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대담_ 김기인의 춤세계 소개서 2권 출간
21세기에 춤의 근원을 다시 생각하도록 하다
  • 일    시
    2020년 10월 8일(목) 오후 2시
  • 장    소
    아카데미아인(서울 동교동)
채희완 – 김기인춤문화재단




채희완 춤비평가, 김기선 김기인춤문화재단 대표




채희완: 지난 9월 초 무용가 고 김기인 선생(1953~2010)을 주제로 한 책 2권을 김기인춤문화재단이 발간하셨더군요. 개인적으로 저는 80년대부터 김기인 선생 춤을 보았고 몇 번 대화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나름 인상적인 춤꾼이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10년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나 안타까웠지요. 이번에 책들이 발간되어 다행히 위안을 받는 한편으로, 한 무용인의 춤과 삶을 충실하게 자료화하는 노력이 돋보이는군요. 김기인 선생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는 계기도 될 듯하고 또 춤에 관해 여러 생각을 진지하게 부추기는 점도 있어요. 장기간 인터뷰를 기획한 것을 바탕으로 책을 발간하느라 애쓴 재단 측의 노력도 강조하고 싶어요. 참고로, 〈춤웹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자리에서 대담을 나누는 김기선님은 김기인님의 언니로서 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으시지요.

김기선: 네, 재단의 대표로서 동생의 활동이나 춤에 관한 책을 낼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었습니다. 춤계에서 개성적인 춤으로 기억되는 김기인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타계하자 그의 춤 세계를 정리해서 알려볼 것을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권유를 받았습니다. 생전에 작품 활동에 주력한 무용가의 세계를 정리하자니 사실 막연했습니다. 팸플릿 자료를 나열하는 자료집이라면 우선 구체성부터 떨어지고요. 그래서 고인에게서 그 춤을 배웠거나 함께 작업을 한 분들의 육성을 청취해서 좀 생생하게 자료화하는 길을 택했지요. 김채현 교수와 상의해서 포럼 형식으로 증언과 자료를 모으는 작업을 2013년 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 작업은 6년 넘게 무려 35명의 사람들로부터 육성을 듣는 꽤 복잡한 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막상 책으로 펴내자니 사실 신중해야 했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 문집 같은 책으로 고인에게 누를 끼치면 어쩌나 염려되었기에, 무엇보다 고인의 춤과 인간 됨됨이를 사실에 충실하게 그리고 맥락을 갖추어 소개함으로써 춤계에 소중한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취지로 이번에 발간하였는데, 이렇게 의의를 짚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채현 엮음 / 김기인 춤문화재단 발간 / 춤북넷 출판 / 46배판 / 양장본 / 2020. 09.




김채현 엮음 / 김기인 춤문화재단 발간 / 춤북넷 출판 / 국판 / 2020. 09.




채희완: 저는 2012년 4월에 한국춤비평가협회가 대구에서 가진 신춘 포럼 시기에 김기인춤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그때, 미학을 전공하셨고 대구에 거주하시던 장미진님의 소개로 김기선님을 함께 만난 적이 있지요. 당시에 재단이 2011년 8월에 설립되었다고 하여 선생님과 재단의 지향이나 운영 방식 등에 대해 짧게나마 의견을 나누었었지요. 김기선님과 저는 그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김기선: 네, 기억납니다. 2012년 제가 대구 포럼 행사에서 채 선생님을 만날 당시 장미진님은 재단의 이사였습니다. 그 훨씬 전에 동생하고 인사동에서 채 선생님을 만나뵌 적이 있는데, 제가 98년에 귀국한 후였지요. 그런데 인사동에서 만났던 그 자리에서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기인이가 제 동생이라도 제가 다 아는 것은 아닐 텐데, 그 자리에서 채 선생님과 상당한 고담(高談)을 나누는 것을 보고 동생의 새로운 면을 감지했었지요. 해외에서 오래 생활하다 귀국하여 동생의 국내 활동에도 밝지 않았던 저로선 동생 김기인의 새로운 발견이라 할까요. 그런 점을 그날 대화에서 감지했더랬습니다. 동생이 전공했다는 서양춤이나 그런 주류 계통의 춤에 관한 대화가 아니라서 생소했으면서도, 마치 도인들의 대화 같은 분위기였었지요. 그래서 채 선생님께 관심을 두고 또 선생님의 글들도 주의 깊게 읽어온 편입니다.

채희완: 제가 언젠가 김기인 선생과 대화 끝에 이렇게 물어봤어요, 혹시 〈동래학춤〉을 본 적이 있느냐?

김기선: 인사동 그 대화에서도 〈동래학춤〉이나 신선의 춤 같은 것을 소재로 대화가 이어졌었지요.

채희완: 90년 무렵 한 시간쯤 진행되는 김기인의 독무를 보고 나서 저는 왜 저렇게 몸을 던지듯이 힘들고 어렵게 고생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마음부터 들었어요. 겉으로는 격하지 않은데, 기의 흐름이 나오는 것보다 속의 뜨거운 열정이, 그야말로 피부름이랄까 이런 게 스며나오는 듯했어요. 혈액이 몸 전체를 요동치듯이 바깥으로 나오는 듯한 기세였어요. 당시 한 시간 이상 솔로를 춘 예로는 그 몇 해 전 이애주 선생의 〈바람맞이〉 이후 처음이었지요.

김기선: 저는 당시 해외에 있었는데, 이번에 발간한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생이 1990년에 문예회관(지금의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인 독무 발표회로 두 작품 〈든〉 〈무〉를 올렸다고 합니다. 〈든〉의 음악은 독일사람의 것이고, 〈무〉는 이생강님의 대금산조였습니다. 제자였던 이철진님도 한 시간이 넘는 그 독무를 처음 보고 무척 놀랐다는 소감을 이번에 발간된 〈고독한 순례자 김기인〉 속의 자기 글에서 밝혔더군요. 그 외 사람들이 김기인의 독무를 여러 모로 강조하는 것을 이번의 두 책에서 확인할 수 있지요.

채희완: 그 공연을 보고 난 지 오래지 않아서 저는 김기인 선생과 얘기를 나누었지요. 김기인 선생의 속과 바깥 사이의 접속 지점이 춤에 있을 법한데, 그 대목이 어딘지를 물어보았지요. 저는 그 공연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어요. 보통 신기(神氣)라고 할까, 신기라는 건 내면 속의 그 무엇과 외부의 그 무엇이 서로 충돌하고 뒤섞여 분출, 폭발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거기에는 분명 떨림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게 감지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고 물은 기억이 납니다.

김기선: 무어라 대답을 하던지요?

채희완: 외부적 힘이라기보다 내부적인 것을 표출해내는 것을 주로 했기 때문에 아마 그게 바깥으로까지 흘러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고 본인이 얘기했어요. 그러면 출수록 더 어려워지고 춤이 괴롭지 않겠는가, 괴로운, 고통스러운 춤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했지요. 오래된 쿠르트 작스의 저서 〈세계무용사〉(지금부터 100년 전에 발간된 책이지요)에는 여러 종족 중에 춤을 잘 추는 종족도 많지만 극히 드물게는 춤을 못 추거나 춤을 싫어하거나 안 추려고 하는 종족의 사례들이 나와요. 거의 발작에 가까운, 억지로 추려니까 견딜 수 없는 몸의 반응들이 나오죠. 춤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생짜 몸부림 비슷한 격렬한 떨림과 고통스러운 근육의 경련 같은 것이 나온다고 해요. 신이 나서 추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내면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조절하면서 스스로 에너지가 충만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김기선: 그런 게 만날 때 예술이 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몸부림에 불과하겠지요.




채희완 춤비평가




채희완: 반어법적으로 이야기하면 춤을 안 추려고 하는 춤, 도저히 못 추겠다고 하는 그런 춤을 추는 것하고 김기인 선생이 추구하는 춤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부와 내부가 서로 얽히면 새로운 그 무엇이 딴 세계로 넘어가는 접점에서 떨림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텐데 저로선 그런 게 감지되지 않았어요. 절제라기보다는, 내부의 속에서 유통이 원활하고 에너지가 여러 곳에서 뭉쳤다가 분산됐다가 흘러갔다가 폭발적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 억제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었지요. 김기인 선생이 앞으로도 계속 춤을 춘다면 아마 이런 춤이지 않을까고 예측된다고 하면서 〈동래학춤〉 보유자가 70년대에 춘 것을 기록한 비디오를 보여드리겠다 했거든요. 3분 정도 길이의 그 비디오를 김기인님 학교로 보냈었지요.

김기선: 네, 그날 인사동 대화에서도 〈동래학춤〉 얘기를 하셨던 거 같아요.

채희완: 저는 탈춤을 할 초창기에 대학 탈춤반원들과 부산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동래학춤〉을 보았습니다. 같이 본 사람 모두 충격을 받았어요. 탈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근사하다고만 얘기할 수도 없고 멋있다고만 얘기할 수도 없는 그 춤을 보고 탈춤을 그만하고 저걸 먼저 하자고 말한 적도 있었어요.(웃음) 〈동래학춤〉을 추신 그 분은 결코 기춤을 추신 게 아니었습니다. 저로서는 아마도 김기인 선생이 추구하는 춤의 거의 마지막 단계의 춤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대화를 나누었지요.

김기선: 네, 인사동의 만남에서 동생이 그런 점에 대해 맞장구치며 대화를 이어가는 게 흥미로웠죠. 지금 대화에서 내면적인 것의 표출을 이야기하셨는데, 관심을 사는 지적으로 보입니다.

채희완: 신기가 돌출되는 결정적인 표현의 한 양태가 어깨춤 같은 거죠. 내부에서 바깥과 충돌이 일어나 그렇게 드러나죠. 다른 나라나 딴 시대에도 그런 것이 많이 있었을 거예요, 무당춤만이 그런 게 아니라. 그야말로 지독하게 춤이 아닌 춤, 지독하게 못 추는 춤과 그야말로 춤의 궁극적인 것은 큰 차이가 없지 않겠는가. 결국은 춤의 궁극을 춤춘다는 것인데, 지금 김기인님의 단계는 그런 궁극이 아니라고 본다는 지적을 한 기억이 나요.

김기선: 그 춤에 신명이 없다고 보면 될까요?

채희완: 외부 세계의 수많은 에너지와 내부에서 일으킨 에너지가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드러날 듯 안 드러날 듯했지요. 그런 단계를 저는 계속 기다리고 봤는데 그 점이 모호하다는 느낌이었지요.

김기선: 김기인의 몸은 완벽하게 조련된 악기에 비유될 것인데, 그걸 갖고 자기의 내면을 표출하는 반면에 어떤 초월적인 것, 신명이 와서 부딪히는 어떤 것이 부족했던 것으로 이해되는군요.

채희완: 보통 노경(老境)의 세계는 유의 세계에서 무의 세계로 넘어가는 그런 단계이고, 젊은이의 춤은 없음에서 있음을 자꾸 만들어나가는 건데 서로의 방향이 역행이죠. 그래서 노경의 마지막은 정중동을 넘어서서 춤의 없음에 해당하죠. 없음으로 있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춤이라는 건데요. 움직임의 없음, 춤추지 않은, 못추는 춤의 의미가 아니라 춤이라 할 수 없는 춤으로 가는 것이 궁극적인 게 아니겠는가. 당시에 아직 40대 중반 즈음이니까 한창 때였겠죠. 특히 한국춤에서는 노인네가 돼야 경지에 다다르죠. 결국 김기인 선생도 그렇게 가지 않겠는가 추측했어요.

김기선: 선생님의 말씀에 비추면 그런 경지는 춤 예술의 전반적 체계를 완전히 무화(無化)하는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춤의 단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요?

채희완: 노경의 세계에 다다르려면 연륜과 함께 숱한 곡절을 겪어야 하죠. 방금 소개한 〈동래학춤〉 추신 김희영이라는 분도 동래 지역 태생이고 어릴 때부터 계속 그 춤을 췄던 분이에요. 기 수련 하듯 춤 수련이라는 의미와 달리 나름 계속 춰왔기 때문에 그런 감이 나온 것인데 그분의 춤 명칭을 학춤이라 하겠지만 저는 학이 독수리가 된, 독수리가 학이 된 차라리 독수리 솔개춤이라 하는 게 더 알맞지 않겠느냐는 거죠. 그분은 굉장한 한량이었고 결핵을 앓기도 하고 일반 사람과 달리 한량을 넘어서서 완전히 출가한 분 같았어요. 그런데 춤 한 번 췄다 하면 모두를 꼼짝 없이 사로잡았죠. 그런 경지는 정말 잘 춘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지극한 춤인 거죠. 아마 노력 끝에 성공적으로 실패한 춤, 춤이 아닌 것으로 간 셈이죠. 그런데 그분은 장단을 맞춰서 췄죠. 소리 입력이 안 된 그 비디오여서 소리는 안 들렸지만 물론 장단 맞춰서 췄죠. 장단을 타고 특히 춤추기 좋은 남도굿거리 장단에 덧배기 가락으로 춘 것인데, 발 디딤새가 굵은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나는 이미 지상으로부터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김기인 선생은 특히 하체의 디딤이나 여러 동작들이 그런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발레의 천상지향적인 의미와 달리 그런 부분과 맞닥뜨리는 지점들, 하늘과 땅이 만난 지점, 하늘이자 땅인, 세상살이이자 세상을 벗어나 있는 그런 경계 지점에서 하늘적인 것에 좀 더 가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래서 춤의 메시지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었지요. 그때도 스스로춤이라 소개한 팸플릿을 유심히 읽었는데, 그것을 춘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면서 그건 지향점이라 하더군요.

김기선: 그걸 춘 단계에서는 개념이 선행한 것이란 뜻이겠죠.

채희완: 네, 그런데 개념을 그대로 춘 건 아니죠. 그런 춤을 설명하고 개념적으로 파악하려니까 쓰게 된 것이겠죠. 동양적인 어떤 개념을 얘기할 때 또 다른 개념을 만들어서 얘기하는데, 사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순환의 굴레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개념을 가지고 하는 건 중요한데 개념을 버린다는 것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개념을 세우면 어떻겠느냐. 공연 안내 자료에 스스로춤이 사실 뭐라고 명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불가지적인 어떤 것처럼 소개돼 있어서 그 춤을 이해하기가 오히려 어려운 점이 있다는 생각도 밝혔지요. 그리고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 출간된 책에서 다른 분들 글을 보니까 조금은 감성적인, 감각적인 또는 관조적인 게 개입돼 있으면 보는 사람으로서 춤을 받아들이는데 훨씬 더 용이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모두들 충격적이고 그런 경지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드는 듯한 소감들을 많이 밝혔었는데, 춤이 구체적인 실체로, 그리고 다이내믹한 이미지로 와닿았으면 한다는 뉘앙스들이겠지요. 전체를 얘기한다면 이성적인 것, 영성적인 것하고,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것하고가 함께 빠져들게끔 해주는 계기들이 포함될 수 있었을 텐테 그런 감각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은 건 아닌가 싶어요. 전반적으로 구체적 실상으로 다가오지 않은 편이었는데, 말하자면 동양적 형이상학에 해당되는 실체감, 이런 것에 대해 아쉬움을 얘기했었지요. 작고하기 2~3년 전 동안의 작품을 접하질 못해서 단정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부분을 학춤은 딱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잡히는 실체감을 느끼게 해주는 점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것이 보는 사람에게 큰 떨림으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김기인 선생 춤을 본 사람이 충격적이었다고 하는데, 그 발언들에서 구체적 내용은 애매합니다. 충격을 받았다는 거지 어떤 충격인지 충격의 실체는 모호해서 말하자면 내가 받은 충격의 내용을 어느 정도 실체감 있게 서술하는 게 필요할 것입니다.
 당시 제가 한국춤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날 대화에서 하보경 선생님이라고 밀양 분을 소개했었지요. 〈밀양백중놀이〉의 보유자로 범부춤, 양반춤을 그야말로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추었던 분이지요. 정병호 선생님이 범부춤, 일반 범부들이 춘 춤이다 해서 그런 명칭을 붙였는데 원래 이름으로서 저는 뻘춤이라고 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마 원래 이름이 뻘춤 그랬을 거예요. 여쭤보진 못했지만 낮춤의 말로서가 아니라 하보경 선생은 본인 스스로 벌판의 춤이라 하여 뻘춤을 춘다고 하셨고, 거기에 대응되는 것이 양반춤이에요. 양반춤은 갓 쓰고 부채 들 때도 있고 안 들 때도 있고 두루마기 입고 갖춰 입고 추는 춤이고, 뻘춤은 민복(民服)을 입고 추는 춤이지요. 대개 일반 평민 이하, 일반 사람들이 절로 신나서 마구잡이로 추는데 그게 기방에서 여러 차례 놀았던 것과 다듬어져 선생님에게서 나름의 춤세계가 이뤄졌어요. 그분은 춤추면 만사를 잊은, 세상사와는 상관없어 보이는데 결코 형이상학적인 춤은 아니었어요. 지독하게 형이하학적인 마구잡이 춤인데 기품이 있다기보다 거기에 뿜어나오는 그 무엇이 참으로 춤 본연의 것을 표출한다는 느낌을 여지없이 주었거든요. 그런데 안 좋아하는 사람은 굉장히 안 좋아해요. 어떻게 저런 허접스러운 것이 예술로서 정제된 예술의 경지에 드는 춤이냐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분의 춤이야말로 춤임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춤이라 보았고, 방식은 다르지만 김기인 선생이 끝내 추구하고자 하는 춤과 서로 통할 것으로 보았지요. 가는 길은 달라도 정상에 같이 올라가는 그런 게 아닌가 싶어 당시 그 춤을 권유했었어요. 그야말로 세상에 널린, 평범한 사람들의 팔 하나만 들어도 춤이 되고마는 민속춤, 노는 춤을 고려해보는 게 어떻겠는가 했지요. 김기인 선생이 추구하려는 기춤과 스스로춤, 다시 말해서 몸의 도를 통해 삶의 길로 삶의 궁극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춤하고 삶에 파묻혀 사는 데서 나오는 그런 사람들의 자연스럽고 자유스럽고 거칠 게 없는 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점에 대해 김기인 선생 쪽에서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언하였지요.

김기선: 하보경 같은 분들은 춤의 전통 속에서 자기와 하나가 된 분들이지요?

채희완: 그런 면이 있죠. 그분들 나름대로 동네에서 추는 춤인데 또 어떤 부분은 기방에서 춘 예인춤이기도 했지요.




김기선 김기인춤문화재단 대표




김기선: 이분들의 춤도 늘 추던 춤이었고, 늘상 물들어 있던 상태에서 나온 춤이겠지요. 어떤 분은 우리 안에 이미 춤이 내재돼 있는데 잠자고 있을 뿐이며, 관념에 의해 위축돼 있어 춤이 나오지 않으므로, 이것이 해방되면 춤이 나온다고 보는 분도 있지요. 그분은 우리는 우주의 씨앗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주와 하나가 됐을 때 그것이 몸을 통해서 표현돼나오는 것이고, 연습된 춤이 아니에요. 춤의 전통이라든지 이런 거에 물들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일반인인 거죠. 그런 춤과 뻘춤은 어떻게 연관될까요.

채희완: 옆에서 인정하길 꺼려했지만 뻘춤을 하는 당사자들은 긍지가 대단하셨어요. 재작년인가 홍신자 선생이 예술의전당에서 솔로로 1시간 가까이 췄어요. 옴니버스 스타일로 했는데 5~6장 정도로 진행된 춤이었지요. 저는 김기인 선생이 홍신자 선생과 생각이나 방향에서 통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김기선: 네, 접점이 있죠.

채희완: 그분이 나이가 여든 가까이 돼서 했던 솔로였는데, 그 솔로를 보신 어느 음악평론하시는 원로 분이 홍신자 선생 그 솔로를 보고 춤에 희로애락이 다 들어가 있네요 했어요. 그 소감은 저로서 충격이었어요. 홍신자 선생 춤에서 희로애락, 정서적 표현, 정감 어린 것, 이런 건 사실 보기 어려워서 기대할 수 없다고 여겨왔었는데 저도 그 원로 분과 동감이었거든요. 이분이 나이가 드시더니 인생사에서 회한 가까운 걸 느끼셨는지 정서적인 분위기가 몸에 아주 많이 배어나오더군요. 그런데 슬픔의 춤은 아니었어요. 동작에서 그런 느낌을 던져주었던 거죠. 그래서 김기인 선생도 계속 춤 작업을 했으면 이전에 배제했을 것이 살아났을 것이다 싶기도 하죠. 그런 기대를 했었는데, 공연들을 처음부터 차곡차곡 자세히 잘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해 아쉬움이 크군요. 그런데 김기인 선생 춤을 처음 봤을 때 마리 뷔그만과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마사 그레이엄 쪽에 가까운 이화여대의 영향을 받았을 텐데도 독일 표현주의적인 그런 것을 여지없이 보여줬고 또 포착됐어요. 80년대 초, 젊었을 때인 27~8살 즈음에 그 움직임 흐름이 굉장히 강렬했거든요. 이대에서 수련했다는데, 그것과는 별도로 그런 표현주의 춤을 어떻게 따로 접했는가 하는 그런 인상도 받았지요.

김기선: 그럴 일은 없었을 텐데요.

채희완: 〈김기인과 그 시대〉에서 자료를 보니까, 80년 5월 공간사랑에서 한 개인발표회로 한국 컨템퍼러리무용단에서 상을 받았지요. 그 무렵입니다. 저는 김기인의 아주 강렬한 몸짓을 봤어요. 다듬어졌다 아니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던져주는 메시지 이전에 움직임의 벡타(vector)성이랄까요. 워낙 가까운 데서 했어요. 일반적으로 압도감은 너무 가까운 데서는 오히려 못 느끼고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데 아주 가까이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죠. 그때 보통 우리 춤꾼들에게서 잘 보이지 않은 꺾음새가 독특했고 인상 깊었어요.

김기선: 한동안 동생이 시립가무단에 있을 때였는지 모르겠는데 여군(女軍)이 되겠다고 난리를 펴서 주위에서 말린 적이 있어요. 아마 대학 졸업하고 난 후의 일입니다. 뭔가 차오르는 에너지가 있었던 거 같아요. 몇해 그랬어요. 결국은 안 갔지만 여군 장교가 되겠다고 했어요.

채희완: 〈김기인과 그 시대〉를 보니까, 김기인 선생과 같은 교수실을 사용한 동료 교수 중 박숙자 선생이 나와요. 저는 이분에게 봉산탈춤을 배운 적 있어요. 이분들이 명성여고 2~3년 때이지요. 제가 대학 탈춤반일 때 고등학생인 이분들한테서 탈춤을 배웠어요. 우리한테 기본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거든요. 이분들은 탈춤과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여고생인데 아주 강렬했어요. 그때 여고생인데 키도 컸어요. 우리보다 1~2년 먼저 배웠기 때문에 초짜인 우리한테 가르쳐준 거죠. 보유자분들이 안 계실 떄 배운 겁니다. 박숙자 선생 배역은 취발이였어요. 노장춤은 딴 여고생이 했고 그분도 아주 잘 추었고, 모두 여고생인데 기가 막히게 했어요. 그 한참 후 김기인 선생과 학교(서울예전)에서 같은 방을 쓴다는 얘기를 누차 들어서 박숙자 선생을 한 번 만나야지 했었는데 그냥 40년 넘게 흘렀네요. 두 분이 같이 춘 무대도 있다는 것이어서 더욱 아쉬웠어요.

김기선: 동생도 봉산탈춤을 했어요. 동생이 고등학생일 때인지 대학생일 때인지 애매한데, 74년 이전에 저도 집에서 동생한테 배웠습니다. 집에서 “낙양동천 이화정” 불림도 하고, 저도 엄청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춤하고 현대무용하고 어우러져서 특이한 동작이 나온 게 아닌가 그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이화여대에서 현대무용 하는 사람들이 교과목으로 탈춤을 하진 않았을 거잖아요.

채희완: 당시 대학 때 탈춤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2년도에 이대 문리대 연극반에서 탈춤 교습이 있었고 73년부터 동아리가 생겼어요. 72년도는 레퍼토리 식으로 해서 봉산탈춤을 그 동아리와 깊이 관계했는데 거기서 저는 김기인 선생을 본 적은 없었지요.

김기선: 김기인의 춤과도 연관이 있는데, 동작 아니면 체조, 몸놀림이 어떨 때 춤이 되는가. 어떤 건 춤이고 어떤 건 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채희완: 무술 동작에 장단을 덧붙이면, 율동성을 넣으면 춤이 되죠. 동작은 똑같으나 장단을 타면 춤이 되는데, 그것이 예술이다 아니다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무술과 춤은 어떻게 다른가 할 때 무술도 장단을 타거든요. 호흡을 조정하면서 하니까요. 장단이 호흡이지요. 무술 동작에 장단이 없다 할 순 없는데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동작의 리듬감에는 표면적인 리듬감도 있지만, 내재율 같은 것도 있잖아요, 율동성을 얘기하듯이. 무술에서도 내재율에 해당하는 호흡 장단을 타기 마련인데 그래도 무술과 춤 사이에 경계가 있다고 하지요. 무술과 무술적 동작의 춤은 다르지요. 특히 택견과 같은 한국 무술의 기본은 대삼소삼입니다. 택견도 슬로모션으로 보면 춤 동작이에요. 장단을 타고, 동작의 힘을 넣고 빼고 하는 수렴과 확산이 아주 분명하게 돼 있으니까요. 무술인데 거기에 굴곡을 조금만 넣으면 이미 단순 동작이 아니라 율동적인 동작이 되면서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거죠. 그럴 때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는데, 뭔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 표현을 얻지 못한 상태의 것은 예술 이전의 것 또는 무예술, 비예술일 것이고, 그렇다고 반예술은 아니지요. 반예술도 예술의 한 국면이니까요.

김기선: 네, 무술 동작이 표현하거나 말을 건네는 것은 아니겠지요.

채희완: 무술은 전달, 그야말로 보는 사람과의 접함 지점을 염두에 두지 않죠. 그래서 독방에서 혼자 춤추는 건 예술이라고 하지 않죠.

김기선: 하나님 같은 절대자 앞에서 추는 독백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전에 한상근 씨와 얘기하면서 꽂힌 말이 있습니다. 2002년 김기인의 〈결결如如〉 공연이 있을 때 이분을 봤어요. 김기인의 춤에 관해서 얘기하는 부분이 깊이 있게 다가왔어요. 참된 춤꾼은 몸이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연결된다는 겁니다. 허리가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이지요. 무용가 중에서도 그렇게 연결된 사람이 드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상체와 하체가 이어진 사람은 서 있기만 해도 춤이 된다는 겁니다. 학춤이나 하보경 같은 분들이 팔 하나만 들어도 춤이 되는 것은 위아래가 연결돼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채희완: 덧붙여 80년대 목판화가로 엄청난 주목을 받다가 일찍 타계한 오윤(吳潤) 화백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분 목판화 그림을 보면, 물론 춤을 형상 잡아서 한 것도 있지만, 보는 사람마다 기를 느낀다, 기가 통한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기춤에 해당하는 기그림은 아니지요. 물론 좀 노골적으로 기가 번져 나오는 듯한 그림도 있어요. 봉산탈춤에서 목중춤, 여덟 명의 도깨비 춤인데 몸 바깥에 머리 위로 뽀글뽀글 오르는 선들을 그어났어요. 노골적으로 기 운행의 방향까지 표현한 듯해요. 인체 동작을 그려놓은, 인체에 모양을 그려놓은 그림은 기혈이 움직이는 통로를 그린 듯하지요. 보면 허벅지나 종아리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독특한 데생 방식으로 표현했어요. 면으로, 선으로 그렸는데 단순히 근육을 그리거나 살이나 뼈를 그려놓은 게 아니라 그 무언가의 흐름이 유동하는 듯한 힘, 에너지를 종아리에다 박아놓은 듯하죠. 인터넷에서 이미지 자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김기선: 쟈코메티도 그래요. 기운이 응축되어 몸으로 표출되고, 그렇게 몸으로 응축된 기운이 몸 바깥으로 표출되는 모습이 보이지요.

채희완: 오윤 선생은 거의 도인처럼 심취했던 거죠. 목판화에는 테두리가 있잖아요. 판소리에서 부채로 야 이놈! 하는 대목이라고 하면 부채 끝에 그 기운이 느껴져요. 그림에서 부채를 그려놓았는데 그림 한 쪽 테두리가 뚫려있어요. 그래서 김기인 선생이 만약에 기의 흐름, 충만된 에너지의 물결침이 몸 사지에서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것에 해당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오윤 선생의 허벅지나 종아리, 팔뚝,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표현이지 않았겠느냐 합니다. 오윤 선생은 표현의 실체를 그런 모양으로 얻어낸 거죠. 오윤 선생은 86년에 타계하였는데, 김기인 선생이 그분하고 만났더라면 통하는 게 많이 있었을 것 아닌가 싶지요.

김기선: 그렇겠군요.

채희완: 김기인님과 비슷한 경향을 가진 작가분들이 있었고, 그분들과 교류를 가졌더라면 더 깊은 표현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 있죠. 오윤 선생도 리얼리즘에 가까운 현실주의에 가까운 성향의 작가로서 몸의 기에 해당하는 작업을 많이 했지요.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작업을 했더라면 아마 한국적 웃음의 세계 같은 차원으로 갔을지 모릅니다. 미학자 고유섭 선생의 언표대로 한국의 민예를 두고, ‘아해 같은 어른’의 세계를 말하지요. 그런 노경 다음에는 못 추는 춤을 추는 겁니다. 못 부르는 노래를, 지극한 경지에 있는 사람은 못 부르는 노래, 못 추는 춤, 못 그리는 그림을 그리듯이 그런대로 더 나아가지 않았을까 싶은 거죠 보통 그걸 고졸(古拙)이라 하잖아요. 예스러운, 치졸한, 고목에 구멍이 뚫려있고 거칠거칠한, 꾸미지 않고, 원초의 세계로 돌아와 있는 것처럼요. 그렇다고 보는 사람이 편하기만 한 건 아니죠. 거기서 안온한 충격적 평화감, 그렇다면 온유하다는 것은 아니겠고 질박한 단계를 넘어섰고 가장 최후의 경지로 도달한 그 너머를 그림이나 문학에서는 고졸이라고 표현한다지요? 춤에서는 그런 경지의 표현이 다소 무리일지 몰라도, 그런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일본의 정적미, 유현미와는 달리 한국 쪽은 한적(閑寂)이랄까, 한국적 웃음이라는 게 있듯이 그런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거지요. 지극한 미적 평화의 세계입니다. 이번에 나온 두 권의 책을 보면 구도자적 마음가짐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춤을 추구한 게 일관되게 읽히는데, 이에 덧붙여 이제는 춤을 갖고 ‘좀 놀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김기선: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아마도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에도 소개되었는데, 만 57세에 타계했는데 3년 뒤 환갑 나이 쯤해서 그쪽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추측해요.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지막을 채우는 과정이 없었죠. 당시도 뭔가를 찾고 있었고, 이미 있었던 건데 계속 찾았던 상황에 있었죠.

채희완: 오윤 선생은 마흔 살로 작고하기 한 2년 사이에 다 쏟아냈어요.

김기선: 네, 그렇게 갔어야 했었죠.

채희완: 그게 너무 아쉽습니다. 저는 〈김기인과 그 시대〉 제목이 지독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그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바로 직전에 중단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한 시대를 풍미하고 형식 개념으로 세워지면 양식이 되잖아요. 어느 시대에 공통된 흐름의 큰 줄기를 얘기할 때 형식의 개념에서 양식의 개념으로 가듯이, 김기인 선생은 양식의 한 물줄기는 굳건하게 잡았어도 더 풀어낼 세월을 필요로 했는데, 갑작스럽게 중단된 듯한 게 여간 아쉬운 게 아니지요. “김기인의 시대”가 이제 열릴 참이었으니까.

김기선: 그 시대를 더 향유했다면 가시적인 결과가 더 나왔을지 모르지요.







채희완: 두 권의 책을 보니까 홍일선, 이승철 시인이나 이경자 소설가, 문학가들하고도 만남을 갖고 작업을 했더군요. 


김기선: 두 책에서 소개되었듯이, 한국문학평화포럼이 2003년부터 전국의 각지에서 열은 문학축전 행사에 참가하여 한국의 근현대사 현장을 춤으로 위무하는 활동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리랑연합회의 아리랑축전에서도 유사한 활동을 했었지요. 현대무용가로서 아리랑을 열심히 추구한 점도 이색적이었지요. 당시 김기인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거죠. 2000년대인데, 무대에서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고 할까요, 자신의 춤의 현실적 구현이라 할까 하는 면에서 그 싹을 볼 수 있을 듯하더군요.

채희완: 원천적 차원의 리얼리즘 정신이랄까, 그런 경향과 만날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닌가 싶군요.

김기선: 자기는 무대에서는 출 만큼 췄다, 원 없이 췄다고 하더라고요. 고단하고 지쳐서 그런 건 아니고, 자기는 춤의 업을 마쳤다고 얘기하거든요. 그 시기에 세상과 소통이 시작된 거죠. 조금 더 진척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죠.

채희완: 백기완 선생님이 2년 전에 발표한 소설 〈버선발 이야기〉에서 열댓 살쯤 된 어느 아이가 엄마를 찾으러 가면서 춤추는 대목이 있어요. 땅의 춤에 해당하는, 말하자면 명칭을 붙이자면 그러한데요. 땅의 기운을 스스로 찾아서 몸부림치는 듯한 춤 대목이지요. 어린아이의 자서전 비슷하게 쓴 책입니다. 김기인 선생의 심층 또는 내면 세계에 깊은 그림자, 미로의 세계에 닿아서 꿈틀거리는 거와 〈버선발 이야기〉에서 백기완 선생이 묘사하는 춤이 지향점에서 서로 통한다 싶지요. 물론 김기인님의 춤 활동에서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김기인 선생과 유사한 사례들을 김기인 선생이 접할 수 있었다면 춤의 결과가 풍성해졌을 것 같아요. 〈김기인과 그 시대〉 책을 보면 가정과 사회 생활, 대인관계라든지 춤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했는지 어느 정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김기인의 삶과 예술세계에서 내면의 세계에 대한 얘기가 더 나올 법하겠다는 감이 들었어요. 김기인 선생을 그 정도밖에 알지 못한 저로서도 춤과 삶에서 궁금한 점이 있어서, 앞으로도 그런 걸 더 찾아볼 방도가 없겠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김기선: 이전에 김기인의 삶을 소재로 어느 소설가가 평전 내지 소설을 쓰려고 하셨어요. 이제 두 권의 책이 나왔으니, 그분의 손에서 김기인의 내면이나 예술세계를 짚는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채희완: 혹시 희곡작가 안종관 선생님 아세요? 문화예술계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가진 분이시지요.

김기선: 네, 목요산악회가 있었어요. 그때 이경자 선생님이 있었고 기인이도 매주 갔기에, 거기서 얘기도 많이 했어요. 일반적인 잣대를 넘어서는 얘기들이 오가고 했는데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됐었죠. 저도 2번인가 따라갔었어요. 재밌는 산악회였고 기인이는 이경자 선생님하고 한동안 같은 동네에 살기도 해서 가까이 지냈죠.

채희완: 그렇지요. 안종관 선생을 만나서 이 책이 나왔다는 얘기를 하니까 김기인 선생과 산행을 여러 번 했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준비해 볼 이야기인데, 이분들과 얘기를 하면 뭔가 더 나올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친밀한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진한 얘기들 말입니다.

김기선: 네. 어떤 문인은 김기인이 자기를 깔고 배 위에서 올라서서 춤췄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주었어요. 이번 책들이 나오고 나서 자기도 밝히고 싶은 생각이나 에피소드가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김기인의 춤 세계나 스스로춤에 더 충실히 접근하는 차원에서 작업이 이어져야 하지 않나 싶지요. 스스로춤이 춤의 기본으로서 교육적 효과가 있다는 제자들의 소감을 굉장히 많이 들었고 책에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스스로춤을 동생은 생전에 구도의 차원에서 추구했다고 봅니다. 이런 다양한 지점들이 총체적으로 조명될 필요가 있어 보여 후속 작업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채희완: 김기인 선생이 기본으로 삼은 기춤과 연관해 생각나는 것은 생활춤, 민속춤이라 하면 무조건 배제하고 보던 과거의 풍토입니다. 1970년대 후반에 춤교육학자정병호 선생이 이매방 선생도 서울로 모셔왔고, 당시에 공옥진 선생도 그랬지요. 이분들은 예술춤계에는 잘 안 알려져 있었던 분들인데 이들 스스로는 자부심이 대단하셨어요. 그 당시엔 예술춤 이전의 민속춤이라 분류했어요. 춤지 발행인 조동화 선생도 민속이라 하면 예술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이애주 선생 춤도 민속이지 예술이냐 했고요. 그렇게 평가 절하해버리고 한영숙 선생만은 훌륭하게 좋게 평가를 하셨거든요. 예술의 개념상에서 별 차이가 없을 텐데 완전히 예술에서 제외시켜버린 거죠. 당시 어느 분이 예술인으로 인정을 못 받았지만 본인 스스로 자기가 추는 춤이 기춤이라 했습니다. 대처승에 해당하는 분인데 불도를 하면서 그분 나름대로 기의 것을 지독하게 수련해서 춤을 보여줬거든요. 정병호 선생도 그분을 중요한 춤꾼 한 사람을 발굴했는데, 예술계 사람들은 저게 무슨 춤이냐 기 수련 자체를, 기의 흐름을 던져놓고 있는 것을, 몸의 사물성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을 어찌 예술로 볼 수 있겠느냐 해서 제외시켰지요. 사람들이 인정 안 해줬어요. 저는 어떨 때는 기춤에서 굉장한 파워를 느꼈습니다. 날 것 그대로인데 좋은 의미로 원석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갈고 닦았으니까 원석은 또 아니에요. 나름대로의 정제된 것이 분명한데 기 자체지 그걸 예술이냐고 하겠느냐 하는 거예요. 저는 이분의 것을 예술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좋은 표현으로 볼 것이냐 자기 발언으로 볼 거냐 메시지에 담겨있는 의도적인 행위로 볼 것이냐로 판별할 문제라 봅니다. 그분은 늘 해오셨던 대로 하는 거예요. 전 분명히 춤으로 보았거든요. 말하자면 몸-의식이 합쳐져 있는, 몸의 세계화, 몸의 현현(incarnation)이라 보는 거지요. 거기에는 그분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동작을 하셨는데 대부분 보는 사람들은 생짜를 보여준 것이지 표현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 하고서는 아예 제쳐놓았을 뿐입니다.

김기선: 예술 개념이 유동적인지 아니면 예술 속에 불변의 것이 있는지 판단이 필요하지만 논쟁은 아직 진행중이지요. 단전 호흡을 하는 단월드에서 단무를 춰요. 일종의 기춤이고, 무(舞)자를 붙이죠. 과거에 춤을 췄던 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도각 스님은 우리 재단에 관심이 매우 깊고 김기인 스스로춤을 원효의 무애무(無碍舞)하고 연결하고 싶어합니다. 김기인이 춤을 구도의 길로 선택하고 깨달음을 얘기했거든요. 김기인의 스스로춤과 연관해서, 무애무가 바로 그런 거잖아요. 원효의 무애무도 춤이죠.

채희완: 원효스님의 경우는 좀더 정확하게는 무애가무행(無碍歌舞行) 이지요. 굳이 예술로 규정하기 전에 그것이 춤 행위로서 추구할만한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기인 선생은 삶의 궁극적인 것을 지향하는 예술을 구도자 자세로 추구했고 어떤 면 고독한 작업을 했었지요. 그런 개념에서 멀리 내다보고 지향점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잖아요. 그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점에선 20세기 말 이후 21세기에 시대적 정신적 상황에서의 하나의 진실된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성과 찰나의 것, 둘 다 인정되는 추세이지요. 돌파구는 있는 듯해요. 동학에서는 ‘인내천’(人乃天)이라는 마지막 한 단어로 요약되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고 기독교에서 십자가의 형상과 같은데 거기에 또 하나가 설정돼 있다지요? 세 가지를 공경한다 해서 삼경(三敬)인데, 경천(敬天), 경인(敬人), 다음에 경물(敬物)이 있어요. 마치 20세기 문명인들의 애니미즘이라 할까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기가 있고 에너지가 있고 자기 발언권이 있고 서로 통한다는 겁니다.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사의 말씀입니다. 현대 생태주의에서는 충분히 용인되는 발상이지요. AI로 만들어내는 것도 그런 개념에 들 수 있지 않겠나 싶어요. 예술의 지향성은 어떤 면에선 종교적 지향과 함께 할 수 있지요. 김기인님의 책 발간이 예기치 않게 새삼 춤의 근원을 되물을 것을 재촉하는군요. 다시 말해 김기인 선생이 21세기에 춤의 근원을 다시 생각하도록 합니다. 의미심장한 작업이 아닐까 하며, 후속 작업도 충실히 이뤄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정리: 이슬기 <춤웹진> 인턴기자

2020.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