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인용무 - 움직임들의 움직임〉을 마치며
정경미_드라마투르그

(이 이야기는 소유에 관한 근본적 문제의식이자,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물음표 가득한 이야기이다.)

 

때는 2019년 봄, 같이 점심을 먹던 중 안무가 정다슬이 질문을 던졌다.
“움직임은 소유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안무는 안무가의 것일까?”
그 당시 질문을 듣자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고 곧 허공을 더듬는 대화가 이어졌다.

‘안무는 당연히 안무가의 것 아닌가? 창작자의 문제의식과 방법론, 그것을 아우르는 분위기는 그 만이 자아낼 수 있는 영역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창작자의 소유이자, 권리이지 않은가?’ 라는 입장과 ‘무형의 움직임이 안무의 짜임으로 창작자의 소유가 된다고 할 때, 작품은 온전히 창작자에 의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는가?’하는 안무가가 독점하는 권리에 대한 반감의 입장이 공존했다.

당시 기분을 떠올려 보자면 어딘가 조심스럽고 불편했던 것 같다. 이제와 보니 그 감정은 상충되는 두 가지 입장이 내 안에서 충돌하고 명확한 답을 낼 수 없음으로부터 오는 답답함 같은 것이었으리라. 요새처럼 단단해 보이는 창작자의 영역은 조금만 들여다봐도 애매모호한 구멍들이 드러났고 그들에게 완전한 권위를 부여하기엔 동시대 창작자의 영역은 비대하고 위태로웠다. 움직임의 소유로부터 파생된 질문들은 예술과의 거리를 불문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고 이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여전히 유효한 질문임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렇게 인용무의 여정은 한 문장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과연 움직임은. 안무는. 누군가의 소유로 규정될 수 있는가?”

정다슬의 〈인용무-움직임들의 움직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지원을 받아 9월 쇼케이스 및 중간심사를 거쳐 이듬해 2월 최종공연 〈차세대열전 2019!〉을 타이틀로 2020년 2월 15.16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과정은 공연은 물론 창작에 필요한 워크샵, 전문가 멘토링, 동료 예술가간에 네트워킹 등 차세대 예술가를 독려하고 지원하는데 주력하였고 본 작업의 확장, 발전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퍼포머 선정은 지난 작업에서 함께 한 주혜영, 임은정, 유지영 멤버 그대로 팀을 꾸렸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3명의 퍼포머와 안무가는 합이 제법 잘 맞았다. 그들은 조화롭게 어울릴 줄 알고 때론 자신의 불만이나 고충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자유롭고 배려있는 친구들이었다. 안무가는 이들이 이번 작업에서도 자신의 캐릭터를 갖고 충분한 역량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했고 함께하는 작업이 지속될수록 관계를 통한 시너지도 기대하고 있었다. 필자 또한 이번 작업에 드라마투르그로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과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에 대한 설렘을 안고 참여하였다.

저작권법
우리는 움직임 소유에 관한 접근에 앞서 법적 제도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저작권의 법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한 저작권법에 관한 리서치 중,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주관한 ‘예술가의 저작권 교육’ 특강을 접하게 되었다. 강의하신 홍승기 변호사님께 인용무에 관해 멘토링을 부탁드렸고 흥미로운 작업이라며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덕분에 안무가, 퍼포머와 저작권에 관한 개념, 사례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저작권에 관한 질문들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저작권법은 문화예술향상의 기여를 기조로 저작자의 권리보호와 사용자의 공정이용을 목적으로 한다. 저작권법 제4조에 따르면 무용은 연극·무언극과 함께 ‘연극저작물’로 포함되어 있으며 안무는 움직임(형)의 조합과 배열이 저작권 보호 여부의 기준이 된다. 안무에 관한 저작권이 문제된 사건은 극히 드물어 판례가 적다고 하는데 이유는 고정되지 않는 움직임을 자신의 저작물이라고 입증하기도 어렵고 다른 매체에 비해 상업적으로 성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작권에 관한 타 매체의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와 함께 최근 무용계의 논란이 된 ‘삼고무’가 언급되었다. 방탄소년단(BTS)이 재해석해 화제가 된 ‘삼고무’ 논란은 전통춤은 저작권 등록이 될 수 없다는 보존회 측에 맞서 고유 창작물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유족 측이 맞선 문제였다. 이를 두고 저작권이 배타적 권리로 작용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저작자의 권리보호 차원을 넘어 사유화로 인해 비대해지는 것은 결국 문화예술향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저작자를 보호하는 권리로서 작동하는 본래 취지의 순기능과 저작권이 난무하여 오히려 문화예술의 전반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역기능에 대해서, 그리고 저작권이 동시대 창작영역에서 어떻게 다뤄져야 할지 다각도로 생각해보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인용
저작권법 제 37조(출처의 명시) “이 관에 따라 저작물을 이용하는 자는 그 출처를 명시하여야 한다.” 에 따라 저작권으로부터 보호받고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 ‘인용’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인용이란 무엇인지, 매체에 따라 달라지는 인용의 방식을 움직임으로 가져온다면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고민 끝에 저작권과 움직임의 소유를 “움직임의 인용”으로 풀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 함정이 있었다. “움직임의 인용”이라는 명목으로 타 작업의 움직임을 파편적 형태로 가져옴으로서 상실되는 것들, 과연 안무를 움직임으로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움직임만으로는 인용의 한계가 분명하게 존재했고 그것은 인용이라 할 수도 없었다. 저작권법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안무는 움직임을 통해 사상과 감정이 포괄적으로 내포된 창작물.”이기에 우리는 ‘안무를 인용하는 방식’에 대해 더 고민해야 했다.

표피의 copy인가, 의미의 copy인가.

originality
인용의 문제를 타개할만한 단초로 창작성이 등장한다. 저작권법 제2조 제1호 “저작물이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을 말한다.” 창작성은 저작권에 의한 보호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건이지만 가장 주관적이고 상대적 개념이지 않은가. 법적 제도에 창작성이라는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이 명시된 것도 아이러니했다. 예술은 법으로도 재단하고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구나 하는 상념과 더불어 창작성에 주목해보고자 했다. 예상대로 안무가, 퍼포머 (혜영, 은정, 지영), 그리고 필자가 정의하는 창작성은 모두 달랐다. 어쩌면 길을 지나가는 사람 열 명을 붙잡고 물어봐도 열 가지의 창작성의 정의가 나올 것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정의들이 흥미로웠고 퍼포머 각자가 정의하는 창작성에 기반한 인용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에 가능성을 발견했다.
주혜영 퍼포머는 입시작품을 안무할 때 주로 사용하는 테크닉을 자신이 생각하는 창작성의 정의와 접목하여 창작성의 유무를 가렸다. 모호한 창작성을 무 자르듯 가르는 발언은 명쾌하지만 의문이 들도록 의도했다. 임은정 퍼포머는 퍼포머의 위치에서 창작성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들과 안무가의 전달력에 의해 좌우되는 창작성에 관해 풀어갔다. “안무가는 다른 어떤 누군가이지만 움직임을 만든 것은 나, 그것을 실연하는 것도 나.” 로부터 오는 안무가와 실연자의 구분 짓기 애매한 창작과정에서의 관계를 설정했다. 그리고 유지영 퍼포머는 본인이 현재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고 과거에 오브제를 사용했던 본인의 작업을 가져왔다. 안무는 자신이 했지만 움직임은 기억나지 않는 에피소드, 그리고 오브제는 사라지고 움직임만 남은 움직임에 주목해 보았다.




〈인용무 - 움직임들의 움직임〉 ⓒ옥상훈




실재와 허구
퍼포머 각자의 독창성에 관한 정의와 접점을 찾는 이야기는 인용을 위한 움직임 소재 설정과도 직결되었다. 이 시점에 퍼포머와 개연성 없는 움직임을 소재로 다루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그들의 경험이 바탕이 된 움직임을 소재로 사용하되 곳곳에 허구성을 가미했다. 허구성은 ‘실연자가 자신의 경험을 현장에서 인용할 때, 움직임은 과연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가’에 의해 장치되었으며 무형의 매체에서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상상해보았다.
‘실연자가 직접 자신의 경험을 실연하는 행위는 인용이라 불릴 수 있지만 복제로서 작동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복제된 그것은 결코 완벽한 복제일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용과 복제 그 어디쯤, 기억에 기댄 실연자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허구 아닐까.’
실연자 임은정은 ‘2018 하상현 작가의 작업에서 스펀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장면’을 통해 당시 움직임의 기억을 되살린 인용을 선보였다. “임은정 실연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라는 반복된 질문이 들릴 때마다 2018년, 2019년, 2020년 실연된 해를 바꿔가며 자신의 움직임을 허구적으로 설명하고 주무르던 스펀지 대신 어느 샌가 물구나무를 선 다른 퍼포머의 종아리를 주무르는데, 이는 지금 여기 존재하는 움직임이 인용을 빙자하여 허구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인용무 - 움직임들의 움직임〉 ⓒ옥상훈




다양한 인용방식
인용의 방식은 다양한 감각을 오가며 실현되었다. 텍스트 스코어를 인용한 움직임은 텍스트에 맞춰 기존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으로 발현되고, 발 구르는 소리는 장단에 맞춰 두들기는 북소리로 상상할 수 있었으며, 입으로 흥얼거리는 박자감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만들어졌다. 다만 황수현 안무가님과의 멘토링 중, 퍼포머마다 창작성의 캐릭터가 드러남과 동시에 많은 인용 방식을 가져오다보면 자칫 몰입도가 떨어지고 인용 방식의 열거로만 보일 수 있다는 우려에 덧붙여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인용 방식에 집중하여 집요하게 탐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이 있었다. 이 제안에 관해 안무가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눴고 저작권 제도가 지닌 실체의 가시화를 시도하려는 의도에 적합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심했다. 결론은 “다양한 인용의 방식을 사용하되 적절한 배치로 저작권법과 끈을 놓지 않고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인용이 온전히 인용으로서 작동할 수 있도록 해보자.”에 의견을 모았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여러 개의 인용 방식들과 씬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된 저작권법 내용, 그리고 퍼포머의 창작성 캐릭터가 버겁지 않게 레이어 되어 입체적인 효과로 드러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용무 - 움직임들의 움직임〉 ⓒ옥상훈




신체성
서현석 교수님과 황수현 안무가님과의 멘토링 중 중복하여 언급된 신체성의 관한 부분이다.
퍼포머는 인용 중인 실연자로서 존재했지만 신체성의 획득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점점 밋밋해지고 건조해지는 움직임들은 현존감을 불러일으켜 소유라는 실체 지향적 태도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인용은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고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필자 또한 신체성의 부재를 언급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살아있는 신체의 절대적 속성을 소환해야하지 않을까.’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이에 대한 안무가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타 장르의 시선에서 볼 때 퍼포먼스는 자연스럽게 신체가 갖는 성질에 주목할 수 있지만 안무가로서 그가 생각하는 신체성은 부각시키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의 관심사는 신체성에 파고들어 어떤 지점에 도달하는 것보다 현실에 직면한 문제가 신체를 통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는 대답이었다.
신체성의 부재에 관한 그의 확고한 대답은 예술과 법 제도의 경계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하는 안무가답게 영민했으나 그럼에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숨길 수 없는 스타일
안무가는 세 퍼포머의 움직임을 유쾌하게 버무렸다. 인용무는 안무의 영역을 최대한 제거하고 인용들의 짜임에 주안점을 두었으나 안무가의 창작성은 기어코 비어져 나왔다. 창작자 고유의 스타일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노릇인가. 정다슬 안무가는 무겁고 난해한 주제라도 사이사이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가 포진된 분위기를 선호했다. 관객의 웃음은 억지로 자아낼 수 없고 문제의 통찰이 있어야 비로소 웃음이 제 기능을 갖는데 이 부분이 안무가의 스타일과 절묘하게 만난 것 같다. 인용무는 2016년부터 안무가가 다뤄온 안무 저작권 시리즈 중 세 번째 작업이었고 2017년 Bodyrightⓒ와 2018년 Floating Appliqué를 거치며 어느 새 가뿐해진 시선과 안무가 특유의 재치가 만나 움직임을 버무리는데 탁월한 기여를 한다. 또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함을 선호하는 취향이 퍼포머의 창작성 캐릭터를 드러내고 버무림을 극대화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

매체와 저작권
저자(author)의 개념은 전통 속에서 기능해 온 필자(scriptor)라는 개념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전적인 권리와 그에 따르는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계기를 통해 구성되었다. 저자의 탄생을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인쇄문화는 개인주의의 가능성을 열었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저작물이 상품으로서 대량복제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증가시켰다.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의 인쇄된 문자는 저자와 독자. 제작자와 소비자를 분리하여 문자를 통한 말의 사적인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가능케 하였다. 저자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러한 사적 소유의 현상은 경제와 정치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냈다.(최문규 외, 『저자의 죽음인가, 부활인가』, 한국문화사, p.2-3.)
이처럼 우리가 평소에 당연시하고 익숙하게 여기는 저자와 저작권의 개념도 거슬러 올라가면 시대적 배경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이자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과 맞물려 상호 교차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 속성을 띤다. 그러므로 저작권법 또한 불변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인식의 변화에 맞게 수정, 보완될 수 있으며 저작권법에 명시된 핵심적 요소 “창작성”에 대해 사회, 문화적으로 재고 가능할 것이다.
춤계도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창작의 성격이나 과정의 방식이 판이하게 달라졌고 이에 따라 안무가가 창작물을 전적으로 독점하는 소유권에 의문을 갖는 것은 어쩌면 예견된 수순 아닐까. 움직임의 소유권으로 인해 빚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은 기존의 안무가(창작자)를 필두로 한 무용수 및 그 밖에 요소들을 수직적으로 배치하는 시스템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음을 알리는 신호이면서 저작권에 관한 인식 개선의 불가피함을 드러내고 있다.
〈인용무〉는 안무 저작권에 대한 어떤 입장이나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합법적 인용’을 통해 소유의 개념으로부터 비롯된 법 제도의 취약점과 움직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소유가 지닌 실체의 허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인용무 - 움직임들의 움직임〉 ⓒ옥상훈




드라마투르그
드라마투르그는 창작 과정에 전방위로 관여한다. 때문에 작업에서 적당한 포지션을 찾고 어떻게 적절히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설정이 필요했다. 필자는 나에게 편안하게 맞는 역할이 작업에도 효과적 영향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었고 가능한 선에서 안무가와 조화를 이루며 나다운 드라마투르그가 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드라마투르그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해 스스로의 포지션을 모색해 보기도 하였으나 이론적인 내용들에 그쳤고 오히려 결정적 힌트로 다가온 건 작업 과정 중 몸으로 느낀 어떤 감각이었다.
선택의 순간, 갈등에 상황에 놓일 때마다 저울 위에서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고 있는 기분.
선택을 하거나 최종 결정은 안무가의 몫이지만 최선의 결정을 위해 퍼포머에 관해서, 관객이 바라보는 시선에 관해서, 멘토의 멘토링에 관해서 안무가와 많은 이야기들이 오갈 때, 슬그머니 저울 위로 올라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것, 필자는 드라마투르그로서 자연스럽게 안무가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몸으로 느낀 그 감각이 내가 찾던 나다운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되짚어본다.

마치며
작업에 참여하는 동안 안팎으로 많이 배우고 느꼈다. 내부를 본다는 건 바깥에서 팔짱을 끼고 음미할 때와는 전혀 다른 시야가 펼쳐졌고 방관자가 될 수 없었다. 안무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예술도 사람관계의 연장선이다. 관계의 균형, 관계를 통한 작업의 균형, 작업을 이루는 요소간의 균형은 무엇보다 절실했고 그것들이 균형감을 갖출 때,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은 그 자리에서 빛이 났다. 드라마투르그로서 균형 잡기를 위한 나름의 고군분투가 어딘가에서 반짝하고 빛이 났기를 바란다.

정경미

인간에 관심을 두고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무용.동작치료를 전공하고 현재,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동 예술치료를 맡고 있으며 놀이하는예술가, 꿈다락토요문화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예술교육 컨텐츠를 기획, 실행하고 있다. ​ ​ 

2020. 4.
사진제공_옥상훈 *춤웹진