄 조회수를 보면 공수표일 가능성이 높지요. 방송사에서 만들었으면 홍보도 많이 따랐을 텐데 왜 그렇게 조회 수가 낮을까 상당히 의아했습니다.

- 대구시립무용단의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는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려는 의지로 단원들이 어디서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뜻은 내비친 반면에, 내용은 극장 안팎을 배경으로 다양하게 행해지는 단원들의 몸짓들만으로 구성되어 한계가 매우 컸었고 일반 시민을 향한 소구력은 짚히지 않았지요. 내용 소재에서도 진취적이지 않았고 코로나 사태를 겪는 시민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도 없었지요. 무용인들만의 세계를 맴도는 인상이 강해서 ‘시립’ 무용단으로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유튜브에서 1차 송출 완료 직후 길어야 1시간도 안 되어 영상이 멈췄습니다. 그후에 유튜브에 옮겨서라도 서비스를 지속했더라면 혹시 조회수가 늘었을 텐데, 왜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의 1회 송출에 그쳤는지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국립현대무용단이 유튜브에서 며칠 동안 반복해 내보낸 것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손질되어야 할 공적 사업과 춤 행사들

- 지난 봄에 〈춤웹진〉에서 2019년도 창작 산실 사업의 문제점을 집중 조명한 바 있지요. 올해 춤계 동향의 하나로 창작 산실 사업은 얼마나 충실히 추진되었는지, 이제 행사가 막을 올렸으니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 창작산실에 선정된 작품은 해를 걸쳐서 공연되는 것이 특징이지요. 단일 작품 공연에 가장 많은 지원금이 책정된 만큼 경쟁도 높고 그만큼 기대도 큽니다. 2020년 초에 선보인 작품들은 기대에 못미쳤지만 2020년12월과 2021년 1월과 2월에 걸쳐 공연할 안무가들 중에는 특히 현대무용 부문에 탄탄한 안무력을 갖춘 무용가들이 포진하고 있어 어느 정도 기대가 됩니다.

-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전체 공연을 네이버TV에서만 무용 영상으로 공개하였지요. 공연 단체는 춤에서 국내 8단체, 해외는 제롬 벨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국내 일반인들의 〈갈라〉 공연 하나 해서 모두 9단체, 연극에서 8단체였습니다. 네이버TV에서 5천원의 유료 관람으로만 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요. 춤과 연극의 17개 단체의 전체 관람 인원수가 3650명이라고 주관 측이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단체당 200명 정도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올해 SPAF의 공공 기금 예산은 9억5천만 원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관객 1인 동원하는 데 공공 기금의 평균 예산이 26만원 정도 소요되었다는 추산이 가능합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다소 신중을 요할지라도 소요 금액에 비해 성과는 저조하지 않나 싶습니다.

- 특히 주관 측은 예술‘경영’지원센터입니다. 춤계의 여러 지원금 행사들의 성과와 비교해서 올해는 심하게 말하면 기가 막히는 결과 아닐까요. 예술경영지원센터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는 이에 대해 어떤 자체 평가를 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춤 분야에서 선정된 올해 참가품들은 신작은 전혀 없이 모두 이전 공연의 재연작들이었습니다. 이 역시 큰 문제점을 안은 선정 결과로 보입니다. 또한 네이버TV에서의 관람을 유료로 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무용 분야는 근본적 전환이 시급합니다.

- 맥락은 다르겠으나, 올해도 대한민국무용대상은 춤계 일각의 행사에 그쳤다는 게 춤계의 중론이고 서울무용제도 갈수록 존재감이 떨어집니다. 두 행사를 두고 그들만의 리그라는 여론은 여전합니다. 한 두 해 사이의 현상이 아니라 이런 지적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두 행사 역시 쇄신이 필요한 행사들로 거듭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 2020년 춤계를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올해는 5 18 광주항쟁 40주년이 되는 해인데 무용계에서는 이와 관련된 작업이 타 장르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두 편의 발레 공연을 보았는데 모두 기대에 못 미친 수준을 보여 실망이 컸습니다. 서울문화재단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지원금 심의과정에서 심의위원으로 부적격자를 선정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개방된 심의위원풀제가 부적격 심의위원 선임으로 이어지고 향후 반복될 소지가 있어 우려가 큽니다.

- 서울과 충남에 캠퍼스를 둔 모 사립대 무용과 교수와 대전에 소재한 정부출연기관인 모 연구소의 책임연구원인 모씨를 상대로 ‘전통 및 대중무용의 체험학습 창작을 위한 퍼포먼스 분석 및 생성기술 개발’ 연구와 관련 연구기획 아이디어와 특허를 도용당했다는 모 박사의 주장이 청와대 청원으로 올라왔습니다. 연구비로 56억이나 집행된 큰 프로젝트였는데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교수들이 제자들의 연구논문을 가로채는 사례가 문제가 되는 것과 함께 연구 윤리 문제로 지탄 받아야 할 사안입니다. 철저한 조사로 춤계의 부정을 도려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춤의 근본

- 코로나 재난으로 춤계에서 무관중, 비대면, 팬데믹, 영상, 스트리밍, 송출 같은 언어들이 일상화되어 변화를 절감합니다. 앞으로 더 큰 변화가 예견되기도 하지요. 변화가 어디까지 이루어질지 예측을 불허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재난이 초래하는 그때 그때 문제에 대한 대응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라 해도, 근본적 근원적 대책이 범세계적으로 요청되고 있지 않습니까. 근본적 대책의 기점이 어디일지는 코로나 재난의 원인을 파악하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요. 신자유주의, 산업 자본주의, 농축산산업, 기후 위기 등에 대한 대처가 자주 제기되어왔습니다. 문명의 흐름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대책은 춤계 등 사회의 특정 분야나 계층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들이어서 국가나 사회 단위로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입니다. 그래도 현시점에서는 춤계 나름의 근본적, 근원적 대책을 자유로이 소통하며 열어가는 기회가 자주 있어야 하겠습니다.

- 그동안 춤판, 춤 공연의 근간을 이루었던 사람, 몸, 판, 극장, 무대, 의상, 조명, 반주 같은 요소들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개념이 앞으로 동요할 것입니다. 디지털 문명, 디지털 기법이 그런 변화를 부르고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결정적인 계기가 점점 더 가시화하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 춤공연에서 몸과 극장의 속성이 어떻게 유지될지, 그럼으로써 춤(공연)의 개념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할지 비평에서나 미학에서 미묘한 과제들이 대두하겠지요.

- 코로나 사태 속의 현시점에서 춤이 공연, 연행으로서 본질적인 자기 매체성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에 대한 우려와 공포가 당연히 있을 겁니다. 공포스럽기도 하고 무용가들이 패닉에 빠진 것도 사실 그런 겁니다. 춤춘다는 건 함께 추고 함께 한다는 개념을 포함한 것이었는데 이제 함께 추는 것도 못 하고, 춘 걸 보여서 관객과 공감했는데 그것도 못 하게 되고, 여태까지 해왔던 걸 다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 오늘의 불안과 문제의 초점입니다. 특히 올해는 임시적 상황이라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년 이후 상황 전개에 따라 새 고민들이 생겨나리라 봅니다. 채널이 정리된다든지 영상 매체 퀄리티가 높아진다든지 아니면 영상과 하는 방법 외에 또 다른 방식이라든지 창작에서도 또 다른 방식이 생길 수 있겠고 더 많은 실험과 구체적인 시도가 예상됩니다. 공연의 가장 핵심적인 특수성, 함께 만나고 그 현장에서 우리가 일회적으로 느낄 수 있고 공유하는 가치들이 위협을 받는 것은 맞지요. 개인적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 내면에 있는 춤에 대한 경험과 습성과 욕구를 과연 어떤 식으로 표출하고 어떤 식으로 문화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춤문화에서 충족되어오던 것,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돌아보도록 하고, 그래서 절대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이런 부분이 갈무리될 거 같습니다. 그렇게 갈무리된 내용이 욕구로 정비되어서 문화적 욕구로 터져 나올 거 같거든요.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욕구는 잠시 포기되는 듯하다가 다른 길을 뚫죠. 함께 하고 싶다, 만나고 싶다, 내 춤을 보여주고 싶다, 춤을 보고 싶다, 춤추고 싶다, 이런 욕구들이 어떤 방식을 택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순리를 따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 몸과 춤을 동일시해 본다면 코로나 사태가 몸에 관한 문제들, 몸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다시 하게끔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전염 질환의 면에서 나 홀로 코로나 사태를 벗어났다고 해봐야 벗어난 게 아닌, 공동의 몸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공동의 삶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으로 문제를 확대해서 사는 방식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도록 만들지요.

- 펜데믹 상황 속에서 어느 때보다 몸과 건강에 대해 다들 고민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앞에서 춤의 공공성이 거론되었는데요, 그와 유사하게 저는 ‘몸의 공동성’, 그러니까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내 몸만의 것만이 아닌 우리가 몸으로 함께 살고 있었구나를 심하게 느끼기를 경험했습니다. 각자의 몸이 개인의 결정권 아래 있다는 흐름이 강하다가 코로나 상황으로 우리가 다 몸으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며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몸의 공동성’ 감각을 다시 일깨워야 하고 그걸 강제받는 상황이 된 거죠. 몸의 공동성 감각은 실은 몸의 예술을 하는 우리들에겐 상당히 익숙하죠. 몸의 공동성, 춤은 기본적으로 거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오히려 무용인들은 몸의 공동체 면에서 잘 할 수 있는 주제들이 있잖아요. 이 상황에서 과연 이 시대적인 분위기와 요청에 어떻게 응답할 것이냐는 결국 무용예술이 가진 능력과 창조적 생각들로써 상황을 타개해야 하겠습니다.

- 이런 사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몸이 창의력을 발휘하여 선두에 나설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 지금 상황에서 이게 무슨 사태인지 가늠하려면 이런 인식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인식에 도달해서 예술가들이 할 일은 그런 인식에 대한 예술적인 응답을 하는 겁니다. 무용예술의 공연이라는 핵심은 타격을 받아도 이 시대 속에서 무용예술이 살아남는 것은 또 그런 대응의 자세에 좌우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형식이 위태롭고 위협받는 상황은 한 부분으로 작용하고 오히려 전면적으로 이 시대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예술가로서 내가 하루하루를 살 것이냐에 대한 응답은 오히려 거기에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거기에 생존의 의미가 있고 내가 예술을 하고 있다는 의미가 그렇게 형성되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 우리가 관습적인 고민에 빠질 게 아니라 새 상황으로 본다면 거기서 존재의 의의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요.

- 만남 그 자체가 차단되는, 거리두기라는 이름 속에서 춤 장르의 특성 자체를 잃게 되고 더 원천적으로는 예술의 근원이었던 굿판 그 자체가 위협을 받는 거 아닙니까. 문명사적 변화와 더불어 가는 방식이 계속 변해오고 있고, 이제는 큰 변화의 물결을 앞에 두게 된 겁니다.

- 굿판을 열 수 있는 구조는 완전히 흔들려버렸지만, 굿판을 가져야 할 조건은 더 강렬해졌지요. 문제에 당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고 그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닐 때 더더욱 함께 해결하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게 굿이라면, 오히려 굿을 향하게 되는 조건들은 더 강렬해졌고 그전까지 굿이 만들어지는 조건은 붕괴되어버린 겁니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이 또 다른 세기말적인 이 상황을 뚫고 나가는 새로운 형식을 도출할 거 같아요. 지금처럼 여러 테크놀로지 도움도 받을 거고 혹은 표현의 강렬함이나 내용의 정밀함을 동반하며 에너지가 그런 방향으로 쏟아지는 등으로 오히려 기대됩니다. 문화적 욕구로 따진다면 그 욕구가 더 고조되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2021. 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